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토막말 / 정양

샌. 2008. 3. 23. 15:45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 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파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 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토막말 / 정양

 

바닷가의 저 막말 앞에서는 나 역시 가슴 저리며 서 있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좋아하게 되는 불가해한 인연에 대하여, 죽도록 보고 싶어지는 갈망의 자력에 대하여 나는 무릎 꿇지 않을 수 없다.

 

파도 역시 육지를 애모하여 쉼없이 그 몸을 핥고, 저녁놀은 바다를 애모하여 예쁘게 예쁘게 몸단장을 한다. 그러므로 바다나 하늘도 인간이 쓴 저 막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안다. 그들도 가슴 시리게 그 말을 새겨 읽는다. 그렇지 않다면 파도는 진작에 움직임을 멈추었고, 노을은 회색빛으로 퇴색되었으리라.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건 사랑의 힘이다.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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