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 31

논어[305]

선생님 말씀하시다. "좋은 일을 만나면 쫓듯이 덤비고, 좋잖은 일을 당하면 끓는 물에서 손을 빼듯하는 그런 사람을 나는 보았고, 그런 말을 나는 들었다. 숨어 지내면서도 높은 뜻을 간직하고, 옳은 일을 행하면 넓은 길을 터준다는 그런 말을 나는 들었으나, 그런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제나라 경공은 말이 사천필이나 되었건만 죽는 날에 백성들이 칭찬할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백이 숙제는 수양산 기슭에서 굶어 죽었지만 백성들이 지금도 그의 인격을 칭송하니 그것은 이를 두고 이른 말인가!" 孔子曰 見善如不及 見不善如探湯 吾見其人矣 吾聞其語矣 隱居以求其志 行義以達其道 吾聞其語矣 未見其人也 齊景公有馬千駟 死之日 民無德而稱焉 伯夷 叔齊 餓于首陽之下 民到于今稱之 其斯之謂與 - 季氏 9 제나라 경공과 백이 숙제를..

삶의나침반 2018.08.31

여보! 비가 와요 / 신달자

아침에 창을 열었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너무 거칠었던 격분 너무 뜨거웠던 적의 우리들 가슴을 누르던 바위 같은 무겁고 치열한 싸움은 녹아 사라지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입이 근질근질하고 싶은 말은 작고 하찮은 날씨 이야기 식탁 위의 이야기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가슴 안에서 쾅 하고 울려오는 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 안고 비비고 입술 대고 싶은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싶다 - 여보! 비가 와요 / 신달자 비범함이란 평범한 일..

시읽는기쁨 2018.08.30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예수가 언제 어떻게 신으로 여겨지게 되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바트 어만(Bart D. Ehrman) 교수의 저작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 질문과도 연관이 있다. 기독교는 예수가 곧 하느님이라는 교리를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예수가 직접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갈릴래아의 가난한 예언자가 어떤 과정을 통해 신으로 변모하게 되었는지 보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예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저자는 예수를 '묵시론적 예언자'로 이해한다. 예수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는 묵시론적 열정이 퍼져 있었다. 사악한 시대를 끝낼 메시아가 오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예수 역시 악의 세력을 파괴하기 위해 하느님이 곧 개입하리라고 가르쳤다. 하..

읽고본느낌 2018.08.29

외톨이로 당당하게 살기

한겨레신문에서 박홍규 선생의 근황을 들었다. 선생의 삶과 글은 을 통해 여러 차례 접한 바 있다. 생태주의 실천가라 할까, 비슷하게는 윤규병, 황대권 선생 같은 분들이 떠오른다. 선생은 올해 영남대에서 정년퇴직했다. 삶의 방식을 바꾸기 위해 경산의 시골집으로 이주한 것은 1999년이었다. 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텃밭을 가꾸며 지구에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살려고 했다. 머리는 집에서 깎고, 수염도 한 달에 한 번 가위로 자른다. 목욕도 자주 하지 않고 비누만 쓴다. 부인도 평생 화장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선생이 정한 땅의 소유 한계는 300평이다. 우리 국토에서 경작 가능한 땅을 7천만 인구로 나눴을 때 한 사람에게 300평 정도 돌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시골집과 텃밭이 부인 몫을 합해 600평이다...

참살이의꿈 2018.08.28

남한산성 큰제비고깔

큰제비고깔은 키가 훤칠해서 눈에 잘 띌 법하건만 의외로 만나기 어렵다. 여름에 남한산성 성곽 바깥쪽을 돌다 보면 서너 개체 정도 볼 수 있다. 몇 년 전에 본 곳에서는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보라색 꽃받침 안에 들어 있는 까만색이 꽃이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제비 새끼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제비고깔로 불린다. 여름이 되면 큰제비고깔과 인사를 나누러 남한산성을 찾는다. 사람 손을 타지 않고 멸종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꽃들의향기 2018.08.26

논어[304]

선생님 말씀하시다. "쓸모 있는 인간은 아홉 가지 경우를 생각한다. 보는 데는 밝을 것을, 듣는 데는 맑을 것을, 안색은 부드러울 것을, 태도는 공손할 것을, 말은 진심으로 할 것을, 일은 꾸준할 것을, 의심날 때는 물을 것을, 분통 터질 때는 뒷처리할 것을, 이익 볼 일 당하면 옳으냐 그르냐를 생각한다." 孔子曰 君子有九思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 季氏 8 군자되기도 참 어렵다. 모든 행동거지가 완벽해야 하니 말이다. 차라리 소인으로 살아가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 마지막의 '옳은 일을 당하면 옳으냐 그르냐를 생각한다[見得思義]'는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로 남아 있다. 유묵에는 '見利思義見危授命'으로 되어 있다. '이익 볼 일이 생기면 의로운지 생각하고, 나..

삶의나침반 2018.08.26

태풍은 지나가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맞았던 태풍인데 의외로 얌전히 지나갔다. '솔릭'은 8년 만에 한반도를 통과한 태풍이었다. 태풍의 기세가 뜨거운 기단을 밀어내줬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힘에 부치는 것 같다. 오랜만에 배낭을 메고 뒷산에 올랐다. 걷기 목적으로는 두 달 만의 바깥 걸음이다. 습도 높은 숲은 눅눅했으나 바람은 서늘했다. 벤치에 누워 쳐다보는 초록 나무들이 시원했다. 한 바퀴 돌아 내려오는 데 세 시간쯤 걸렸다. 그럭저럭 하루가 지나간다. 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간다. 가을바람이 불면 의욕이 살아날려나....

사진속일상 2018.08.25

살구나무 여인숙 / 장석남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주 서 있었다 일층은 주인이 살고 그 옆에는 바다 소리가 살았다 아주 작은 방들이 여럿 하나씩 내놓은 창엔 살구나무에 놀러온 하늘이 살았다 형광등에서는 쉬라쉬라 소리가 났다 가슴 복잡한 낙서들이 파르르 떨었다 가끔 옆방에서는 대통령으로 덮은 짜장면 그릇이 나와 있었다 감색 목도리를 한 새가 하나 자주 왔으나 어느 날 주인집 고양이가 총총히 물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살구나무엔 새의 자리가 하나 비었으나 그냥 맑았다 나는 나왔으나 그 집은 그냥 맑았다 - 살구나무 여인숙 / 장석남 '제주에서 달포 남짓 살 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다. 요즈음 나도 그런 꿈을 꾼다. 요란스레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달포만이라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고 싶다. 서해 바닷가 조용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시읽는기쁨 2018.08.24

수인

황석영 작가의 자전 기록이다. 1943년 출생에서부터 1998년 감옥에서 석방될 때까지 55년간의 삶을 담았다. 1권은 '경계를 넘다', 2권은 '불꽃 속으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구성이 특이하다. 감옥 생활 여섯 꼭지를 중심으로 사이사이에 과거 기록이 들어 있다. 순서를 거스른 의도적인 배치가 내용에 포인트를 준다. 시대순으로 재배열하면 이렇다. 유년(1947~1956) 방랑(1956~1966) 파병(1966~1969) 유신(1969~1976) 광주(1976~1985) 출행(1985~1986) 방북(1986~1989) 망명(1989~1993) 감옥(1993~1998) 제목에서 보듯 파란만장한 생애다. 대부분이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바쳐져 있다. 한 인간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

읽고본느낌 2018.08.23

금당실 송림

예천군 용문면에 있는 금당실(金塘室) 마을의 자랑으로 천연기념물 469호인 송림이다. 금당실 서북쪽 오미봉에서 용문초등학교까지 800m에 걸쳐 소나무 500여 그루가 긴 띠를 이루며 자라고 있다. 하천 범람에 따른 수해와 겨울철 북서풍을 막기 위하여 마을 주민들이 조성했다. 19세기 후반 동학혁명 당시에 노비 구출 비용 마련을 위해 소나무 벌채가 심했을 때는 당시 법무대신이던 이유인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숲을 보호했다고 한다. 소나무 숲이 조성될 때 원래 길이는 2km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반 이상 없어진 셈이다. 소나무 수령은 100~200년이고, 높이는 13~18m 정도 된다. 남은 나무는 건강하게 자연스럽게 잘 자라고 있다. 소나무 숲 사이로 산책로가 나 있어 1시간 정도 잡으면 끝까지 갔다 돌아..

천년의나무 2018.08.22

저만 모른다

고등학교 동기 밴드에 쓴웃음을 짓게 하는 유머 글이 하나 올라왔다. 동네 치과에서 진료를 기다리며 대기실에 앉아 있던 중 의사의 치과대학 졸업장을 봤다. 의사의 이름은 반세기 전 고등학교 시절의 같은 반이었던 친구의 이름과 같았다. 그는 키도 크고 멋진 친구였는데 혹시 이 사람이 그 당시 나와 친했던 그 친구인가, 하고 있는데 의사를 본 순간 그런 생각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대머리에다 몇 낱 안 남은 흰 머리카락, 그리고 주름살이 깊게 파인 얼굴이 내 동급생이기엔 너무 늙어 보였기 때문이다. 진료가 끝난 후 나는 그에게 물었다. "혹시 00고등학교에 다니지 않았습니까?" "네, 다녔습니다. 그때 좀 우쭐댔었지요"라고 말하며 치과의사는 활짝 웃었다. "언제 졸업했습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1967년입..

길위의단상 2018.08.22

금당실 느티나무

예천 금당실마을에 있는 500년 된 느티나무다. 표석에는 국립산림과학원에서 500년 수령을 공식 인정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연대로 추정해 보면 변희리(邊希李, 1435~1506) 선생이 심은 것으로 보인다. 이 집안에는 사괴당(四槐堂)이라는 종가 건물이 있다. '괴(槐)'는 느티나무를 가리킨다. 원래는 네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었던 듯하다. 나무 둘레는 5.2m에 이르고 금줄이 휘감고 있다. 줄기를 보면 500년의 연륜이 확실히 느껴진다. 금당실을 대표하는 나무로 용문면사무소 앞에 있다.

천년의나무 2018.08.21

논어[303]

선생님 말씀하시다. "낳자마자 아는 사람은 위가 되고,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요, 막혔다가 배운 사람은 또 그 다음인데, 막혔어도 배우지 않는 부류들은 꼴찌감이다." 孔子曰 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 下矣 - 季氏 7 여기서 '안다'는 말은 교과서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에 대한 앎과 실천일 것이다. 그래야 '생이지지(生而知之)'가 가능하다. 산골의 일자무식 농부도 사람의 도리 측면에서는 위가 될 수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 뒤에 속한다. 배워서 알게 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막혔어도 막힌 줄을 모르는 인간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세상이 혼미하다.

삶의나침반 2018.08.20

꽃핀 나무 아래 / 허수경

한때 연분홍의 시절 시절을 기억하는 고약함이여 저 나무 아래 내 마음을 기댄다네 마음을 다 놓고 갔던 길을 일테면 길이 아니고 꿈이었을 터 아련함으로 연명해 온 생애는 쓰리더라 나는 비애로 가는 차 그러나 나아감을 믿는 바퀴 살아온 길이 일테면 자궁 하나 어느 범박한 무덤 하나 찾는 거라면 이게 꿈 아닌가, 더러 돌아오겠다 했네 어느 해질녘엔 언덕에도 올라가고 야산에도 가고 눈 쓰린 햇살 마지막 햇살의 가시에 찔려 그게 날 피 흘리게 했겠는가 다만 쓰리게 했을 뿐 했을 뿐, 그러나 한때 연분홍의 시절 꿈 아닌 길로 가리라 했던 시절 - 꽃핀 나무 아래 / 허수경 독일로 간 허수경 시인이 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고고학을 공부하러 먼 나라로 가서 남달랐던 시인이었다. 생의 허무와 애상을 노래하고..

시읽는기쁨 2018.08.19

가을이 가깝다

햇살이 여전히 따갑지만 바람은 선선해지고 있다. 며칠 전과 같은 열풍은 아니다. 하늘의 구름도 변하고 있다. 높은 권운이 나타나는 걸 보니 가을이 가까워진 걸 알겠다. 낮과 밤이 오가고, 계절이 오가고, 해가 오가고, 그러면서 일생이 흘러간다. 생명의 기본은 숨이다. 숨도 날숨과 들숨이 있으니 오고감에 다름 아니다. 내 몸을 구성하는 원자도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만약 원자의 이동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면, 뒷날 나는 만물 중에 편재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오고감, 너와 나의 구별이라는 게 무의미해진다. 존재한다는 건 일어나고 스러지는 구름의 변화와 같다. 허깨비인 줄 알면서도 의식은 집착하고 발버둥 친다. 감정의 물결이 격렬히 요동한다. 그 또한 살아있음의 증거다. 진공도 끊임없는 양자 요동의 상..

사진속일상 2018.08.18

남한산성행궁 느티나무(3)

노을 사진을 찍어볼까 하고 남한산성을 찾았더니 포인트는 이미 수많은 삼각대로 점령되어 있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두 시간 전에 이미 만원사례였다. 사진가의 열정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구름이 사라진 하늘도 휑해서 석양이 멋진 풍경을 연출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행궁 옆을 지나며 오래 된 느티나무와 인사를 나누었다. 역광 상태에서 카메라의 HDR 기능을 처음으로 이용해 보았다. 사진은 맴맴 제자리만 돈다.

천년의나무 2018.08.17

김 박사는 누구인가?

여름에는 소설 읽기가 제일이다. 요즘처럼 찜통더위가 계속될 때는 집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소설을 벗하는 게 최고의 피서다. 전기료가 걱정된다지만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싸게 먹힌다. 재미있는 소설을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여름을 보낼 수 있다. 는 이기호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최근에 이기호 작가의 작품을 자주 읽는데 이야기가 경쾌하면서 생생하게 살아 있어 좋다. 그러면서 단단한 뼈대를 숨기고 있다. 쉽게 읽히지만 한참을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는 '탄원의 문장'이 제일 인상 깊었다. 대학교에서 일어난 과실치사 사고와 관련된 이야기다. 후배들 기강을 잡는다고 선배들이 강압적으로 술을 마시게 하고 훈계를 했다. 그중 한 여학생이 집으로 돌아간 뒤..

읽고본느낌 2018.08.16

논어[302]

선생님 말씀하시다. "참된 인간은 세 가지를 두려워한다. 천명을 두려워하고, 큰 어른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하찮은 사람은 천명을 모르므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큰 어른께 함부로 굴고,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긴다." 孔子曰 君子有三畏 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 小人 不知天命 而不畏也 狎大人 侮聖人之言 - 季氏 6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역사는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 의해 변화되고 진보해 왔다. 여기 나오는 천명, 큰 어른, 성인의 말씀은 권위를 지탱하는 힘이다. 신분이나 지위에 의한 예속 관계를 심화, 고착시킨다. 판을 뒤엎는 새 물결은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한 반동에서 생긴다.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는 모든 운동은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상이나 신념도 마찬가지다. 부처를..

삶의나침반 2018.08.15

그가 부르시면 / 권지숙

골목에서 아이들 옹기종기 땅따먹기하고 있다 배고픈 것도 잊고 해 지는 줄도 모르고 영수야, 부르는 소리에 한 아이 흙 묻은 손 털며 일어난다 애써 따놓은 많은 땅 아쉬워 뒤돌아보며 아이는 돌아가고 남은 아이들 다시 둘러앉아 왁자지껄 논다 땅거미의 푸른 손바닥이 골목을 온통 덮은 즈음 아이들은 하나둘 부르는 소리 따라 돌아가고 남은 아이들은 여전히 머리 맞대고 놀고 부르시면, 어느 날 나도 가야 하리 아쉬워 뒤돌아보리 - 그가 부르시면 / 권지숙 땅따먹기 놀이는 정교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욕심을 적당히 제어할 줄도 알아야 한다. 힘과 근력으로 하는 게임이 아니니 나한테는 잘 맞았다. 승률도 꽤 높았을 것이다. 놀이에 빠지면 집에 들어갈 시간도 잊는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면 집집마다 아이 부르는 소리로 골목..

시읽는기쁨 2018.08.14

체력과 열정

"체력과 열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살짝 미쳐야 하고, 득실을 계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특별한 사람이 있다. 이 말을 한 조유성 할머니는 여든셋인데 동남아의 밀림을 찾아다니며 곤충 사진을 찍고 있다. 벌써 9년째다. 사진을 배우고 나서 야생화와 곤충의 세계에 빠졌고, 2천년대 후반부터는 열대지방 동식물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밀림 안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기도 했는데, 현재는 인도네시아 프로볼링고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조 할머니가 멋있다고 여기면서 나는 왜 안 될까를 생각한다. 이것저것 재고 있기 때문이지만, 실은 바라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살짝 미치는 게 두려운 이유도 있다. 부러운 것과 실천은 별개다. 나이가 들면 체력과 열정이 시드는 게 당연하다. 일부는 젊은..

참살이의꿈 2018.08.13

우리는 언제쯤

안 그래도 푹푹 찌는 날씨인데 더 열을 받게 하는 소식이 들린다. 도로 확장을 하려고 제주도 비자림로의 삼나무를 잘라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 사진처럼 2차선 도로를 4차로로 바꾸기 위해 2천 그루가 넘는 삼나무를 벨 예정이라고 한다. 저곳은 산굼부리 인근 지역이 아닌가 싶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아름다운 길이 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웠던 곳이다. 삼나무 숲 사이로 난 2차로 길이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 가까이 도시가 없으니 막히는 길도 아니다. 예쁜 길에 빠진 관광객이 탄 차가 서행을 하니 지역 주민으로서는 답답할 수도 있다. 그래도 삼사 분 정도 더 걸릴 뿐이다. 그 시간이 아깝다고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어내고 길을 넓히겠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다. 4차로로 되어 쌩쌩 달리면 길의 정..

길위의단상 2018.08.12

영초언니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씨의 소설이다. 작가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막바지에 이른 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다. 반독재 민주화 학생운동을 하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200일 넘게 감옥살이도 했다. 당시 작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천영초 선배 이야기를 이 소설에 담았다. 소설 형식을 빌렸지만 실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르포르타주에 가깝다. 이 기록이 애틋한 것은 소설 주인공인 천영초는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현재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겨우 의식을 되찾고 고국에 돌아와 요양중이라고 한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혹하다. 영초언니만이겠는가, 운동의 앞장을 섰던 많은 이들이 고문의 후유증이나 가난으로 고통을 겪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에 그려진..

읽고본느낌 2018.08.11

논어[301]

선생님 말씀하시다. "참된 인물은 세 가지 일을 조심한다. 젊을 때는 혈기가 아직 알차지 않은 때라 계집을 조심하고, 장년이 되면 혈기가 꿋꿋하므로 주먹다짐을 조심하고, 늙어지면 혈기가 시들기 때문에 탐욕을 조심해야 한다." 孔子曰 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鬪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在得 - 季氏 5 인간의 성정을 혈기(血氣)로 설명하는 게 재미있다. 동양 의학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노년이 되어 혈기가 시들면 그걸 보충하기 위해 탐욕스럽게 된다는 것이다. 설명의 옳고 그름을 떠나 노인의 탐욕만큼 부끄러운 것도 없다. 그치고 놓아야 할 때 더 움켜쥐고 악착스럽게 되면 노추(老醜)다. 재물이나 명예욕만이 아니다. 노인의 옹고집은 사고의 탐욕이다. 생기가 끊어진 나뭇가지..

삶의나침반 2018.08.10

밴댕이 / 함민복

팥알만 한 속으로도 바다를 이해하고 사셨으니 자, 인사드려야지 이분이 우리 선생님이셔 - 밴댕이 / 함민복 '밴댕이 소갈머리'임을 자인한다. 누가 지적해준 게 아니라 스스로 찔려서 하는 말이다. 늙어갈수록 밴댕이 소갈머리를 닮아간다. 제발 나잇값을 하며 살고 싶다. 우리는 땅의 밴댕이들이 아닌가. 도시는 거대한 밴댕이 양식장 같다. 얼마나 더 작아질 수 있을까, 바글거리며 살아간다. 그런 소갈머리로 거친 세상을 헤치고 버텨낸다. 어찌 보면 그것만으로도 대견한 거지. 밴댕이는 나이를 먹어도 밴댕이일 뿐. 그걸 인정하면 크게 안달할 일도 없는 거지. 팥알만 한 속으로도 바다를 이해하며 살 수 있다고, 우리 선생님이 보여주고 있잖아.

시읽는기쁨 2018.08.09

손주와 속초 피서

손주를 모시고(?) 2박3일 속초에 피서를 다녀왔다. 아내와 사위 없이, 딸 둘에 손주 둘과 함께였다. 나는 오로지 기사로 필요했다. 둘째가 운전을 시작했으니 이런 여행은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다. 한반도가 펄펄 끓고 있다. 앞으로 더위라는 말이 나오면 기억에서 끄집어내야 될 2018년이다. 마침 우리가 간 때에 속초와 강릉 지방에는 200mm의 폭우가 쏟아졌다. 덕분에 낮 기온도 20도 중반대로 떨어졌다. 피서를 제대로 한 셈이다. 첫날 저녁에는 봉포 해변으로 바다 구경을 나갔다. 구름이 잔뜩 몰려왔다. 밀려오는 파도를 피하며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둘째 날, 오전에는 세찬 비가 퍼부었다. 비가 잦아든 오후가 되어서야 아이들은 워터피아로 놀러갔다. 숙소는 한화 리조트였다. 마침 뽀로로 방이 배정되어 아이들..

사진속일상 2018.08.08

행복은 내 선택이었다

호주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는 분이 죽음을 앞둔 노인들과 대화를 나눈 내용을 책으로 펴냈다고 한다. 그분이 제일 많이 들은 다섯 가지 후회는 다음과 같다. 1. 내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다. 2. 그렇게 열심히 일 할 필요가 없었다. 3.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살지 못했다. 4. 친구들과 연락하며 살았어야 했다. 5. 행복은 결국 내 선택이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조사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사람 살아가는 껍데기는 달라도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눈을 감기 전 생을 돌아보며 이 정도 아쉬움은 누구나 가지리라 본다. 알면서도 실천 못 하는 것, 그게 인생 아니겠는가. '내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다'는 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막은 탓이다. 우리는 생의 많은 부분을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닌 남의 눈..

참살이의꿈 2018.08.05

안락사를 부탁합니다

'오싱'을 쓴 하시다 스가코 작가는 1925년에 태어났으니 금년이 93세다. 지금도 수영을 하고 매년 몇 달간은 크루즈로 세계 여행을 즐기며 글을 쓰고 있다. 아흔이 넘어도 총기를 잃지 않고 여행을 한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이 책 는 재작년에 나왔으니 91세에 썼다. 부제가 '후련하게 깨끗이 떠나는 10가지 종활 이야기'다. 종활(終活)이란 인생을 마무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이다. 어느 시기가 되면 종활이 필요하다. 작가는 원고를 정리하고, 집에 있는 물건을 정리하고, 사후에 부탁할 일은 '종활 노트'에 적어둔다. 동시에 이 세상을 떠날 마음의 준비도 한다. 작가의 마음가짐은 '없도록 애쓴다!'이다. 깨끗하고 후련하게 떠나기 위해서는 미련이 없어야 한다. 쓸데없는 기대도 하지 않는 '없는' 삶을 살아..

읽고본느낌 2018.08.04

논어[300]

선생님 말씀하시다. "윗사람을 모실 때 세 가지 잘못이 있으니, 말을 안 해야 할 때 말을 하는 것은 조급한 짓이요, 말을 해야 할 경우에 말하지 않는 것은 감추는 짓이요, 얼굴빛도 보지 않고 중얼거리는 것은 눈 먼 짓이다." 孔子曰 侍於君子 有三愆 言未及之而言 謂之躁 言及之而不言 謂之隱 未見顔色而言 謂之고 - 季氏 4 윗사람 모실 때의 말가짐에 대한 가르침이다. 말을 해야 할 때 입 다물지 말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때 나서지 말고, 상대의 얼굴빛을 살피지 않고 중얼거리지 말라는 세 가지 금기사항이다. 꼭 윗사람만이겠는가. 아랫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말에는 상대가 있으니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말가짐은 결국 마음가짐과 연결되는 것이다.

삶의나침반 2018.08.03

나의 거처 / 김선향

너는 고산지대에 핀 말나리꽃의 줄기다 빈집 절구독에 고인 빗물에 비치는 낮달이다 붙박이별을 이정표 삼아 비탈길을 가는 나귀 걸음걸이다 너는 무명천에 물들인 쪽빛이다 노인정 앞 평상에 내려앉은 후박나무 잎사귀다 - 나의 거처 / 김선향 꽃과 잎을 주목하지 줄기를 살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말나리꽃의 '줄기'다, 라는 독백에서는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결연한 고독이 감지진다. 더구나 고산지대에 핀 말나리꽃의 줄기다. 다른 연이 주는 느낌도 비슷하다. 무욕(無欲) 하기에 당당하게 외로울 수 있다. 시인의 걸음에서는 묵향이 풍긴다. 제목은 '나'이지만 시에서는 '너'라고 한 것도 재미있다. '우리'의 거처는 마땅히 이래야 하리라는 은유 같다. 이런 집 한 채 짓고 살면 어떤 호화 저택이 부러우랴. 김선향 시인이..

시읽는기쁨 2018.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