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 31

금강경[13]

이때 수보리 장로가 부처님께 여쭈였네. "행복하신 분이시여, 이 가르침을 무엇이라 이름해야 하겠습니까? 또 이 가르침을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 장로에게 말씀하셨네. "수보리여, 이 가르침은 '금강 같은 지혜를 이루는 길'이라 이름하십시오. 이와 같은 이름으로 이 가르침을 받아 지니십시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수보리여, 여래가 말한 '지혜를 이루는 길'은 '지혜를 이루는 길'이 아니라 '지혜를 이루는 길'이라 이름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래가 말한 가르침이 있겠습니까?" "행복하신 분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은 없겠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주, 그 가없는 우주를 이루는 먼지들이 아주 많지 않겠습니..

삶의나침반 2020.02.29

경안천 개불알풀

봄이 오면 경안천변은 개불알풀 꽃밭으로 변한다. 올해도 어김이 없다. 작년에 산책로가 시멘트로 덮이는 공사가 있어 염려되었으나 생명의 힘은 어찌할 수 없다. 연약해 보이는 풀이지만 실은 제일 힘이 세다. 꽃은 산책로를 따라 300m 정도 되는 구간에 만개해 있다. 같은 길이지만 다른 데서는 드문드문 보이는데 유독 이곳에서만 옹기종기 모여 산다. 끼리끼리 마을을 이루고 사는 것은 사람이나 풀이나 비슷한가 보다. 개불알풀꽃은 가까이서 보면 앙증맞게 귀엽고, 떨어져서 보면 지상에 피어난 별처럼 반짝인다. "나 여기 있어요", "날 한 번 봐주세요", 라고 딸랑거리며 부르지만, 사람들은 부지런히 걷기에 바쁘다. 코로나19로 세상은 시끄러워도 봄은 오고 꽃은 핀다.

꽃들의향기 2020.02.28

연이틀 걷다

코로나19로 떠들썩하지만 내 생활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바깥출입이 드문 방콕형이라 평소대로 지내는 게 격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내는 생활 패턴이 확 바뀌었다. 배우러 다니는 강좌들이 닫히고, 집안에서만 버텨야 한다. 요사이는 답답해하는 아내 들러리로 같이 바깥나들이를 한다. 덕분에 연이틀 걷기를 했다. 공기가 깨끗하고 날씨가 좋은 탓도 있었다. 어제는 물안개공원을 걸었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했으나 공원이 워낙 넓어서 안에 들어가니 인적이 드물었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사람들은 되도록 타인과 접촉을 피하려 한다. 북적이는 곳보다는 이런 한적한 장소가 인기다. 공원에는 평소보다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단체는 없고 전부가 두셋 정도의 가족끼리다. 우리도 그동안은 따로따로 노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진속일상 2020.02.27

결혼 이야기

이번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러 차례 호명된 영화다. 작품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극본상 후보에 올랐으나, 변호사 역을 맡은 로라 던만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스칼렛 요한슨이 여우주연상을 받았어도 마땅한 영화다. '결혼 이야기'는 결혼보다는 이혼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연극 연출가와 배우인 찰리와 니콜은 여덟 살의 아들 헨리를 두고 있는 부부다. 작은 일에서 갈등을 겪다가 결국은 헤어지기로 한다. 처음에는 변호사를 쓰지 않고 대화로 마무리 지으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니콜이 이혼 전문 변호사를 만나면서 상황이 급변하고 난장판이 된다. 어쩌면 이 영화는 미국의 이혼 사법 절차에 대한 고발인지 모른다. 둘은 이혼을 결심하고도 사이가 좋다. 왜 이혼하려는 건지 의아하기까지 하다. 흔히 ..

읽고본느낌 2020.02.26

손주와 오르는 뒷산

뒷산에 가고 싶다고 손주한테서 연락이 왔다. 손주와 함께 뒷산에 오를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먼저 요청을 하니 잘된 일이었다. 아내도 따라나섰다. 뒷산조차 겁내던 아내는 손주의 에너지를 빌려 얼떨결에 정상까지 다녀왔다. 할머니에게 손주는 힘이 세다. 아이는 산길에서도 분주하다. 이것저것 만지고, 낙엽을 발로 긁고, 무슨 나무냐고 묻고,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딸이었던 내 자식을 키울 때와는 딴판이다. 딸은 너무 수동적이고 얌전해서 걱정했었는데, 이 녀석은 천방지축이다. 생명의 활기를 보며 감탄하다가도 뭔가 숙연해지며 먼 하늘을 쳐다 보게 된다. 보통 때 평일이면 두세 시간 산길에서 겨우 한두 사람 만나는 정도다. 그런데 이날은 10여 명을 만났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붐비는 바깥 대신 인적 드문 뒷산..

사진속일상 2020.02.25

바닷가 늙은 집 / 손세실리아

제주 해안가를 걷다가 버려진 집을 발견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그 어떤 이끌림으로 빨려들 듯 들어섰던 것인데요 둘러보니 폐가처럼 보이던 외관과는 달리 뼈대란 뼈대와 살점이란 살점이 합심해 무너뜨리고 주저앉히려는 세력에 맞서 대항한 이력 곳곳에 역력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도 저렇듯 담담하고 의연히 쇠락하길 바라며 덜컥 입도(入島)를 결심하고 말았던 것인데요 이런 속내를 알아챈 조천 앞바다 수십 수만 평이 우르르우르르 덤으로 딸려왔습니다 어떤 부호도 부럽지 않은 세금 한 푼 물지 않는 - 바닷가 늙은 집 / 손세실리아 작년 봄, 제주도에 갔을 때 '시인의 집'을 찾아갔었다. 검은 현무암이 양떼처럼 흩어져 있는 조천 바닷가에 시인의 집은 낮고 겸손하게 앉아 있었다. 덜컥 새집을 짓는 게 아니라 백 년 ..

시읽는기쁨 2020.02.24

흑산

김훈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1800년 전후 시기의 천주교 박해가 중심 이야기다. 당시의 부패한 정치와 피폐한 백성의 삶이 바탕에 깔려 있다. 무겁게 읽히는 책이다. 시대의 질곡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스려져 간 인간의 고통과 눈물이 김훈 작가 특유의 문체로 잘 그려져 있다. 이라는 제목만 보면 정약전이 주인공인 것 같은데, 이 책에는 뚜렷한 주인공이 없다. 정약전이 등장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정약전과 황사영을 중심으로 이들과 관계된 다수의 인물이 모두 주인공이다. 황사영의 부인인 정명련, 정약현 집 노비였던 김개동과 육손이, 마부 마노리, 아전 출신의 첩자 박차돌, 퇴물 상궁 길갈녀, 국밥집 주모 강사녀, 도망친 노비 아리 등의 이야기가 천주교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작가는 일러두기에서 이 책은..

읽고본느낌 2020.02.23

지구 - 창백한 푸른 점

인간이 만든 물체 중 가장 멀리 나아가고 있는 것이 보이저 1호다. 보이저 1호(Voyager 1)는 1977년 9월에 발사되어 1990년에 명왕성을 지났고, 지금은 태양계를 벗어나 성간공간을 여행 중이다. 현재 위치는 지구에서 약 150AU(220억km) 떨어져 있다. 태양계 지름의 두 배에 해당하는 거리다. 보이저 1호는 명왕성을 지날 때 태양계 끝에서 본 지구 사진을 찍었다. 1990년 2월이었으니 꼭 30년 전이다. 지구에서 60억km 밖에서 본 우리 지구 사진인데, 이 희미하게 빛나는 영상을 칼 세이건은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고 명명했다. 촬영 30주년을 맞아 이 사진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NASA에서는 옛 사진을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보정하여 다시 발표했다. 보일..

길위의단상 2020.02.22

금강경[12]

"또한 수보리여, 이 가르침 가운데 네 구절의 게송만이라도 풀어 말하는 님이 있는 곳이라면 이곳은 모든 세계의 하늘중생과 사람과 아수라들이 거룩한 땅으로 여겨 우러러 공양하는 곳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거늘 하물며 이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 지녀 읽고 외우는 님들이 있는 곳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수보리여, 이런 님들은 둘도 없이 귀한, 가장 으뜸 가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니, 이 가르침이 살아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부처님이나 성스런 제자들이 머무는 곳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 금강경 12(존중해야 할 바른 가르침, 尊重正敎分) 19세기의 박해 시기에 천주교인을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고 불렀다. 나만 정(正)이라고 고집하면, 나와 다른 것은 사(邪)가 된다. 나누고 분별해서 옳고..

삶의나침반 2020.02.20

속 빈 것들 / 공광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 줄기에서 슬픈 숨소리가 흘러나와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었다는 갈대도 그렇고 시골집 뒤란에 총총히 서 있는 대나무도 그렇고 가수 김태곤이 힐링 프로그램에 들고 나와 켜는 해금과 대금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회의 마치고 나오다가 정동 길거리에서 산 오카리나도 그렇고 나도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 속 빈 것들과 놀아야겠다 - 속 빈 것들 / 공광규 '서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

시읽는기쁨 2020.02.19

클래식이 알고 싶다

피아니스트 안인모 씨는 팟캐스트 '클래식이 알고 싶다'를 통해 만나고 있다. 맑고 청아한 매력적인 목소리에 재치 있는 진행으로 한 번 들으면 쉽게 빠져든다. 음악 해설도 기존의 딱딱한 틀에서 벗어나 누구라도 클래식에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같은 이름으로 안인모 씨가 쓴 는 낭만 시대의 대표적인 음악가 여섯 사람을 소개하는 책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대표곡을 듣다 보면 클래식의 세계에 흠뻑 잠긴다. 시대의 특징이 그랬는지 몰라도 음악 작품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 또한 낭만적이었고, 타고난 천재성이 빛을 발하도록 열정적으로 살았던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1) 완벽한 미완성, 방랑하는 봄 총각 슈베르트 2) 이별을 노래하는 피아노 시인 쇼팽 3) 사랑을 꿈꾸는 슈퍼스타 리스트 4)..

읽고본느낌 2020.02.18

눈 귀한 겨울

눈이 귀한 겨울이다. 강수량 자체가 적지만 그마저도 기온이 높아 대부분 비로 내렸다. 그저께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새벽부터 어렵사리 눈으로 변했다. 어제는 하루 내내 눈이 흩날렸다.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눈 구경을 했다. 그마저도 내리는 눈이 거의 쌓이지 않았다. 지상에 닿는 족족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짧게 뿌려주더니 지금은 햇살이 환하다. 눈 내린 흔적은 곧 지워질 것 같다. 남녘에서는 이미 봄꽃 소식이 들린다. 복수초나 변산바람꽃이 개화했다는 전언이다. 예년보다 20일 정도는 빠르다고 한다. 하긴 서울 홍릉수목원의 복수초도 핀지 한참 되었다. 이런 상태라면 올해 꽃구경 계획은 훨씬 앞당겨야 할 것 같다. 눈 그치고 반짝 추위가 가시면 봄이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올 것..

사진속일상 2020.02.17

당구장에서 만난 이미래 선수

친구들과 모임 후 당구장에 들렀다가 우연히 이미래 선수를 만났다. 나는 당구의 초보자여서 게임을 직접 하기보다는 TV로 당구 시합 보는 걸 더 즐긴다. 그래서 이미래 선수를 잘 알고 있다. 예쁜 외모와 말씨에 마음씨마저 고와 보여 내가 좋아하는 여자 당구 선수다. 실력 역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탑 클래스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프로 당구 대회가 만들어졌다. 남자는 PBA, 여자는 LPBA 투어라고 부른다. 아직은 세계 유명 선수 중 일부만 참가하지만, 상금 때문에 대회의 인기는 높다. 남자부 우승은 1억 원, 여자부 우승은 1천 5백만 원이다. 골프나 테니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나마 전에 비하면 많이 늘어난 것이다. 지난해에는 일곱 차례의 투어가 있었는데, 이미래 선수는 5차 대회에서 한 번 우승..

사진속일상 2020.02.16

고구리 느티나무

교동도 고구리에 있는 느티나무다. 행정 명칭으로는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다. '고구리(古龜里)'는 고구려를 연상시키지만 한자를 보면 전혀 관계 없다. 고읍리와 구산리가 합쳐진 마을이라고 한다. 이 느티나무 주변은 정리가 잘 되어 있다. 나무 하나가 이만큼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경우도 드물다. 주위는 돌담으로 둘러싸이고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다. 나무를 대하는 마을 주민의 정성이 읽힌다. 안내문에는 고구리 느티나무의 수령이 800년으로 나와 있다. 나무 높이는 27m, 줄기 둘레는 7m다. 밑둥만 봐도 대단한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전에는 이곳이 마을 우물이 있는 주민의 공동 생활 터전이 아니었을까, 라는 추측을 해 본다. 주변이 잘 단장되어 돋보이는 느티나무다. 고구리에는 또 다른 느티나무가 있다...

천년의나무 2020.02.16

화개사 소나무

화개사(華蓋寺)는 교동도의 화개산 자락에 있는 아담한 절이다. 고려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목은 이색 선생의 '화개사'에 관한 시가 있어 선생이 이곳을 들렀을 가능성이 높다. 화개사 경내에 200년 수령의 소나무가 한 그루가 우뚝하다. 몇 군데 줄기가 잘려 나갔지만 늘씬한 수형의 잘 생긴 소나무다. 나무 높이는 14m, 줄기 둘레는 1.6m다. 소나무 옆에 서면 서해 바다와 섬이 내려다 보인다. 따스한 겨울에 보는 바다 풍경이 아늑하다.

천년의나무 2020.02.15

교동도와 장화리 석양

교동도에서 강화나들길 9코스를 걷는 경떠회 모임에 늦게 합류하다. 끝 구간을 30분 정도만 함께 걷다. 교동도는 교동대교가 세워지기 전 배를 타고 들어온 적이 있다. 화개사, 연산군유배지, 대룡시장을 둘러보고 교동도의 오래 된 나무를 찾았다. 그때 찍은 나무 사진을 무슨 이유인지 블로그에 올리지 못했다. 강화나들길은 총 20 코스에 길이가 310km인데, 교동도에는 9, 10코스가 있다. 조금밖에 걷지 못했지만 걷는 길로는 괜찮은 것 같다. 앞으로 강화도 나들이 계획 세울 때 나들길을 포함시키면 좋겠다. 대룡시장에서 국밥으로 점심을 먹다. 시장 분위기는 13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때는 시골 장터의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현대적이고 상업적인 냄새가 난다. 다리가 개통되고 외지인 출입이 늘면서 생기는 ..

사진속일상 2020.02.15

금강경[11]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갠지스 강이 있다면 이 모든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는 많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많겠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갠지스 강만 해도 헤아릴 수 없겠는데 하물며 그 모든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이겠습니까?" "수보리여, 내가 이제 진실로 그대에게 말하겠습니다.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저 모든 갠지스 강 모래알 수만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주, 그 우주를 가득 채운 일곱 가지 보배를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면, 수보리여, 그 복덕이 많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많겠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 장로에게 말씀하셨네.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가르침 가운데서 네 구절의 게송만이라도 삶으로 받..

삶의나침반 2020.02.13

산다는 건 힘들어

가끔 아내와 막걸릿잔을 맞대며 이야기를 나눈다. 신변에서 일어난 일부터 이웃과 자식 등 사람에 관한 얘기가 주된 화제다. 그러다가 공통으로 맺어지는 결론이 있다. "산다는 건 힘들어!" 모르는 사람은 날 보고 팔자 편하게 산다고 할지 모른다. 자식은 모두 출가시켰고, 연금을 받으니 돈 벌 걱정 없고, 무슨 염려 있겠느냐는 것이다. 블로그만 보면 신선 같이 사는 줄 안다. 그러나 사람 살아가는 양태는 비슷하다.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 등 근심 걱정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층간소음은 요사이 내 일상을 괴롭히는 문제 중 하나다. 잠을 제대로 못 자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만사가 귀찮아지고 사람 만나는 것도 싫다. 이웃을 미워하는 내 모습이 두렵다. 어제 아내는 위층을 다시 방문했다. 그쪽에서는..

참살이의꿈 2020.02.12

팔당 드라이브

집 가까이에 팔당호를 따라 난 342번 지방도가 있다. 분원리, 귀여리, 검천리, 수청리를 지나는데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이다. 특히 봄에는 벚꽃길로 유명하다. 아내와 이 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했다. 몸이 좋지 않은 아내는 근 열흘 만의 외출이었다. 오늘은 날씨가 더욱 풀려 낮 기온이 14도까지 올랐다. 얼마나 따스한지 반팔 상의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 중간에 물안개공원에 들러 한 시간 정도 산책했다. 원래 걸을 계획이 없었는데 간질간질한 햇살의 유혹을 이기기 힘들었다. 공원의 나무들은 벌써 봄물이 오르고 있었다. 살아가는데 제일 큰 스트레스가 윗집 올빼미 가족의 층간소음이다. 방학이 되어선지 겨울이 되면 그 강도가 서너 배는 세진다. 오늘은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

사진속일상 2020.02.11

천문: 하늘에 묻는다

이 영화의 개봉 소식을 듣고 세종과 장영실을 어떻게 그렸을까 궁금해졌다. 장영실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과학기술자인데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면서도 마지막에는 벌을 받고 궁궐에서 쫓겨났다. 단순히 임금의 가마를 잘못 만들었다는 이유로는 설명하기 부족한 부분이 있다. 장영실은 관노 신분이면서 종3품 벼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독자적인 기술 입국을 꿈꿨던 세종의 명으로 혼천의, 자격루, 측우기 등 여러 과학기기를 제작했다. 세종의 신임이 두터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런데 이 영화 '천문'에서는 둘의 관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깝게 나온다. 왕과 신하의 신분을 떠난 벗이며 동지 같다. 장영실은 왕의 침실에서 같이 있기도 한다. 자신의 뜻을 몰라주는 신하들에 둘러싸인 세종은 외로움을 느끼고, ..

읽고본느낌 2020.02.10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않은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여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첫 연에 나오는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에 대해 자야는 이렇게 설명한다. 백석과 자야가 오순도순 살던 청진동 시절이었다. 시내에 나갔다가 자야는 백석에게 어울릴 것 같은 넥타이를 샀다. 옅은 검은색 바탕에 다홍빛 빗금 줄무늬가 잔잔하게 박힌 것이었다..

시읽는기쁨 2020.02.09

입춘 지난 뒷산

입춘 즈음에 반짝추위가 찾아오더니 다시 포근해졌다. 이제부터는 양(陽)의 기운이 흥하면서 뭇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며 겨울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햇볕 좋은 날, 뒷산에 올랐다. 주로 집에 있다 보니 햇볕 쬐는 시간이 부족하다. 양지 바른 쉼터에서 태양을 향해 앉아 햇빛바라기를 하다. 얼굴에 닿은 햇살과 그 햇살을 그리워한 피부가 서로 희롱하는 즐거움이 느껴진다. 걸을 때도 파란 겨울 하늘이 좋아 자꾸 고개를 들다. 산등성이 낙엽 가운데 어딘가에 샛노란 복수초가 고개를 내밀고 있을 것만 같다. 한 달 전부터 잎눈을 낸 진달래는 그다지 진도가 안 나갔다. 너무 성급했던 걸까, 봄을 기다리는 대기시간이 길다. 우리 동네 양지 바른 비탈에도 개불알풀꽃이 피었다. 사람들 얘기로는 꽃을 본 지 한참 되었다 한다. 확..

사진속일상 2020.02.08

내 사랑 백석

1938년, 청진동 시절이었다. 백석과 자야는 아침부터 독서에 골몰하느라 해저무는 줄도 몰랐다. 이때 자야의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는 약초(若草)극장에 영화 '클레오파트라'가 왔는데, 함께 가자고 졸랐다. 자야는 가고 싶었으나 백석이 안 갈 것 같아 친구에게 눈짓을 했다. 눈치 빠른 친구가, "백선생! '클레오파트라' 보러 같이 가자구요!" 라고 보챘다. 백석은 대답 없이 잠자코 있더니, 곧바로 자야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클레오파트라, 여기 있지 않소?" 에 나오는 일화다. 자야가 백석과의 사랑을 회상하며 쓴 이 책을 읽어보니 둘은 상상한 것보다 더 간절하고 열렬하게 사랑한 것 같다. 요사이 말로 하면 닭살 돋는 연인이었다. 백석과 자야가 처음 만난 건 1936년 함흥에서였다. 백석은 함흥에 있는..

읽고본느낌 2020.02.07

다람쥐가 되어 간다

# 1 공돈 20만 원이 두 달 전에 생겼다. 요긴할 때 쓰려고 책장에 있는 책 속에 감추어 두었다. 젊을 때부터 책 속에다 비상금을 숨겨 두곤 했다. 책 제목만 기억하고 있으면 아무 때나 꺼낼 수 있으니 비밀 보관함으로는 제격이었다. 아내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의심이 간다고 많은 책을 전부 꺼내 볼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에 돈이 필요해서 책장 앞에 섰다가 난감한 일이 생겼다. 어디에 넣어 두었는지 도대체 기억이 안 났다. 손이 자주 가는 책을 중심으로 찾아봤지만 허탕이었다. 아무리 두 달 전 상황을 더듬어도 깜깜했다. 그렇다고 모든 책을 뒤져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몇 차례 들락날락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20만 원은 훗날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졌다. # 2 도서관에 갈 때마..

길위의단상 2020.02.06

금강경[10]

부처님께서 수보리 장로에게 이르셨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래가 저 옛날 연등부처님 회상에 머물 때 그곳에서 얻은 진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회상에 머무실 때 그곳에서 얻으신 진리가 없겠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보살이 깨달음의 나라를 빛내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깨달음의 나라를 빛낸다 함은 곧 빛냄이 아니라 빛냄이라 이름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보살들은 이와 같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내어야 할 것이니, 보살은 마땅히 모양에도 소리에도 냄새에도 물들지 않는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보살은 마땅히 맛에도 느낌에도 마음의 대상에도 물들지 않는 마..

삶의나침반 2020.02.05

자야오가(子夜吳歌) / 이백

장안도 한밤에 달은 밝은데 집집이 들리는 다듬이 소리 처량도 하구나 가을바람은 불어서 그치지를 않으니 이 모두가 옥관(玉關)의 정을 일깨우노나 언제쯤 오랑캐를 평정하고 원정 끝낸 그이가 돌아오실까 長安一片月 萬戶擣衣聲 秋風吹不盡 總是玉關情 何日平胡虜 良人罷遠征 - 子夜吳歌 中 秋歌 / 李白 1936년, 함흥에서 만난 백석(白石)과 진향(眞香)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어느 날 진향은 서점에서 라는 제목의 당시 선집을 사서 백석에게 보여주었다. 책을 훑어보던 백석은 미소를 머금고 진향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 당신에게 아호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라고 합시다!" 이렇게 해서 '자야'라는 애칭이 생겼고, 어쩌면 동진의 자야라는 여인처럼 평생을 기다리는 숙명으로 살아가도록 예정이 되었..

시읽는기쁨 2020.02.04

타인에 대한 섬세함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여자 둘이 들어온다. 바로 자전거로 직행하더니 나란히 앉아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러닝머신으로 옮겨서도 마찬가지다. 헬스장을 자기네 집 거실로 착각하는 것 같다. 말을 안 할 뿐이지 주변 사람이 얼마나 불쾌하게 여길지는 안중에도 없다. 헬스장 벽에는 타인을 위해 잡담을 삼가해 달라는 안내문도 붙어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는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동체 생활의 기본이다. 옆에 누가 있건 말건 큰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은 너무 자주 본다. 층간소음 문제도 이웃에 대한 배려심의 부족에서 생기는 게 아닐까. 우리는 너무 무례하고 투박하다.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남긴 상처의 무게를 잴 ..

참살이의꿈 2020.02.03

전주향교 은행나무(2)

10년 만에 다시 찾아본 전주향교다. 물론 은행나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전주향교에는 은행나무 보호수가 세 그루 있다. 대성전 앞에 두 그루, 명륜당 앞에 한 그루다. 수령은 400년 전후 된 나무들이다. 전주향교는 고려말에 세워졌으니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나 현재 위치에 자리 잡은 것은 선조 36년(1603)이라고 한다. 이 나무들은 새로 향교를 조성하면서 심은 것으로 보인다. 세 그루 중에서는 대성전 왼쪽에 있는 은행나무가 생김새 때문에 눈길을 끈다. 10년 전 모습과 대동소이하다. 줄기 둘레가 10m가 넘는데 많이 상해서 보형재로 채워져 있다. 노쇠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거인의 풍모는 여전하다. 대성전 오른쪽에 있는 은행나무로 늘씬하게 생겼다. 겨울에 보니 세한도에 나오는 나무 모양과 ..

천년의나무 2020.02.02

1월의 개불알풀

전주천을 걷다가 개불알풀을 만났다. 일찍 피는 꽃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1월에 보는 느낌이 기이했다. 꽃 상태로 볼 때 이미 한참 전부터 피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추위가 사라진 겨울에 제일 먼저 반응하는 게 식물이다. 보통 2월 중순에 피는 홍릉의 복수초는 1월 중순에 피었다는 전갈을 받았다. 예년보다 한 달이나 빨리 핀 것이다. 올겨울이 특이하긴 하다. 사람이 체감할 정도면 기온에 더 예민한 식물은 말할 나위가 없다. 따뜻한 겨울이라고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더 뜨거워진 여름을 견뎌야 하는 반대급부가 따른다. 해충의 발생 빈도도 높아질 것이다. 이번 겨울에 유행을 시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도 온난화와 어떤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급격한 기후 변화가 사람 심리에 미치는 영향 역시 무시할 수 없을 것이..

꽃들의향기 2020.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