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 28

빛의 과거

오랜만에 나온 은희경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자전소설에 장기가 있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과거를 재현한다. 이 소설은 1977년에 대학에 입학하여 시작한 기숙사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도 같은 7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므로 비슷한 시대 환경을 경험했다. 그래서 더욱 공감할 수 있었고, 그 시절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은희경 작가의 문장은 입에 착착 달라붙는 듯 감칠맛이 난다. 감성적인 여성 작가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 권의 책을 단 한 차례도 지루하지 않게 읽기가 드문 데 작가의 글은 그렇지 않다. 빨리 끝날까 봐 두려울 정도로 이야기에 빠져드는 마력이 있다. 그중에서 작가가 사랑에 빠졌을 때를 묘사한 아름다운 부분은 이렇다. 1977년의 6월과 7월은 일생에서 내가 가장..

읽고본느낌 2020.11.30

산에 대하여 / 신경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

시읽는기쁨 2020.11.27

시드는 풀꽃을 바라보자

늦가을의 산길을 걷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해도 한낮이 되면 걷기 적당할 정도로 기온이 올라간다. 따스한 햇살이 점점 반갑고 고마워지는 계절로 접어들고 있다. 오늘은 코로나 하루 확진자 수가 500명대로 올라갔다. 당분간은 사람 만나는 걸 더욱 조심해야겠다. 백수 신세로서 칩거하는 것 외에 세상에 도움이 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집 가까이 있는 산길을 혼자 걷는 떳떳한 명분이 다시 생겼다. 이 시기의 산은 졸음에 겨운 듯 나른하다. 땅에 떨어져 쌓인 나뭇잎이나, 잎을 떠나보낸 나무나 모두 편안한 자세로 서거나 누워 있다. 초봄의 산은 수런거리며 뭔가 음모를 꾸미는 듯하지만, 늦가을의 산은 버린 자의 여유와 한가함이 있다. 늦가을의 산길에서는 자꾸 걸음이 멈추어진다. 늦가을은 내 인생의 계절과 비슷하다. ..

사진속일상 2020.11.26

승리의 키스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항복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뉴욕 메디슨 스퀘어 광장에는 축하하는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서로 환호하고 키스하며 기쁨을 나눌 때 한 커플의 열정적인 키스가 사진기자인 에이젠슈테트(A. Eisenstaedt)의 렌즈에 담겼다. 에 실려서 유명하게 된 '승리의 키스'다. 해군 복장을 한 군인과 그의 연인이 재회하며 뜨겁게 키스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상은 다르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둘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애인과 술을 마신 뒤 거리로 나온 남자는 무조건 지나가는 여자를 붙들고 키스를 했다. 이 모습이 기자의 눈에 포착되었고, 마침내 하얀 복장을 한 간호사와 키스하는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피사체의 옷 색깔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고 한다. 만약 여자의 복장이 어두..

길위의단상 2020.11.25

다정도 병인 양하여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드는 밤이 있다. 주로 윗집의 층간소음 탓이다. 그런데 어젯밤은 아니었다.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를 뵙고 온 날은 심란하여 잠이 안 온다. 어머니가 편찮으시거나 큰 걱정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낡게 하고 허물어버리는 잔인한 엔트로피의 법칙을 고향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요사이 같은 늦가을에는 고향을 찾을 일이 아니다. 빨리 내려와서 가을걷이를 가져가라는 어머니의 연락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흔 연세에도 온갖 농작물을 기르고 거두신다. 그리고 가을이면 수확해서 자식에게 주는 재미로 사신다. 배추, 무, 사과, 깨, 생강, 시래기, 당근, 파, 호박 등 이번에도 차 뒤의 트렁크 하나 가득하였다. 그러나 마냥 기쁘지는 않다. 고맙게 받아오고 잘 먹어주는 게 효도의 하나라고 ..

참살이의꿈 2020.11.24

다읽(8) -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있지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가치 추구를 지향하는 삶과 그것에 무관심한 삶이다. 가치 추구를 지향하는 사람은 단순히 살아가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좀 더 의미 있은 삶을 위해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품고 살아간다. 반대로 가치 추구에 무관심한 사람은 대개 현실주의자다. 지상에서 얼마나 누리고 즐기느냐가 목적이다. 세속적 가치관이 그들을 지배한다. 이 책 를 쓴 리 호이나키(Lee Hoinacki) 선생도 전자의 길을 가는 분 중 하나다. 제목에서 '비틀거리며'라는 말이 와닿는다.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질문과 고뇌, 방황을 필수적으로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해 "No!"라고 말할 용기도 필요하다. 당연히 세상은 그를 곱게 봐주지 않는다. 선생은 대학교..

읽고본느낌 2020.11.22

성덕리 음나무

양평군 강하면 성덕리에는 고창굿을 올리는 국수당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때 이 마을에 솥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는데, 언제부턴가 솥이 깨지고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루는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쇠와 흙으로 만든 말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라고 해서 그대로 했더니 솥이 잘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마을에서는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고창굿 또는 도당굿이라 한다. 국수당 주위에 열 그루 정도 되는 오래된 나무가 자라는 작은 숲이 있다. 이 당숲을 대표하는 나무가 수령이 300여 년 된 음나무다. 5년 전에 찍은 사진에는 비록 가지는 없어도 위로 뻗은 줄기가 당당했는데, 이번에 찾아가 보니 줄기가 중간에서 끊어져 버렸다. 아마 최근에 태풍 피해를 보지 않았나 싶다. 과연 이 음나무가 살아있기나 한..

천년의나무 2020.11.21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 이유경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가 있는 걸까 십여 년 외딴곳에서 하루하루 보내다가 이 번잡한 광화문사거리 다시 와 서보니 주름진 얼굴 된 나만 산 것 같다 우리 기다려주던 사람이나 나무들 풍경 하나씩 바꾸며 없어져 갔고 옛것들 다 비켜서라!며 새것들 차례로 와서 치장할 거고 그들끼리는 쉽게 친해지겠지 그렇지, 그들끼리는 그들 세상을 공들여 만들어가겠지 우리가 보낸 세월까지 지우면서 - 너 여기서 무엇하고 있느냐 누구 내 어깨라도 툭 쳐줬으면 싶다 -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 이유경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단독주택이 모여 있던 동네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해서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전파상이 있고, 콩나물 할머니가 앉아 있고, 아이들 뛰노는 소리로 분주했던 골목길을 비롯해 모든 ..

시읽는기쁨 2020.11.20

가을비 속 드라이브

밤과 아침 사이에 수도권에는 가을비가 사납게 내렸다. 뉴스를 보니 104년 만의 가을 폭우란다. 그래도 빗소리를 들으니 싱숭생숭해져서 차를 몰고 드라이브에 나섰다. 집 가까이에는 팔당호를 한 바퀴 도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가 있다. 퇴촌과 양평의 강하와 강상을 지나 양근대교를 건넌 뒤 6번 국도를 따라 북상해서 팔당대교를 건너 돌아오는 코스다. 집을 기점으로 할 때 약 100km가 되니 하루 드라이브 코스로 딱 알맞은 길이다. 비가 온다고 라디오에서는 달콤한 음악을 질리도록 선사해 준다. 아무래도 늦가을 비 속을 달리는 맛은 꽤나 쓸쓸하다. 이 길 위에서 만나고 떠나간 여러 인연이 떠오른다. 하지만 구름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지상에 왔다가 물러나는 것도 차 유리창에 ..

사진속일상 2020.11.19

인투 더 와일드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북소리를 따라 문명을 박차고 나간 한 젊은이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크리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가식과 위선의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 나선다. 첫 번째 이유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신이 모은 돈 2만여 달러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크리스는 말 한마디 없이 집을 떠나 버린다. 영화는 'My Own Birth' 부터 'Getting Of Wisdom'까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크리스는 노숙을 하면서 자연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맛본다. 길 위에서 만나 집시 부부나 농장의 일꾼과 우정을 나누고, 독거노인과 한동안 같이 지내기도 한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인생에 대한 충고도 듣지만 그 무엇도 크리스의 마음을 되..

읽고본느낌 2020.11.18

청춘을 돌려다오

집에 놀러 온 아홉 살 손주가 나훈아의 '테스 형'을 자랑껏 부른다. 어린아이가 "세상이 왜 이래"라고 하니 웃으면서도 씁쓰레하다. 무슨 뜻인지 알고 그러랴마는, 요사이 아이들은 어른 흉내를 워낙 잘 내니 작은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어쨌든 지난 추석 콘서트 이후 나훈아의 인기는 다시 치솟고 있다. 나훈아의 노래 중에 '청춘을 돌려다오'가 있다.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흐르는 내 인생에 애원이란다"로 시작하는 나훈아의 대표곡 중 하나다. 영상을 보면 무대에 꿇어앉아 통곡하듯 이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실제로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호소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청춘으로 돌아가서 힘든 인생을 또다시 살라고, 라며 고개를 저을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청춘이 청춘의 아름다움을 과..

참살이의꿈 2020.11.17

두 에피소드

아침을 먹은 뒤 커피를 마시며 TV를 보는데 출연자들이 얼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중 한 사람이 자신이 젊을 때는 동안(童顔)이라는 소리를 늘 들었는데, 나이가 드니까 반대로 다른 사람보다 빨리 노안(老顔)이 되는 것 같다고 한다. 나도 공감이 가는 얘기였다. 언뜻 그에 얽힌 두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 1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나선 게 스물 세 살이었다. 만으로는 스물둘에 선생을 시작했다. 또래보다 한 해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군대도 가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나 역시 동안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해 겨울에 예비고사 감독관을 나가게 되었다. 시험 전날에 수험생 예비 소집을 했는데, 고사장 운동장에서 출석 확인을 하는 게 감독관의 임무였다. 마이크로 전체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동안..

길위의단상 2020.11.16

베란다에서 말리는 시래기

텃밭에서 시래기를 거둬와 베란다에서 말리고 있다. 양구의 펀치볼 시래기 씨앗을 8월쯤에 뿌렸으니 두 달여 만에 거둔 셈이다. 사 먹으면 편리하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재미로 심어 본 것이다. 양도 얼마 되지 않아 모자라는 것은 어차피 사서 먹어야 한다. 옛날 시골에서는 잘라낸 무청을 새끼줄로 엮어 처마 밑에 달아매서 시래기를 만들었다. 푸짐하고 큼지막했는데 이번 경우는 시래기용 무우 품종이라 그런지 크기가 훨씬 작다. 대신 질기지는 않을 것 같다. 어쨌든 직접 가꾸어서 만들어 본다는 데 의미를 둔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말라가는 시래기를 바라보면서 잠시 공상의 나래를 편다. 텃밭이 가까이 있는 마당 넓은 시골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상상이다. 말을 삼갈 뿐이지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

사진속일상 2020.11.15

소르본 철학 수업

작가는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명품 인간이 돼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낯설게 느낀다. '인간'과 '명품'이 서로 등치 될 수 있는 것일까? 한때는 정부에서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명칭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용하기도 했다. 세상의 당연함에 회의를 품었던 소녀는 프랑스 파리로 철학 공부를 하러 떠난다. 이 책 은 자의식에 눈 뜨면서 세상의 관념에 맞서 싸우며 나아가는 한 인간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전진 작가는 201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파리로 날아갔다. 2년의 어학 코스를 밟은 뒤, 2017년에 파리 제1대학 철학과에 입학하고 3년 만에 졸업했다. 지금은 같은 대학원 철학과 미술사학부에서 미학을 공부하고 있다. 요즈음 공부 잘하는 똑똑한(?) 아이들은 대개 의대나 법대를 간다. 우리 때만 해도 ..

읽고본느낌 2020.11.14

남한산성 성곽길 걷기

용두회에서 남한산성 성곽길을 걸었다. 네 명이 나왔다. 원래는 남문에서 수어장대를 거쳐 북문까지 가는 코스를 걸으려 했으나 내년 2월까지 공사로 이 길이 폐쇄되었다. 그래서 부득이 동문으로 향했다. 삼사 년 전만 해도 성곽길 한 바퀴를 돌자고 하면 다들 기꺼이 응했다. 약 9km에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길이니 걸을 만하다 여겼다. 그런데 이제는 손사래를 친다. 나이에 맞게 걷자며 반 바퀴가 적당하단다. 흐르는 세월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남한산성 남문은 유일하게 '지화문(至和門)'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정조 3년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붙인 명칭이다. 4대문 중 그나마 규모을 갖춘 문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이 문을 통해 피신했을 것이다. 문에는 철판을 입혔는데 그 모양이 성곽의 돌을 쌓아 놓은 ..

사진속일상 2020.11.13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아내와 나 사이 / 이생진 시인이 그리는 풍경을 바라보면 가슴이 아리다. 산다는 게 뭘까? 부부의 연은 또 무엇일까? '서로 모르는 사..

시읽는기쁨 2020.11.12

늦가을 뒷산

늦가을이 되면 산은 순해진다. 자신을 비우고 가벼워진 존재가 가지는 아름다움이다. 사람이 덜 다니는 길은 낙엽으로 덮여 있다. 흐릿해진 경계 위를 따라 낙엽 밟는 소리가 좋다. 자연의 순리에 몸을 맡긴 낙엽은 바스락 소리를 내며 발아래서 부서진다. 하늘 열린 공터에 앉아 햇빛 사냥을 한다. 총도 없고 화약 냄새도 나지 않는다. 은폐, 엄폐 대신 최대한 노출을 많이 시켜야 수확물이 많은 이상한 사냥이다. 옆에는 골프장이 있다.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공이 날아가고, 이어서 "나이스 샷" 하는 외침이 후렴처럼 따른다. 10년째 지켜보지만 아직 무슨 골프장인지 이름도 모른다. 단지 안 단풍나무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다. 코로나로 멀리 나가는 단풍 구경을 못 했지만, 바로 옆에서 이런 화려한 향연을 즐길 ..

사진속일상 2020.11.11

한 장의 사진(26)

학교에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남은 술과 안주를 미리 숙직실에 챙겨 두었다. 내가 숙직하는 날이었고, 술꾼들은 자연스레 숙직실로 모였다. 그때는 남교사가 돌아가며 학교를 지키는 숙직을 했다. 여교사가 많은 학교에서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씩 차례가 돌아왔다.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야간 순찰은 학교에서 고용한 아저씨가 돌기 때문에 전화나 받고 자리만 지키는 정도였다. 결혼한 사람은 불편하게 여겼지만, 총각은 오히려 숙직을 좋아했다. 집에 갔다 왔다 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자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숙직을 하면 술판이 벌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밖에서 한잔 걸치고는 술을 사 가지고 숙직실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취해서 흥이 나면 교무실에 들어가 앰프함을 열고 회의할 때 사용하는 마이크로 노래자랑도 했다. 원조..

길위의단상 2020.11.10

다읽(7) - 거꾸로 사는 재미

1983년에 펴낸 이오덕 선생의 수필집이다. 주로 70년대에 선생이 쓴 글이 주제별로 모여 있다. 1부는 자연, 2부는 삶에 대한 성찰, 3부는 시론(時論), 4부는 교육 수상이다. 선생의 글은 가식이 없고 진솔해서 좋다. 기교를 부리거나 장식 많은 글이 아니다. 선생의 고결한 성품이 배어 있다. 담박한 글맛을 느끼기에 아주 좋다. 겉 포장에 능숙한 시대에 선생의 글을 읽으면 더운 여름에 시원한 바람을 쐬는 것 같다. 내가 다시 꺼내서 읽어본 는 2006년에 산처럼 출판사에서 펴낸 것이다. '거꾸로 사는 재미'라는 제목이 언제나 마음을 끈다. 세상의 흐름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내 흥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살아가면서 재미까지 더해진다면 이미 보통 경지에 오른 분이 아닐 것이다. 이오덕 ..

읽고본느낌 2020.11.09

입동 / 이면우

무우 속에 도마질 소리 꽉 들어찼다 배추고랑이 된장국 안에 달큰해졌다 어둔 부엌에서 어머니, 가마솥 뚜껑 열고 밥 푸신다 김이 어머니 몸 뭉게구름 둘렀다 우리는 올망졸망 둘러앉아 한 대접씩 차례를 기다린다 숟가락 한번 들었다 놓고 젓가락 맞추고 크고 둥그런 상에서 가만히 기다린다 근데 오늘 저녁은 왜 이리 더디냐 현관 문 찰칵 열리며 찬바람 휘이익 들어오고 다녀왔습니다 외치며 아이가 따라 들어선다 그때 주방 김 말끔히 걷히자 거기, 아내가 구부정이 서서 등 보이며 압력솥 뚜껑을 열고 있다 - 입동 / 이면우 어제가 입동(立冬)이었다. 절기가 달력보다 앞서 겨울이 왔음을 알린다. 사람들은 세월이 빠르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실감이 안 난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하루가 그리 급하지는 않다. 느릿느릿 가는..

시읽는기쁨 2020.11.08

상처 입은 천사

핀란드 화가인 휴고 게르하르트 심베리(H. G. Simberg, 1873~1917)가 그린 '상처 입은 천사(Wounded Angel)'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본 것은 20년 전쯤 현직에 있을 때 전교조에서 펴낸 소책자에서였다. 당시는 청소년 자살이 사회문제로 대두했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이 유행하던 때였다. 이 그림은 우리 교육 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지금도 무척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그림의 분위기는 어둡고 황량하다. 땅에는 나무 한 그루와 꽃 몇 송이가 피어 있을 뿐 황무지와 비슷하다. 먼 산이나 호수도 회색이다. 무엇에 다쳤는지 상처 입은 천사가 들것에 실려 간다. 천사의 눈은 가려져 있다. 천사를 나르는 둘 중 뒤에 있는 아이의 얼굴에는 ..

길위의단상 2020.11.07

걱정 많은 한국인

지난 9월에 한 조사 결과가 보도되었다. 미국의 퓨리서치센터에서 세계 주요 14개국의 국민을 대상으로 9개 항목(기후변화, 감염병, 테러리즘, 사이버 공격, 핵무기 확산, 경제 불안, 세계 빈곤, 국가 간 갈등, 난민)이 국가에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 조사했다. 이중 5개 항목에서 한국의 걱정 정도가 1위를 차지했다. 예를 들면, 한국은 감염병 걱정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였다. 감염병 확산이 국가에 중대한 위협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한국은 89%나 되었다. 반면에 독일 55%를 비롯해 서구 각국의 평균은 60%대였다. 세계 경제에 대한 걱정도 한국이 제일 높았다. 세계 경제 현황이 국가에 위협이라고 답한 비율이 한국은 83%로 1위였다. 2위가 스페인으로 76%이고, 전체 평균은 50%대였다. 핵무기 확산을..

참살이의꿈 2020.11.06

단풍과 코로나

올해는 멀고 유명한 곳을 가지 못하고 가까이 있는 단풍을 즐긴다. 오늘은 집 주변 산책길에 있는 영은미술관에 들렀다. 전에는 입장료를 받았는데 언제부턴가 무료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은 단풍나무가 몇 그루밖에 안 되지만, 대신에 색깔이 무척 예쁘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고운 자태를 보여준다. 미술관에 있는 나무답게 단풍나무가 설치미술 작품이 되었다. 인공조형물이건만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 역병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2020년을 나타내는 건지 붉은 조형물이 코로나를 닮았다. 설명문이 없어 작가의 의도는 모르지만, 내가 임의로 '단풍과 코로나'로 붙였다. 자연은 수탈이나 이용 대상이 아니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바라보며 공존할 때 인간의 삶도 아름답게 빛나지 않겠는가. 멋진 가을 풍경을 마주하면서 자연과..

사진속일상 2020.11.05

금강경[32]

"수보리여, 어떤 사람이 십억이나 되는 가없는 우주를 일곱 가지 보배로 가득 채워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고 해도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선남자 선여인이 이 가르침 가운데 네 구절의 게송만이라도 거뜬히 받아 지녀 즐겨 읽고 절로 외우면서 이웃과 함께 나눈다면 이 공덕이 앞의 공덕보다 뛰어날 것입니다. 어떻게 함께 나눌 것입니까? 모양에도 생각에도 걸리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러하겠습니까? '나'라고 하는 모든 것들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나'라고 하는 모든 것들 그림자요 이슬이요 번갯불이니 이렇게 보아야 하리 이렇게 보아야 하리." 님께서는 이와 같이 가르침을 마치셨네. 님께서 이렇게 가르침을 마치시자 행복하여 두 손 모은 장로와 모임에 함께한 비구 비구니와..

삶의나침반 2020.11.05

곤지암도자공원 단풍

화담숲 단풍을 보러 갔다가 예약을 안 했다고 퇴짜를 맞았다. 단풍철에는 평일에도 예약제로 운영한단다. 한참 줄을 서서 체온 측정까지 했는데 헛걸음이 되어 버렸다. 꿩 대신 닭이라고, 집으로 돌아오며 곤지암도자공원에 들렀다. 외곽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단풍을 구경했다. 화담숲에는 비할 바가 못 되어도 낙엽 깔린 호젓한 산길이 좋았다. 사람이 북적이는 곳보다는 오히려 이런 데가 가을 정취에 어울리지 않나, 라고 생각하며 고마워한다. 화담숲에 못 들어간 자기 합리화면 어떤가. 가을은 차별 없이 온 강산을 물들이고 있다.

사진속일상 2020.11.04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세계 무대에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거울 같은 책이다. 우리나라는 작년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나라만 들어갈 수 있다는 '30-50 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이상, 인구 5천만 명 이상인 나라)에 들어간 일곱 번째 나라가 되었다.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이다. 대한민국은 경제적 성취와 정치적 민주화에서는 세계에서 독보적인 나라다. 반면에 '헬조선'이라는 말처럼 불명예의 기록도 다수 가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고, 노동시간이 가장 길고, 불평등이 가장 심하고, 아이들이 가장 우울하고, 아이들을 가장 적게 낳고, 제일 서로를 불신하는 나라다. 이 정도면 지옥이라 할 만하다. 어느 외국 학자는 한국 사회의 특징을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

읽고본느낌 2020.11.03

잠깐 꾸는 꿈같이 / 이태수

담담해지고 싶다 말은 담박하게 삭이고 물 흐르듯이 걸어가고 싶다 지나가는 건 지나가게 두고 떠나가는 것들은 그냥 떠나보내고 이 괴로움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두 팔로 오롯이 그러안으며 모두 다독여 앉혀놓고 싶다 이슬처럼, 물방울처럼 잠깐 꾸는 꿈같이 - 잠깐 꾸는 꿈같이 / 이태수 단풍이 참 곱다. 사라지는 것들은 왜 이리 아름다운지, 창 밖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된다. 사람의 끝도 이렇게 물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삶도 그를 닮기를, 잠깐 꾸는 꿈같이....

시읽는기쁨 2020.11.02

가을 속 우리 동네

어딜 가든 울긋불긋 단풍색이 고운 때다. 집 주변을 산책만 해도 다양한 가을 색깔을 즐길 수 있다. 이웃 동네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가 있는데, 여기서는 그 고갯길 주변 단풍이 볼 만하다. 내년이면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한다. 예정대로 공사가 시작되면 올해가 마지막 단풍이 될 것 같다. 이 나무도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랫동안 슬픈 눈으로 지켜봐야 하겠지.

사진속일상 2020.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