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 32

천장산 숲길과 의릉

홍릉수목원 복수초를 보고 옆에 있는 천장산 숲길을 걸었다. 천장산(天藏山, 140m)은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과 성북구 석관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하늘이 숨겨둔 곳'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 왕가의 묘지가 많은 연유와도 통하는 것 같다. 천장산 숲길은 길이가 2km 남짓 되는 짧은 길로 작년에 개통되었다. "평양을 다녀왔습니다." 1972년 7월 4일, 이후락의 난데없는 이 한 마디에 놀랐던 순간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런데 왠 걸, 몇 달 지나지 않아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건물 앞에는 그때 남북이 합의한 공동성명서 삼 원칙이 적혀 있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

사진속일상 2021.01.31

홍릉수목원 복수초(2021)

홍릉수목원에 복수초가 피었다는 소식에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S, Y 형에게 연락하여 셋이 만나 2021년의 첫 꽃을 영접했다. 지난주부터 홍릉수목원의 복수초 소식이 들렸으니 올해는 일찍 개화한 셈이다. 남도 지방이 아닌 서울에서 이렇게 빨리 피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더욱 귀한 복수초다. 사람 마음은 비슷한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훼손을 막기 위해서 복수초 둘레에는 나무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다. 더 예쁘게 찍게 위해선지 누군가 눈을 퍼다가 복수초 주위에다 뿌려 놓았다. 엉성하고 부자연스러워 도리어 역효과를 내어 언짢다. 그냥 있는 그대로 두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

꽃들의향기 2021.01.31

나라 없는 나라

전봉준과 대원군의 밀회로 소설은 시작한다. 둘의 속은 달라도 상대가 가지고 있는 명분이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소설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에서부터 전봉준이 체포되던 마지막까지를 다룬다. 이광재 작가가 썼고, 혼불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19세기 후반부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사회 밑바닥에서부터 불만과 요구가 터져 나오던 시기였다. 동시에 외세는 호시탐탐 조선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나라의 중심을 잡을 힘 있는 세력은 없었다. 도리어 일본이나 청나라에 의존함으로써 한 줌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전봉준과 대원군이 암묵적으로 손을 잡은 것은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는 공통된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1894년 3월에 고부 백산에서 1차로 봉기할 때 동학농민군은 네 가지 강령을 만들었다. ..

읽고본느낌 2021.01.29

여자들은 빠집시다 / 윤금초

난봉꾼 타고난 끼로 숱한 아녀자를 농락했다. 성난 주민들 관아에 고발, 심판 받게 된 것이다. 원님 가로되 "저놈이 다시는 나뿐 짓 못하게 거시기를 잘라 버리도록 해라!" 그러자 그 아비가 일어서서 간청했다. "나리. 저 녀석이 우리 집안 4대 독자입니다. 대를 이어가야 하므로 저 아이 대신 제 거시기를 자르십시오." 깜짝 놀란 어머니가 불쑥 원님 앞에 나섰다. "사또, 법대로 하옵소서." 그러자 큰일 났다 싶은 며느리가 손사래, 손사래 치며 "어머님. 남정네 하는 일에 여자들은 빠집시다." - 여자들은 빠집시다 / 윤금초 도지사, 부산시장, 서울시장만 해도 벅찬데 이번에는 정의당 대표의 성추행이 터졌다. 권력과 성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힘이 생기면 어디에든 과시해 보고 싶은 걸까. 성 욕망에는..

시읽는기쁨 2021.01.27

우리 고장에 찾아온 고니와 황새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고니는 세 종류가 있다. 고니, 큰고니, 흑고니인데 고니와 큰고니는 구분하기가 어렵다. 부리에 있는 노란색 무늬의 크기로 나누는데 명확하지 않다. 큰고니가 제일 많지만 편의상 그냥 고니라도 부른다. 겨울 철새인 고니류는 모두 천연기념물이다. 우리 고장 경안천에 고니의 월동지가 있다. 많이 모여 있을 때는 꽥꽥거리는 소리로 주위가 소란스럽다. 경안천습지생태공원 안팎에 있는 고니를 찍어 보았다. 고니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다른 새들보다 덜한 것 같다. 심지어는 사람한테 가까이 오기도 한다. 고니를 새롭게 바라본 날이었다. 경안천에는 진객인 황새 한 마리도 겨울을 나고 있다. 발에 가락지가 없는 걸로 보아 러시아에서 날아온 걸로 보인다. 황새의 수명은 20년 정도인데 이 새는 어려 ..

사진속일상 2021.01.26

우주정거장에서 본 지구

국제우주정거장 ISS(International Space Station)는 16개국이 참여하는 하늘에 떠 있는 다국적 우주 기지다. 크기는 축구 경기장만 하며 지상 400km 높이에서 하루에 지구를 15바퀴 정도 돈다. 400km라면 대략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다. 지구를 사과 정도 크기로 축소하면 우주정거장은 사과 껍질에서 2m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맨눈으로도 쉽게 보이고, 성능 좋은 망원경이면 형체까지 뚜렷이 볼 수 있다. 승무원은 여섯 명인데 평균 6개월 정도 체류한다. NASA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우주정거장에서 찍은 지구 사진을 봤다. 우리는 중력에 의해 지구 표면에 갇혀 있다. 지구 전체를 조망하는 넓은 시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 숲을 보자면 숲 밖으로 나가야 한다. ..

길위의단상 2021.01.25

우주를 만지다

물리학자인 권재술 선생의 과학 에세이다. 통상의 과학책과 달리 물리학과 인문학의 따스한 만남을 시도해서 특이하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일 것이다. 특히 글의 갈피마다 직접 쓴 시가 실려 있어 딱딱한 과학 내용을 적절히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작가인 권 선생님은 대학 선배시다. 학부 때 조교이시던 선배한테 가르침을 받았다. 따스하고 겸손하신 분이었다. 후에는 대학 교수가 되시고 총장까지 하셨다. 대개 이과생은 세상을 보는 눈이 좁고 논리가 거친데 선배는 달랐다. 글을 잘 쓰신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책으로는 처음 만났다. 다만 당구 실력은 나와 비슷해서 재작년인가에는 하수끼리 같이 시합을 한 적도 있었다. 책에서 상대성이론을 설명하는 부분을 읽고 아차, 하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교단에서 ..

읽고본느낌 2021.01.24

두 달만에 당구와 놀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 2.5단계가 계속되고 있지만 이번 주부터 당구장이 문을 열었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두 달만에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만나 즐겁게 놀았다. 11월 중순부터 코로나 잠수에 들어가서 바깥 모임에는 나가지 않았는데 이젠 수면 밖으로 나와도 될 것 같다. 당구장이 첫 신호탄이다. 밖에 나가보니 집에서 염려하는 것과는 달리 사람들의 일상은 다름이 없었다. 어쩌면 코로나에 대해 내가 너무 몸을 사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 친구는 정부가 코로나에 대해 과잉 공포심을 조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에 그렇게라도 했으니 이만큼이나마 통제되고 있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었다. 코로나를 대하는 반응도 각양각색이다. 우리에게는 올해가 대학 입학 50주년이 되는 해다. 해외여행 얘기가 나오다가 슬그머니..

사진속일상 2021.01.23

마르코복음[5]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다가 보시니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내 뒤를 따르시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습니다." 하시자 곧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예수께서 또 조금 더 가시다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셨는데, 그들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곧바로 예수께서 부르시니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두고 뒤좇아갔다. - 마르코 1,16-20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제자 그룹 중에서도 핵심 멤버다. '곧'이라는 말에서 보듯 이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운동에 동참한다. 사전에 예수와 어떤 식으로든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삶의나침반 2021.01.22

굴산사지 소나무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굴산사지에 있는 소나무다. 굴산사지(掘山寺址)는 신라시대 선종구산 중 하나였던 굴산사가 있었던 터다. 고려시대까지도 번창했으나 조선이 세워지면서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굴산사지에는 현재 당간지주와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것으로 보이는 승탑이 남아 있는데. 승탑 앞에 이 소나무가 있다. 나무 주변 흙을 너무 깎아 내서 나무만 불쑥 솟아 있다. 소나무의 높이는 10m, 줄기 둘레는 3m이며, 수관의 직경이 12m에 이르는 멋진 나무다. 갈라진 두 줄기가 Y자 모양으로 우뚝하다. 안내문에 보면 이 소나무 아래에 살던 최진사 댁에서 매년 이곳에서 안택(安宅)을 기원하는 제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나무라는데 나무 주변을 세심하게 정비했으면 더 좋겠다.

천년의나무 2021.01.21

강릉 바닷바람을 쐬다

바닷바람을 쐬러 아내와 강릉에 다녀왔다. 올해 들어서는 첫나들이였다. 아직 거리두기 2.5단계가 실시되고 있지만, 다행히 코로나 기세는 한풀 꺾인 듯하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 상쾌했다. 오늘 행선지는 안목해변, 솔향수목원, 굴산사지, 경포호로 잡았다. 일박을 하며 여유 있는 일정도 생각했으나 왠지 아직은 아닌 듯 싶었다. 밖에서 잠자고 식사하는 일이 꺼림칙한 게 사실이다. 역시 동해에 와야 바다다운 바다를 마주할 수 있다. 기운차게 포효하며 밀려오는 파도 앞에 둘이 섰다. 안목해변을 따라 바우길 5코스가 지나간다. 길이 지나는 솔숲이 좋다. 갈 때는 모래사장을 따라, 올 때는 솔숲길을 따라 1시간 정도 걸었다. 사랑, 얼마나 오래 잠그고 싶은 걸까? 강릉시 구정면에 있는 솔향수목원은 23곳..

사진속일상 2021.01.21

무이산에서 / 사방득

집으로 돌아갈 꿈 10년 동안 안 꾼 채로 푸른 산에 홀로 서서 물가를 바라보네 산 비 뚝, 그치고 나니 온 천지가 적막한데 몇 생애를 더 살아야 매화가 될까 몰라 十年無夢得還家 獨立靑峰野水涯 天地寂寥山雨歇 幾生修得到梅花 - 무이산에서(武夷山中) / 사방득(謝枋得) 사방득(謝枋得, 1226~1289)은 남송 시대의 문인으로 원나라가 침략하여 나라가 망하자 무이산으로 들어가 협력을 거부하고 저항한 인물이다. 내용으로 볼 때 10년 동안 무이산에 숨어 사는 기간 중에 쓴 시로 보인다. 지조를 지키며 살려고 한 사방득의 결기와 고독이 동시에 느껴진다. 결국 사방득은 스스로 곡기를 끊으면서 목숨을 버렸다고 한다. "몇 생애를 더 살아야 매화가 될까 몰라[幾生修得到梅花]." 이런 시를 읽으면 사는 게 무엇인지 아..

시읽는기쁨 2021.01.19

오스만 제국의 꿈

6편으로 된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드라마로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다룬 이야기다. 술탄 메흐메드 2세는 1453년 4월 5일에 공격을 시작해서 55일 만인 5월 29일에 성채를 넘는다. 당시 상황을 보면 콘스탄티노플은 이미 오스만 제국에 둘러싸여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점령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1천 년을 버틴 난공불락의 요새로 쉽사리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오스만 제국의 꿈'은 메흐메드를 중심으로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전말을 다룬다. 메흐메드는 아버지가 죽으면서 19살에 술탄에 올랐다. 어린 술탄은 선왕의 신하들과 힘겨루기에서 뭔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목표로 선언하고 국력을 쏟아붇는다. 실패하면 술탄의 지위를 빼앗길 수도 있는 모..

읽고본느낌 2021.01.18

갈 때 되면 가야지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잦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금방 죽는다"라고 말하며 나를 깨우치겠다고 새해의 마음 다짐을 했다. 보름 넘게 지났지만 지금까지는 이 약속을 잘 지켜오고 있다.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죽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의지다. 죽는다는 -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 의식이 내 생각과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걸 확인한다. 좀 더 초연해진다 할까, 세상사의 헛됨을 자각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 죽는다는 사실만 확실할 뿐 때는 모른다. 내일일 수도 있고, 먼 날일 수도 있다. 바로 그 점이 나를 죽음에서 예외인 존재로 착각하게 만든다. 마치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행동한다. 물론 죽음을 외면한 채 오늘을 열심히 살..

참살이의꿈 2021.01.16

경안천에서 황새를 보다

경안천에 새를 보러 나갔다가 운 좋게 황새를 만났다. 어렸을 때는 동네 앞 논에서 황새를 자주 봤는데 70년대에 들어서며 거의 멸종이 되었다. 20년 전부터 황새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고, 2015년부터는 자연 적응 기간을 거쳐 방사를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 우리나라에 사는 황새는 100마리가 안 된다. 일부는 겨울을 나기 위해 북쪽 지방에서 날아온다. 내가 본 황새도 발에 가락지가 없는 걸로 봐서 러시아 쪽에서 날아온 겨울 철새로 보인다. 황새는 몸길이가 1m, 몸무게는 4kg가량 되는 큰 새다. 그래서 '크다'는 뜻을 가진 '한'이 변해 황새가 되었다. '큰 수소'를 뜻하는 황소 이름과 비슷하다. 논이나 하천 등 습지에서 살며 잡식성이지만 주로 물고기가 작은 동물을 잡아먹는다. 한 마리의 암컷이 한 마..

사진속일상 2021.01.15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20세기 말 미국의 대기업 엔론이 '등수 매겨 내쫓기'라는 모델을 도입했다. 직원의 성과를 경쟁의 잣대로 평가하여 상위 20%에게 보너스를 몽땅 몰아주고 하위 10%는 해고했다.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에서 능력에 따라 인간을 평가하는 '20/70/10 규칙'이 적용되는 사회를 '엔론 사회'라고 부른다. 이런 실적주의는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고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문장에서는 '빚으로 산 우울한 향락의 사회' '역사상 가장 잘 살지만 가장 기분이 나쁜 사람들' '우리의 가장 나쁜 측면을 장려하는 사회' 등으로 표현한다. 벨기에의 정신분석학자인 파울 페르하에허가 쓴 는 신자유주의 가치의 지배를 받는 현대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인간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길게 설명한..

읽고본느낌 2021.01.14

넉 달만에 이발하다

오랜만에 이발을 했다. 지난해 추석 전에 이발한 뒤로 처음이니 넉 달만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피하기 위해 외부인과 접촉을 마다하다 보니 이발소도 발을 끊었다. 넉 달이 지나니 머리칼은 귀를 전부 가릴 정도다. 보기에는 거칠어도 바깥출입해서 타인을 만날 일이 없으니 앞으로 몇 달은 더 버틸 수가 있다. 그런데 이번 주말에 조카 결혼식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깎으러 이발소를 가야 했다. 그동안 이발소보다는 미용실을 자주 이용했다. 이발소는 면도해 주는 게 영 불편했다. 나는 내 몸을 누가 만지는 게 아주 싫다. 이발소에서는 머리를 깎고나면 여자 면도사가 꼭 면도를 해 준다. 정성껏 털을 밀어준다고 볼을 잡아당기고 입술을 비틀기도 한다. 신경이 쓰여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저는 면도를 ..

길위의단상 2021.01.13

매아미 맵다 울고 / 이정신

매아미 맵다 울고 쓰르라미 쓰다 우니 산채를 맵다는가 박주를 쓰다는가 우리는 초야에 묻혔으니 맵고 쓴 줄 몰라라 - 매아미 맵다 울고 / 이정신 매미가 맵다고 울든 쓰르라미가 쓰다고 울든 왜 내가 속을 끓여야 하지? 매미나 쓰르라미가 아니라 아직도 거기에 매여 있는 내 마음 탓인 것을. 열 받고 단톡방을 뛰쳐나왔던 내 속 좁음을 반성한다. 이 시조를 지은 이정신(李廷藎) 선생은 현감을 지낸 조선 영조 때 분이라고 한다. 호는 백회재(百悔齋)다. 백 번을 뉘우쳐야 맵고 쓴 바를 잊는 경지에 이른다고 가르침을 주는 것 같다.

시읽는기쁨 2021.01.11

마르코복음[4]

요한이 잡힌 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 마르코 1,14-15 당대의 로마 역사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대로 세례자 요한의 체포와 처형은 역사적 사실이다. AD 29년쯤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예수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당시에 주목을 받은 인물이 누구였는지 추론해 볼 수 있다. 요한은 두려움이 없었다. 정치나 종교 권력층에 대한 독설을 서슴치 않았다. 요한의 투옥이 예수에게 영향을 주었을까?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래아에서 첫 활동을 시작한다. 중앙의 주목을 덜 받아서 위험 요소가 적은 이점이 있을 것이다.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는 자신의 이적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소문이 ..

삶의나침반 2021.01.10

26일 동안의 광복

1945년 8월 15일부터 미군이 조선총독부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하는 9월 9일까지 26일 동안을 기록한 책이다. 부제가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이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한겨레신문의 길윤형 기자가 썼다. 1부는 8월 15일 광복 당일의 숨 가빴던 시간을 세 세력(여운형, 총독부, 송진우)의 입장에서 복원한다. 혼란한 때에 발빠르게 나선 쪽은 여운형이었다. 총독부는 치안 유지와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 명망 있는 인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여운형은 총독부의 방침에 협조하면서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든다. 광복을 전후한 시기의 중심인물은 여운형이었다. 그가 만든 건준은 안재홍 주도로 끝까지 좌우합작을 시도한다. 그러나 우익을 대표하는 송진우는 좌익에 이용당할 것을 두려워해 ..

읽고본느낌 2021.01.09

문도선행록

김미루 작가의 치열한 예술혼과 도전 정신을 존경한다. 예술이란 무엇일까? 예술이란 "사람되기를 배우기(Learning to be human)"라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다. 작가의 작업 과정을 보면 인간의 길을 물으며 정진하는 수도자의 모습이 연상된다. 이라는 책 제목 그대로다. 이 책은 2012년부터 3년 동안 사하라 사막, 아라비아 사막, 타르 사막, 고비 사막을 헤매며 문명이 내팽개친 정신을 찾아 나선 고독한 모험의 발자취를 그리고 있다. 자신의 누드로 이미지를 전달하는 작가는 여기서는 사막의 낙타를 통해 자연과의 교감 및 상생의 길을 보여준다. 도시의 버려진 풍경이나 돼지, 애벌레를 소재로 한 작품과는 달리 낙타 시리즈에서는 인간의 손에 때 묻지 않은 원초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펼쳐진다. 마치 에덴동..

읽고본느낌 2021.01.08

2021년 첫 뒷산

소한 추위가 찾아왔다. 낮 기온도 영하 5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고 쌀쌀하다. 하지만 바람 없고 햇빛 쨍한 날이라 중무장을 하고 밖에 나섰다. 올해 들어 첫 외출이면서 첫 뒷산이다. 부지런히 걷다 보면 땀이 배다가 잠깐 머뭇거리면 싸늘해져 다시 모자를 푹 눌러 쓴다. 겨울 산길 위로 나무 그림자가 열을 맞춰 가지런하다. 정상 아래 나의 쉼터는 남향으로 양지바른 곳이다. 오래 앉아 있어도 추위를 잊을 정도로 따스하다. 심리적으로 느끼는 포근함이 더해진다. 한 번 앉으면 일어서기가 싫다. 코로나 탓인지 산길 옆에 있는 골프장은 적막강산이다. 처음으로 필드에 들어가 본다. 골프 선수나 되는 듯 가상의 공을 향해 빈 팔을 휘두른다. 와- 하는 갤러리의 환성이 들리는 것 같다. 현직에 있을 때 수능 검토위원으로 ..

사진속일상 2021.01.07

반성 / 함민복

늘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씻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 - 반성 / 함민복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는 손 세정제가 있다. 코로나를 예방하라고 관리사무소에서 마련한 것이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에는 습관적으로 세정제로 손을 닦는다. 남의 손이 닿은 버튼이 오염되었을까 두려워서다. 그러나 이 시를 읽고는 반성했다. 먼저 손을 닦고 버튼을 누를 수도 있지 않는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결과는 동일하다. 그런데 둘 사이에 마음가짐은 천양지차가 난다. 시인의 타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심이 지극하다. 실천 여부를 떠나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마음이 아름답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뭣이 중요한지는 내팽개쳐 놓고 엉뚱한 곁다리만 신경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시읽는기쁨 2021.01.06

한결같은 제라늄

몇 년 전부터 베란다에 있는 제라늄이 거의 방치 상태다. 처음에 기를 때는 애지중지했는데 오래되다 보니 관심이 시들해졌다. 물 주는 것도 들쑥날쑥하고 분갈이는 생각도 안 한다. 그래도 제라늄은 한결같다. 사람이 쳐다보든 아니든 끝없이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춥든 덥든 상관없다. 끈질긴 제라늄이다. 생명이 다해야 갖다 버리기라도 할 텐데 죽지도 않는다. 아무리 여러해살이풀이지만 이렇게 오래 살아갈 줄은 몰랐다. 10년 가까이 되니 줄기 아랫부분은 목질로 변했다. 나무처럼 분재로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제라늄 덕분에 우리 집 베란다는 사시사철 꽃색으로 환하다. 대견하고 기특하다. 올봄에는 예쁘게 손질이라도 해 줘야겠다. 이번 겨울만 잘 견디거라. 그동안 신경을 못 써줘서 정말 미안해.

꽃들의향기 2021.01.05

로마

담백한 흑백 화면에 클레오의 삶을 잔잔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배경은 1970년대 초반 멕시코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로마가 아니라 멕시코시티에 있는 어느 지역명이다. 클레오는 원주민으로 멕시코 상류 가정에서 일하는 가정부다. 넓은 집의 살림을 하고 네 아이 치다꺼리 하느라 종일 일에 파묻혀 산다. 이 영화는 두 계급 사이의 가까워질 수 없는 간극을 냉정하면서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넓게는 인간의 외로움이나 소통의 문제를 다룬다고 볼 수도 있겠다. 부자와 빈자, 서양인과 원주민, 남과 여 등의 대비를 통해 인간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흑백 화면으로 보여준다.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계급'이라는 단어가 금기어가 된 때가 있었다. 씁쓰레한 에피소드가..

읽고본느낌 2021.01.04

내 어릴 적 겨울에는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젊은 부부가 많이 산다. 같은 층에 사는 네 가구만 봐도 노인은 우리뿐이고 다른 세 집은 3, 40대 부부 가정이다.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아이들도 여섯 명이나 된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 안에서 아이들 보기는 힘들다. 등교할 때 잠깐 북적이지만 다른 시간에는 조용하다. 다들 어디로 숨었는지 모르겠다. 코로나 이전에도 다르지 않았다. 제일 넓은 공터인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도 운동하기 위해 나온 어른들이 많지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손주를 봐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집에서 엄마와 둘이 지내는 시간이 많다. 친구와 노는 시간은 태권도학원에 나가서다. 요사이 아이들은 제멋대로 뛰어노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화된 틀에 따라 움직인다. 그걸 보면 붕어..

길위의단상 2021.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