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 25

정원사의 방울

위고의 2권에는 파리에 있는 봉쇄 수녀원 얘기가 나온다. 장발장이 자베르 형사를 피해 은신한 곳이다. 봉쇄 수녀원은 '봉쇄'라는 이름 그대로 외부와 단절된 곳이다. 더구나 남자는 절대 접근 금지 구역이다. 그래도 수녀원을 운영하자면 남자의 힘을 빌려야 할 때가 있다. 이 봉쇄 수녀원에는 정원사와 잡일을 겸하는 유일한 남자가 산다. 포슐르방이라는 노인으로 절름발이다. 장발장은 전에 포슐르방의 생명을 구해준 인연으로 그의 도움을 받아 수녀원에 피신할 수 있었다. 정원사 노인은 발목에 방울을 달고 있다. 그가 움직이면 방울 소리가 난다. 수녀들은 방울 소리가 나면 얼른 숨는다. 정원사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다. 남자와 만나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정원사의 방울은 '내가 여기 있으니 피하시오' ..

참살이의꿈 2019.01.31

서산시청 보호수 두 그루

충남 서산시청 앞에는 느티나무와 왕버들, 두 그루의 보호수가 있다. 나무로 볼 때 오래전부터 이곳이 관아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왕버들이 있다는 것은 연못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무가 있는 자리는 시청 정문 바로 앞인데 공원으로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느티나무는 수령이 400년, 높이는 9m로, 단아한 모양새다. 왕버들 수령은 300년이다. 왕버들 특성상 느티나무에 비해 훨씬 더 세월의 깊이가 느껴진다. 이 둘은 서산 관아의 역사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나무다.

천년의나무 2019.01.31

논어[327]

선생님 말씀하시다. "진종일 처먹기만 하고 아무것도 뜻이 없는 인간은 할 수가 없다. 장기나 바둑 같은 것도 있지 않느냐? 그런 것을 하는 것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단 말이다." 子曰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 - 陽貨 20 향상을 위한 노력! 공자가 제일 강조하는 내용이다. 빈둥거리느니 차라리 장기나 바둑이라도 두란다. 바둑이나 장기 놀이 역시 공자는 마땅찮게 본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무 뜻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한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허나 쓸데 없는 데 '용심(用心)'을 쓰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인간의 행위 중에 순수하게 내적 향상을 위한 마음씀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이 제 이익을 챙기려는 분투가 아니던가. '용심(用心)'의 해석에 따라 다..

삶의나침반 2019.01.30

올해 첫 매화

천리포수목원에서 올해 첫 매화를 보았다. 굉장히 일찍 피는 품종인 것 같다. 가지가 꽈배기처럼 꼬불꼬불 비틀어진 모양이 특이하다. 꽃봉오리가 많은 걸 보니 이제 막 개화하기 시작한 듯하다. 실은 납매를 보러 천리포수목원에 찾아갔다. 4년 전 기억을 더듬어서다. 바람도 쐴 겸 아내도 동행했다. 납매는 매화 느낌이 나지 않지만 향기는 닮았다. 나무 가까이 서 있으면 매화 향기가 진동한다. 2월 하순에는 남쪽 지방으로 매화 여행을 떠나볼까 한다. 통도사 홍매, 화엄사 흑매, 산청 삼매 등 찾아볼 매화가 여럿 있다. 중요한 건 때를 맞추는 일인데 얼마나 개화 시기와 맞을 지는 모르겠다.

꽃들의향기 2019.01.29

당진성당 보호수

충남 당진시 읍내동에 있는 당진성당 마당에는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두 그루의 보호수가 있다. 제일 많은 보호수를 보유한 성당은 아산에 있는 공세리성당일 것이다. 당진성당은 본당이 설립된지 70년 정도 되었는데, 두 나무는 성당이 세워지기 훨씬 전부터 이 언덕에서 자라고 있었다. 옛날에는 이곳 터가 무슨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궁금하다. 느티나무는 성당 정면을 향해 있고, 수령은 약 150년 정도 되었다. 보호수 중에서 이 정도면 어린 편에 속한다. 나무 높이는 20m, 줄기 둘레는 2.3m다. 균형 잡힌 몸매가 아담하면서 정갈하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800년이다. 엄청난 풍채를 자랑한다. 옆에 있는 느티나무는 손자에 손자뻘 정도 되어 보인다. 줄기가 보러진 곳도 보이고, 상한 부분도 있지만 씩씩한 기상이 느..

천년의나무 2019.01.28

레 미제라블(2)

2권의 소제목은 '코제트'다. 밑바닥 삶을 살다 병으로 죽은 팡틴의 가련한 딸이다. 코제트는 엄마와 헤어져 탐욕스러운 테나르디에 부부 밑에서 학대받으며 살고 있었다. 두 번째로 탈주한 장발장이 코제트를 구출해 나온다. 추적하는 자베르 형사를 피해 수도원으로 도망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2권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워털루 전투와 봉쇄수도원을 묘사한 장면이다. 워털루 전투만 100페이지 가까이 서술되어 있다. 1815년 6월 18일의 워털루는 유럽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전투였지만 여러 우연이 겹쳤다. 나폴레옹이 승리할 수도 있었지만 위고는 그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고 해석한다. 나폴레옹은 질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두 가지 결정적인 부분은 대포 소리를 못 들은 그루시와 오앵의 움푹 팬 길이다..

읽고본느낌 2019.01.27

겨울 나무 / 이원수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오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평생을 지내 봐도 늘 한 자리 넓은 세상 얘기는 바람께 듣고 꽃 피는 봄 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 겨울 나무 / 이원수 겨울에는 산에 거의 가지 않지만, 가볍게 오르는 뒷산 길에서 가끔 이 동요를 읊조린다. 산꼭대기 가까운 비탈에 이 노래와 비슷한 이미지의 겨울 나무가 있다. 지금도 초등학생이 이 노래를 배우는지 모르지만 우리 때는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노래 분위기는 생기발랄한 아이들보다 차라리 지금의 나한테 더 맞는 것 같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이 구절만으로도 쉽게 감정 이입이 되며 나무를 쓰다듬게 된다.

시읽는기쁨 2019.01.25

별마당 도서관

서울에 나간 길에 코엑스에 있는 '별마당 도서관"에 들렀다. 개장한 지 2년 정도 되는데, 코엑스 한가운데에 이런 도서관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비주얼로는 독보적인 도서관이다. '스타필드'라는 민간 기업에서 운영하는 도서관 같다. 그래서 도서관 이름이 '별마당'이다. 5만여 권의 도서를 누구나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 다만, 대여는 해 주지 않는다. 서점이 아니기 때문에 책을 판매하지도 않는다. 도서관 내부의 편의 시설이 잘 되어 있어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적당한 장소다. 서점이나 도서관이 종래의 개념과 달라지고 있다. 서점이 책을 사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서점과 도서관이 여러 기능을 하는 복합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별마당 도서관도 고정관념을 깨는 장소다. 코엑스 한가운데라 수익을 내는 관점에서..

사진속일상 2019.01.24

트레커 10년

2008년 11월에 가입했으니 트레커와 함께 한지 10년이 넘었다. 일기장을 찾아 보니 그동안 함께 다닌 산과 길이 아련한 추억 속에 펼쳐진다. 10년 동안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많은 도움과 즐거움을 받았고, 그러면서 실망도 있었다. 10년 간의 산행 목록은 다음과 같다. 2008년 11월 강씨봉 12월 칼봉 2009년 1월 히말라야 랑탕 트레킹 2월 고대산 3월 가리산 6월 백덕산 7월 두타연 9월 소백산 2010년 3월 금학산 7월 비학산 11월 구봉상 12월 정암산 2011년 3월 아차산, 도봉산 11월 금강소나무숲길 2012년 1월 대금산 3월 아차산 4월 북바위산 5월 응복산 10월 갈기산 2013년 2월 금병산 3월 보리산 7월 중원산 10월 금오도 비렁길 2014년 1월 칠장산 7월 가은..

길위의단상 2019.01.22

논어[326]

재아가 물었다. "삼년상은 너무 기한이 긴 듯합니다. 웃자리에 있는 분이 삼 년 동안 예법을 그만두면 예법이 시들어지고 삼 년 동안 음악을 그만두면 음악이 부스러집니다. 묵은 곡식은 떨어지고 햅쌀이 나오면 불씨도 새로 갈아넣게 마련이니, 일 년이면 좋지 않을까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그처럼 쌀밥을 먹고, 그처럼 비단옷을 입어도 너는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네가 괜찮거든 그대로 하려무나! 대개 성실한 인물들은 상 중에는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고, 집안에서도 편안한 줄 모르므로 그렇게 않는 것이다. 네가 괜찮거든 그렇게 하려무나!" 재아가 나간 후에 선생님 말씀하시다. "재아는 사람 구실을 못하는 아이다. 사람이 나면 삼 년이 지난 뒤라야 부모의 품에서 멀어지게 되므로..

삶의나침반 2019.01.21

못난이 노자

노자(老子)라고 하면 흰 수염의 할아버지가 연상된다. 이름에서 풍기는 자연스러운 이미지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못난이 노자'는 열아홉 살 고등학생이다. 그것도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그의 짝인 은정이도 비슷한데, 은정이는 학교를 자퇴하고 집을 나왔다. 이 두 젊은이가 노자의 가르침을 익히고 따른다. 그런 역발상이 재미있다. 송기원 소설가가 쓴 는 두 젊은이의 생각과 삶을 통해 을 풀이한다. 그래서 아주 쉽게 쓰였다. 오래전 에 연재될 때 읽었었는데 단행본으로 나왔다. 은 81장으로 되어 있지만, 책에서는 12장만 선별하여 해설한다. "생긴 대로 살자." "못난이가 힘이다." "노자를 알면 천하무적이 된다." 이런 주제가 반복해서 나온다.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노자의 ..

읽고본느낌 2019.01.20

광양 여자 / 이대흠

청보리 필 때는 청보리처럼 푸르게 웃음 짓던 여자 빈 들 보리밭 가 점심 굶고 걸어도 마냥 나를 배부르게 하였던 여자 쓸쓸함이 산수유 꽃그늘 같아서 열에 들뜬 내 머리를 가만히 다스려주고 쉬운 분노와 잦은 뉘우침을 반복하던 나에게 가시몸 속 탱자꽃을 보여주던 여자 내 오래 절망했을 때 치약처럼 상큼한 냄새로 제 몸이 걸레 되어 더께 낀 내 속을 찬찬히 닦아주던 여자 내가 아플 때면 메꽃잎 같은 손으로 상처의 뿌리를 매만져주던 여자 눈동자가 초꼬지불 같아서 어둠 속을 초롱초롱 빛내던 여자 그 눈동자에 눈부터로 있는 게 즐거워서 오래도록 눈 마주보았던 여자 불경 같은 여자 연꽃 같은 여자 숯불 같은 여자 차심 같은 여자 짐승 같은 여자 마른 낙엽 밑 돌멩이처럼 감추어진 여자 찬바람에도 쉬 드러나 찢긴 내 맨..

시읽는기쁨 2019.01.19

어려운 인간관계

얼마 전에 남한산성에서 멧돼지와 마주친 적이 있다.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뭘까, 하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멧돼지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나서 눈이 마주쳤다. 10m 앞쯤 되었을까, 놀란 건 나보다 멧돼지였다. 멧돼지는 후다닥 달아났고, 그 뒤로 새끼 세 마리가 뒤따랐다. 멧돼지 가족은 요란한 발걸음 소리를 남기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만약 멧돼지가 아니고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아마 멧돼지보다 훨씬 더 무서웠을 것이다. 무슨 해코지를 하지나 않을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여자 입장에서는 공포감이 더 클 것이다. 산속에서 제일 무서운 동물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멧돼지는 사람을 해치기보다 십중팔구 제가 먼저 도망간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어떤 흑심을 품을지 ..

참살이의꿈 2019.01.18

열이틀 만의 외출

독감 기세가 누그러졌다. 열이틀 만에 밖에 나갔다. 내 멋대로 쉴 수 있는 건 백수의 특권이다. 만약 직장에 다닌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고작 하루 정도 병가를 낼 수 있을까. 눈치가 보여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열이틀은 나같이 게으른 백수에게나 가능하다. 활동적인 사람은 몸이 근질거려 오직 방콕을 견디지 못하리라. 경안천을 30분 정도 산책했다. 햇빛이 자글거리며 얼굴을 간질이는 게 좋았다. 독감이 물러가고 이제 몸이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오는 이 안도감과 느긋함이라니. 나한테서 릴레이 받아 시작한 아내는 독감이 현재진행형이다. 하남에 가서 보신탕을 사 왔다. 아내는 기력 회복용으로 보신탕이 최고의 음식이라 믿고 있다. 내가 아프면 먹을거리가 풍성하지만, 아내가 아프면 식탁이..

사진속일상 2019.01.17

논어[325]

유비가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다. 선생님은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전갈하는 사람이 문을 나가자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러 그가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 孺悲欲見孔子 孔子辭以疾 將命者出戶 取瑟而歌 使之聞之 - 陽貨 18 이 대목은 읽을 때마다 고개가 갸웃해진다. 병을 핑계로 거절했으면 됐지, 굳이 노랫소리를 듣게 해서 놀릴(?) 필요가 있었을까. 아픈 사람이 거문고를 타며 노래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모욕적인 대우를 받은 셈이다. 병을 핑계 댄 것은 거짓이고, 실제는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매몰찬 공자의 모습이다. 유비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대우를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공자는 호오(好惡)가 분명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얼버무리지는 않았다. 일부 무리..

삶의나침반 2019.01.16

강신주의 감정수업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다. 특히 다양한 감정 변화는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다. 다른 동물은 식욕과 번식욕에 따른 몇 가지 감정이 전부다. 그러나 인간은 관계와 욕망에 따른 무수한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 산다. 인간의 이성의 동물이면서 감정의 동물이다. 그동안 감정은 이성보다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부정되기까지 했다. 마치 몸이 멸시를 받은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감정을 억압하면 행복한 생활은 불가능하다. 샘솟는 감정을 통해 우리는 살아있다는 기쁨을 맛본다. 환희나 영광만 아니라 슬픔, 비애, 절망 등의 감정도 우리에겐 소중하다. 은 철학자 강신주 선생이 인간의 감정을 48가지로 분류하고 설명을 붙인 책이다. '감정의 철인'이라는 스피노자의 정의를 기본으로 깔고, 그 감정이 드러난 문학 작품을 소개한..

읽고본느낌 2019.01.15

독감 2라운드

독감에 걸린 지 열흘째다. 재채기와 콧물이 흐르는 증세가 오늘은 더 심해졌다. 집에 같이 있던 아내에게도 독감 바이러스가 옮아갔다. 방 두 개가 병상이 되어 있다. 서로 에스컬레이터 작용을 하는 것 같다. 쉽게 나을 것 같지 않다. 짜증이 많이 난다. 열흘 전 남한산성을 간 게 잘못이었다. 일행 중에 독감에 걸린 사람이 있었다. 거의 나아서 나왔다지만 온전하지 않은 몸이었다. 같은 A형 진단을 받았으니, 그로부터 감염된 게 확실하다고 합리적 의심을 해 본다. 안 좋은 일에는 원망의 대상이 필요하니까. 감기에 걸린 사람은 제발 바깥출입을 자제하자. 생계를 위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친목 모임까지야 기어코 나갈 필요가 있을까. 심지어는 콜록거리면서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마스크는 남을 위..

길위의단상 2019.01.14

그 많던 귀신은 다 어디로 갔을까 / 곽효환

섬섬한 별들만이 지키는 밤 사랑채에서 마당 건너 뒷간까지는 수많은 귀신들이 첩첩이 에워싸고 있었다 깊은 밤 혹여 잠에서 깨기라도 하면 새까만 어둠 속에 득실거리는 더 새까만 귀신들 때문에 창호지를 바른 덧문을 차마 열고 나갈 수 없었다 대청 들보 위에는 성주신 부엌에는 조앙신 변소에는 측간신 그리고 담장 밖에는 외눈 부릅뜬 외발 달린 도깨비들.... 숨죽이며 가득 찬 오줌보를 움켜쥐고 참던 나는 발을 동동 구르다 끝내 울음을 터뜨려 잠든 할아버지를 깨우곤 했다 문틀 위에는 문신이 파수를 서고, 지붕 위에서는 바래기기와귀신이 망을 보고, 어스름밤 골목에서는 달걀귀신이 아이들의 귀갓길을 쫓고, 뒷산 묘지에는 소복 입은 처녀귀신이, 더 먼 산에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한다는.... 우리가 사는 ..

시읽는기쁨 2019.01.12

허술한 몸

겨우 기력을 회복해 컴퓨터 앞에 앉는다. 독감에 걸린 지 이레째다. 올겨울은 잔병을 달고 지낸다. 한 달여 전인 12월 초에 찾아온 위염이 시작이었다. 소화가 안 되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연말까지 지냈다. 덕분에 송년 모임은 참석할 수 없었다. 몇 차례는 취해서 해롱거렸을 텐데, 금주한 효과는 있었다. 속을 겨우 진정시켰더니 이번에는 독감이 기습했다. 산행 뒤 몸살이 나서 병원에 갔더니 A형 독감 판정을 받았다. 4년 전에는 집에서 미적대다가 폐렴으로 발전해 열흘간 입원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겁이 나서 바로 병원을 찾은 게 다행이었다. 독감 증세는 이제 정점을 지났다. 하지만 몸은 축 늘어진 상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석증 증상이 재발했다. 너무 오래 침대에 누워 있었던 탓인지 고개를 돌리는..

길위의단상 2019.01.11

논어[324]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자공이 말했다. "선생님이 말씀을 안 하시면 우리들은 무엇을 받아서 전하오리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하늘이 무엇을 말하더냐? 사시는 오고 가고, 만물은 거기서 자라는데 하늘이 무엇을 말하더냐?" 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 陽貨 17 노자의 불언지교(不言之敎)가 떠오른다. 가르침은 말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말의 한계 또한 공자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말이 많아지면 핵심에서 멀어진다. 나아가 말로 전해질 수 없는 것도 있다. 이 대목에서는 왠지 공자의 지친 모습이 보인다. 공자의 제자라고 해서 하나 같이 가르침 대로 따르기만 했을까?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선생으로서 공..

삶의나침반 2019.01.07

트레커와 남한산성 만남

서울 마천역에서 등산을 시작한 트레커 팀과 남한산성 북문에서 만났다. 함께 성곽길을 일주할 생각이었는데 팀이 중간에서 접는 바람에 짧은 걸음이 되었다. 예상보다 날이 차가워 오들오들 떤 탓인가, 산길 걸은 뒤 몸살이 찾아왔다. 기침이 나고 몸이 새큼거려서 오늘은 하루 내내 누워 지냈다. 주제 파악 못 하고 까불면 탈이 생긴다. 2년간 트레커 팀과는 소원하게 지냈다. 올해부터는 여건이 되면 가능한 참석하려 한다. 트레커는 같이 만났을 때 그나마 마음이 편한 멤버들이다. 올해 첫 산행에 열두 명이 참석했다. 한 명의 신입회원도 있었다. '오복두부집'에서 점심을 하고, 다시 짧은 산책 후 '반월'에서 단팥죽을 맛보았다.

사진속일상 2019.01.06

레 미제라블(1)

민음사에서 나온 빅토르 위고의 완역본 다섯 권을 사서 1부를 읽었다. 올겨울에 전체를 읽어보려 한다. 총 페이지가 2,500쪽이나 된다. 장발장 이야기는 어릴 때 접하고, 소설도 축약본으로 읽은 적은 있으나 완역본은 처음이다. 전체를 읽어보겠다고 오래전부터 별렀던 책이다. 첫 권인 1부는 소제목이 '팡틴'이다. '레 미제라블'이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여기에 걸맞은 인물이 팡틴이다. 남자에게 버림받고 미혼모가 된 팡틴은 딸 코제트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한다. 공장에서 쫓겨나서는 몸 파는 여자로까지 전락한다. 장발장인 마들렌 시장의 도움으로 구출되지만, 결국은 딸을 만나지 못하고 병사하는 불쌍한 여인이다. 가난과 차별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했지만 영혼은 순수하고 고결했다. 혁명 이..

읽고본느낌 2019.01.05

35년 된 셔츠

특별한 옷이 하나 있다. 35년 된 셔츠다. 장롱에 보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도 입고 있다. 천에는 보푸라기가 생겼고 소매 끝은 헤져서 밖에 입고 나가지는 못하지만 집에서 입기에는 아직 무난하다. 오래된 만큼 편안해서 좋다. 이젠 정이 들어서 조강지처처럼 버릴 수 없다. 이 옷에 얽힌 기억이 선명하다. 35년 전인 1984년 봄, 서울 변두리에 있는 M 중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새로 담임을 맡은 반의 한 학생의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오셨다. 그 학생은 몸이 가늘고 얼굴이 유난히 하얬다. 어머니 얘기로는 심장에 이상이 있어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담임이 잘 살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 학생의 어머니가 선물한 옷이다. 셔츠 주머니에는 우산 모양의 상표가 붙어 있었다. 천의 감촉이 좋고 편해서 나들이..

길위의단상 2019.01.04

새해 첫 뒷산

2019년 첫걸음으로 뒷산에 오르다. 뒷산은 항상 그 자리에서 어느 때나 나를 포근히 품어준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사박사박 걸으면 잡념이 사라지고 정신이 상쾌해진다. 몸이 개운해지는 건 물론이다. 우주의 기운을 담뿍 받는 것 같다. 한없이 주기만 하는 고마운 뒷산이다. 겨울 산길은 말한다. 붙잡아두지 말고 훌훌 털어내어라. 애착이 없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알지만 안 되는 걸요. 인생이 산길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놈아, 알면서 행하지 않으니 어리석다 하는 거야. 씩씩거리며 앞으로 나가지만 말고 나무를 오르내리는 저 다람쥐를 잘 보려무나. 2011년에 이곳으로 왔으니 어느덧 8년째에 접어든다. 5년 정도 살아보고 더 시골로 들어갈 요량이었는데, 이젠 거의 붙박이가 되어간다..

사진속일상 2019.01.03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물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소년 시절 겨울 풍경을 소환해 본다. 아무리 필름을 되돌려 봐도 온종일 논 것밖에 없다. 학원도 없었고, 공부하라는 부모의 잔소리도 없었다. 낮에는 앞 논에 나가 '씨게또'를 타고, 양지바른 마당에서 뜀박질하며 놀았다...

시읽는기쁨 2019.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