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소설이었다. 근자에는 국어 선생을 했던 후배가 추천하기도 해서 보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이 소설을 가르쳤지만 자기도 완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두꺼우면서 낯선 용어가 자주 나와 읽기에 부담이 될 거라고 주의도 줬다.
마침 출판사 지만지에서 상세한 해설을 곁들인 <삼대>를 펴내서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삼대>는 염상섭 작가가 1931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이다. 215회까지 이어졌다니 보통의 연재소설에 비해 두 배나 되는 분량이다. 현재의 책으로도 1천 페이지가 넘는다.
이 작품이 문학사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나로서는 특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욕망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1920년대의 경성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보는 재미는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 100년 전 서울 사람들이 쓰는 말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사람들 살아가는 양태는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오히려 당시가 지금보다 세대간의 갈등이 더 심각하지 않았나 여겨졌다. 어느 시대에서나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 눈에는 자기들 세대에서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고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소설은 조 의관, 조상훈, 조덕기라는 조씨 집안 삼 세대간의 갈등과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다룬다. 여기에 돈과 여자, 이데올로기가 횡으로 짜여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모든 인간관계의 중심에는 돈이 관계되어 있다. 부자(父子) 사이도 돈 앞에서는 서로 이용하면서 이해타산에 의해 살아간다. 과거나 현재나 그런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흔히 세상이 말세라고 한탄하지만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당시에 쓰던 용어 중에 '동정자'가 눈에 띄었다. 영어 'sympathy'에 대응하는 말인데 동정(同情)으로 번역하면서 사용된 것 같다. 불쌍함, 연민, 공감과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고 한다. 1920년대에는 '동정 파업' '동정 퇴사' '동정 연설회' 등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조덕기에게 이 동정자라는 말이 쓰인다. 그는 '주의자'인 친구 김병화의 운동에 공감하면서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 식민지의 폭력적 현실 속에서 당시 사람들은 저항자/방관자/동정자가 되는 길 중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조덕기는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지만 돈만 밝히는 부모 세대를 경멸한다. 그렇다고 병화처럼 주의자로 나서지도 못하는 경계인이다. '동정자'라는 용어가 아주 적절한 것 같다. 현대에도 부활시키면 어떨까 싶다.
<삼대>는 일제 강점기였던 백 년 전 경성의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보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다. 당시의 길거리와 사람들이 눈에 잡히듯 선명하게 펼쳐진다. 더운 여름 에어컨 바람 밑에서의 피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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