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세대의 허다한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받들어 왔지만, 그 예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적다. 더구나 예수가 뜻한 바를 실천에 옮긴 사람은 더욱 적다. 예수의 말은 별의별 뜻으로 왜곡되어 아무 뜻도 없게까지 되었다.’
엘벗 놀런(Albert Nolan)의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내가 성서 모임에 나갔다가 사 가지고 온 이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나에게는 시의적절 하게 주어진 좋은 책이었다. 무릇 좋은 책이란 엉킨 실타래를 풀어주듯 마음속의 고민을 풀어주고 헝클어진 생각들을 하나로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나?’ ‘당시에 예수가 가졌던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던 나에게 이 책은 막힌 속을 뚫어주는 시원한 약수와도 같았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라는 제목만 보아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다. 교리나 선입견에 가려진 예수가 아닌 살아있는 생생한 예수의 참모습을 찾아보자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고 나에게는 공감되는 바가 많았다.
그 당시에 과연 예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무엇을 하려 했는가? 저자는 가장 확실한 단서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로 한 결단을 든다. 우리가 세례 요한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요단강가에서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면서 회개, 즉 마음의 변화를 요구했다. 그는 앞으로 파국이 다가온다고 경고한 재난과 멸망의 예언자였다. 당시의 바리사이나 엣세네, 사두가이파와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랐다. 그러므로 예수의 출발점도 요한과 같다. 예수 역시 심판과 파국을 내다보았고 종말론적 상황에 대한 인식은 요한과 같았다.
예수는 우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하류 계급이었고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피압박자였다. 예수의 가장 비범한 점은 그가 스스로 선택하여 가난한 사람들과 사귀고 어울렸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들’로 통칭되는 이들은 거지, 과부, 고아, 죄인, 창녀, 세리 같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이었다. 그들은 시민권도 없었고, 회당 출입도 못하는 불가촉천민에 가까웠다. 당시의 사회 종교적 상황에서 중류 출신인 예수의 행동은 특별한 것이었다. 죄인들과 두레상 사귐을 나누는 것이 예수와 요한의 다른 점이기도 하다. 예수는 명랑한 사람이었다. 요한처럼 단식이나 금식을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예수를 움직인 힘을 저자는 예수가 가지고 있던 연민의 마음에서 찾는다. 복음서는 예수가 가진 따스한 감성과 측은지심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믿음의 힘’에 대한 확신이 강했다. 그가 병자를 치유하면서 자주 한 말은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낫게 했습니다.”이었다. 여기서 ‘믿음’은 지금 우리의 믿음과는 성질이 다르다. 예수의 믿음은 숙명론과 반대된다. 믿음은 희망을 주지만, 숙명은 불신과 절망으로 이어진다. 죄를 지어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다는 숙명론과 좌절에 빠진 가난한 사람들에게 예수가 준 것은 육체적인 치유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치유였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오는 치유의 기적들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비참한 숙명적 체념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예수의 애절한 연민만이 유일한 동기였다. 그리고 예수는 그 결과에 대한 성공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서 용서를 받았고 수치심이나 죄의식에서 벗어났다.
예수가 강조한 ‘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추상적인 나라가 아니라 지상의 사람들로 구성된 구체적인 정치적 조직 사회였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세상의 가치나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가 이해한 세계는 선과 악의 싸움터였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악의 세력이었고, 당시의 정치, 사회적 구조를 예수는 악으로 단죄했다. 로마뿐만 아니라 민중을 억압하는 종교 지도자들도 그 범주에 들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해방 활동은 그런 악과의 싸움이었으며, 예수는 사람이 사람이기에 존중받는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꿈꾸었다. 그는 그런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부터 찾아오고 있다고 믿었다.
돈과 하느님 나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게 예수의 생각이었다. 그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수는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렇다고 예수가 가난을 이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예수의 꿈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없는 범세계적인 풍요로운 공동체였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는 사람들이 가진 것을 나눌 때 모두가 공평하면서 넉넉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부에 대한 경고는 극단적이다 싶을 만큼 심하다. 구원을 묻는 청년에게 예수는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다시 찾아오라고 한다. 부자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자신의 기본 생활을 하는 외의 여분의 재물을 축적해서는 안 된다. 그런 기준에서 현대의 부유한 신자들은 과연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돈보다 더 소중했던 것은 위신이나 체면이었다. 예수는 돈과 함께 신분이나 지위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도 요구했다. 도리어 꼴찌나 종이 되라고까지 했다. 예수가 바리사이인들의 위선을 비난한 것은 그들이 율법 준수를 강조한 내면적 동기는 기실 체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드러내면서 기도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길 원했다. 나는 이만큼 하느님을 잘 섬기고 있으며 복을 받고 있다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죄인들과는 마주치지도 않으려 했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이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차별 받는 것을 배격했다. 인간은 인간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안식일이나 율법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는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성이나 어린이에 대한 그런 예수의 태도에서는 비범함이 느껴진다.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차이는 연대성의 관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탄의 나라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이다. 가족이나 종파 중심의 편협한 연대성으로 소속 집단의 이익이 우선이다. 반면에 하느님의 나라는 전 인류적인 보편 연대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도 초월하는 개념이다.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선언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우리의 이웃이 누군지는 분명히 드러난다. 생물학적 가족애도 넘어서는 인류의 연대를 예수는 몸으로 보여 주었다.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보며 그는 “누가 내 어머니며 친척입니까?”하고 반문했다.
저자는 예수를 역사상 가장 빼어났던 한 인간으로 설명한다. 그는 비범한 독자성, 엄청난 용기, 빼어난 진실성을 가졌으며, 이루 형언할 길이 없는 형안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그가 특별했던 것은 어떤 권위에도 의지하지 않았던 독립적인 자유인이었던 점이다. 당시의 종교사회에서 성서나 경전 같은 권위에조차 거의 의존하지 않았다. 그래서 끊임없는 악평과 추문에 시달렸고 늘 위험이 따랐다. 결국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게 그의 운명이었다. 또 그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자신을 메시아라거나 스승이나 지도자로 자처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선하다고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이 없었고 비상하게 어떤 확신에 차 있었다. 그것은 진리에의 확신, 진리가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그런 배경에는 예수만의 하느님 체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찼고 인간과 자연과의 연대성의 체험으로도 연결되었을 것이다. 예수의 확신과 통찰력의 비밀에는 ‘압바’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감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계시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격신에 대한 낡은 표상들을 버리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섬겼던 돈, 권력, 위신, 자아 등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는 누구보다도 더 인간적인 분이셨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분에게서 신성(神性)을 발견한다. 예수의 신성은 예수 인간성의 초월적인 깊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믿음이란 사고방식이나 고백이 아니라 생활방식이며 실천이다. 예수의 가치 질서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당시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시대의 징조를 정확히 읽고자 하는 것과 같다. 이 시대 악의 세력과 체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식별하는 것이 믿음과도 연관되어 있다.
저자는 현재의 종말론적 상황이 예수가 살았던 시대와 닮았다고 본다. 지금 우리가 처한 시대 역시 인류 파멸의 위기가 높아지고 있다. 핵, 전쟁, 환경오염, 자원 부족, 빈부 격차 등 난제는 겹겹이 쌓이고 있다. 오죽하면 기후 변화에 위기를 느끼고 전 세계적인 정상회의가 열리겠는가. 그러나 이런 체제에서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건 어렵다. 자체의 동력을 가진 이 체제는 이익을 위하여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로 변하고 있다. 예수는 파국이냐, 하느님의 나라냐는 갈림길에서 자신의 긴급한 사명을 수행하려고 했다. 그것은 선이 악을 이기리라는 확신이었고, 결국 인간은 억압에서 해방되리라는 믿음이었다. 우리가 맞고 있는 현재의 파국적 상황 역시 위기이면서 동시에 인류 해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오늘날 하느님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 - 우리 시대의 사건들과 문제점들 속에서. 예수는 우리가 진리 자체의 소리를 알아듣도록 도와 줄 수 있지만, 필경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 것은 우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