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이 닮은 글자는 필시 서로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사람’과 ‘사랑’, ‘님’과 ‘남’, ‘배우다’와 ‘비우다’ 같은 글자가 그렇습니다.
그런 글자 중에 ‘똥’과 ‘땅’이 있습니다. 우연히 닮았을 수도 있지만 똥이란 땅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서로가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자연 듭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밥 먹고 똥 싸는 일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왕후장상도 하루 세 끼 밥을 먹어야 하고, 똥 싸고 뒤를 닦아야 하는 것은 시골 무지렁이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집어삼키기만 하고 내보내지를 못한다면 며칠을 못가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종내는 죽음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점에서는 탐욕스런 현대 문명을 닮았습니다. 끊임없이 먹어치우기만 하고 나눌 줄은 모르는 문명은 이미 사망 선고가 예고되어 있습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똥을 잘 싸고 잘 내보내는 일이야말로 건강의 지표가 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배설하는 것만큼의 중대사도 없을 듯 합니다. 식탐이나 성욕은 어느 정도 절제가 가능하지만 오줌똥 마려운 것을 참아낼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화장실이라고 하지만 어릴 적 고향에서는 통시라고 불렀습니다. 볼 일을 보러 가자면 마당을 가로질러 감나무 밑에 있는 통시까지 가야 했습니다. 땅을 파고 나무판자 두 개를 걸쳐놓은 재래식이었습니다. 한 쪽 구석에는 재무더기가 있었고, 똥 푸는 도구들도 놓여있었습니다. 입구는 문도 없이 늘 개방되어 있었는데 겨울이면 앉아있는 발밑에까지 눈이 날려 오기도 했습니다.
그때도 똥을 더럽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래도 농사를 짓는데 사용하는 귀한 자원이어서 지금처럼 천덕꾸러기 신세는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기저귀도 별로 사용 안했는지 어린 동생이 방에다 수시로 똥을 쌌습니다. 그때 “독구, 독구”하고 부르면 어디선가 개가 쏜살같이 달려와 깨끗하게 먹어 치웠습니다. 똥은 개에게는 직접적인 먹이가 되었고, 사람에게는 땅으로 돌아가 다시 먹이로 돌아오는 자원이었던 것입니다. 똥은 땅으로 돌아가고, 그래서 색도 땅의 색깔을 닮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도시의 똥은 귀찮기만 한 쓰레기일 뿐입니다.
몸에서 빠져나간 똥과 오줌은 부피가 그 수십 배가 넘는 물과 함께 정화조를 거쳐 하수처리장까지 옮겨집니다. 서울에서 하루에 나오는 똥 무더기가 1만 톤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서울에는 네 곳의 하수처리장이 있는데, 그 중에서 중랑처리장에서 정화된 물의 일부는 다시 끌러 올려 지금 청계천의 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수세식 처리 방식은 산업혁명의 초기 영국에서 개발된 것이라는데 그 과정에서 물의 낭비와 에너지의 소비는 엄청날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처리 방법도 없고, 이런 저런 이유로 똥은 천대받을 수밖에 없게 생겼습니다.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똥은 오물이요, 공해일 뿐입니다.
나중에 똥 찌꺼기만 걸러내 수분을 빼버리고 만들어진 것을 ‘분뇨 케이크’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이름만은 멋지게 붙여 놓았습니다. 이 케이크의 일부는 매립이나 소각을 하지만 대부분은 서해 바다에 싣고 나가서 버린다고 합니다. 아무리 멀리 갖다 버려야 해류를 타고 다시 돌아올 테고, 아니면 고기를 통해 다시 우리 몸속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먼 길을 도는 것만 다를 뿐 역시 돌고 돌아 우리 몸으로 돌아오는 것은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똥이 땅으로 돌아가고, 똥을 먹은 작물이 다시 내 몸으로 들어오는 순환 구조가 현대에 들어와서 깨어졌습니다. 대신에 작물들은 화학 비료를 먹고 자라납니다. 농촌에서마저 똥은 더 이상 땅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새로 짓는 집들은 대부분 수세식 화장실과 정화조를 갖추고 있고, 재래식 뒷간들도 똥 푸는 차가 와서 실어 갑니다. 힘들고 거추장스럽게 똥을 퇴비로 사용하려는 농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농촌의 정화조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집은 전기료를 아낀다고 모터를 꺼놓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물과 섞인 똥은 부패해서 독을 내뿜게 됩니다. 그 물이 하천으로 들어가면 축산 폐수 등과 같이 하천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똥은 인간에게 앙갚음을 합니다.
이 문명이 다시 원시사회로 돌아가지 않는 한 똥과 땅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똥이 땅으로 돌아가고 그것이 다시 인간의 음식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고 한 몸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체득했습니다. 물론 옛날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생태적 의식을 가졌다고는 말 할 수 없겠지만요. 그러나 지금처럼 정갈한 화장실에서 버튼 하나 누름으로써 모든 것이 자동 처리되는 자연과의 단절은 아니었습니다.
또 하나 비극적인 것은 이제 인간의 똥은 중금속으로 오염돼 그나마 퇴비로 사용하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것입니다. 도시에 사는 비둘기의 몸에는 중금속이 시골 비둘기보다 10여 배나 많이 들어있다는 조사 결과가 얼마 전에 나왔습니다. 사람의 몸이라고 예외는 아니겠지요.
중국산 김치에서 나온 기생충 알은 이것에 비하면 별 문제가 안 될지 모릅니다. 똥이 땅에서 멀어지는 것만큼, 그리고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것만큼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혹독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똥의 문제는 문명에 의한 자연과의 단절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덧 이런 모든 현상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젠 하루 종일 흙을 밟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하지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물이 오염되면 정수기, 공기가 오염되면 정화기가 있으니 사람들은 환경 보다는 정수기나 정화기의 품질에 더 신경을 씁니다.
이 시대의 화두로 된 웰빙이란 말도 쉽게 말해 잘 먹고 잘 싸는 것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일진대 결코 자연을 떠나서는 또는 자연을 이용 대상으로만 여겨서는 참된 의미의 웰빙은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먹을거리가 생산되는 바탕이나, 싸고 난 것이 어디로 가고 어떻게 되는지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내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물만 깨끗하면 되고, 내가 싼 것이 어디로 가든 잘 빠져나가주기만 하면 다른 걱정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잘 사는 웰빙이 되자면 그 모든 전체 순환 과정이 자연에 맞게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만약 그런 의식이 있다면 변기의 물 하나 내리는데도 조심할 것이고, 자가용을 이용하는데도 훨씬 더 몸을 사리게 될 것입니다.
똥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문명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거침없이 굴러가고 우리가 할 일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있더라도 너무나 미약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거창한 담론 보다는 작은 실천 하나가 더 소중해 보입니다.
저도 언젠가는 생태적 뒷간이라 불리는 작은 화장실을 하나 지어볼까 합니다. 이 세상에 와서 살면서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적게 흔적을 남기고 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