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샌. 2011. 8. 4. 19:40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 자 물어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 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연일 날씨가 우중충하고 기분도 꾸무럭한데 이 시를 읽고 한 바탕 대소(大笑)를 하니 기분전환이 된다. 시라는 게 나 같이 어리석은 인간을 계몽하거나, 삶의 깊숙한 비의를 드러내주는 비수 같은 날카로움을 꼭 가져야 하는 건 아니다. 쉽게 말하면 시 역시 인간의 사는 이야기들이다. 아주머니의 넉넉한 입담을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이 시의 역할은 충분하다. 시가 이렇게 일상적이고 편하다는걸 전해줘서 고맙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살아갈 때는 진지하고 엄숙해 보이지만 한 발짝만 멀리서 보면 가볍고 쓸쓸한 농담이 아니겠는가. 뭐라 해도 이 시의 백미는 마지막에 있다.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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