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 34

지나가고 떠나가고 / 이태수

지나간다. 바람이 지나가고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하루가 지나간다. 봄, 여름, 가을도 지나가고 또 한 해가 지나간다. 꿈 많던 시절이 지나가고 안 돌아올 것들이 줄줄이 지나간다. 물같이, 쏜살처럼, 떼 지어 지나간다. 떠나간다. 나뭇잎들이 나무를 떠나고 물고기들이 물을 떠난다. 사람들이 사람을 떠나고 강물이 강을 떠난다. 미련들이 미련을 떠나고 구름들이 하늘을 떠난다. 너도 기어이 나를 떠나고 못 돌아올 것들이 영영 떠나간다. 허공 깊숙이, 아득히, 죄다 떠나간다.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는다. 나의 이 낮은 감사의 기도는 마침내 환하다. 적막 속에 따뜻한 불꽃으로 타오른다. - 지나가고 떠나가고 / 이태수 다사다난(多事多難) - 연말이면 상투적으로 쓰지만, 올해는 이 말이 정말 실감 난다..

시읽는기쁨 2020.12.31

부동산 약탈 국가

읽는 동안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체한 듯 가슴이 답답하고 화도 났다. 자극적인 책 제목대로 이 책의 지은이인 강준만 선생은 부동산 가격 폭등을 '합법적 약탈'이라고 규정한다. 집 없는 사람 처지에서는 폭력으로 빼앗아가는 약탈보다 더 악랄한 약탈이다. 부제가 '아파트는 어떻게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 되었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정부의 '부동산 사기극'에 당하고만 살 건가?'다. 집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약탈이 '코리안 드림'이 된 나라에서 서울 강남에 아파트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미 계급 분리가 되어 있다. 이 책에서 자주 인용하는 19세기 미국 경제학자 헨리 조지는 말했다. "우리 현 사회체제 속에 내재한 낭비 중에서도 가장 엄청난 낭비는 바로 정신적 능력의 낭비다." 불..

읽고본느낌 2020.12.30

중산동 느티나무

인천시 중구 중산동에 있는 느티나무다. 영종도 구읍뱃터 근처에 있다. 마을 당산목으로 당제를 지내던 나무라는데 옛 마을은 사라지고 현대식 건물만 우뚝하니 나무를 압도한다.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지켜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영종도에 국제공항이 들어서고 신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 나무는 어리둥절한 채 지켜볼 것 같다. 중산동 느티나무의 높이는 15m, 줄기 둘레는 1m다. 작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천년의나무 2020.12.29

선녀바위의 저녁

한 해가 저물어가서 그런지 해 지는 풍경에 자꾸 끌린다. 이번에는 서해 영종도로 나갔다. 을왕리에서 일주일 만에 다시 처제 부부와 만났다. 서쪽 바다 끝에 짙은 구름이 끼어 있어 해는 연붉은 색깔을 잠시 보여주다가 구름 뒤로 숨어버렸다. 선녀바위 뒤에서 ND 필터를 끼고 30초 노출로 찍어본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노을을 보기 전에 선녀바위와 을왕리해수욕장을 연결하는 산책로를 걸었다. 바닷길과 산길이 적당히 어울려 있는데 새로 만든 길이라 산뜻했다. 새로 설치한 출렁다리인데 코로나 때문인지 출입은 막고 있다. 산책로에서는 멀리 을왕리해수욕장이 보인다. 25년 전에 천문반 아이들을 데리고 별 보러 이곳까지 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캠핑 장비에 무거운 망원경 두 개를 들고, 버스-전철-버스-배-버스를 타고..

사진속일상 2020.12.29

로마 제국

로마 제국의 세 황제를 다룬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드라마다. 1부는 칼리굴라, 2부는 카이사르, 3부는 코모두스가 주인공인데, 각 부는 여섯 편으로 되어 있다. 거대한 로마 제국에서 권력의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이 다큐멘터리는 잘 보여준다. 칼리굴라나 코모두스 같은 정신 이상 증세를 가진 황제가 나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측근이나 심지어는 형제에게마저 배신당하는 환경에서 폭군으로 변해간다. 처음부터 광기가 있었다면 황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황제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카이사르가 한 일을 보면 과연 영웅의 칭호를 들을 만한 인물이다. 이 드라마를 봐도 대단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다만 너무 야망이 커서 문제였다. 실라리우스 전투, 갈리아 정..

읽고본느낌 2020.12.28

성탄 구유와 무수리 선착장

코로나 때문에 올해는 아내도 성탄 미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소수 인원으로 제한하느라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더 나이 드신 분에게 양보했다는 게 맞는 말이리라. 대신에 성탄절이 지난 뒤 구유 앞에서 묵상 시간을 가졌다. 성당 안 제단 앞의 아기 예수 구유. 크리스마스 전에 다녀간 첫째 손주가 둘째에게 이런 쪽지를 써 놓고 갔다. 첫째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반면에 지금 일곱 살인 둘째 손주는 산타를 철석같이 믿는다. 이 쪽지를 보고도 누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우긴다. 성당에서 나와 무수리 선착장에 들렀다. 무수리 선착장에서는 건너편 정지리를 연결하는 줄배가 다닌다. 경안천은 꽁꽁 얼어 있고, 배도 얼음에 갇혀 있다. 무수리 선착장은 동쪽을 면하고 있으므로 일출..

사진속일상 2020.12.27

음치는 서러워

전 직장 동료 다섯이 모이는 작은 모임이 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봄에 한 번 만난 뒤로는 대면 모임을 갖지 못했다. 대신 단톡방에서 살아가는 얘기를 나눈다. 며칠 전에 A가 55년 전 중학생 때 일화를 하나 올렸다. 그때 기말고사 음악 시험은 실기평가로 한 사람씩 선생님 앞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지정곡은 홍난파의 '고향 생각'이었다. 반 전체의 평가를 마친 후 음악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음악 점수 '양'을 줄 수는 없다. 70점이 안 되는 학생은 다시 한번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그러면서 재시험 볼 학생 이름을 불렀는데 일고여덟 명 속에 A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만큼 노래에는 자신이 없었다. A는 다시 노래를 불렀고 가까스로 음악 점수 '미'를 받았다는 얘기..

길위의단상 2020.12.26

나는 5.18을 왜곡한다 / 최진석

지금 나는 5.18을 저주하고, 5.18을 왜곡한다. 1980년 5월 18일에 다시 태어난 적이 있는 나는 지금 5.18을 그때 5.18의 슬픈 눈으로 왜곡하고 폄훼한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면서 그들에게 포획된 5.18을 나는 저주한다. 그 잘난 5.18들은 5.18이 아니었다. 나는 속았다. 금남로, 전일빌딩, 전남도청, 카톨릭센터, 너릿재의 5.18은 죽었다. 자유의 5.18은 끝났다. 민주의 5.18은 길을 잃었다. 5.18이 전두환을 닮아갈 줄 꿈에도 몰랐다. 나는 속았다. 3.1, 4.19, 6.10, 부마항쟁의 자유로운 님들께 동학교도들의 겸손한 님들께 천안함 형제들의 원한에 미안하다. 자유를 위해 싸우다 자유를 가둔 5.18을 저주한다. 그들만의 5.18을 폄훼한다. 갇힌 ..

시읽는기쁨 2020.12.25

경안천 버들(201224)

아침 7시, 알람 소리에 일어났다. 이른 시간에 경안천 버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경안천으로 가는 도중에 동편 산 위로 해가 떠올랐다. 먼 곳에는 고니떼가 흰 점으로 떠 있는 경안천의 아침이었다. 꽥꽥거리는 울음소리 외에는 사위가 고요했다. 겨울이지만 날씨가 순해서 나왔더니 너무 밋밋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하늘에는 구름조차 없고, 더구나 아침에 나무는 순광을 받는다. 나무 위로 새라도 지나갈까 기다렸지만 헛일이었다. 다음에는 눈 소식이 있을 때 찾아와야겠다.

천년의나무 2020.12.24

탄도항의 저녁

안산에 들린 길에 처제 부부와 대부도 탄도항에 찾아갔다. 코로나로 답답한 마음을 바닷바람이 씻어주길 바라서였다. 탄도항 앞에는 누에섬이 있는데 바닷물에 잠겼다 열렸다 하는 시멘트 길로 연결되어 있다. 마침 썰물이라 바닷물이 빠지고 길 주변은 넓디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비록 물이 빠졌지만 오랜만에 바다를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서해로 넘어가는 일몰까지 구경하는 것은 덤이었다. 때 맞추어 날씨가 포근했다. 탄도항에 도착한 건 오후 세 시경이었는데 바닷길을 따라 산책하다 보니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갔다. 누에섬에서 보니 제부도가 바로 코 앞이었다. 옆에 전곡항도 있다. 전곡항과 제부도를 연결하는 다리 공사는 교각을 세우는 작업이 한창이다. 바깥나들이가 두렵지만 가족끼리의 가벼운 나들이는 괜..

사진속일상 2020.12.23

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문명과 야만의 충돌과 이에 저항하는 생명의 힘에 대해 썼다고 말했다. 소설의 무대는 대륙의 넓은 땅인데 동서로 흐르는 나하(奈河)를 경계로 북쪽의 초(草)와 남쪽의 단(旦) 두 나라로 나누어져 있다. 초는 유목민족이고 단은 농경민족인데, 초가 단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두 나라에 얽힌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작가가 지어낸 것이다. 역사소설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일종의 판타지 소설이다. 때도 역사 기록 이전의 아득한 옛날이다. 사람과 나라의 흥망성쇠와 함께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은 말이다. 야백(夜白)과 토하(吐霞)라는 두 말인데 전쟁터를 누비며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지만 결국에는 야생 상태의 말의 길을 찾아간다. 야백이 스스로 이빨을 빼서 재갈을 벗는 장면은..

읽고본느낌 2020.12.22

마르코복음[2]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 심부름꾼을 먼저 보내니 그가 네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부르짖는 소리니라.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굽은 길을 바르게 하여라." 하고 씌어 있는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했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주민과 예루살렘 사람 모두가 그에게 나아가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 그는 이렇게 선포했다. "나보다 굳센 분이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허리 굽혀 그분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입니다." 그 무렵 예수께서 갈릴레아 나자렛에서 요르단 강으로 와서 ..

삶의나침반 2020.12.21

흔들리지 마

주말에 집에 찾아온 손주의 웃음소리를 뒤에 두고 뒷산에 올랐다. 낮에도 영하의 날씨였지만 산길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집에서 탈출하기는 힘들어도 산에 들면 기분이 환해진다. 이 좋은 길을 거의 한 달 만에 걷는다. 겨울옷은 주머니가 커서 좋다. 똑딱이 카메라는 주머니에 넣으면 딱 알맞다. 요사이는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내던지고 휴대폰을 사용한다. 휴대폰 카메라 성능이 좋아지다 보니 굳이 다른 카메라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휴대폰 카메라에는 적응이 안 된다. 사진을 잘 찍고 못 찍고를 떠나 사진 찍는 맛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밖에 나갈 때는 똑딱이라도 들고 가야 마음이 편하다. "사진이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 주는 수단이다." 어느 사진가의 말이다. 사진은..

사진속일상 2020.12.20

스카이 캐슬

'스카이 캐슬'이 방영되던 2년 전에 친구가 우리의 교육 현실을 다룬 내용이라면서 꼭 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그때는 TV 드라마에 대한 선입견이 커서 코웃음 치며 흘려넘겼다. 이번에는 넷플릭스에 들어갔다가 이 드라마를 보고 몰아보기를 했다. 예상외로 흡인력이 강하고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드라마에 빠지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한때 이 드라마의 무대가 된 강남의 어느 명문 고등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그때 생각이 많이 났다. 그 학교에 간지 이태째 되던 해에 어쩌다 담임을 맡았다가 정말로 죽을 고생을 했다. 강남 학부모와 아이들의 생태를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경험을 했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 내가 있을 때 그 학교에서 암에 걸린 교사가 여럿 나왔고, 친한 동료는 몇 달 ..

읽고본느낌 2020.12.19

경안천 버들(201217)

이번 추위에 경안천이 얼었다. 올 겨울 들어 첫 결빙이다. 내 견문으로는 우리 고장에서 제일 멋진 나무가 경안천에 있는 이 나무다. 거리가 멀어서 무슨 나무인지 확인하기 어려우나 수피의 생김새로 판단하건대 버드나무 종류로 보인다. 천에 모래톱이 생기고 그 위에 떨어진 씨가 이만한 나무로 자라자면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강 가운데 홀로 우뚝하게 서 있는 균형 잡힌 자태가 당당하고 아름답다. 좀 떨어진 곳에 다른 버드나무도 있지만 이 나무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한 나무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세 그루가 합쳐져서 완벽한 나무 형태를 만들고 있다. 셋이 서로 협동하여 조화를 이루니 더 감탄이 나온다. 앞으로는 이 경안버들과 더 친해져야겠다.

천년의나무 2020.12.18

수청리 느티나무

참하게 생긴 나무다. 별 고생 없이 곱게 자란 듯 외모가 단정하다. 경기도 광주시 수청리 한강변에 있다. 건너편의 양평과 오가는 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나루터였던가 보다. 나루터에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는 충분히 상상할 만하다. 주민에게 물어보니 이 배는 일반인을 태우는 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필요할 때 이용한다고 한다. 나무의 수령은 300년이고, 높이는 22m, 줄기 둘레는 5.2m다. 주변은 작은 공원으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관리가 잘되고 있는 수청리 느티나무다.

천년의나무 2020.12.18

공휴일 / 김사인

중랑교 난간에 비슬막히 식구들 세워놓고 사내 하나 사진을 찍는다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히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 들쳐업은 촌스러운 여편네는 생전 처음 일이 쑥스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을 어쩔 줄 모르는데 큰애는 엄마 곁에 붙어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차렷을 하고 눈만 때굴때굴 숨죽이고 섰는데 그 곁 난간 틈으로는 웬 코스모스도 하나 고개 뽑고 내다보는데 짐을 맡아들고 장모인지 시어미인지 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 부산도 한데 - 공휴일 / 김사인 저 시절 중랑교가 무슨 볼품이 있었을까? 밑으로는 시커먼 중랑천이 흐르던, 높은 빌딩 하나 없는 서울 변두리였다. 그래도 서울 구경이라고 시골에서 올라온 한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는가 보다. 사진천국이 된 지금는 누구나 주머니에 카메라를 넣고 ..

시읽는기쁨 2020.12.17

사진 직설

사진에 젬병이지만 관심은 많다. 평생 사진을 업으로 삼고 일가견을 이룬 사람 얘기 듣는 걸 좋아한다. 물론 직접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다. 이 책은 최건수 사진 평론가가 풀어놓는 사진 세상 이야기다. 따분한 사진 이론이 아니라 술자리에서 얼굴을 맞대고 사진 현장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사진계의 현실을 드러내는 직설(直說)이 따끔하다. 이 책 은 아마추어가 아니라 예술 사진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읽으면 좋다. 나와는 관계가 없지만 사진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되는 것만으로도 읽은 효과는 있다. 사진은 찍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다. 사진은 사물과 나와의 대화다. 선생은 사진을 배우려는 한 스님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스님, 찍지 말고 관조(觀照)하세요. 그러면 보여요. 스님들이 왜 면벽을..

읽고본느낌 2020.12.16

어떤 실수

겨울이 되면 피부가 건조해진다. 특히 다리 부위가 간지럽고 꺼칠하다. 보름 전쯤 아내에게 피부 보습제를 부탁했더니 병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발라보니 전과 달리 끈적끈적한 게 느낌이 이상했다. 그렇지만 아내가 좋은 거라고 말했으니 의심 않고 두 주 정도 열심히 사용했다. 그런데 가려움증이 없어지지 않고 도리어 더 자주 긁게 되었다. 다리를 살펴보니 붉은 반점이 쫙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수상쩍어서 병을 봤더니 이런, 이건 보습제가 아니라 바디와셔였다. 샤워하고 비누기를 없앤 다음에 다시 비누를 잔뜩 바른 셈이었다. 피부 트러블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몸 전체에 바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병을 보니 착각하게도 생겼다. 상표 이름만 영어로 크게 적혀 있고, 내용물에 대한 한글 설명은 깨알 같은 ..

길위의단상 2020.12.15

필요한 하나

조선 중종 때 문신인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의 호는 팔여거사(八餘居士)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기묘사화에 휩쓸려 삭탈관직 되자 고양 명봉산 자락에 들어가 은거하며 사신 분이다. 그가 말한 '팔여(八餘)', 즉 '여덟 가지 넉넉한 것'은 이렇다. 1.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히 먹고 2. 등 따뜻하게 넉넉히 잠자고 3. 맑은 샘물을 넉넉히 마시고 4.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히 읽고 5. 봄꽃과 가을 달빛을 넉넉히 감상하고 6.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히 듣고 7.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히 맡는다. 8. 그리고 이 일곱 가지를 넉넉히 즐기니, 이것이 팔여(八餘)다. 팔여거사의 넉넉함은 자족(自足)에서 나온다. 사람은 욕심을 부리면 끝이 없지만, 분수를 알고 만족하면..

참살이의꿈 2020.12.14

첫눈(2020/12/13)

아침에 일어나니 세상이 은세계로 변해 있다. 창 밖으로 눈 내리는 풍경을 오래 구경하다. 어딘가 쓸쓸해져서 우산을 받쳐 들고 동네 산책에 나서다. 눈 위에 내 발자국이 처음 찍히는 길이 많다. 산길에 드니 앞서 고라니가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고라니 걸음은 붓으로 찍은 듯 부드럽다. 같이 보조를 맞추어 걷다. 얼마간은 마음이 포근해지고 따스해지다. 2020년 12월 13일, 첫눈 내린 날....

사진속일상 2020.12.13

마르코복음[1]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렇게 비롯되었다. - 마르코 1,1 마르코복음서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한때 아무개 목사를 따른 적이 있었는데, 그분의 강연장에서 성서 읽기에 대한 충고를 들었다. 마르코복음서만 100번을 집중적으로 읽으라는 것이었다. 바로 실천에 들어갔다. 2년 정도 걸렸을 것이다. 읽은 횟수를 체크하다가 말았으니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100번을 채웠다. 평균하면 일주일에 일독을 한 셈이었다. 거의 20년 전이었다. 이제 다시 마르코를 읽으려 한다. 대학생 때 개신교 교회를 통해 기독교를 접한 이래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의문은 계속되고 있다. 그에 대한 답은 내 신앙의 정체성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복음서를 통해 우리는..

삶의나침반 2020.12.12

철도원 삼대

삼대로 이어진 철도원의 삶을 그린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작가가 1989년 방북 때 평양에서 만난 어느 노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이백만, 이일철, 이지산이 철도원 삼대이고, 그 아랫대인 굴뚝 농성을 하는 이진오 이야기가 현재 시제로 교차한다. 실제로는 사대에 걸친 노동자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우리나라에는 별로 없는 노동소설을 써보고 싶었다고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밝힌다. 황석영 작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 같다. 는 이진오의 농성 투쟁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처음부터 작가의 현란한 글솜씨에 빨려 들어간다. 6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지루할 틈 없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특히 주안댁과 신금이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안방에서 듣는 민담 같은 내용이라 정감이 간다. 이 소설..

읽고본느낌 2020.12.11

다시 아침 / 도종환

내게서 나간 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진 날은 돌아와 빗자루로 방을 쓴다 떨어져 나가고 흩어진 것들을 천천히 쓰레받기에 담는다 요란한 행사장에서 명함을 잔뜩 받은 날은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 찬물에 차르르 차르르 씻겨나가는 뽀얀 소리를 듣는다 앞차를 쫓아가듯 하루를 보내고 온 날은 초록에 물을 준다 꽃잎이 자라는 속도를 한참씩 바라본다 다투고 대립하고 각을 세웠던 날은 건조대에 널린 빨래와 양말을 갠다 수건과 내복을 판판하게 접으며 음악을 듣는다 가느다란 선율이 링거액처럼 몸속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걸 느끼며 눈을 감는다 - 다시 아침 / 도종환 시인이 마음을 정화하듯 하는 행위를 나 역시 집에서 일상으로 한다. 방 쓸기, 설거지와 밥 안치기, 초록에 물 주기, 빨래 개기 등은 퇴직 이후..

시읽는기쁨 2020.12.10

코로나 겨울 속 경안천

스산하고 을씨년스럽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으나 걸음걸이에는 활기가 없다. 공원을 걷긴 하지만 다들 마지못해 밖으로 끌려 나온 모습이다. 모두가 코로나 탓이다. 내 활동량도 코로나 전에 비해 거의 1/3로 줄었다. 덕분에 몸무게는 3kg이 늘어났다. 그나마 이만한 게 다행일 정도다. 이제 겨울이 왔으니 다른 해보다 더 깊은 겨울잠이 될 것 같다. 오랜만에 경안천에 나갔다. 청석공원에서 상류 쪽으로 갔다가 오는 코스를 걸었다. 길섶에서 12월에 핀 민들레를 봤다. 요사이는 아침에는 영하 5도, 낮에는 영상 5도 내외의 날씨다. 싸늘하긴 하지만 해 나고 바람 불지 않으면 야외 활동하기에 괜찮다. 올해는 첫눈이 늦다. 청석공원은 산책로를 제외하고 전부 폐쇄되었다. 뛰노는 아이들을 볼 수 ..

사진속일상 2020.12.09

퀸스 갬빗

'메시아'와 '빨간 머리 앤'에 이어 세 번째로 본 넷플릭스 드라마다. 요사이 넷플릭스 때문에 드라마의 재미에 푹 빠졌다. TV의 영향이겠지만 '막장'이라는 선입견으로 드라마를 외면했는데, 잘 만든 드라마는 영화 이상의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 인간의 성장기를 다루는 내용은 영화보다는 드라마가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퀸스 갬빗(The Queen's Gambit)'은 체스의 천재인 고아 소녀가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7부작의 인생 드라마다. 제목으로 쓰인 '퀸스 갬빗'은 체스 용어라고 한다. '갬빗(gambit)'은 사전에서 찾아보니 '체스에서 기선을 제압하려고 폰을 희생시키는 초반의 수'라고 나와 있다. 주인공이 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함축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 ..

읽고본느낌 2020.12.08

재미와 의미

손주 둘이 집에 와서 시끌벅적하니 정신이 없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깔깔거리며 뛰어다닌다. 아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장난감인가 보다. 세상이 온통 재미있는 놀이터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런 무작정의 재미는 어디서 오는가, 궁금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는 재미를 잃어가는 과정인지 모른다. 한 번뿐인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건 누구나 동의한다. 재미없이 행복이 있을 리 없다. 고단한 세상살이에서 재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은 갸륵하다. 인간의 활동과 오락 대부분이 재미를 추구하는 분투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내면의 공허에서 회피하기 위해 바깥의 재미를 찾는지 모른다. 감각적인 재미는 일종의 마취제다. 재미있는 일에 몰두할 때는 자신을 잊는다. 그러나 재미는 그때뿐이고 다시 ..

참살이의꿈 2020.12.07

2020 천체사진

영국 그리니치천문대에서는 매년 천체사진을 공모한다. 전 세계에서 출품한 우수한 사진을 많이 볼 수 있기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다. 올해 수상작 중에서 눈에 띄는 몇 작품을 골라 보았다. 1. 오로라 부문 - Lone Tree under a Scandinavian Aurora(Nikon D850, 15mm, ISO 1000, 13s) - Hamnoy Lights(Nikon Z7, 17mm, ISO 800, 10s) 요사이 사진에 푹 빠진 친구가 아이슬란드로 오로라 사진을 찍으로 간다고 한다. 원래는 올 겨울이었는데 코로라 때문에 내년으로 미루어질 것 같다. 나도 그 팀에 끼워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2. 태양 부문 - Total Solar Eclipse, Venus and the Red Giant Betel..

길위의단상 2020.12.06

먼 바다

공지영 작가의 장편소설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첫사랑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여교수인 미호는 SNS를 통해 연락이 닿은 요셉을 미국 여행길에 뉴욕에서 만난다. 40년 전 그들은 여고생과 신학생으로 성당에서 만난 첫사랑이었다.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렇듯 우여곡절을 겪으며 둘은 헤어진다. 그건 오해였을 거야, 라는 아쉬움과 함께 첫사랑은 오래 기억된다. 미호가 첫사랑을 만나려는 것은 가슴 속 응어리를 풀고 싶은 바람이 있었는지 모른다. 을 읽으면서 누구나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릴 것이다. 아픔도 있겠지만 추억하는 첫사랑은 아련하면서 달콤하다. 그러나 첫사랑과의 재회가 꼭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손에 들고 무수히 망설이다가 결국은 포기했던 적이 있다. 만약 지금 다시 기회가 주..

읽고본느낌 2020.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