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 27

혼자가 혼자에게

이병률 작가의 여행 산문집이다. 작가가 찍은 여행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글과 함께 사진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글보다 사진 한 장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책 표지 뒷면에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 이렇다. 시를 쓰고 산문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술을 마시고 식물을 기르고 사랑을 한다. 저 'ㅅ'들과 함께 사는 혼자 사람. 이 책 를 읽으며 '자신을 지키는 삶'에 대해 내내 생각했다. 나를 세상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내 개성을 세상과 병립시키며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세상과 불화하지 않으면서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 독립적이되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내 색깔을 고이 간직하면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같은 것들이다. 책 제목에..

읽고본느낌 2020.01.30

가벼운 금언 / 이상희

- 기적을 믿니? 이렇게 낡은 손으로 쓰는 약속을, 사랑을 너는 믿겠니? 빈 식기食器를 햇볕에 널고 오늘은 가벼운 금언을 짓기로 한다. 하루에 세 번 크게 숨을 쉴 것, 맑은 강과 큰 산이 있다는 곳을 향해 머리를 둘 것, 머리를 두고 누워 좋은 결심을 떠올려 볼 것, 시간의 묵직한 테가 이마에 얹힐 때까지 해질 때까지 매일 한 번은 최후를 생각해 둘 것. - 가벼운 금언 / 이상희 젊었을 때 늙은 내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었을까?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젊을 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그래, 잘 익어가고 있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여줄까? 아니면 실망 가득한 얼굴로 씁쓸하게 바라볼까? 가끔 그런 게 궁금할 때가 있다. '맑은 강과 큰 산이 있다는 곳을 향해 머리를 둘 것'이라는 ..

시읽는기쁨 2020.01.29

금강경[9]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을 다 이루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수다원은 거룩한 삶에 들어간 성자이지만 진실로 들어가야 할 어떤 삶도 없는 성자이기 때문입니다. 모양에도 소리에도 들어가지 않는 님, 맛에도 느낌에도 생각의 대상에도 들어가지 않는 님, 이런 님을 '수다원'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을 다 이루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사다함은 한 번 더 세상에 와서 깨달음을 이룰 성자이지만 참으로 오고 감이 없는 님, 이런 님을 '사다함'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을 다 이루..

삶의나침반 2020.01.28

설날 세 장면

# 1 귀성길에 저녁을 먹기 위해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다. 된장찌개를 시켜놓고 기다리는데 옆자리에 한 가족이 앉았다. 40대 부부와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들 둘이었는데 전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명절 전 휴게소 분위기가 대체로 그렇다. 설빔을 차려입고 환한 미소를 띠고 기차에 오르는 TV에 나오는 명절 풍경을 나는 믿지 않는다. 이 가족은 그중에서도 유별나서 눈길이 갔다. 두 아들은 휴대폰만 붙잡고 있고, 부부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딴 데만 쳐다보고 있었다. 음식이 나오자 각자 제 몫을 가져와서는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다. 각자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남편한테서는 서운하면서 뭔가 미안해하는 기색도 보였다. 저 나이였을 때 우리 가족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아이들은 억지로 따라나서고, 아내..

길위의단상 2020.01.27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터미네이터 1편이 나온 게 1984년이니 어느덧 36년이 되었다. 1편 뒤에 시리즈로 다섯 편이 제작되었고, 나는 세 편 정도를 본 것 같다. 이번에 나온 '다크 페이트'는 여섯 번째 작품이다. 옛 작품은 본 지가 오래돼서 기억에 떠오르는 장면들이 어느 편에 나오는 건지 헷갈린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연기한 터미네이터가 차를 몰고 추격하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어느 집 지붕을 뚫고 거꾸로 처박혔다. 죽든지 아니면 큰 부상이라도 당할 줄 알았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 옷의 먼지를 훌훌 털면서 집 밖으로 걸어나오는 장면이 있다. 터미네이터의 위력을 보여준 첫 장면이어서 기억에 남아 있다. 경찰관 복장을 한 액체 로봇 터미네이터 T-1000도 처음 봤을 때 놀라웠다.형상기억합금을 설명하면서 수업 시간에 써..

읽고본느낌 2020.01.23

아귀들 / 정현종

계곡마다 식당이 들어차고 물가마다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이 나라 산천 가는 데마다 식당이요 카페요 레스토랑뿐이다. 굶어 죽은 귀신들이 환생을 해서 저렇게 됐을 것이다. 또 다른 아귀들은 몰려들어 아귀아귀 먹는다. (다 아는 얘기지만 대학가도 도시의 골목도 식당과 술집으로 미어진다!) 한 아귀인 나는 토종닭을 시켜 먹으며 이 천박한 나라를 개탄하고 개탄한다. 이 나라 이 국민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이 땅의 계곡들아 대답해다오. 바다야 강물들아 대답해다오. 아귀들 대답해다오. - 아귀들 / 정현종 "진지 드셨니껴?" 어릴 때 동네 골목에서 어르신을 만나면 의레 하던 인사말이었다. 제 때 끼니를 차려 먹기 어렵던 시절의 안타까움이 배어 있던 말이다. 아마 우리 나이대가 보릿고개를 경험한 마지막 세대일 것..

시읽는기쁨 2020.01.23

수상한 겨울

소한, 대한이 지나가며 겨울의 정점을 통과했지만 유례없이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올해 들어 1월 낮 최고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날이 하루도 없다. 서울 기준으로 소한인 6일은 4.6도, 대한인 20일은 5.5도였다. 어느 날 밤에는 빗소리에 잠이 깨기도 했다. 겨울 새벽에 듣는 빗소리가 기묘했다. 경안천변도 겨울 풍경이 아니다. 아무리 따뜻한 겨울이라 해도 그늘진 곳에는 얼음이나 눈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올해는 말끔하다. 강물에서도 해동이 끝난 봄 냄새가 난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좋지만, 무슨 겨울이 이렇나 싶다. 목도리, 장갑을 모두 풀고 벗어야 했다. 마른 풀 속에 무슨 꽃이라도 피지 않았을까, 살피게 된다. 도서관에 들린 길에 시내를 거쳐 경안천 주변을 걸었다. 몸을 많이 움직이고 자주 걸어..

사진속일상 2020.01.21

금강경[8]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이 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주에 일곱 가지 보배를 가득 채워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면 이 사람이 받는 공덕이 많지 않겠습니까?" 수보리 장로가 사뢰었네. "행복하신 분이시여, 참으로 많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덕은 복덕이라 할 것이 없는, '나 없는' 복덕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가르침 가운데 네 구절의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 이웃과 함께 나눈다면 이 복덕은 저 일곱 가지 보배를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린 공덕보다 뛰어날 것입니다. 왜 그러하겠습니까? 수보리여, 모든 부처님과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이 하나같이 이 가르침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수보리여, 깨달음의 진리라..

삶의나침반 2020.01.21

타이젬 4단

기원에서 모여 바둑 두는 모임이 해체되고 난 뒤 심심해졌다. 바둑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인데 1년 넘게 바둑 둘 기회가 안 생겼다. 아는 사람 중에 바둑을 즐길 수담 친구는 없다. 있다면 불원천리하고 찾아갈 것이다. 요사이는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는 사람이 많다. 인터넷 바둑은 편리하면서 상대가 많아서 좋다. 컴퓨터만 있으면 중국이나 일본 사람과도 대국할 수 있다. 전에 인터넷 바둑을 둬 봤지만 내 스타일과는 맞지 않아 곧 접었다. 인터넷 바둑은 속기로 너무 호흡이 빠르다. 장고파인 나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두 번째는 바둑 두는 맛이 나지 않는다. 바둑판 위에 돌을 놓을 때의 감각과 소리가 없다. 인터넷에도 전자음 효과가 있지만, 실제 나무 바둑판 위에 돌이 접촉하는 맑고 경쾌한 소리를 따라올 수..

길위의단상 2020.01.20

목수의 망치, 판사의 망치

"수학 7등급 나오면 용접 배워서 호주 가야 돼. 돈 많이 줘." 유튜브의 인기 수학 강사가 한 말이 지난주에 논란이 되었다. 용접공을 비하했다고 해서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강사는 사과했다. 공부를 못하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듯 보이지만, 강사의 발언에는 직업에 대한 은근한 차별 의식이 깔려 있는 느낌을 받는다. 무심코 나온 말이겠지만 마음 밑바닥에는 그런 의식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기술을 배운다는 사실의 연관 관계도 없다. 전에 근무했던 J 고등학교에서는 독일에서 광부로 일했던 선생님이 계셨다. 귀국해서 교사 자격증까지 딴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분이 들려주던 여러 독일 얘기를 흥미롭게 들었는데, 광부 월급이 교수보다 더 높다고 해서 반신반의했던 ..

참살이의꿈 2020.01.19

데스크톱으로 바꾸다

그동안 노트북을 쭉 써 왔다. 지금 사용하는 노트북도 10년이 넘으니 키보드가 고장 나면서 바꿀 때가 되었다고 신음을 한다. 노트북은 화면이 작으니 눈이 피곤하다. 그래서 데스크톱으로 바꾸었다. 15인치에서 24인치로 모니터 화면이 커지니 시원해서 좋다. 무엇보다 새 컴퓨터는 부팅 시간이 짧은 게 마음에 든다. 10초도 안 걸린다. 전의 노트북은 오래 돼서 그런지 전원을 켜고 나서 10분은 지나야 사용할 수 있었다. 다른 성능도 노트북보다 훨씬 앞서니 속도 걱정 없이 포토샵을 배워볼까 한다. 앞으로 컴퓨터 앞에서 놀 일이 더 많아지게 생겼다.

사진속일상 2020.01.18

끌림

이병률 작가의 감성 충만한 여행기다. 여행지와 작가의 교감이 글과 사진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책을 펼칠 때마다 카메라 하나 들고 혼자서 계획 없이 떠돌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낯선 도시 뒷골목에 허름한 숙소를 정하고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싶다. 며칠 빈둥거려도 좋겠다. 이런 여행에 대한 로망 하나 나에게도 있다. '포카라에서 열흘'을 꿈꾼 게 십 년이 넘었지만 유효기간은 아직 남아 있다. 반으로 평가절하된 네팔 화폐도 여전히 내 지갑 속에서 제 땅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언젠가는 오겠지. 작가의 글 한 편을 옮긴다. 좋아해 낡은 옷을 싸들고 여행을 가서 그 옷을 마지막인 듯 입고 다니는 걸 좋아해. 한 번만 더 입고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면서 계속 빨고 있는 나와 그 빨래가 마르는 것, 그리고..

읽고본느낌 2020.01.17

추위가 사라진 겨울

겨울인데 겨울답지 않다. 올겨울 들어서는 제대로 추워 본 날이 없다. 서울 기준으로 작년 12월 1일부터 오늘(1월 16일)까지 낮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날이 사흘밖에 안 된다. 12월 5일이 -0.2도, 6일이 -1.0도, 31일이 -4.5도였다. 이번 겨울 47일 동안 낮에도 영하인 날이 고작 3일이었다. 겨울이 실종되었다. 강원도에는 겨울비가 내려 얼음축제장이 엉망이 되었다. 앞으로 예보를 보면 1월 말까지는 이런 날씨가 이어진다고 한다. 겨울인데 눈과 얼음을 보기 힘들다. 집 주변 개울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 마치 봄이 된 것 같다. 뒷산에 올랐는데 나뭇가지에는 연초록 잎눈이 돋았다. 기후 변화가 수상하다. 따스한 겨울이 사람 살기에는 다행이다 싶다가도 왠지 꺼림직하다. 예견하지 못하는 변고가 닥..

사진속일상 2020.01.16

나이 / 이븐 하짐

누군가 나에게 나이를 물었지. 세월 속에 희끗희끗해진 머리를 보고 난 뒤 내 이마의 주름살들을 보고 난 뒤. 난 그에게 대답했지. 내 나이는 한 시간이라고. 사실 난 아무곳도 세지 않으니까. 게다가 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해서는. 그가 나에게 말했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설명해 주세요. 그래서 난 말했지. 어느 날 불시에 나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에게 입을 맞추었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입맞춤을. 나의 날들이 너무도 많지만 나는 그 짧은 순간만을 세지. 왜냐하면 그 순간이 정말로 나의 모든 삶이었으니까. - 나이 / 이븐 하짐 괴테가 그랬던가.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진정으로 행복했던 시간은 하루가 채 안 된다고. 우리가 볼 때 세상의 복이란 복은 혼자 독차지한 것 같은 괴테인데, 인간에게 ..

시읽는기쁨 2020.01.15

능동 향나무

서울시 광진구 능동에 있는 향나무다. 능동(陵洞)은 능이 있던 마을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1904년에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비인 순명왕후 민씨가 세상을 뜨자 이곳에 묘를 만들고 유강원(裕康園)이라 했다. 지금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자리다. 뒤에 순종이 승하하자 금곡에 있는 유릉(裕陵)으로 옮겨가 합장했다. 유강원의 석물은 어린이대공원 안에 전시되어 있다. 수령이 450년인 이 향나무는 능과는 무관하게 오랜 세월 동네 주민들의 당산목 노릇을 해 왔다. 매년 2월과 10월 초하루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치제를 이곳에서 올린다고 한다. 향나무 주위는 정자마당으로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다. 향나무의 높이는 13m, 줄기 둘레는 2.2m다.

천년의나무 2020.01.14

금강경[7]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래가 얻은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이라고 할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한 여래가 말한 진리가 있겠습니까?" 수보리 장로가 부처님께 사뢰었네. "행복하신 분이시여, 제가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기로는 '이것이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이다'라고 할 그런 진리는 없겠습니다. 또한 여래께서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씀하실 그런 진리도 없겠습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진리도 아니고 진리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현자와 성자들은 나 없는 진리로 가르침을 나투시기 때문입니다." - 금강경 7(얻을 깨달음도 말할 진리도 없어, 無得無說分) '나 없는 진리의 가르침'이 한문으로는 '무위법(無爲法)'으로 나..

삶의나침반 2020.01.13

식물원 꽃기린

겨울이라 꽃 갈증이 오래지만 이제 해갈이 멀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남쪽에서부터 이른 꽃 소식이 들릴 것이다. 어린이대공원을 산책하다가 식물원에 들어가 보았다. 온실이라고 꽃이 많은 건 아니다. 꽃이 핀 서너 종류 중에서 그나마 붉은 꽃기린이 싱싱했다. 꽃기린은 생명력이 무척 강한 식물이다. 꽃도 사시사철 핀다. 이름에 왜 '기린'이 붙었냐면 꽃이 달리는 줄기가 기린의 목처럼 길다고 해서다. 줄기에는 억센 가시가 달려 있어 동물이 뜯어먹는 걸 방비한다. 온실이지만 바깥에서 만나는 꽃기린이 반가웠다.

꽃들의향기 2020.01.12

어린이대공원 산책

서울의 친지 결혼식에 참석한 뒤 마침 가까이에 어린이대공원이 있어 잠시 산책하다. 거의 15년 만에 들어와 보다. 더 옛날,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자주 놀러 왔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요사이는 갈 데가 많지만 그때는 어린이대공원이 놀이 시설과 동물원이 있는 대표적인 복합 나들이 장소였다. 공원을 한 바퀴 돌며 옛 생각에 잠긴다. 둘이 유모차를 서로 타려고 싸우다가 언니가 혼이 나서 운 데가 여기였지. 저기쯤 잔디밭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고, 비스듬히 누워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고. 코끼리 우리 앞에서 목말을 태워주면 엄청 좋아하던 아이들이었는데. 가볍게 번쩍 들어올리던, 얘들이 언제 클까 싶던, 그 시절이 좋았어. 놀이동산에서 청룡열차 타는 걸 좋아해서 긴 줄에 서 있곤 했지. 아이..

사진속일상 2020.01.12

신의 한 수 : 귀수편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라서 관심이 컸다. 전작인 '신의 한 수 : 사활편'은 폭력적인 장면이 많아서 실망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개선되길 바랐다. 그런데 같은 스타일의 복수혈전이다. 바둑을 들러리로 세운 액션 활극이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화끈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대로 볼 만할지 모르겠다. 겉으로 보면 바둑만큼 정적인 게임은 없다. 그러나 바둑 두는 사람의 심리 상태는 천변만화하며 요동친다. 평상심을 잃지말라고 하지만 승부가 걸리면 지키기 힘들다. 목숨이 걸린 내기바둑이라면 어떻겠는가. 이 영화의 주인공에게 바둑은 복수를 위한 도구다. 최고수가 되어 돌아온 귀수(권상우 분)는 상대를 하나하나 꺾으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누나를 성폭행하고 자살하게 만든 옛 바둑도장의 스승까지 정복하고 자살하게 만든..

읽고본느낌 2020.01.10

그거 안 먹으면 / 정양

아침저녁 한 웅큼씩 약을 먹는다 약 먹는 걸 더러 잊는다고 했더니 의사선생은 벌컥 화를 내면서 그게 목숨 걸린 일이란다 꼬박꼬박 챙기며 깜박 잊으며 약에 걸린 목숨이 하릴없이 늙는다 약 먹는 일 말고도 꾸역꾸역 마지못해 하고 사는 게 깜박 잊고 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쭈글거리는 내 몰골이 안돼 보였던지 제자 하나가 날더러 제발 나이 좀 먹지 말라는데 그거 안 먹으면 깜박 죽는다는 걸 녀석도 깜박 잊었나보다 - 그거 안 먹으면 / 정양 요즘 들어 깜박하는 일이 잦다고 친구가 말했다. 시내에 나간 게 어제인지 그저께인지 헷갈린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젊을 때 영민했던 친구도 나이를 먹으면서 이렇게 변해간다. 우리말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

시읽는기쁨 2020.01.09

저 청소 일 하는데요?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 젊은이들은 고민이 많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고 싶지만 내 능력을 발휘할 직장을 얻기가 쉽지 않다. 좋아하는 일만 하겠다고 고집하다가는 생계가 문제 된다. 제일 현실적인 방법은 아무 일자리나 구해서 우선 먹고사는 일부터 해결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은 남는 시간에 취미 삼아 틈틈이 하면 된다. 언젠가는 기회가 찾아온다. 인생은 길다. 조급하게 덤비지 말아야 한다. 를 쓴 김예지 씨가 좋은 본보기다. 작가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을 시작했다. 입사 시험에서는 번번이 낙방했다. 그녀에게 일을 맡기는 데도 없었다. 생계를 위해 청소 일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대학을 졸업한 20대의 아가씨가 빌딩 청소 일을 하는 것은 세상의 편견..

읽고본느낌 2020.01.08

맑고 향기롭게

전에 살던 집 거실 벽에는 '맑고 향기롭게'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신영복 선생이 쓴 붓글씨 복사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원래 '맑고 향기롭게'는 법정 스님의 정신을 기리는 불교 운동으로 알고 있다. 종교를 떠나서 '맑고 향기롭게'라는 말이 무척 아름다웠고, 그 말이 주는 의미를 내 삶의 지표로 삼고 싶었다. 가당찮은 바람인 걸 알지만, 그때는 피안을 향한 무한 갈망의 시기였다. 며칠 전에 을 읽다가 '맑은 믿음'이라는 구절을 접하고 문득 '맑고 향기롭게'가 떠올랐다. 불교가 구현하려는 경지는 결국 '맑음'으로 귀결되는 게 아닐까. '맑은 믿음' 하나만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믿음이 무엇인지, 이 시대에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맑은'이 주는 무게감이 만만찮다. 하물며 맑은 생각,..

참살이의꿈 2020.01.07

비발디파크의 밤

비발디파크 눈썰매장에 놀러간 손주들과 늦게 합류하다. 눈밭에서 뛰노는 모습을 사진 찍어주고 싶었는데, 눈썰매장은 4만 원의 입장료를 낸 뒤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야 해서 포기하다. 대신 스키장의 밤을 구경하다. 밤에 조명을 받은 슬로프는 눈이 부시도록 환하다. 지그재그로 활강해 내려오는 모습도 멋지다. 야간 스키장을 보니 스키를 배우지 못한 게 아쉽다. 스키와 골프는 아예 손을 대지 못했다. 제일 큰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공무원 월급만으로, 생활하고, 아이들 공부시키기에는 항상 빠듯했다. 빚을 지지 않고 살아온 것만도 다행이었지 싶다. 스키 인기도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 한겨울 휴일인데 그리 복잡하지 않다. 스키장 들어오는 길의 장비 렌트점도 썰렁하다. 더구나 날씨도 겨울이 없어지는 건 아닐지 걱정될..

사진속일상 2020.01.06

세상에서 제일 공평한 것

해가 바뀌면서 누구나 똑같이 한 살이 보태진다. 찰나의 어긋남도 없다. 세상에서 제일 공평하다. 나이 한 살 더 먹는다고 한숨 쉬며 억울해 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을 충실히 못 살고 있다는 반증밖에 안 되는 짓이다. 강남에 사는 누구는 아파트값이 껑충 뛰었고, 지방에 사는 아무개는 도리어 값이 내려갔다. 같은 서울에서도 편차가 크다. 배가 아픈 게 인지상정이다. 만약 나이 먹는 것이 이와 같다면 어찌 되겠는가.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은 한 살이 늘어나는데, 깡촌에 산다고 열 살이나 더 먹는다면 억울하고 분통 터질 일이 아니겠는가. 세상사 중에서 흐르는 세월만큼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똑같이 나이 들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러나 미래에는 ..

길위의단상 2020.01.05

온돌방 / 조향미

할머니는 겨울이면 무를 썰어 말리셨다 해 좋을 땐 마당에 마루에 소쿠리 가득 궂은 날엔 방 안 가득 무 향내가 났다 우리도 따순 데를 골라 호박씨를 늘어놓았다 실겅엔 주렁주렁 메주 뜨는 냄새 쿰쿰하고 윗목에선 콩나물이 쑥쑥 자라고 아랫목 술독엔 향기로운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설을 앞두고 어머니는 조청에 버무린 쌀 콩 깨 강정을 한 방 가득 펼쳤다 문풍지엔 바람 쌩쌩 불고 문고리는 쩍쩍 얼고 아궁이엔 지긋한 장작불 등이 뜨거워 자반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집으며 우리는 노릇노릇 토실토실 익어갔다 그런 온돌방에서 여물게 자란 아이들은 어느 먼 날 장마처럼 젖은 생을 만나도 아침 나팔꽃처럼 금세 활짝 피어나곤 한다 아, 그 온돌방에서 세월을 잊고 익어가던 메주가 되었으면 한세상 취케 만들 독한 밀주가 되었으면 아..

시읽는기쁨 2020.01.04

금강경[6]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네. "행복하신 분이시여, 먼 뒷날 이와 같은 가르침을 듣고 '참으로 그렇다'며 바른 믿음을 낼 수 있는 님들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 장로에게 말씀하셨네. "수보리여,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여래가 열반에 든 뒤 오랜 세월이 흘러 바른 가르침이 사그라지려 할 때에도 맑은 삶을 가꾸고 따뜻한 지혜를 밝히는 님들이 있을 것이니, 이런 님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에 쉬이 믿는 마음을 낼 것이고 이런 님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참답게 여길 것입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알아야 합니다. 이런 님들은 다만 한 분 부처님 또는 몇 분 부처님께만 깨달음의 씨앗을 뿌려온 님들이 아닙니다. 이런 님들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들께 가지가지로 깨달음이 씨앗을 뿌려 온 님들로서, ..

삶의나침반 2020.01.03

주전장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로, 일본계 미국인인 미키 데자키 감독 작품이다. 작년 여름에 개봉했으나, 신년 특집으로 SBS TV에서 어제 저녁에 방송되었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갈등의 최전선에 있는 이슈다. '주전장'은 양측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문제의 본질에 객관적으로 접근한다. 일본 우익의 주장은 보도를 통해 대체로 알고 있다. 그런데 보통의 일본 사람들은 위안부라는 말 자체를 대부분 모른다. 군국주의 시대의 부끄러운 역사를 은폐하고 숨기기 때문이다. 두 나라 국민의 갈등의 골이 깊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위안부를 바라보는 일본 우익의 주장이 이영훈 등이 쓴 라는 책에서 본 내용과 똑같아서 놀라웠다. 군복을 입고 일장기를 들고 행진하는 모습에서 태극기 부..

읽고본느낌 2020.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