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이 시대에서 가난의 가치

샌. 2007. 4. 27. 12:06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무슨 살림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지 다시금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에 걸쳐 쓰지 않는 물건들을 버렸는데 그 양 또한 만만치 않았다. 현대의 도시에서의 삶은 쓰레기를 만드는 노릇에 다름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대부분이 쓰레기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인데, 예전 같으면 고치고 손을 봐서 충분히 사용할 것들이 단지 쓰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이다. 특히 옷 종류는 단지 유행에 뒤지고 싫증난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솔직히 버리면서도 뭔가 죄를 짓는 느낌 때문에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마음을 비우고 버리는 공부는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지만,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같이 생활한 물건과의 정서적 교감 때문일 수도 있고, 이렇게 낭비하며 살아도 되는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기도 하다. 광고는 연일 신상품으로 유혹하며 새로운 물건을 구매하라고 충동질을 하고,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지고 경제력이 없는 못난 사람 취급을 한다. 이런 풍조의 세상에서 홀로 독야청청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조금 자제하는 정도로 세상과 맞추며 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조심하는 삶조차 2년마다의 이사건만 이렇게 많은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 경우는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을 되돌아볼 때 옛날 농촌의 생활에서는 버리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음식물 찌꺼기는 동물들 사료가 되고, 심지어는 똥오줌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옷은 낡아 헤어져 못 입을 때까지 썼고, 그것도 나중에는 쪼가리나 걸레로 사용했다. 그 당시는 폐지라는 이름조차 없었다. 그만큼 물자가 부족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대신 낭비나 오염이라는 말도 없었던 시대였다. 내가 쓰레기를 버린다는 것은 지구의 다른 부분을 더럽힌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니 현대인의 생활방식 자체가 다른 것들의 희생 위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 시원한 여름을 위해서는 바깥으로 더운 공기를 내보내야 한다. 내가 빨리 편안하게 이동하기 위해 자가용을 모는 것은 지구 공기를 더럽히는 행위다. 지금 같은 풍요의 시대는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게 다른 존재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생의 생태적 삶이란 이런 방식이 아니다. 궁핍하기는 했지만 예전의 삶이 훨씬 더 자연적이고 생태적 삶에 가까웠다.


어떻게 보면 현대의 인간은 쓰레기를 만들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고 돈을 버는지 모른다.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이 소비하라고, 그것이 멋진 삶이라고 세상은 부추긴다. 그리고 사람들은 별 다른 의식 없이 당연하게 그런 사실을 받아들인다. 만약 모든 지구인들이 지금의 선진국과 같은 삶을 산다면 정상적인 생태계 순환이 막힌 이 지구가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런 문명은 언젠가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내가 사는 삶의 방식은 우선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지난주에 TV에서 방송된 ‘착한 거래’(Fair Trade)라는 프로를 보면 상당량의 무역 거래가 제 3세계 노동자들의 착취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익과 자본이 우선시되는 체제가 낳은 어쩔 수 없는 세상의 모습이다. 우리가 싼 값에 물건을 구입하는 행위 자체에 이미 부도덕성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가난의 가치, 청빈(淸貧)이라든가 안빈(安貧), 공생공빈(共生公貧)이라는 말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된다. 분명히 현재의 삶의 방식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믿기에 그 대안으로 다시 가난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궁핍이 아니라 생태적 가치관에 입각한 절제와 소욕이다. 그리고 가난을 실천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런 모습일까 하고 여러 그림을 그려보게 된다.


이 시대에 가난을 이야기하면 무슨 미친 소리인가 하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남고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성찰적 입장에서 다시 돌아봐야 할 가치가 가난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난은 개인의 이익이나 안락을 추구하는 데서 떠나 세상의 공동선(共同善)을 향한 의식과 행동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찾는가는 각자의 몫이지만, 가난한 삶이란 환경과 사람,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는 부당이득을 추구하는 것의 포기, 소비의 절제 등이 따라야 한다. 즉, 지금까지 옳다고 여기고 살아온 관습적인 삶을 버리는 것이다. 지나친 경쟁과 부에의 집착은 인간 내면을 피폐화시키고 공동체를 나아가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마음을 줄일 수 있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살기 좋은 터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의 역할이 크고, 종교도 그 근본 가르침으로 회귀해야 한다. 언젠가 케이블 TV에서 재물이 많은 것이 신의 축복이고, 가난과 병을 악으로 규정하는 설교를 듣고 아연한 적이 있었다. 그 목사는 분당을 천당에 비유했는데 아무리 농담이지만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이 모두를 부자와 건강한 사람 만들기 위해서 가난한 마을을 찾아다니신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초대교회 초기에 반짝하다가 세상의 정치권력과 결탁하면서 빛이 바래버렸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예수님의 제대로 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설교단은 드물다.


공생공영(共生共榮)에의 꿈은 환상이라는 것이 점점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부자 나라가 되어도 새로운 소외계층이 생겨나면서 빈부격차는 점점 더 커져가고 인간성은 황폐해져 간다. 그리고 작금의 인간 활동이 자연 생태계에 미치는 악영향의 반대급부를 단단히 치를 준비도 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생활 패턴을 청산하지 않는다면 이런 부작용은 점점 더 심화될 것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폭력의 문화라고 정의했는데 이런 시스템에서는 인간 상호간의 충돌, 인간과 자연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고의 대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경쟁 대신 조화와 협동, 공생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삶의 원리가 절실히 필요하고, 그런 의미에서 가난의 가치가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안은 그 길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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