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 29

무덤덤에 대하여

노인이 된다는 건 감정이 무뎌지는 일이다. 희로애락의 진폭이 점점 줄어든다. 젊은 시절의 가슴 설렘은 멀리 사라져 간다. 크게 웃을 일도 뜸해진다.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할지 모른다. 감정의 요동이 적으니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차분하게 인생을 관조하는 게 가능해진다. 웃을 일이 적다지만, 애통할 일도 줄어든다. 잃으면 얻는 게 있다. 청춘에는 약동하는 젊음이 있지만, 온갖 번뇌와 열정에 시달려야 한다.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가만두지 않는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다. 반면에 노년은 따스한 온기를 품은 화로와 같다. 사람들은 화로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루의 얘기를 속삭이듯 나눈다. 고된 노동 뒤 안식의 시간이다. 솔직히 말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지금이 좋다. 무..

참살이의꿈 2018.12.31

논어[323]

선생님 말씀하시다. "자줏빛이 붉은 빛을 흐리게 하는 것이 싫다. 정나라 음란한 음악이 참된 음악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 싫다. 말재주로 나라를 뒤엎는 것이 싫다." 子曰 惡紫之奪朱也 惡鄭聲之亂雅樂也 惡利口之覆邦家者 - 陽貨 16 공자는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다. 불의를 만나면 화를 낸다. 호오(好惡)를 구분 못하고, 화를 내야 할 때와 안 내야 할 때를 분간 못하는 건 소인(小人)이다. 공자의 이 말씀은 지금도 그대로 적용해 볼 수 있다. 사람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사이비가 얼마나 횡행하는가. 그 바탕에는 사이비의 활약을 부추기는 대중의 무지가 있다. 많이 안다고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다.

삶의나침반 2018.12.30

몸과 인문학

동의보감의 눈으로 본 문명 비평 에세이다. 고미숙 선생이 썼다. 신문에 연재된 칼럼이라 길이가 짧고 쉽게 이해된다. 대신 깊은 내용을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다. 글 내용은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시원하다. 여덟 개 목차는 몸과 몸, 몸과 여성, 몸과 사랑, 몸과 가족, 몸과 교육, 몸과 정치사회, 몸과 경제, 몸과 운명으로 되어 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우리는 우리 '몸'의 주인이 아니다. 병이 나면 의사와 의료기기의 처치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몸을 상품화하는 데도 기꺼이 동참한다. 우리가 겪는 숱한 질병과 번뇌의 원인이 여기서 시작한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에서는 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우리 사회에 대한 진단이 명료하게 읽힌다. 특히 스위트 홈이나 모성 신화를 거침없이 공격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워낙..

읽고본느낌 2018.12.29

손주 돌보기

어제 모임에 나갔더니 세 명이 손주를 봐줘야 한다는 이유로 불참했다. 전체가 아홉 명이니 삼 분의 일이 손주에게 발목이 잡힌 셈이다. 우리 나이대에서는 흔한 모습이다. 자식과 손주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별로 없다. 자식이 결혼하고 손주를 낳게 되면 손주 봐주는 데 묶이게 되는 것이 한국 부모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요사이는 대부분이 맞벌이라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하는데 부모가 제일 만만하다. 어찌 된 풍조인지 부모나 자식 모두 당연한 일인 줄 안다. 우리 세대가 젊었을 때만 해도 여자가 결혼하면 전업주부가 되어 아이는 직접 키웠다. 출산 후 몸조리를 위해 잠시 부모의 도움을 받았지만 내내 신세를 지는 일은 없었다. 내 부모님이나 처가의 장인, 장모님도 각각 다섯 형제를 두었고 손주만 스무 명이지만 손..

길위의단상 2018.12.28

사랑 / 김중

곱추 여자가 빗자루 몽둥이를 바싹 쥐고 절름발이 남편의 못 쓰는 다리를 후리고 있다 나가 뒈져, 이 씨앙놈의 새끼야 이런 비엉-신이 육갑 떨구 자빠졌네 만취한 그 남자 흙 묻은 목발을 들어 여자의 휜 등을 친다 부부는 서로를 오래 때리다 무너져 서럽게도 운다 아침에 그 여자 들쳐 업고 약수 뜨러 가고 저녁이면 가늘고 짧은 다리 수고했다 주물러도 돌아서 미어지며 눈물이 번지는 인생 붉은 눈을 서로 피하며 멍을 핧아줄 저 상처들을 목발로 몽둥이로 후려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어렵고 독한 것인가? - 사랑 / 김중 곁불만 쬐며 살아왔다. 가까이 가면 너무 뜨거워 고개 돌렸다. 한 여인만이겠는가. 삶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진실로 삶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자서전을 쓰려 해도 소재가 없는 인생..

시읽는기쁨 2018.12.25

논어[322]

선생님 말씀하시다. "옛날 백성들에게는 세 가지 병통이 있었는데, 시방은 그것마저 없어진 것 같다. 옛날 이상주의자는 멋대로 했는데, 요즈음 이상주의자는 갈팡질팡한다. 옛날 고집통이는 못난 짓을 했는데, 요즈음 고집통이는 억지만 쓴다. 옛날 어리석은 패는 고지식했는데, 요즈음 어리석은 패는 속셈만을 따진다." 子曰 古者民有三疾 今也或是之亡也 古之狂也肆 今之狂也蕩 古之矜也廉 今之矜也戾 古之憂也直 今之憂也詐而已矣 - 陽貨 15 골칫덩이[狂, 矜, 憂]도 진화하는가. 옛날 '미친 자[狂]'는 제멋대로긴 하지만 중심은 있었는데, 요즈음은 줏대가 없다. 옛날 '고집통이[矜]'는 모나긴 했어도 바른 대로 따랐으나, 요즈음은 억지만 쓴다. 옛날 '어리석은 자[憂]'는 곧기라도 했으나, 요즈음은 속셈이 따로 있다. 한..

삶의나침반 2018.12.24

중세의 사람들

우리가 접하는 역사는 대부분 왕이나 위인, 전쟁 이야기로 되어 있다. 평범한 민초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사료의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나에게 영웅들의 이야기보다 더 궁금한 것은 당시 민중들의 삶이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민중의 일상을 알고 싶다. 은 그런 호기심을 일부 채워주는 책이다. 서양 중세시대에 살았던 여섯 사람의 삶을 복원했다. 프랑크 왕국의 농부 보도, 베네치아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 수녀원장 에글렌타인, 14세기 파리의 주부인 메나지에의 아내, 상인 벳슨, 직물업자 페이콕이 등장한다. 마르코 폴로를 제외하고는 보통 사람들이다. 픽션이 아니라 사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서양의 중세는 암흑시대라고 배웠다. 종교와 신..

읽고본느낌 2018.12.23

남한산성 산책

안양에 사는 G한테서 전화가 왔다. 걱정 되어서 연락한다고 했다. 송년 모임에 나가지 않았더니 엉뚱한 소문이 돈 모양이다. 가족 건강 문제가 심각한 줄 안다. 두문불출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면 안 되겠구나. 사람들은 제 식으로 상대방을 파악한다. 제 앎과 경험의 범위 안에서만 본다. 그게 사람과 사물을 이해하는 인간의 한계다. 그렇다고,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라고 변명하기도 뭣하다. G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지 말라고 충고한다. 허허, 하고 웃어넘겼다. 첫째가 와서 남한산성을 셋이서 산책하다. 함께 걸어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남한산성 주차비가 3천 원으로 올랐다. 그동안 천 원이어서 싸다 했더니 배포있게 세 배나 인상하며 현실화시켰다. 주차장에서 북문, 서문, 남문을 거쳐 내려왔다...

사진속일상 2018.12.22

'정규직'에 담긴 불편한 진실

고미숙 선생의 글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게 한다. 그중의 하나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반성이다. 누구나 정규직이 되기를 바란다. 이유는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정된 직장은 역동적인 인간의 삶에 맞지 않는다. 그런 내용이 '정규직에 담긴 불편한 진실'이라는 글에 실려 있다. 이 글을 읽으며 기본소득을 다시 생각한다. 최소한의 생활 보장이 된다면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정규직 직장에 목을 맬 이유가 없어진다. 갑질도 자연스레 사라진다. 각자는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 어쨌든 정규직만이 인생의 목표인 양 올인하는 젊은이가 적어졌으면 한다. 시야를 넓게 가졌으면 좋겠다. 인생에는 다양한 길이 있다. 중요한..

참살이의꿈 2018.12.21

무심천 / 도종환

한세상 사는 동안 가장 버리기 힘든 것 중 하나가 욕심이라서 인연이라서 그 끈 떨쳐버릴 수 없어 괴로울 때 이 물의 끝까지 함께 따라가 보시게 흐르고 흘러 물의 끝에서 문득 노을이 앞을 막아서는 저물 무렵 그토록 괴로워하던 것의 실체를 꺼내 물 한 자락에 씻어 헹구어 볼 수 있다면 이 세상 사는 동안엔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어긋나고 어긋나는 사랑의 매듭 다 풀어 물살에 주고 달맞이꽃 속에서 서서 흔들리다 돌아보시게 돌아서는 텅 빈 가슴으로 바람 한 줄기 서늘히 다가와 몸을 감거든 어찌하여 이 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 무심히 흘러오고 흘러갔는지 알게 될지니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 욕심을 다 버린 뒤 저녁 하늘처럼 넓어진 마음 무심이라 하나니 다 비워 고요히 깊어지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

시읽는기쁨 2018.12.20

논어[321]

선생님 말씀하시다. "비루한 인간과 함께 군왕을 섬길 수 있을까! 지위를 못 얻으면 몹시 서둘고, 얻은 후에는 놓칠까 걱정하고,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못하는 짓이 없지." 子曰 鄙夫可與事君也與哉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 - 陽貨 14 이런 '비루한 인간[鄙夫]'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게 공자 시대뿐이겠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도찐개찐이다. 인간의 성정상 이런 인간은 늘 있기 마련이다. 오히려 지금이 훨씬 교활해진 게 아닐까. 덕치(德治)를 좀먹는 이런 인간을 공자는 노골적으로 경멸한다.

삶의나침반 2018.12.19

경안천 새길

초겨울이 되면 계절병을 앓는다. 소화기관이 차가워진 기온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몸에서는 위와 장이 제일 약하다. 여름에 에어컨 바람을 쐬어도 배가 바로 반응한다. 그러니 겨울의 찬 공기는 상극이다. 거기에다 활동량이 줄어드니 위와 장 기능이 더 떨어진다. 음식물을 소화하지 못하니 속은 늘 부글부글 끓는다. 마치 사보타지를 하는 것 같다. 두 주일째 죽이나 누룽지로 속을 달래고 있다. 이제 한고비는 지나갔다. 어제부터는 조심스레 정상적인 식사를 하고, 커피도 마시고 있다. 위장도 환경에 맞추어야지 별수 있겠는가. 내가 도와줄 것은 걷기밖에 없다. 게을러진 몸을 일으켜 세운다. 가까운 경안천에 나간다. 몇 달 전에 천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놓여서 쉬이 건너편으로 갈 수 있다. 이젠 통상적인 산책로의..

사진속일상 2018.12.18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

고미숙 선생의 글을 읽다가 꽤 오래전에 본 이 영화가 생각났다. 글 제목이 '스위트 홈은 없다'다. 가족은 '상처의 온상'이라고 말한다. 선생은 화폐, 권력과 함께 스위트 홈에 대한 망상을 우리가 깨뜨려야 할 벽으로 본다.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에 나오는 가족 이야기는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를 뺨친다. 불륜과 돈, 부모 형제간의 갈등이 아버지 장례식에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폭발한다. 메릴 스트립은 약물 중독에 구강암 환자로 나온다. 그녀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세 딸은 내면에 상처를 갖고 있다. 가시를 잔뜩 품고 있는 선인장 같다. 결국 각자는 뿔뿔이 흩어진다. 서로에게 절망하고 해체된 다음에야 다시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볼 여유가 생긴다. 내면의 상처를 극복해야 상처의 대물림도 막을 수 있고, 다시 ..

읽고본느낌 2018.12.17

로이터 선정 올해의 사진

로이터통신이 올해를 대표하는 사진 100장을 선정했다. 로이터통신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다. 밝은 뉴스보다는 어두운 뉴스가 많지만 보도사진의 특성상 어찌할 수 없는 것 같다. 어느 해나 그렇지만 내전이나 테러, 자연재해 사진이 주를 이룬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사진을 골라보았다. 우리나라 관련 사진도 5장이나 된다. 하와이 킬라우에아 화산에서 흘러내리는 용암(5월). 내전중인 시리아의 한 마을에서 아이가 가방 안에서 자고 있다(3월). 그린랜드에서 녹고 있는 빙산(6월). 미투 운동이 활발한 한 해였다. 우리나라도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갔다. 뉴욕 재판소에 들어가는 하비 웨인스타인(5월). 미국은 더 힘이 세지고 있다. 미 육군 훈련을 참관하는 트럼프 대통령(8월). 나치의 망령은 아직 살아 있..

길위의단상 2018.12.16

옛날 사람 / 곽효환

때론 사랑이 시들해질 때가 있지 달력 그림 같은 창밖 풍경들도 이내 무료해지듯 경춘선 기차 객실에 나란히 앉아 재잘거리다 넓은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잠이 든 그 설렘도 덕수궁 돌담길 따라 걷던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떨림도 북촌 마을 막다른 골목 가슴 터질듯 두근거리던 입맞춤도 그냥 지겨워질 때가 있지 그래서 보낸 사람이 있지 세월이 흘러 홀로 지나온 길을 남몰래 돌아보지 날은 어둡고 텅 빈 하늘 아래 드문드문 가로등불 오래된 성당 앞 가로수 길에 찬바람 불고 낙엽과 함께 뒹구는 당신 이름, 당신과의 날들 빛바랜 누런 털, 눈물 그렁그렁한 선한 눈망울 영화 속 늙은 소 같은 옛날 사람 시들하고 지겨웠던, 휴식이고 위로였던 그 이름 늘 내 안에 있는 당신 이제 눈물을 훔치며 무릎을 내미네 두근거림은 없어도 ..

시읽는기쁨 2018.12.15

논어[320]

선생님 말씀하시다. "길가에서 들은 말을 길가에서 지껄이는 것은 제 인격을 짓밟는 짓이다." 子曰 道聽而塗說 德之棄也 - 陽貨 13 요사이 말로 바꾸면 인터넷에서 떠도는 정보를 마구 퍼 나르는 짓에 해당하겠다. 단톡방에는 시도 때도 없이 그런 글과 사진이 올라온다. 시사와 건강에 관한 내용이 많고, 미담이나 교훈적인 얘기, 유머도 있다. 대부분 다른 데서 베껴 옮긴 것이다. 개인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시사 내용은 편견이 엄청 심하다. 특히 고향이 경상도인 동창들 단톡방은 문재인 대통령 욕하는 것밖에 없다. 짜증이 나서 탈퇴하고 싶어도 인간관계를 쉬이 끊을 수 없어 참고 있다. 그래서 떴다 하면 보지도 않고 삭제해 버린다. 되지 않는 소리라도 제발 제 목소리로 말했으면 좋겠다. 남의 주장 뒤에 숨는 것은 ..

삶의나침반 2018.12.14

억만금을 준대도

옛사람이 현대인보다 지조 면에서는 몇 급 위인 것 같다. 그때는 선비 정신이란 게 살아 있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킬 건 지켰다. 현실에 야합하는 간신 무리도 있었겠지만, 명분과 가치를 중시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존경했다. 그들은 현재의 고초를 기꺼이 감내했다. 당장의 이익보다 어떤 이름으로 남을 것인지를 먼저 생각했다. 반면에 현대인은 즉물적이고 찰나적이다.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실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고, 심지어는 사람의 마음도 살 수 있다. 누구나 돈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다. 가끔 생각한다. 억만금에도 팔 수 없는 내 안의 무엇이 과연 있는가? 백 억을 줄 테니 그걸 포기하라고 하면 "No!"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천 억을 주겠다면 어찌하겠는가? 마지막까지 남는 게 있어야 그게 바..

참살이의꿈 2018.12.13

남이 봐도 되는 일기

1. 찬바람 속을 걸으면 눈물이 쉴 새 없이 나온다. 손수건 꺼내는 걸 잠깐 잊으면 볼을 타고 목까지 흘러내린다. 내가 이렇게 눈물 많은 사람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그런데 정작 울어야 할 때는 절대로 안 나온다.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주책이다. 병원에 가보고 싶지만 의사는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노화 현상입니다!" 미세먼지를 막아주는 마스크처럼 눈물을 제어해 주는 투명 마스크는 없을까. 고령화 시대에 대박 상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2.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천년의 세월을 살 것처럼 앞만 보고 살아왔는데.... 그렇게 멀리만 보이던 노년이었는데 세월을 나를 어느덧 노년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초등 친구 카톡방에 ..

사진속일상 2018.12.12

500일의 썸머

토요일 밤에 EBS에서 우연히 본 영화다. 윗집의 쿵쾅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서, 어쩔 수 없이 거실에 나가 채널을 돌리니 마침 이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영화에 집중하는 동안은 웬만한 소음은 잊을 수 있다. '500일의 썸머'는 썸머와 톰의 500일에 걸친 만남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둘의 성격은 아주 다르다. 썸머가 활달하고 현실적이라면, 톰은 소심한 반면 순수한 청년이다. 썸머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어릴 적 부모의 이혼이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썸머는 운명적인 사랑 같은 걸 믿지 않는다. 반면에 톰은 천생연분으로서 사랑의 기적을 믿는다. 둘은 다른 점이 많지만 서로 호감을 느끼고 여느 젊은이들처럼 데이트를 즐긴다. 싸울 때도 있지만 곧 화해한다. 그런데 300일쯤 된 때, ..

읽고본느낌 2018.12.11

여산의 안개비 / 소동파

여산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가보지 못했을 땐 천만가지 한이었는데 가서 보고 돌아오니 별다른 것은 없네 여산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 여산의 안개비 / 소동파 廬山煙雨浙江潮 未到千般恨不消 到得還來無別事 廬山煙雨浙江潮 - 廬山煙雨 / 蘇東坡 이번 겨울 첫 추위가 닥쳤다. 속물이어선지 소동파 하면 동파육이 먼저 떠오른다. 동파육에 연태고량주 한잔하면 딱 좋겠다. 추울 때는 독한 술이 제일이지. 그런데 지금은 장염약을 먹으며 속을 달래는 중이다. 소동파는 긴 유배 생활 중에도 자신만의 정신의 세계를 추구한 시인이었다. '산은 산, 물은 물'의 어원도 이 시가 아닐까. 선풍(禪風)이 감지되는 시다. 힘든 걸음 해서 가보지만 별다른 게 없다는 걸 아는 게 깨달음일까. 그러나 '별다른 게 없다'는 말에는 깊은..

시읽는기쁨 2018.12.10

논어[319]

선생님 말씀하시다. "근엄한 체하는 사람은 곧은 인격을 좀먹는 무리들이다." 子曰 鄕原德之賊也 - 陽貨 12 "향원은 덕을 훔치는 도적이다." 직역하는 게 더 분명하게 이해된다. 공자가 제일 싫어한 무리가 향원이다. 마치 예수가 바리새인을 비난하는 것과 비슷하다. 향원(鄕原)은 겉과 속이 다른 사이비 지식인이다. 표리부동의 위선자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는 군자인 체하지만 속으로는 제 잇속만 차린다. 악인은 차라리 경계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향원은 타인의 존경을 유도하고 무장해제시키면서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힌다. 향원이 많아지고 득세하면 나라가 혼란해진다. 꼭 그런 놈들이 권력을 잡으려 하니 문제다.

삶의나침반 2018.12.09

동대문 송년 모임

이상하게 생긴 건물을 비싸게 짓는다고 비난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데 자꾸 보다 보니 현대 도시에 어울리는 외양으로 어느덧 익숙해지고 있다. 마치 도심에 착륙한 거대한 우주선 같은데, 몇십 년은 앞선 디자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래 도시는 이런 유형의 건물이 주를 이루지 않을까. 이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나름의 역할을 하는 건축물인 것 같다. 효율성만으로 가치를 따질 수는 없다.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서울에서 제일 멋진 건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는 이 건물을 완성하고 2년 뒤에 사망했으니, DDP는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된 셈이다. 경떠모 다섯 명이 동대문에서 만났다. 영하 10도로 떨어진 추운 날씨였다. 점심은 '..

사진속일상 2018.12.08

한 장의 사진(25)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외손녀는 두 주에 한 번씩 찾아와서 자고 간다. 이번에 와서는 엄마 옛날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한다. 두 딸이 시집을 갔지만 가족 앨범은 우리 집에 있다. 제 엄마와 같이 앨범을 펴놓고 엄마가 설명하는 얘기를 들으며 깔깔댄다. 그러더니 내 방에 와서 앨범에서 꺼낸 사진 한 장을 내민다. 30년쯤 전에 찍은 것이다. 어린 손주가 보기에 제 엄마와 외할아버지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나 보다. 엄마가 꼭 제 나이만 할 때 모습이다. 이때가 1987년이던가, 아니면 1988년이리라. 내 나이는 30대 중반, 품에 안긴 첫째는 예닐곱 되었으리라. 아마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던 기차 안 모습 같다. 그때는 방학이 되면 어머니가 계신 고향에 내려가서 열흘 정도 지냈다 왔다. 자가용이 없..

길위의단상 2018.12.06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는 소설보다 그의 삶이 더 흥미롭다. 처음 쓴 소설이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며 혜성처럼 문단에 등장한 뒤 돌연 시골로 잠적하여 은거에 들어간다. 오직 글쓰기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지였다. 인간관계를 끊고, 최소한의 생활비로 버티면서 문학과 마주한다. 그리고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세상과 자신과 당당하게 싸워나간다. 그가 문학을 대하는 자세는 수도승 같다. 반항적이며 아나키스트 기질에 더해진 그의 독특한 생활 철학은 문단의 이단아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최근에 그의 책 두 권을 읽었다. 와 이다. 는 중편소설이고, 는 의기소침한 젊은이들에게 주는 에세이집이다. 전에 작가의 를 읽은 적이 있는데 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세상을 대하는 견해가 당돌하고 파격적이다. 인습과 고정관념을 무시하는 태도가 시..

읽고본느낌 2018.12.05

청평리 느티나무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에 있는 느티나무다. 옛 마을은 사라지고 지금 이곳은 개발이 한창이다. 옆에 청평역이 들어섰고, 나무 주위로는 새 도로를 내는 작업이 마무리에 있다. 나무 옆에 정자가 있지만 마을 주민의 휴식처로서 정자목의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시대의 변화를 겪지 않는 나무는 별로 없다. 느티나무 옆으로는 청평역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이 나무 높이는 22m로 수형이 수려해서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수령은 약 300년이다. 나무 옆이 지금은 논이지만 오래지 않아 건물이 들어설 게 틀림없다. 그리되면 지금의 시원한 전망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천년의나무 2018.12.03

가평 읍내리 느티나무

처음부터 이런 비탈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이 야금야금 나무의 자리를 갉아먹어 더 이상 내어줄 수 없는 자리만 차지한 채 버티고 있으리라. 느티나무 답지 않게 수형도 왜곡되어 있다. 풍성해야 할 가지가 많이 잘려 나갔다. 키만 껑충 하고 바싹 말라 보여 안타깝다. 안내문에는 이 느티나무 수령이 300년으로 적혀 있다. 높이는 25m, 줄기 둘레는 4.8m다. 가평군 읍내리 513번지, 가평성당 옆에 있다.

천년의나무 2018.12.03

그래서 / 김소연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를 안 듣고 싶어요 ..

시읽는기쁨 2018.12.02

논어[318]

선생님 말씀하시다. "볼품만은 위풍을 갖추면서 속으로는 꿍꿍이 셈을 꾸미는 것을 못된 인간에게 비긴다면 아마도 담 구멍을 뚫는 좀도둑이라고나 할까!" 子曰 色려而內荏 譬諸小人 其猶穿유之盜也與 - 陽貨 11 언뜻 떠오르는 게 정치인들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속 꿍꿍이 셈은 전혀 딴판이다. 돈과 권력을 탐하는 속내를 숨기려면 교언영색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정치인이 득세하는 것은 속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선거철만 되면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대중이 있기 때문이다. 좀도둑에게 살림을 맡기니 나라 꼬락서니가 어떻게 되겠는가.

삶의나침반 2018.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