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 34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3년동안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 1000억의 재산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 그 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

시읽는기쁨 2020.08.31

시무7조 상소와 하교문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시무(時務)7조 상소문'이 화제다. 글쓴이는 진인(塵人) 조은산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필력을 갖춘 분이 아닌가 싶다. 이분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글재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분 글을 옮겨 적다 보니 우리 사회의 공동체 정신이 무척 아쉽다는 걸 느낀다. 보수의 첫째 가치는 공동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민족을 경시하고 사리 추구와 외세 의존이 보수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 일부 극우의 사상이 점점 확산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이분 글의 오독인 줄 모르지만, 내 가진 것을 앗기기 싫다는 혜택받은 자의 억지투정으로 읽힌다. 사악하다고까지는 차마 말하지 않겠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양극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길위의단상 2020.08.30

풀어주는 뒷산

나름대로 유유자적을 즐긴다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답답함이 없겠는가. 그럴 때 특효약은 뒷산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어지간한 체증은 뻥 뚫린다. 이만한 소화제가 없다. 코로나가 다시 창궐하면서 일부 종교인들의 행태가 못마땅한데, 부잣집 도련님들의 투정까지 더해졌다. 너무 내 것만 챙기려는 심보가 얄밉다. 20년 전 의약분업을 둘러싼 사태가 재현되는 것 같다. 그때도 명분은 국민 건강이었지만, 투쟁의 실제는 오로지 자기들의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이었음을 잘 안다. 못된 정치인처럼 제발 국민 좀 팔아먹지 말기 바란다. 산에서 비를 만났다. 우산을 쓰고 산길을 걷는 것도 재미있다. 며칠 전 지나간 태풍으로 길에는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 있다. 닭의장풀, 꽃며느리밥풀 등 여름꽃이 눈에 띄지만 오늘은 풀잎에 맺힌 빗방울..

사진속일상 2020.08.29

태풍 바비

태풍 바비(Bavi, 8.22~8.27)가 지나갔다. 서해안을 따라 북상했는데 다행히 큰 피해 없이 통과했다. 기상청에서는 역대급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번에도 기상청의 과장 예보가 또 도마 위에 올랐다. 이번 태풍만이 아니라 기상청 예보가 지나치게 오버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게 반복되면 기상청은 양치기 소년이 될 수밖에 없다. 조심하라고 외쳐도 국민은 별로 안 믿게 된다. 기상청은 과학이다. 오직 데이터로 말해야 한다. 예측이 잘못되어 욕을 먹더라도 사실대로 전하는 게 옳다. 기상청은 이번 태풍의 크기 예측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했다. 폭풍반경을 보면 거의 배 가까이나 틀렸다. 우리 같은 아마추어가 봐도 바비는 그렇게 덩치가 큰 태풍이 아니었다. 수도권에서는 출근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는데 막상 태풍..

길위의단상 2020.08.28

다읽(3) - 티벳 사자의 서

책 표지를 넘기니 내지에 이런 글을 적어 놓은 게 눈에 들어온다. 모든 것은 마음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나니.... 1996년 2월, 삶과 죽음의 신비! 1999년 12월, 지금 여기 나에게 주는 메시지 2002년 10월, 진리를 향한 길 읽었을 때마다 짧은 감상을 적은 것이다. 책에는 거의 메모를 남기지 않는데 는 예외였던 것 같다. 그만큼 나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의 감동이 잊히지 않는다. 뭔가 새로운 개안을 한 느낌이랄까,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꾼 책이다. 역설적으로 를 만남으로써 가톨릭 신앙이 오히려 더 깊어졌다. 의 원제목은 '바르도 퇴돌'로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기'라는 뜻이다. 인간의 죽음과 사후세계, 그리고 환생을 다루고 있다..

읽고본느낌 2020.08.27

도에 이르는 두 가지 길

6세기에 인도에서 중국에 온 달마대사는 선(禪)의 시조로 꼽힌다. 달마에서 전해진 선의 불꽃은 육조 혜능에 이르러 활짝 타오르게 된다. 달마대사는 온종일 침묵을 지키며 벽만 바라보고 참선을 했다고 해서 면벽바라문(面璧婆羅門)이라 불리웠다. 그만큼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정진 수도했다는 뜻이리라. 달마대사가 썼다고 전해지는 글이 '이입사행론(理入四行論)'이다. 도에 이르는 길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하며, '지성에 의한 길'[理]과 '행위에 의한 길'[行]로 구분한다. 지성에 의한 길은 경전 공부를 통한 깨달음이고, 행위에 의한 길은 삶의 실천을 통한 깨달음이다. 마치 돈오와 점수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뒷날 선사들은 도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리라. 사실 이 글에서는 선의 정신이 보이지는..

참살이의꿈 2020.08.26

금강경[28]

"수보리여, 어떤 보살이 갠지스 강 모래알 수만큼 많은 세계를 가득 채운 일곱 가지 보배를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 해도, 만일 누군가가 있고 없는 모든 것에는 '나'가 없다는 깨달음을 잘 견디어 이룬다면, 이 보살이 받는 복덕은 앞의 보살이 받는 복덕보다 뛰어날 것입니다. 수보리여,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보살들은 뛰어난 복덕마저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보살은 어떻게 복덕마저 받지 않는 것입니까?" "수보리여, 보살은 스스로 짓는 복덕을 탐내거나 그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덕마저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금강경 28(받지도 탐내지도 않는 복덕, 不受不貪分) 달마대사를 만난 양 무제는 자랑스레 물었다. "짐은 즉위한 이래 수많은 절을 짓고 경전을 출판하였..

삶의나침반 2020.08.25

설봉산 걷기

이천에 있는 설봉산(雪峯山, 394m)을 걸었다. 야트막한 산이라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이 둘레길처럼 편하다. 그래도 지치는 것은 뜨거운 여름 날씨 탓이 크다. 능선에만 올라서면 길은 아주 순하다. 더구나 길은 나무가 감싸고 있어 주로 그늘 속을 걷는다. 8년 전에 왔을 때는 반 바퀴만 돌았는데 오늘은 완전히 한 바퀴를 돌기로 한다. 설봉공원 주차장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걷는다면 제일 먼저 호암약수를 만난다. 그런데 약수를 받는 용기가 집 화장실에서 보는 것이다. 이런 것도 발상의 전환인가? 실용면에서는 최고이긴 하지만... 설봉산에는 삼국시대 때 만든 설봉산성이 있다. 산성의 둘레는 약 1km이고 화강암으로 바른층 쌓기를 하였다. 여기는 높은 산이 없어서 이곳이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군사 요충지였을 법하..

사진속일상 2020.08.24

저녁 하늘과 그믐달

산책길에서 만난 저녁 하늘의 구름과 그믐달, 음력 그믐날은 내일이지만... 그믐달이나 초승달은 손톱 모양으로 생겼다. 그래서 '손톱달'이라고도 한다. 재미있는 시 한 편이 있다. 어느 분의 작품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옮긴다. 비죽배죽 나온 손톱 가지런히 다듬을 때 손가락은 열 손가락 놓인 손톱 아홉 개 톡, 톡, 톡, 톡 깎을 적에 뛰는 소리 내더니 어디까지 뛰었나 하늘까지 뛰었네 하늘에 걸린 달이 왼손 약지 손톱달

사진속일상 2020.08.23

세상에서 가장 큰 우산을 써 본 날 / 김봄희

후두두둑 비가 세차게 내리는데 마을버스가 서둘러 정류장에 들어왔어. 사람들은 우산을 접지도 펴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버스에 오를 준비를 했지. 그때 교복을 입은 오빠가 가만히 버스 줄 밖으로 비켜서는 거야. 다른 차를 타려나 보다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기다리던 사람들이 버스에 다 오를 때까지 한참동안 우산을 높이 펴 들고 서 있더니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 오르는 거야. 그것을 본 만원 버스 속 사람들은 한 발짝씩 자리를 옮겨 오빠가 설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어. 마을버스는 걷는 사람들에게 빗물이 튀지 않게 더 천천히 움직였지. 나는 그날 세상에서 가장 큰 우산을 써 본 거야. - 세상에서 가장 큰 우산을 써 본 날 / 김봄희 따스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누가 공익 광고로 찍어줬으면 좋겠다. 배려..

시읽는기쁨 2020.08.23

장마 지난 뒤

길었던 장마가 끝난지 닷새가 지났다. 장마 막바지에 많은 비가 와서 경안천에도 홍수주의보가 내렸다. 경안천에 나가봤더니 홍수가 지나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천변 공원은 발을 딛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다. 정상 상태로 회복하자면 많은 공이 들어야 할 것 같다. 큰물에 떠내려간 쓰레기는 다 어디로 가서 모이는 걸까? 나일강이 범람하면 비옥한 땅을 선물한다지만 여기는 악취만 진동한다. 옛 자리에 잘못 들어섰다가 훌쩍 미끄러질 뻔 했다. 그래도 멀리 눈을 돌리면 초록의 숲이 반짝이고, 홀로 개울가를 찾은 백로는 세상 태평한 듯 서성거린다. 다리 위에 앉아 빵부스러기를 던져주는 한 청년 밑에는 팔뚝 만한 잉어들이 서로 먹이를 다투느라 요란하다. 돌아갈 때 봐도 이 청년은 같은 자리에 하염없이 앉아 잉어와 놀고..

사진속일상 2020.08.22

아라비아의 로렌스

이 영화를 언제 봤는지 가물가물하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닥터 지바고'나 '사운드 오브 뮤직'은 기억이 선명한데 이 영화는 안갯속이다. 극장에서 개봉할 때 못 봤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번에 유튜브에서 찾아서 보았다. 영화의 스케일에 비해 컴퓨터의 작은 모니터로 본 게 아쉬웠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1962년에 나왔으니 60년 전 영화다. 촬영은 아마 50년대 후반에 시작했을 것이다. 그때를 고려하면 놀라운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감독이 데이비드 린(David Lean)인데 '콰이강의 다리' '닥터 지바고'를 만든 명장이다. 감독과 여기 나온 배우들은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특히 안소니 퀸과 오마 샤리프의 젊을 때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영상미가 참 ..

읽고본느낌 2020.08.21

수원 노송지대 맥문동

수원시 장안구에 노송지대가 있다. 정조가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1천 냥을 하사하여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한 곳이다. 그때 심은 소나무들 중 일부가 남아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러 갈 때 이 길을 지나갔을지 모른다. 여름이 되면 노송지대에 맥문동이 활짝 핀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풍경이 멋지다. 수원시가 노송지대 복원 사업을 벌이고 맥문동을 심은 결과 아름다운 장소로 변신했다. 노송지대 총 길이가 5km라는데, 전체가 복원될 날을 기다려 본다.

꽃들의향기 2020.08.20

오전동 느티나무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에 있는 느티나무다. 나무 옆에는 마을 유래와 이 나무를 설명한 비석이 있어서 이해를 도와준다. 마을 중심에 있는 이 느티나무 두 그루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매년 향사제를 단옷날에 거행하고, 겸해서 마을 노인분들을 위한 경로 잔치를 베푼다고 한다. 둘 중 한 나무가 더 오래돼 보이고, 이 나무는 큰 암반을 품고 있다. 모습으로 보건대 마을 주민의 쉼터와 아이들의 놀이터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 같다. 나무 수령은 400여 년, 높이는 23m, 줄기 둘레는 5.5m다.

천년의나무 2020.08.19

왕곡동 은행나무, 회화나무

중종반정 공신인 김우증(金友曾)이 임금한테서 하사 받은 땅이 의왕시 왕곡동 일대다. 백운산, 오봉산, 모락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김우증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고, 자연스레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는 마을이 형성된 초기에 심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김우증의 행적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수령은 500여 년이고, 나무 높이는 30m, 줄기 둘레는 6.9m다. 은행나무 옆에는 회화나무 보호수도 한 그루 있다. 수령은 120년, 나무 높이는 17m, 줄기 둘레는 4m다.

천년의나무 2020.08.19

백운호수 한 바퀴

답답해서 집 밖으로 나왔다. 언뜻 생각난 게 의왕에 있는 백운(白雲)호수였다. 집에서 차로 30분이면 넉넉히 갈 수 있는 거리다. 호수 둘레로 산책로가 완성되고 나서는 처음 찾아가 본다. 백운호수 주변도 많이 변하고 있다. 호수와 백운산 사이 지역은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대규모 쇼핑몰도 들어서는 것 같다. 예전의 시골스런 정취를 기대하긴 힘들게 생겼다. 산책로는 호수 둘레를 따라 나무 데크와 흙길로 되어 있다. 오르내림이 전혀 없는 평탄한 길이다. 전체 길이가 3km로 40분이면 한 바퀴를 돈다. 그런데 여름 한낮 땡볕 속을 걷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장맛비가 호수로 흘러들어간 흔적이 남아 있다. 백운호수는 1953년에 농업용수를 공급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도시인의 휴양지로 인기가 높다. 전..

사진속일상 2020.08.18

질긴 장마

2020년은 코로나와 함께 질긴 장마의 해로 기록될 것 같다. 중부 지방의 장마는 어제 8월 16일에야 끝났다. 6월 24일부터였으니 무려 54일간 지속한 최장기간 장마였다. 그전 기록은 2013년의 49일이었다(6.17~8.5). 또한 장마가 가장 늦게 끝난 해로 기록이 남게 됐다. 1987년 장마가 8월 10일에 끝났는데, 그때보다 무려 6일이나 더 오래 끌었다. 특히 7월 하순부터 장마 끝날 때까지는 거의 햇빛을 보지 못하고 내리 비가 내렸다. 땡볕 더위는 피했지만 후덥지근한 습도 높은 날씨 역시 견디기 힘들었다. 올 장마의 전국 누적 강수량은 920mm로 역대 두 번째 기록이었다. 질긴 장마와 비로 인한 피해도 컸다. 마치 전염병과 기상 이변은 연관되어 있다는 걸 하늘이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길위의단상 2020.08.17

중용가 / 이밀

이 세상 모든 일은 중용이 제일이거니, 믿고 살아왔다네 - 한데 이상도 하지. 이 '중용' -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네 그려. 자아, 이렇게 되면 무엇이고 중용을 택하여 당황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니 마음은 편하기 그지없는 것. 하늘과 땅 사이는 넓디넓은 것. 읍내와 시골 사이에 살며, 산과 개울 사이에 농토를 갖네. 반은 선비요, 반은 농사꾼일세.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노네. 아랫사람들도 적당히 구슬리네. 집은 너무 좋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으니 가꾼 것이 절반이요, 안 가꾼 것 또한 절반일세. 입은 옷은 낡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새로 장만한 것도 아닐세. 너무 좋은 음식도 먹지 않고 하인배는 바보와 꾀보의 중간내기라. 아내는 너무 똑똑하지도 않고 너무 단순치도 않으니, 그러고 보면 이내 몸은 반..

시읽는기쁨 2020.08.16

다읽(2) - 생활의 발견

젊은 시절에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던 친구가 있었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애쓰던 시기라 주로 철학책이 많았다. 둘은 많은 부분에서 생각을 공유했지만 조금 결이 다르기도 했다. 누가 추천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친구와 함께 읽으며 토론했던 책 중 하나가 이 이다. 중국의 임어당(林語堂)이 썼는데 동양인의 정서에 잘 맞았다. 특히 친구는 임어당이 강조하는 동양의 멋과 여유에 홀딱 빠졌다. 반면에 나는 임어당의 노회하고 현실주의적 사고에 거리감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때의 생각 차이가 지금 우리 둘의 생활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임어당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즐거움의 추구에 둔다. 인생에서 관념적인 목적이나 목표를 구하는 것은 헛되며 자신을 괴롭힐 뿐이다. 그분의 명쾌한 말이 있다. "만일 인생에..

읽고본느낌 2020.08.15

토성에 핀 맥문동

여름 올림픽공원에는 맥문동이 많다. 그늘진 데서 잘 자라서인지 특히 소나무 밑에 맥문동 화단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소나무 아래서는 보통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하는데 맥문동은 어떤 환경에도 끄떡없는 것 같다. 올림픽공원 토성 위를 걷다가 만난 맥문동이다. 이처럼 가리는 것 없이 훤한 풀밭에서 자라기도 한다. 올해는 맥문동 꽃색깔이 유난히 화사하다. 긴 비와 흐린 날씨가 맥문동한테는 호시절인가 보다.

꽃들의향기 2020.08.14

파란에서 부활로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소마미술관에서 류인 작가의 조각전이 열리고 있다[2020.5.19 ~ 10.4]. 전시 주제가 '파란에서 부활로'이다. '파란'은 한자로 '破卵'으로, '알을 깨고 나온다'는 뜻이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주는 말인 듯하다. 류인(柳仁, 1956~1999)은 요절한 천재 조각가다. 40대 초반에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고작 10여 년간 활동을 하면서 7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전통적 방법으로 인체를 다루면서도 현대적인 표현을 구사하여 한국 현대 구상조각의 독보적 자취를 남겼다고 한다. 입방체 속에 갇힌 인간이 굴레를 깨고 나오려는 몸부림을 표현한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작품 제목에 '입산(入山)'이나 '파란(破卵)'이 들어간 연작이 여럿 있다. 무척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사진속일상 2020.08.13

금강경[27]

"수보리여, 그대가 만일 여래는 거룩한 모습을 갖추었기에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수보리여,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래는 거룩한 몸 모습을 갖추었기에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수보리여, 그대가 만일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사람은 모든 것의 끝남과 없어짐을 말한다고 생각한다면, 수보리여,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사람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것의 끝남과 없어짐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금강경 27(끝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어, 無斷無滅分) 두 번째 대목에 주목한다. 번뇌에서 해방되는 게 깨달음의 목적은 아니다. 세속의 온갖 망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은 그 너머에 있다. 끝나거..

삶의나침반 2020.08.12

우중 산책

장마가 길다. 8월 중순에 들어섰는데도 장마전선은 물러갈 줄 모른다. 전국적으로 비 피해도 만만찮다. 장마에 관한 기록이 2020년에 여러 개가 갱신될 것 같다. 마을 산책하러 나갔다가 비를 만났다. 목현천에는 물안개가 뿌옇게 올라온다. 너무 비를 맞아선지 매미 소리도 힘이 없다. 한창 짝을 찾아 짝짓기할 땐데 매미는 평생 농사를 망치게 생겼다. 길에서 그저께 봤던 노부부를 다시 만났다. 걸음이 빠른 할머니는 멀찌감치 앞서가다가 개울을 바라보며 할아버지를 기다린다. 오늘은 캐리어 없이 할머니만 배낭을 메고 있다. 산책 나온 복장이 아니라서 이 노부부의 가는 길이 여전히 궁금한다. 비 탓인지 목현천 백일홍 꽃길에도 걷는 사람이 거의 없다. 장마 기간에 태풍 '장미'가 올라왔다. 다행히 소형 태풍이라서 남해..

사진속일상 2020.08.11

삼백초

여러해살이풀로 동아시아에서 자라는 약초다. 염증이나 고혈압, 변비나 부인병 개선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흰 꽃이 피면 잎이 하얗게 변해서, 뿌리까지 포함해 세 가지가 희다고 삼백초(三白草)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남부 지방에서 자란다는데 희귀종이라 만나기는 쉽지 않은가 보다. 이 삼백초는 지난달에 전주수목원에서 봤다. 꽃이 피면서 하얗게 변색한 잎이 특이했다.

꽃들의향기 2020.08.10

메시아

10부작의 미국 드라마다. 2천 년 전의 역사적 예수가 현대에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라는 관점에서 흥미 있게 보았다. 드라마에서는 갑자기 등장한 이 사람이 메시아인지 아니면 사기꾼인지 분명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아마 당시 예수도 그런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이 사람 이름은 알마시히다. 이란에서 태어나서 자라다가 전쟁의 포화 속에 휩싸인 시리아에 나타나 모래폭풍을 일으켜 IS를 격퇴한다. 이슬람과 기독교를 아우르는 구세주인 셈이다. 미국 CIA에서는 이 독특한 인물을 추적하며 정체를 밝히려 한다. 알마시히는 돌연 미국으로 가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워낙 화제를 모으다 보니 미국 대통령과도 면담하게 된다. 알마시히는 여러 기적을 행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워싱턴에서 물 위를 걷는 기적이다. 많은 사람 앞에..

읽고본느낌 2020.08.10

생각하는 재미

바둑만큼 생각하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놀이도 없다. 내가 바둑을 즐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생각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수칙은 바둑에도 예외가 아니다. 어려운 장면을 만나서 장고를 하면 빨리 두라고 채근하거나, 심하면 짜증을 낸다. 같이 느긋하게 바둑을 둘 수 있는 상대를 만나기 어렵다. 요사이는 거리에서 기원을 찾아보기 힘들고, 대신 인터넷 바둑이 대세다. 인터넷 바둑의 특징은 속전속결이다. 대부분 제한시간이 5분, 아니면 10분이다. 이 정도면 금방 제한시간이 지나가고 바로 10초 초읽기에 들어간다. 10초에 한 수씩 두는 것은 나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시간에 쫓기며 허둥대다 끝난다. 속기 바둑은 실력보다는 순발력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길위의단상 2020.08.09

변덕스런 날씨 / 김시습

개었다가 비 오고 비 오다 다시 개고 하늘도 그런데 하물며 세상 인정이랴 나를 칭찬하다가는 다시 나를 헐뜯고 이름 피한다면서 도리어 이름 구하네 피고 지는 저 꽃을 봄이 어찌 주관하며 가고 오는 저 구름과 산이 어찌 다투리 바라건대 사람들아 이 말을 기억하라 평생 동안 즐거운 곳 어디에도 없느니 乍晴還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譽我便應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花開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 寄語世人須記憶 取歡無處得平生 - 변덕스런 날씨(乍晴乍雨) / 김시습(金時習) "雲去雲來山不爭(구름 가고 구름 오되 산은 다투지 않는다)", 시를 읽어 내려가다가 여기에서 오래 멎는다. 하늘조차 변화무쌍한데 세상사야 오죽하겠는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인심은 더 말할 나위 없으리라. 돈, 건강, 명성, 그 어느 것이든 일일이 쫓아..

시읽는기쁨 2020.08.08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냐

김성탄(金聖嘆, 1608~1661)은 중국 명말 청초에 살았던 문예평론가였다. 재주가 뛰어났고 활달한 성격에 전통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인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세상을 우습게 여기고 경멸하는 태도 때문에 공맹지도(孔孟之道)를 어겼다 해서 사형을 받았다. 그는 머리가 잘리기 전 이렇게 큰소리 쳤다고 한다. "머리가 잘리는 것은 아플 뿐이고, 가산을 몰수 당하는 것은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나 나 성탄이 뜻하지 않은 일로 그리된 것은 참으로 괴이하도다." 김성탄을 처음 안 것은 오래 전 임어당의 을 통해서였다. 이 책에서 임어당은 김성탄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에는 김성탄의 글 한 편이 나온다. '행복한 한때에 관한 김성탄의 33절'인데 절에 갔다가 장마로 열흘 동안 갇혀 있으면서 인생에서 유쾌한 순간..

참살이의꿈 2020.08.07

반짝 뒷산

장마 꼬리가 길다. 다음 주까지 비 예보가 나와 있으니, 잘 하면 장마 종료일 기록을 갈아치울 기세다. 장마가 가장 늦게 끝난 때는 1987년의 8월 10일이었다. 오후에 반짝, 하고 파란 하늘이 열렸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부리나케 배낭을 메고 뒷산에 올랐다. 많이 게을러졌지만 이만한 의욕이라도 남아 있으니 다행이 아니겠는가. 한밤중에 요란하게 비가 지나갔는가 보다. 산길에도 빗물이 흘러내린 흔적이 남아 있다. 목현천은 흙탕물이다. 하천 옆 길은 아직 통제할 정도는 아니다. 앞에 걸어가는 80대 노부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입성으로 봐서 교양 있고 세련된 분들 같다. 씩씩한 할머니는 여행용 가방을 밀면서 앞서고, 할아버지가 뒤따른다. 두 분 간격이 자꾸 벌어진다. 젊었을 때 모습과 반대로 되었다..

사진속일상 2020.08.06

흰배롱

배롱나무꽃은 한자로는 자미화(紫微花)다. 이름 그대로 붉은색 계열의 꽃이지만 가끔 흰색도 보인다. 흰배롱은 백미(白微)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여름에는 붉은색 자미가 어울리지만 흰배롱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 탈속한 듯 고결한 품성이 전해오는 꽃이다. 서원이나 양반가의 정원에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는 걸 보면, 배롱나무는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예년 이맘이면 장마가 끝나고 땡볕이 내리쬘 때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배롱나무꽃이 더욱 뜨거워지는 시기지만, 올해 중부 지방은 그렇지 못하다.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비에 젖는 배롱나무꽃이 생기를 잃고 축 처져 있다. 장마 끝 기약은 아직 먼데, 이 긴 비가 지나면 병산서원의 배롱나무를 보러 가야겠다.

꽃들의향기 2020.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