시읽는기쁨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 심보선

샌. 2008. 5. 31. 08:32

우리에게 그 어떤 명예가 남았는가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몇 개나 남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주말의 동물원은 문전성시

야광처럼 빛나던 코끼리와

낙타의 더딘 행진과

시간의 빠른 진행

팔 끝에 주먹이라는 결실이 맺히던

뇌성벽력처럼 터지던 잔기침의 시절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곁눈질로 서로의 반쪽을 탐하던

꽃그늘에 연모지정을 절이던

바보,라 부르면

바보,라 화답하던 때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면

소리 내어 웃어 보시게

입천장에 박힌 황금빛 뿔을 쑥 뽑아 보시게

그것은 오랜 침묵이 만든 두 번째 혀

그러니 잘 아시겠지

그 웃음, 소리는 크지만

냄새는 무척 나쁘다는 걸

우리는 썩은 시간의 아들 딸들

우리에겐 그 어떤 명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죄다 풀리고야 말았다

 

-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 심보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성장하고 철이 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어느 측면에서는 우리의 영혼이 타락하고 비루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소년 소녀였을 때는 그나마 신성(神性)이 반짝이던 시기였다. 갓난아이의 얼굴에서는 신의 미소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유년의 기억에만 남겨두고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우리가 유년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남겨두고 떠나온 소중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닐까?

 

차마 견딜 수 없었던 것까지도 이제 우리는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이 악취 풍기는 시궁창인 줄도 모르고 물신성의 늪에서 희희낙락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몰락의 과정이다. 내면의 신성을 모독하는 독신(瀆神)의 과정이다. 얼마큼 무너지느냐가 얼마큼 성공했느냐의 기준인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겐 그 어떤 명예도 남아 있지 않다. 수치심마저 상실한 삶의 누추함이 있을 뿐이다.웃음 소리 크지만 냄새는 무척 나쁘다. 시인은 말한다. 우리는 썩은 시간의 아들 딸들이라고. 그러나 우리도 한 때는 소년 소녀였지 않았는가. 그런데 과연 그런 때가 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