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 33

허수아비 / 조오현

새 떼가 와도 손 흔들고 팔 벌려 웃고 사람이 와도 손 흔들고 팔 벌려 웃고 남의 논 일을 하면서 웃고 있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 논두렁 밟고 서면 -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 가을 들 바라보면 -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손 흔들어주고 숨 돌리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 허수아비 / 조오현 무산(霧山) 스님의 다비식이 어제 건봉사에서 열렸다. 속명을 따라 오현 스님이라고도 한다. 시인이기도 한 스님의 선시(禪詩)는 수도 정신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핵심을 드러낸다. 스님은 거침없는 언행으로 무애의 삶을 살았다. "가장 승려답지 않으면서, 가장 승려다..

시읽는기쁨 2018.05.31

신두리 해당화

신두리 사구 지대에는 사초가 많이 자란다. 사초는 종류가 워낙 많아 하나하나 구별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모래 언덕 군데군데 해당화가 피어 있다. 건조한 풍경 중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 같다. 이런 데서 피는 걸 보니 해당화도 생명력이 엄청나게 질긴 식물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큰 꽃을 피어내다니 대단하다. 해당(海棠)의 '당(棠)'은 '아가위 당'으로 산사나무 열매를 뜻한다. 확인은 못 했지만 둘의 열매가 닮았는지 모른다. 해당화가 피는 5, 6월에 섬마을 처녀는 선생님을 사모하게 되었을까. 해당화를 보면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꽃들의향기 2018.05.30

여미리 비자나무

충남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에 있는 비자나무다. 비자나무는 제주도나 남해안 지역에서 많이 자란다. 이렇게 중부 지방에서 자라는 비자나무 고목은 드물다. 추정 수령은 330년이고, 높이 20m, 줄기 둘레 2.5m다. 이 비자나무는 여미리에 살던 전주 이씨 가문의 한 분이 1600년대 후반에 제주도에서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기후나 풍토가 맞지 않을 텐데 잘 자라고 있다. 수형도 아름답다. 비자나무 밑에 유기방 가옥이 있다. 봄에 수선화가 유명하다고 친구가 소개해 준 곳이다.

천년의나무 2018.05.30

서산, 태안 나들이

답답했다. 바깥 바람을 쐬면 나을까 싶었다. 선뜻 선택한 곳이 태안과 서산 지역이었다. 백제의 미소를 만나 보면 웃음기가 돌까. 개심사에서는 꽁꽁 언 마음을 열 수 있을까. 그리고 신두리의 쓸쓸한 바다 풍경을 보고 싶었다. 이 셋은 오래 전부터 단골 코스였다. 은퇴한 이후로는 뜸했다. 찾아가야 할 이유가 줄어든 탓이리라. 생활은 안정되었지만 역동적이지는 않다. 한 쪽을 얻으면 한 쪽을 잃는다. 묘하다. 고정된 석상이라도 기분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오늘은 천진한 미소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맑아야지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개심(開心), 이름 때문에 들러보고 싶어지는 곳이다. 마음을 연다는 게 무엇일까. 편견과 아집을 버리는 것일까. 창문을 열듯 마음도 열어지는 것일..

사진속일상 2018.05.29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는 의료사회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캐나다 캘거리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40대 때 경험한 심장마비와 암이 이 책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질병 경험을 나눔으로써 질병의 의미와 가치를 공유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질병은 무작위로 찾아오지만 '잘 아프기'는 개인의 책임일 수 있다. 지은이는 고환암에 걸렸다. 수차례의 화학요법 치료를 받으며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고 완치 판정을 받았다. 나는 심각한 질병을 앓은 경험은 없지만, 환자의 고통과 고충에 공감하며 읽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고, 죽기 전에 크건 작건 질병의 기간을 통과의례로 거쳐야 한다.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몸이 '의학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표현은 재미있다. 환자가 되면 병원에 입원해야 하고 온갖..

읽고본느낌 2018.05.27

적응하기

딩동! "누구세요?" "실내 소독하러 왔습니다." 낮에 집에 있으면 현관 벨 소리에 응대해야 할 일이 가끔 있다. 방문자를 잘 파악해서 문을 열어줄지 말지를 빨리 판단해야 한다. 벨을 누른다고 다 문을 열어줄 수는 없다. 정기 소독이야 의심 없이 문을 열어주지만, 무슨 말인지 분명치 않은 사람은 십중팔구 귀찮게 하는 사람이다. 대면하면 뿌리치기 쉽지 않다. 이번에 소독하러 온 아줌마는 50대 중반쯤 되었다. 배수구에 분무기로 소독액을 뿌리는 간단한 작업이다. "다 됐습니다. 아버님, 여기 사인 좀 해 주세요." 헐! 아버님이라고? 내가 80대쯤으로 보인 모양이다. 내 여동생보다도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한테서 듣는 '아버님'이라는 호칭은 너무 생경했다. 제일 황당했던 건 전철을 탔을 때였다. 경로석 앞..

길위의단상 2018.05.26

경이로움 / 쉼보르스카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제쳐두고 오직 이 한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가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 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행성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天人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 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

시읽는기쁨 2018.05.24

그럭저럭

사람들이 안부를 물을 때 내가 잘 하는 말이 '그럭저럭'이다. 어쩌다 한 번 쓴 뒤로 지금은 입에 붙어 버렸다. "잘 지내?" "그럭저럭 지내지 뭐." '그럭저럭'은 '큰 문제나 잘된 일이 없이 그런대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큰 문제도 없고 잘되는 일도 없다는 말이다. 요사이 내 생활이 말 그대로 그럭저럭이다. 상대방은 어떻게 알아들을지 모르지만, '그럭저럭'은 무색무취해서 마음에 든다. '그럭저럭'은 양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무탈하다는 것은 잘 지낸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된다. 자랑할 일도 비난받을 일도 없으니 감사한 일이다. 그렇지만 행복하냐고 물으면 자신이 없다. 만족하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다른 면으로 '그럭저럭'에는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이 묻어 있다. 잘되는 ..

참살이의꿈 2018.05.23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출판사에서 교정과 교열 일을 보고 있는 김정선 씨의 바른 글쓰기를 위한 안내서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쓰는 어색한 표현들을 예시를 통해 보여주고,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고쳐준다.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내가 글 쓰는 원칙은 '쉽고 솔직하게'이다. 꾸밈보다 내용이 중요하다. 진솔한 마음이 담기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면 욕심이 생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내용만 아니라 표현도 자연스럽고 문법에 맞으면 더 좋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니 스스로 터득해 나갈 수밖에 없다. 을 읽어보니 그동안 무심코 남발한 쓸데없는 단어가 많았다는 걸 알겠다. 그걸 없애니 문장이 한결 깔끔해진다. 앞으로 신경을 많이 써야겠다. '적' 예> 사회적 현상 → 사회 현상 '의..

읽고본느낌 2018.05.22

물의정원 산책

신현회 넷이 모여 물의정원을 한 시간 정도 산책하다. 원래는 예봉산 등산 예정이었지만 내 발이 온전치 못한 관계로 가벼운 한강변 걷기로 바꾸다. 물의정원 공원은 아직 꽃양귀비가 피기 전이라 꽃밭은 초록 융단을 깔아놓은 것 같다. 더없이 청명한 날이다. 언제 미세먼지 걱정이 있었나 싶다. 비 내린 뒤 연사흘 이런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자꾸 심호흡이 깊어진다. 발걸음 가볍다. 그끄저께까지 내린 비로 팔당호 물은 많이 불어나 있다. 애기똥풀이 군데군데 무더기로 피어 있다. 강에 시멘트 바르는 일 말고 이런 수변 공원화 사업은 아주 고맙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며 새삼 감탄한다. 늘 이래야 정상 아닐까. 예전에 이곳에는 용진나루터가 있었다. 남양주 조안면 송촌리와 강 건너 양평을 연결하는 나루터다. 조선시대..

사진속일상 2018.05.21

논어[290]

선생님 말씀하시다. "사람들이 사람 구실하는 것을 물불보다도 더 무섭게 안다. 물불에 뛰어들다가 죽는 사람을 나는 보았지만, 사람 구실 하는 데 뛰어들다가 죽은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子曰 民之於仁也 甚於水火 水火 吾見蹈而死者矣 未見蹈仁而死者也 - 衛靈公 28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 구실[仁]'하며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한다. 이웃에 폐를 끼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게 인(仁)의 기본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심이 소중하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명심해야 한다. 그러자면 제 이기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인만 아니라 가족이나 국가 이기주의도 마찬가지다. 이기성에서 벗어난 마음이 선(善)이다. 인과 선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손해보더라도 착하게 살라고 자식을 교육하는 부모는 드물다. ..

삶의나침반 2018.05.20

티눈

발에 통증이 감지된 건 서너 해 전이었다. 새끼발가락 부근의 바깥쪽으로 신발과 제일 많이 접촉되는 부위였다. 만지면 딱딱한 게 잡히면서 누르면 아팠다. 많이 걸으니 굳은살이 생기는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올해 들어서는 걸을 때 절뚝거릴 정도가 되었다. 견디다 못해 병원에 갔더니 티눈이 세게 생겼다고 한다. 석 달째 냉동치료를 받고 있다. 초기에 손을 봤으면 쉽게 고쳤을 텐데 뿌리가 깊어선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저께는 의사한테 야단을 맞았다. 걷는 걸 조심하지 않으면 치료가 잘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쉽게 재발한단다. 사실 티눈을 가볍게 보고 치료 중임에도 전혀 조심하지 않았다. 통증이 가라앉았다고 이산 저산을 쏘다녔다. 쉽게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만만치 않다. 내 일상의 행복..

길위의단상 2018.05.19

한동안 그럴 것이다 / 윤제림

1 한 젊은 부부가,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아이를 공원에 데리고 와서 사진을 찍는다. 그네 위에 걸터앉혀 놓고 이리 찍고 저리 찍고, 필름 한 통을 다 찍는다. 한동안 저럴 것이다. 2 저러다가 어느 날, 언제부터인가 사진 찍는 것을 잊어버린 자신들을 발견하곤 흠칫 놀라지만, 이내 잊어버린다. 아이가 자신들의 가슴 속에 푸욱 들어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이는 한동안 부모의 가슴에 갇혀 자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이는 부모의 가슴에 난 작은 틈을 찾아낸다. 문을 낸다,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간다. 그 문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온다. 3 또 어느 날엔,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 하날 양손에 붙들고 와서 저렇게 사진을 찍는다. 필름 한 통을 다 찍는다. 한동안 그럴 것이다. - 한동안 그럴..

시읽는기쁨 2018.05.18

물곡리 느티나무

전형적인 시골 마을 정자나무다. 나무 밑에는 주민이 쉴 수 있는 깔끔한 정자가 앉아 있다. 흠이라면 너무 도로에 연해 있어 차량 소음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전북 진안읍 물곡리에 있다. 이 마을은 뒷산 지형에서 따와서 '궁동(弓洞)마을'로도 불린다. 앞으로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어 시원하다. 나무 수령은 200년 정도 되는데 마을 역사와 얼추 비슷하다. 나무 앞에는 돌 제단이 있는데 빈 막걸리 통이 놓여 있다. 한여름에 이런 나무 아래서 바둑 한 판 둔다면 신선이 따로 없겠다.

천년의나무 2018.05.17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안성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장석주 작가의 행복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 소박한 삶을 살자는 흐름은 오래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화려한 소비 중심의 현대 문명에 대한 반감이자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려는 자연스러운 운동이다. 작고 단순함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문명이 주는 안락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며 불편하더라고 적게 소비하고 단순하게 살아가는 데서 행복을 찾는다. "소박하게 먹고 단순하게 사는 것, 그게 내 방식의 삶이다. 하루의 보람은 사과 한 알 먹는 거, 세 시간 이상 햇볕을 쬐며 걷는 거, 8시간 정도 읽고 쓰는 거, 심심함 속에 머무는 거 따위다. 그리고 이타적 생각을 하며 살기,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 되기를 실천해야 삶이 온전해진다." 작가는 시골에 살며 그런 삶을 실천한..

읽고본느낌 2018.05.16

논어[289]

선생님 말씀하시다. "훌륭한 인물은 잔일은 잘 모르지만 큰 일은 맡을 수 있다. 하찮은 사람은 큰 일을 맡아서는 안 되지만 잔일은 잘 안다." 子曰 君子不可小知 而可大受也 小人 不可大受 而可小知也 - 衛靈公 27 큰 그릇과 작은 그릇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만들어지기보다는 타고나는 품성 중 하나다. 여기 나오는 '소지(小知)'는 '단편적인 지식'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 제 좁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재단하는 사람이 소인이다. 큰 일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살이에서는 소지(小知)와 소인(小人)도 필요하다. 잔일을 아는 사람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자가 군자와 소인을 구분했지만 하나를 차별하고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군자로만 이루어진 세상이 이상향은 아니다. 군자와 소인이 제 역할을 하며..

삶의나침반 2018.05.15

성지(6) - 어은공소

9. 진안성당 어은공소(사적지) 어은공소는 깊은 산 속에 있다. 박해를 피해 모여든 신자들이니 가능하면 사람들 눈에 덜 띄는 곳을 택했을 것이다. 성수산 아래 어은동은 그렇게 진안, 장수 지역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어은(魚隱)이라는 지명에는 천주교가 박해 받던 시절의 의미가 들어 있다. 어은공소 건물은 1909년에 세워졌다. 한식의 너와지붕으로 내부 공간은 서양의 바실리카 형식을 차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이 잠겨 있어 안을 볼 수는 없었다. 당시의 남녀유별 관습에 따라 내부는 물론 출입하는 문도 따로 나 있다. 어은공소가 본당이었을 때는 이곳 교우만 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해방 뒤에 본당이 진안읍으로 옮기면서 여기서는 한 달에 한 번 미사만 드린다.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어선지..

사진속일상 2018.05.14

어떻게 죽을 것인가

데이비드 구들이라는 104세 된 호주의 과학자가 안락사를 선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구들 박사는 안락사가 허용되는 스위스로 가서 스스로 주사액이 들어가는 밸브를 열었다. 불치병이 없으면서 단지 고령이라는 이유로 안락사가 허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구들 박사는 90세에도 테니스를 할 정도로 건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100세를 넘으면서 기력이 떨어졌고 눕거나 앉아 있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삶을 이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고 판단했다. 구들 박사는 '추하게 늙는 것(Aging Disgracefully)'을 피하고자 안락사를 선택했다. 마지막 순간에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에 나오는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졌다. 그가 선택한 곡이었다. 구들 박사는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 나를..

참살이의꿈 2018.05.14

5월의 노래 / 괴테

아, 대자연이 찬연하게 내게 빛을 보내요! 아, 햇살이 밝게 비쳐요 온 들판이 미소 지어요! 가지가지 이파리마다 꽃망울 터지고 수풀 사이 수천 가지 노랫소리가 들려요 가슴 가슴마다 환희와 축복이 넘쳐요 오, 대지여, 태양이여, 기쁨이여, 환희여 오, 사랑이여, 사랑하는 이여! 저 높은 언덕 위 드높은 아침 구름처럼 모두가 황금빛으로 아름다워요! 찬연한 그대 모습도 온 들판을 환하게 축복해주는 이 넓은 세상을 온통 안개꽃으로 감싸요 소녀여, 소녀여, 그대를 사랑해요! 참으로 빛나는 그대의 눈빛! 나를 사랑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그대! 사랑 때문에 종달새들도 높이 대기 속에서 노래하고 아침 꽃들도 모두 하늘 냄새를 사랑해요 뜨거운 가슴, 뜨거운 피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듯 그대는 내게 기쁨과 젊음과 용기를 줘요..

시읽는기쁨 2018.05.13

나무 철학

'내가 나무로부터 배운 것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나무를 소재로 책 한 권 가득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강판권 선생의 솜씨가 놀랍다. 나무에서 배우는 교훈을 내가 쓴다면 과연 몇 페이지나 나갈 수 있을까, 금방 생각이 막혀 버릴 것이다. 선생은 수학(樹學)이라는 새로운 학문 체계를 만드는 생태사학자다. 전공은 사학이었으나 40세가 되어서 나무와 인연을 맺었고, 그 뒤로 나무를 통해 세계사와 문화를 읽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무에 관한 열 권이 넘는 책을 냈다. 은 3부 28장으로 되어 있다. 제 1부: 순리에 맞게 변화하는 나이테의 철학, 단풍의 철학, 낙엽의 철학, 흔들림의 철학, 원만의 철학, 무심의 철학, 사랑의 철학, 독락의 철학, 위기의 철학, 역지사지의 철학 제 2부: 단순하고 절박..

읽고본느낌 2018.05.11

평지리 이팝나무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 있는 이팝나무군은 나무 자체보다는 민속적 의미가 커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 같다. 옛날에 이곳은 죽은 아이들의 무덤이었다고 한다. 죽어서라도 이밥을 많이 먹으라고 사람들은 무덤 주위에 이팝나무를 심었다. 그만큼 배 고팠던 시절이었다. 옛 무덤 자리에는 지금 마령초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몇 그루의 이팝나무가 남아 있다. 가장 오래된 이팝나무는 수령이 300년 정도 되었다. 그러나 나무의 생육 상태는 좋지 못하다. 줄기도 상하고 잎도 온전히 피우지 못한다. 꽃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의 슬픈 넋을 위로하느라 나무도 시름시름 앓는지 모른다. 모두 교실 수업을 하는지 운동장에는 아이 하나 없이 고요한 평지리의 봄날이었다.

천년의나무 2018.05.11

송화

아파트 단지에는 군데군데 소나무가 자란다. 조경용으로 심은 지 8년이 되었다. 소나무는 베란다 창을 통해서도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움츠리고 있더니 이제는 적응했는지 쑥쑥 자라난다. 봄에 돋는 새순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다. 이러다가는 베란다로 들어오는 햇빛을 곧 가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이맘때면 연기가 일듯 송홧가루가 날린다. 창을 열어두면 베란다 바닥이 금방 가루로 덮인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꽃가루가 생기는지 신기하다. 박목월의 '윤사월'을 나직이 읊조려 본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올봄은 외딴 산 속 눈먼 처녀가 부럽다.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진 그 적막강..

꽃들의향기 2018.05.07

논어[288]

선생님 말씀하시다. "지혜는 넉넉하지만 사람 구실로 뒷받침하지 않으면 비록 얻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잃고야 만다. 지혜도 넉넉하고 사람 구실로 뒷받혀졌더라도 엄격한 태도로 대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는다. 지혜도 넉넉하고 사람 구실로 뒷받혀졌고 엄격한 태도로 대하더라도 질서있게 백성들의 활동을 도와주지 않으면 잘된 일은 못된다." 子曰 知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知及之 仁能守之 不莊以리之 則民不敬 知及之 仁能守之 莊以리之 動之不以禮 未善也 - 衛靈公 26 여기 나오는 지(知), 인(仁), 엄정(莊), 예(禮)를 정치인이 갖춰야 할 자질이라고 볼 수 있겠다. 과연 이렇게 실천되는 정치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민주정이 되었지만 정파의 이익에 휘둘리는 것이 현실 정치다.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를 공자가..

삶의나침반 2018.05.07

가물치

낚시를 좋아하는 처남이 잡은 물고기를 들고 왔다. 붕어, 잉어, 메기, 가물치로 골고루 구색을 갖추었다. 메기와 가물치는 길이가 세 뼘이나 된다. 가져올 때는 전부 살아 있었는데 아침이 되니 붕어와 잉어가 죽었다. 24시간이 지나니 메기도 죽고, 사흘째 날까지 가물치만 살아 있다. 가물치는 고무 대야를 튀어나와 한바탕 소동을 치렀다. 얼마나 힘이 센지 모른다. 잡으면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바람에 주변이 온통 물 범벅이 되었다. 내 옷도 마찬가지였다. 고기 눈을 가리면 얌전해진다는 걸 처남이 나중에야 알려줬다. 다른 통으로 옮길 때 그대로 해 보니 가물치는 거짓말처럼 고분고분했다. 밤에 물고기가 조용히 있는 이유는 잠을 자서가 아니라 캄캄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민물고기 요리가 싫다. 낚시도 취미에 맞지..

사진속일상 2018.05.06

반복되는 꿈

꿈에서는 늘 학교가 등장한다. 우중충하고 복잡한 구조의 건물이다. 볼일이 급한데 화장실이 없다. 겨우 찾아내도 너무 더러워 들어갈 수가 없다. 전부 재래식 화장실인데 어디나 대변으로 가득 차 있다. 이리저리 헤매기만 한다. 몇 년 전부터 이런 유형의 꿈을 연속으로 꾸고 있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힘들게 화장실을 찾았는데 내부는 겨우 볼일을 볼 정도의 여유만 있었다. 난감해하다가 잠을 깼다. 꿈에 학교가 나오면 늘 악몽이다. 퇴직한 다음에는 교실을 못 찾아 허둥대는 꿈이 계속 나왔다. 시간표를 착각해서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다. 진땀을 흘렸다. 몇 년간 그러더니 이젠 똥 꿈으로 변했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한다. 더구나 같은 꿈을 연속으로 꾼다는 것은 내면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메시지로 해석해도 무리..

길위의단상 2018.05.06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봄밤' 등 7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책 제목처럼 주정뱅이가 등장하는 작품이 여럿이다. 작가 자신도 대단한 애주가인 듯하다. 또한 우리는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일정 부분 주정뱅이와 닮았다. 에서 '안녕'이란 주정뱅이에게 건네는 따스한 인사말 같다. 이 책에 모인 작품들은 공통되는 색깔이 있다. 인생의 고통과 비극을 드러낸 상처가 아프게 드러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살면서 맺어야 하는 인간과의 관계는 생채기를 남긴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 자체가 고(苦)의 원인이다. 견뎌내는 사람도 있지만 삶의 무게가 버거워 지쳐 쓰러지는 사람도 있다. 인간은 인간 때문에 병든다. 에는 인간에 대한 슬픈 연민이 깔려 있다. 일곱 편 중에서 제일 관심을 끄는 ..

읽고본느낌 2018.05.05

바람이 불어오는 곳 / 김광석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덜컹이는 기차에 기대어 너에게 편지를 쓴다 꿈에 보았던 길 그 길에 서 있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볼 하늘과 사람들 즐거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햇살 눈부신 곳 그곳으로 가네 바람에 내 몸 맡기고 그곳으로 가네 출렁이는 파도에 흔들려도 수평선을 바라보며 햇살이 웃고 있는 곳 그곳으로 가네 나뭇잎이 손짓하는 곳 그곳으로 가네 휘파람 불며 걷다가 너를 생각해 너의 목소리가 그리워도 뒤돌아 볼 수는 없지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 바람이 불어오는 곳 / 김광석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만찬장에서 불린 김광석의 노래다. 소년의 맑은 목소리로 들으니 느낌이 색달..

시읽는기쁨 2018.05.04

백마산에서 외대로

경안교에서 출발하여 백마산 줄기를 타다가 이번에는 외대 용인캠퍼스로 빠지는 길을 택했다. 새로운 길을 걸어보는 설렘은 언제나 좋다. 백마산 줄기에 있는 등산 코스는 모두 밟아보고 싶다. 어제 비가 내리고 대기는 깨끗하게 청소되었다. 오후에 비 예보가 있지만 배낭을 메고 상큼하게 집을 나섰다. 잠시만 버스를 타면 백마산 등산로 입구다. 걸어가도 되는 거리다. 집을 중심으로 고만고만한 거리에 기다리는 산들이 여럿 있다. 내 발이 둔해서 자주 못 찾을 뿐이다. 조금 걸으면 활공장이 나오는데, 날씨 좋은 휴일에는 여기에서 행글라이더가 뜬다. 광주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조망 포인트다. 새로 들어설 아파트 단지 기초 공사가 한창이다. 용인외대를 가기 위해 백마산 줄기를 타다 보면 여러 개의 봉우리를 넘는다. 차례대..

사진속일상 2018.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