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 31

뒷산 세 시간

당신에게 제일 편안한 장소는 어디입니까? 나한테 묻는다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대답이 튀어나올 것이다. 뒷산이다. 뒷산길을 걸을 때 나는 제일 행복하다. 높지 않아도 뒷산의 품은 넉넉하고 따스하다. 뒷산은 말로 무엇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마음은 부드러운 위무의 손길을 느낀다. 모난 생각도 산길을 닮아 부드러워진다. 집에서 뒷산 정상까지 다녀오는데 바지런히 걸으면 두 시간 정도 걸린다. 그렇게 바삐 걷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세 시간에서 네 시간까지 걸린다. 숲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길다. 쉬는 시간은 마음의 포만감에 비례한다. 여름 산은 성가시게 달려드는 날벌레와 모기 때문에 짜증을 유발한다. 뒷산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이번 여름도 뒷산 찾는 횟수가 뜸했다. 이제 아침 저녁으로 부는..

사진속일상 2019.08.31

풀 / 김재진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알고 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다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 풀 / 김재진 '아름다움'은 '앓음'에서 나왔는지 모른다. 예술 작품을 보라. 창작 과정의 고통과 아픔 없이 나오는 명작은 없다. 상처의 향기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풀은 자신의 전 생이 베어지는 때에 향기를 낸다. 원망과 한탄의 늪에 빠지거나 복수의 칼날을 갈지 않는다. 상처에서 나오는 악취는 썩는 신호다. 향기는 생명 의지의 표현이다. 상처의 향기가 아름다움이다.

시읽는기쁨 2019.08.30

권혁재의 핸드폰 사진관

누구나 사진을 찍는 시대가 되었다. 어제 집에 들어오는데 아파트 현관에서 유치원 아이 둘이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핸드폰 앞에 선 아이의 포즈가 모델 뺨쳤다. '사진 인류'라는 말이 실감 난다. 이 모두가 핸드폰 카메라 때문이다. 그러나 핸드폰 카메라 기능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면 대개 비슷하다. 고민하지 않고 그냥 보이는 대로 누른 결과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핸드폰 카메라로도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다. 권혁재 사진기자의 은 핸드폰 카메라로 좋은 사진을 찍는 비법을 보여준다. 이 책에 나온 사진은 LG V30 핸드폰으로 찍었다. 사진만 보면 정말 핸드폰 사진 맞아, 라고 놀라게 된다. DSLR에 못지 않다. 일반인이 찍은 DSLR 사진보..

읽고본느낌 2019.08.29

목현천 백일홍

백일홍은 고향과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꽃이다. 닭장 둘레에 듬성듬성 피어 있던 백일홍이 안갯속처럼 흐릿하다. 별로 주의해서 바라보지도 않은 것 같다. 흔하고 너무 오래 피어 있으니 귀한 꽃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냥 제가 알아서 피고 지고 했을 것이다. 목현천 화단에 온갖 색깔의 백일홍이 가득하다. 백일홍 꽃밭에서 귀 기울이면 거센 민중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단순히 도시를 장식하기 위한 꽃이 아니다. 모이고 힘을 합치면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다는 무언의 웅변이다. 흩어지지 말고 하나로 힘을 모아라! 목현천 백일홍한테서 듣는 전언이다.

꽃들의향기 2019.08.28

논어[351]

맹씨가 양부로 재판관을 삼았다. 그가 문의한즉, 증자가 말했다. "윗사람이 도리를 그르쳤고 백성들이 흩어진지 오래다. 그들의 정상을 살피게 되거든 불쌍히 여겨 주되 기뻐할 것은 없느니라." 孟氏使陽膚爲士師 問於曾子 曾子曰 上失其道 民散久矣 如得其情 則哀矜而勿喜 - 子張 13 "윗사람이 도리를 그르쳤고 백성들이 흩어진지 오래다[上失其道 民散久矣]." 정치는 민심을 얻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게 된 원인을 증자는 윗사람이 도리를 그르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공방이 뜨겁다. 야당의 지나친 발목잡기와 정치 공세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동시에 후보자에 대한 실망도 크다. 합법만을 강조할 일이 아니다. 지도자란 백성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줄 줄 알아야 한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자..

삶의나침반 2019.08.27

햇볕 걷기

아침부터 우울하다. 눈 뜨자마자 자동으로 확인하는 뉴스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국내나 국외 관계 모두 삐거덕거린다. 그동안 잠잠하던 단톡방에서도 '수꼴'의 목소리가 힘을 받으며 큰소리 내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지혜롭게 이 난국을 헤쳐나가 주었으면 좋겠다. 햇볕을 받고 싶어 한낮에 밖으로 나간다. 적당히 햇볕을 쬐야 하는데 덥다고 방안에만 있으니 우울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일부러 반바지를 입고 가볍게 배낭을 맸다. 자기 선전하는 국회의원과 'No Japan' 현수막이 나란히 걸려 있는 삼거리다. 집에서 20여 분 걸어 나가면 목현천이 나온다. 2년 전에 개울을 완전히 파헤치며 배관 공사를 했는데 금방 옛 모습대로 복원되어 있다. 백로나 왜가리가 자주 찾는 걸 보니 물고기도 다시 들어온 듯하다. 자연..

사진속일상 2019.08.26

게으름 연습 / 나태주

텃밭에 아무 것도 심지 않기로 했다 텃밭에 나가 땀흘려 수고하는 대신 낮잠이나 자 두기로 하고 흰 구름이나 보고 새소리나 듣기로 했다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이런 저런 풀들이 찾아와 살았다 각시풀, 쇠비름, 참비름, 강아지풀, 더러는 채송화 꽃 두어 송이 잡풀들 사이에 끼어 얼굴을 내밀었다 흥, 꽃들이 오히려 잡풀들 사이에 끼어 잡풀 행세를 하러드는군 어느 날 보니 텃밭에 통통통 뛰어노는 놈들이 있었다 메뚜기였다 연초록 빛 방아깨비, 콩메뚜기, 풀무치 어린 새끼들도 보였다 하, 이 녀석들은 어디서부터 찾아온 진객(珍客)들일까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하늘의 식솔들이 내려와 내 대신 이들을 돌보아 주신 모양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번갈아 이들을 받들어 가꾸어 주신 모양이다 아예 나는 텃밭을 하늘..

시읽는기쁨 2019.08.25

그냥

멍석 김문태 선생은 '한글꽃 동심화'라는 독특한 분야를 열어 가고 있다. 동심화는 한글을 그래픽적으로 변형 시켜 천진한 동심의 세계를 표현하는 작품이다. 동양화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풍경화가 아니라 한글이 내포하는 의미를 조형적으로 그려낸다. '웃음'이라는 글씨는 마치 사람이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고요'라는 글씨는 기도하는 선승의 모습으로 산속의 정적이 그대로 느껴진다. 은 선생의 동심화 모음집이다. 그림만으로도 좋지만 옆에 붙은 글과 감상하면 감동이 두 배로 된다.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선생의 따스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서예를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글자의 한 획이 그냥 나오지 않는다. 쓰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림 역시 정신의 표현이다. 천진난만한 사람이 아니면 천진..

읽고본느낌 2019.08.24

진보와 보수

"보수의 윤리는 합법에 있다. 그러나 진보의 윤리는 합법에 대한 질문에 있다." 김규항 씨의 글을 읽다가 무릎을 친 말이다. 요사이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정치 공방이 거세다. 조국 후보자는 진보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의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딸에 대한 의혹에 대해 그는 말했다. "적법한 행위였고 부정한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합법이나 적법은 진보에서 변명으로 쓸 말이 아니다. "진보의 윤리는 합법에 대한 질문에 있다." 김규항 씨의 발언은 정곡을 찌른다. 한때는 '강남 좌파'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이제는 '진보 귀족'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진보 귀족은 말로는 개혁,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지만 삶은 전형적인 기득권층을 닮았다. 합법이라는 그늘 뒤로 숨어서 제 이득 챙기..

길위의단상 2019.08.23

먼 데서 찾아온 벗

14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며 주유천하를 한 공자는 68세가 되어 노나라에 돌아왔다. 아무 소득이 없는 빈손 귀국이었다. 이때부터는 직접 정치하기를 포기하고 대신 제자를 기르는 일에 전념했다. 나이 73세(BC 479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의 5년이 공자 생애에서 가장 여유 있고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처음에 공자의 이런 말씀이 나온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배우는 족족 내 것을 만들면 기쁘지 않을까? 벗들이 먼 데서 찾아와 주면 반갑지 않을까? 남들이 몰라주더라도 부루퉁하지 않는다면 참된 인간이 아닐까?"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온 不亦君子乎 어쩌면 사상을 압축한 듯한 이 말씀은 공자 생애의 말기, 즉 마지막 5년의 어느 때쯤에 하신 듯하다.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

참살이의꿈 2019.08.21

논어[350]

증자가 말했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들었는데 '맹장자의 효도 중에 다른 것은 할 수 있으나 아버지의 신하를 갈지 않고 아버지의 정책을 바꾸지 않는 그 점은 본받기가 힘들다'고." 曾子曰 吾聞諸夫子 孟莊子之孝也 其他可能也 其不改父之臣 與父之政 是難能也 - 子張 12 이런 주장의 기저에는 효(孝)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부모의 뜻을 거스리는 일은 천륜에 어긋난다. 머리카락도 잘라내지 못하니 구한말 단발령 소동이 생겼다. 위정자의 경우 아버지가 편 정책은 바꾸지 말고 이어가야 한다. 여기 나오는 맹장자는 노나라 대부였다. 좋은 제도라면 계승하는 게 맞다. 그러나 고인 물은 반드시 썩는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조상과의 연결된 고리의 일부로 보느냐, 아니면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체로..

삶의나침반 2019.08.19

힘없는 자는 / 박노해

힘없는 자는 용서할 자유마저 없나니 그것은 비굴함이기에 힘없는 자는 화해할 자유마저 없나니 그것은 도피이기에 힘없는 자는 침묵할 자유마저 없나니 그것은 불의의 승인이기에 힘을 기르자 저 강대한 세력을 기어코 뛰어넘을 저 사나운 폭력을 끝끝내 품어 안을 끈질긴 힘, 사랑의 힘을 - 힘없는 자는 / 박노해 지난 8월 15일 제74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자고 강조했다.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인용한 시가 김기림의 '새나라송頌'이다. 이 시에는 '시멘트와 철과 희망 위에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 가자'라는 구절이 나온다. 대통령 메시지의 핵심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다. 일본의 무역 보복으로 그 의미가 엄중하게 다가온다. 박노해 시인의 이 시 역시 ..

시읽는기쁨 2019.08.17

쇼코의 미소

최은영 작가의 중, 단편소설집이다. '쇼코의 미소'를 비롯해 7편이 실려 있다. '쇼코의 미소'는 작가의 등단작이면서 젊은작가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최 작가의 글은 몇 년 전 다른 소설집에서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라는 단편을 통해 만났다. 잔잔하면서 진한 감동에 젖게 하는 글이었다. 사회 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안쓰러움이 작품 가득 묻어났다. 이 작품은 에도 수록되어 있어 두 번째로 읽었다. 좋은 글은 다시 읽어도 감동이 줄어들지 않는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가 그랬다. 인간관계에서 파문처럼 퍼져 나가는 감정과 느낌을 도드라지지 않으면서 잔잔하게 잡아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작가의 문체는 특별하지 않고 평범하다. 소설적 기교도 찾아볼 수 없다...

읽고본느낌 2019.08.16

광복절에 뜬 쌍무지개

2019년 8월 15일, 74주년 광복절 저녁에 쌍무지개 떴다. 일본을 통과하는 태풍 '크로사'의 영향으로 낮 내내 비가 내리더니, 저녁이 되면서 구름이 걷히고 동쪽 하늘에 쌍무지개가 떴다. 나라의 앞길을 환하게 밝히는 좋은 징조였으면 좋겠다. 오전에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강조한 대통령의 경축사가 인상적이었다.

사진속일상 2019.08.15

헬스에 재미를 붙이다

단지 안에 헬스장이 있다. 입주 초기에는 무료였는데 지금은 출입할 때마다 500원씩 받는다. 사설 헬스장에 비하면 공짜나 마찬가지다. 입주민을 위한 복지 시설 중 하나다. 좋은 시설이 옆에 있지만 작년까지는 헬스장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바깥에서 자연과 벗하며 운동하며 되지, 기계에 의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까이서 걷기가 필요하면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돌면 충분했다. 굳이 러닝머신을 탈 필요가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단련한 근육을 유지하자면 계속 헬스장을 다녀야 한다. 무엇에 매이는 의무감보다는 차라리 근육이 없는 편을 나는 택했다. 요사이는 헬스장에서 진화하여 피트니스 센터라 부른다. 보기 좋은 몸을 만들려고 하면 전문 트레이너의 코치를 받아야 한다. 번거로..

길위의단상 2019.08.14

논어[349]

자유가 말했다. "내 친구 자장은 남 못하는 일을 잘한다. 그러나 아직 사람답게 된 것이 아니야." 子游曰 吾友張也 爲難能也 然而未仁 증자가 말했다. "당당하구나. 자장은! 함께 사람 구실하기가 무척 힘든다." 曾子曰 堂堂乎張也 難與竝爲仁矣 - 子張 11 자장에 대한 인물평이다. '선진'편에 보면 이런 대화가 나온다. 자공이 물었다. "자장과 자하는 누가 더 잘났을까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지근하다." "그러면 자장이 더 나은가요?" "지나친 것도 미지근한 것과 같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 나오는 대화다. 공자는 자장의 행동에 대해 '지나치다'고 말한다. '위정'편에서는 자장의 질문에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말에 빈틈이 적고, 행동에 거침새가 적어야 한다." 이런 걸..

삶의나침반 2019.08.13

아, 달다!

나그네가 불타는 광야를 걷고 있을 때였다. 홀연 미친 코끼리 한 마리가 나타나 나그네에게 덤벼들었다. 마침 주위에는 입구에 큰 나무 한 그루가 거인처럼 가지를 벌리고 서 있는 우물이 있고, 우물 안으로 나무에 얽힌 칡덩굴이 내려뜨려져 있었다. 나그네는 급한 김에 칡덩굴을 타고 내려가 우물 안을 피신처로 삼았다. 하지만 우물 안도 살벌하긴 마찬가지였다. 우물 안쪽 벽에는 이무기 네 마리가 혀를 날름거리고 우물 아래에는 독룡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더욱이 나그네가 매달려 있는 칡덩굴을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덤벼들어 갉아댔다. 이런 절박한 순간, 나무 위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나그네는 칡덩굴에 매달린 채 꿀맛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 맛이 어찌나 달던지 모든 고통을 잠시 잊을 판인데, 화..

참살이의꿈 2019.08.12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 김혜순

직육면체 물, 동그란 물, 길고 긴 물, 구불구불한 물, 봄날 아침 목련꽃 한 송이로 솟아오르는 물, 내 몸뚱이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물, 저 직립하고 걸어다니는 물, 물, 물...... 내 아기, 아장거리며 걸어오던 물, 이 지상 살다갔던 800억 사람 몸 속을 모두 기억하는, 오래고 오랜 빗물, 지구 한 방울. 오늘 아침 내 눈썹 위에 똑 떨어지네. 자꾸만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으로 가고 싶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저 물이, 초침 같은 한 방울 물이 내 뺨을 타고 또 어딘가로 흘러가네. -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 김혜순 지금 내가 숨 쉬는 한 호흡 속에도 우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땅속 깊은 곳의 마그마인 적도 있고, 600년 전 세종대왕의 폐에 들어갔던 공기 분자도 있을 것이다. 생명이 다하면..

시읽는기쁨 2019.08.11

이 또한 지나가리라!

김별아 작가의 백두대간 산행기다. 백두대간 종주는 2년에 걸쳐 40차로 진행되었는데, 이 책은 2010년 3월부터 10월까지 16차례 산행에 대한 전반기 기록이다. 부제가 '김별아 치유의 산행'이듯이 단순한 산행기가 아니라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자신을 보듬고 사랑하게 되어 가는 치유의 과정을 담았다. 산행 이야기와 작가가 살며 경험한 내적 고뇌가 반씩 섞여 있다. 작가는 집 가까이 있는 산도 오르지 않던 전형적인 평지형 인간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다니는 대안학교에서 실시하는 아이와 학부모가 함께 하는 백두대간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갑자기 종주에 나서게 되었다. 전문 산꾼도 어려워하는 백두대간 종주다. 등산 초보자가 감당하기에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한 달에 두 번씩 주말을 이용했고, 하루 평균..

읽고본느낌 2019.08.10

손주 따라 광릉수목원에

손주들 여름휴가 끝에 합류해서, 집으로 돌아오며 광릉수목원에 들렀다. 태풍이 지나간 뒤 습도 높은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아이들은 시원한 산림박물관에 들어가서 나올 줄을 모른다. 이 더위에도 제일 싱싱하고 화려한 꽃이 무궁화다. 시련이 닥칠 때 더 강해지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는 것 같다. 무궁화 정원에서는 다양한 품종을 볼 수 있다. 아이들 크는 건 말하는 데서 느낄 수 있다. 어른 투의 표현에 깜짝 놀란다. 우리 어릴 때는 아이들과 주로 어울려 지냈으니 대개 아이들 말투였다. 지금 아이들은 어른과 보내는 시간이 많다. 어휘도 어른이 쓰는 걸 흉내 낸다. 그래서 더 성숙해져 보이는가 보다. "외할아버지, 행복하게 사세요." 첫째 손주가 헤어지며 진지하게 말한다. 여덟 살짜리가 '행복'이 무엇인지 알까?..

사진속일상 2019.08.09

논어[348]

자유가 말했다. "상례는 슬퍼하면 그만이야." 子游曰 喪致乎哀而止 - 子張 10 장례식장에 가면 통로를 따라 조화가 즐비하다. 조화의 수는 그 집안의 권세에 비례한다. 무엇을 자랑하려는 것일까? 조화를 보낸 사람의 이름과 직책을 커다랗게 게시하는 꿍꿍이가 뻔하다. "상례는 슬퍼하면 그만이야." 상례의 기본은 진정으로 슬퍼함이다. 거기서 그쳐야 한다.

삶의나침반 2019.08.07

무봉리 느티나무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에 있는 느티나무다. 네 그루가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는 수령이 300년 정도 되었다. 이 나무는 높이가 14m, 줄기 둘레는 3.8m다. 무봉2리 마을회관 앞에 있다. 낮 기온이 37도까지 오른 뜨거운 날이었는데, 나무 그늘 아래서 동네 어르신들이 담소를 나누며 쉬고 있었다. 나무 네 그루가 만드는 그늘이 넓고 시원했다. 그늘에 드니 더운 줄을 모르겠다. 실내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는 것보다 훨씬 낫다. 무봉2리는 '거친봉이'라고도 하는 큰 마을이다. 주변 사람들이 시장에 가기 위해서는 이 마을을 거쳐 간다고 해서 명명된 이름이라고 한다. 오래 전부터 이 느티나무는 지나가는 객들이 쉬어가는 장소였을 것이다. 옆에는 주막이 있었을 법도 하다.

천년의나무 2019.08.06

팔랑귀와 불신지옥

아내는 남의 말을 쉽게 믿는다. 방송에 나오는 내용도 거의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TV는 온갖 건강과 의학 정보를 전한다. 몸에 좋은 약이나 음식이 있다고 하면 금방 솔깃해지는 모양이다. 아무 관심 없는 나까지 끌어들일 때가 많다. 내가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우리 집은 건강식품점을 차려도 될 것이다. 아내는 보이스 피싱에 걸려들기 쉬운 타입이다. 실제로 돈을 뺏기기 일보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2천만 원을 갖다 바치지 않은 것은 순전히 휴대폰 배터리 덕분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배터리가 방전되어 사기범과 휴대폰 연결이 끊어졌다. 안절부절못하다가 아내는 제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한다. 나는 아내가 홈쇼핑 방송을 보는 게 제일 무섭다. 나도 유혹을 받을 때가 있는데 아내는 오죽하겠는가. 까짓..

길위의단상 2019.08.05

82년생 김지영

재작년에 화제를 모은 책인데 이제야 읽어 본다. 조남주 작가의 장편소설로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현실이 어떠한지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픽션이지만 '82년생 김지영'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일반적인 여성의 모습이다. 여성이 성장하며 겪는 고통과 심리 상태를 남성이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렵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다.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아직 사회 곳곳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하대, 심하면 혐오의 감정이 남아 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태도 같은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남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폭력적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를 여성은 갖고 있는 것 같다. 은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식과 여론을 환기한 역할이 크다. 내 딸이 책의 주인공과 같은 82년생이다. 딸 둘만 뒀기에 페미니스트라고 할..

읽고본느낌 2019.08.04

불당리 기점 두 번째 산행

알려주기 전까지는 까맣게 몰랐다. 불당리를 기점으로 하는 산행이 첫길인 줄 알고 나갔다. 그런데 5년 전에 같이 올랐던 코스란다. 설명을 듣고 같은 길을 걸어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옛 일기장을 확인하고서야 그랬던가 싶다. 이런 멍충이가 있나! 8월 3일, 폭염 경보가 내린 날이었다. 불당리에서 출발하여 검단산과 망덕봉을 지나 원점으로 돌아왔다. 트레커 여덟 명과 함께 했다. 다수가 코카서스 트레킹 한 달을 마치고 온 터여서 여행 얘기가 많았다. 6, 7월의 코카서스는 온통 꽃밭이더라는 전언이 제일 부러웠다. 무릎 연골을 다친 A가 몇 년만에 나왔다. 꾸준한 재활 노력으로 이제 동네 뒷산 정도는 다닐 정도가 되었다 한다. 작년에 퇴직한 뒤로 어학 공부도 부지런히 하는 것 같다.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사진속일상 2019.08.03

나 홀로 웃노라 / 정약용

有栗無人食 多男必患飢 達官必倡愚 才者無所施 家室少完福 至道常陵遲 翁嗇子每蕩 婦慧郞必癡 月滿頻値雲 花開風誤之 物物盡如此 獨笑無人知 - 獨笑 / 丁若鏞 양식 많은 집은 자식이 귀하고, 아들 많은 집은 허구한 날 끼니 걱정 벼슬 높은 사람은 으례 멍청하고, 재주 있는 사람은 펼 길이 없다오 복 많아도 다 갖춘 집 드물고, 지극한 도라도 무너지기 마련 아비가 절약하면 자식은 흥청망청, 아내가 똑똑하면 남편은 꼭 바보라오 달이 차면 구름이 자주 끼고, 꽃이 피면 바람이 심술 부려 세상만사 다 이러하니, 사람들은 모르리라 나 홀로 웃는 까닭 이만큼이라도 살아보니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세상사가 내 뜻대로는 안 된다." 도모하는 일은 자주 어긋나게 마련이고, 열에 아홉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시읽는기쁨 2019.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