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 30

랑탕 랜선 트레킹(4)

오늘부터 본격적인 랑탕 트레킹의 시작이다. 랑탕 계곡의 존재는 1940년대에 처음으로 외부에 알려졌고, 1971년에는 네팔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랑탕(Langtang)은 ‘야크를 따라간다’는 뜻으로 어느 스님이 도망가는 야크를 따라가다가 이 아름다운 계곡을 발견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명명법을 닮은 이름이다. 붓다 롯지에서 6시에 일어나 물휴지로 얼굴을 훔치는 간편 세수를 한다. 히말라야에서는 물이 부족할뿐더러 찬물 세수를 하면 고산병에 걸릴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히말라야는 게으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7시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발한다. 우리의 장도를 축복하는 듯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파랗다. 무거운 짐은 카고백에 담아 포터에게 넘기고, 배낭에는 물 두 통, ..

길위의단상 2021.03.31

뒷산 목련

뒷산에 우리 토종 목련이 있다. 산속이라 누가 심은 것 같지는 않고 야생 상태의 목련 같다. 그래서 사람이 가꾼 정원에서 보는 목련과는 느낌이 다르다. 목련은 백목련에 비해 단정하지는 않지만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가 느껴진다. 인공의 아름다움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호방한 멋이다. 뒷산을 산책하다가 목련을 만난 행운의 날이었다. 산을 내려와서 본 동네에 있는 백목련이다.

꽃들의향기 2021.03.30

랑탕 랜선 트레킹(3)

랑탕 트레킹의 출발점인 샤브루벤시까지 가는 날이다. 거리는 140km지만 길이 험해서 9시간이 걸린다.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캄캄한 호텔방에서 헤드렌턴에 의지해 세수를 하고 짐을 꾸린다. 함께 떠나는 일행은 우리 팀원 12명에 현지인 가이드 2명과 포터 12명, 총 26명이다. 전세 낸 중형 버스를 타고 아침도 먹지 못한 채 출발한다. 조금만 늦으면 카트만두 시내를 빠져나가는 데 애를 먹는다고 한다. 서울이나 카트만두나 도시는 어디나 교통 체증이 문제다. 팀원 12명이 묘하게 남자 6명, 여자 6명이다. 떠나오기 전에 아내는 미심쩍은 듯 말했다. “가는 사람들이 남녀 동수라고? 설마 일부러 짝을 맞춘 건 아니지?” 마치 우리가 히말라야로 쌍쌍파티라도 떠나는 듯 아내의 말투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여자의..

길위의단상 2021.03.30

랑탕 랜선 트레킹(2)

이런저런 근심이 비행기에 오르니 눈 녹듯이 사라진다. 그래 ‘케세라 세라’, 될 대로 되라지 뭐. 여행을 떠나는 맛이 본래 이런 것이다. 집을 떠날 때의 돌연한 기분 전환 즉, 익숙한 곳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향해 가는 기대와 설렘이다. 비행기 안에서 화장실에 가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띈다. 중학교 동기 친구다. “야, 이게 누구로? 니 어데 가노?” 동향 사람을 만나면 사투리가 나도 모르게 터진다. 사투리는 정서적 친밀감을 주지만 과잉 수용하면 독이 되는 걸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남이가!”로까지 나가면 곤란하다(이 친구 SNS에 들어갔다가 광화문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을 봤다. 뒷날 일이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포카라에 열흘 정도 쉬러 간단다. 옆에는 부인이 앉아 있다. 이 친구는 안나푸르..

길위의단상 2021.03.29

랑탕 랜선 트레킹(1)

다시 히말라야 랑탕을 걷는다. 코로나 시대라 몸이 직접 가는 게 아닌 랜선 트레킹이다. 인간의 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현실 같은 상상은 실제 경험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이보다 경제적인 여행법이 없다. 12년 전 12명의 트레커와 걸은 코스를 함께 다시 걷기로 한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복도에서 장 대장이 물었다. “안 선생, 히말라야 갈 생각 있어?” 내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왔다. “좋아!” 나는 이리 굴리고 저리 따져보는 햄릿형이지만 이때는 아니었다. 오랫동안 히말라야가 내 버킷 리스트 1순위였기 때문이다. 때맞은 줄탁동시(啐啄同時)였다. 전부터 장 대장에게 히말라야에는 꼭 가고 싶다고 말해두었던 터였다. 딱히 이유는 모르지만 히말라야는 나에게 이상향이었다...

길위의단상 2021.03.28

비망록 /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을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 비망록 / 문정희 비망록이란 그래도 잊지 말자는 다짐일 게다. 젊은 시절의 비망록을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한 생애를 허둥거린들 어떠리. 아프고 흔들린다는 건 내 가슴에 새긴 별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별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별을 바라보는 것으로 우리 인생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별을 품고 있는 사람은..

시읽는기쁨 2021.03.27

진달래 활짝 핀 뒷산

뒷산에 진달래가 활짝 폈다. 봄이 찾아오는 속도도 세월이 흐르는 것만큼 빠르다. 뒷산은 꽃이 적은 편인데 그나마 봄 진달래가 제일 볼 만하다. 진달래 때문인지 평상시보다 산에 드는 사람도 많아졌다. 진달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가족의 모습이 보기 좋다. 뒷산에서 제일 먼지 피는 꽃은 생강나무다. 생강나무꽃의 노란색과 진달래의 분홍색이 이맘 때면 잘 어울린다. 산자락에 있는 매화도 만개해 있고, 목련도 꽃을 열기 시작했다. 산 어귀에는 현호색도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뒷산도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다. 봄이 되니 새들의 노랫소리가 다양해지고 볼륨도 높아졌는데 눈에는 잘 띄지 않는다. 멀리서 박새, 곤줄박이, 딱따구리, 직박구리를 봤는데 그중에서는 박새가 제일 많다. 산을 내려오니 역시 참새들 세상이..

사진속일상 2021.03.26

다읽(9) - 무소유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 법정 스님의 수필 '무소유' 첫부분은 이같은 간디의 말로 시작한다. 에서 이 구절을 읽고 당신이 무척 부끄러웠다고 고백한다. 당신이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몇 달 전에 H 스님의 무소유 논란이 일었고, 인기 스타였던 스님은 한 순간에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수도자의 세속적인 소유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한참동안 이어졌다. "무소유란 물질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이 소유한 물질에 대한 애착이 무(無)라는 얘기다." 공공연히 이런 생각을 밝히는 수도자도 있다. 잘못하면 ..

읽고본느낌 2021.03.25

내맘대로 건강법

나이가 나이인지라 친구들 단톡방에는 건강 관련 글이 자주 올라온다.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듣는 건강 상식에 관한 내용이다. 나는 건강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데다 그 말이 그 말이어서 대부분 보지도 않고 삭제한다. 며칠 전에 한 친구가 허정 박사의 건강 비법이라면서 글을 하나 올렸다. 첫머리의 '자기 몸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기분 좋게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건강의 비법'이라는 말이 눈길을 끌었다. 일반적인 건강 상식은 무시하고 생긴 대로 살자는 것이다. 아무거나 잘 먹고, 잘 자고, 내 맘이 내키는 대로 살면 된다는 얘기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다. 너에게 맞는 식사법이 나에게 맞는 식사법과는 다르다. 획일적인 건강 상식은 없다. 박사의 건강법이 평소의 내 생각과 비슷해서 여기에 옮기며 내 생각을 첨부..

참살이의꿈 2021.03.24

경안천 버들(210323)

오랜만에 찾는 경안버들이다. 그동안 경안천이 한 달간 폐쇄되어 사람들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곳에서 고니의 사체가 발견되어 조류독감이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경안천은 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경안버들도 봄옷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경안버들은 다른 나무의 연초록색과는 다르다. 멀리서 봐서 확실치는 않으나 아직 잎이 나오기 전에 수꽃을 잔뜩 달고 있는 모양 같다. 시간이 지나면 곧 다른 색으로 변신할 것이다.

천년의나무 2021.03.23

마르코복음[9]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무릎 꿇고 간청했다. "선생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측은히 여겨 손을 펴서 만져주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시오." 그러자 곧 나병이 물러가고 그는 깨끗해졌다. 예수께서 곧 그를 내보내며 엄히 경고하셨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다만, 가서 제관에게 몸을 보이고, 모세가 지시한 것들을 갖다 바쳐 깨끗해졌다는 증거가 되게 하시오." 그러나 그가 떠나가서 널리 알리고 이야기를 퍼뜨리기 시작했으므로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외딴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래도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분을 찾아왔다. - 마르코 1,40-45 예수가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며 여러 고을을 찾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난..

삶의나침반 2021.03.22

삼지닥나무

길가에서 노란 꽃이 가득 피어 있는 나무를 보았다. 처음 보는 꽃나무였다.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일본닥나무라고 했다. 우리 전통 닥나무와 달리 일본에서 들여온 닥나무라는 것이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정식 이름이 삼지(三枝)닥나무다. 닥나무 껍질은 종이를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 이 삼지닥나무도 마찬가지 용도였겠지만 지금은 정원수로 주로 심는 것 같다. 멀리서도 눈에 잘 띄는 노란색 꽃이 특이하다. 한 송이에 많은 꽃이 달리는데 위에는 피면서 밑에서는 시든다. 재미있는 모양의 꽃을 가진 삼지닥나무다.

꽃들의향기 2021.03.21

소문이 돌다 / 정윤옥

복사꽃 활짝 핀 솔이네 집에 든 좀도둑 애지중지 보살펴온 난 몇 개 손 탔다 적금 부을 십오만 원은 손도 대지 않았다는데 그 별난 손님 베란다 화분들만 마구 헤집어놨다지 며칠 전 나도 시어골 골짝 몰래 들어가 고추순, 오이순, 다래순에 달래까지 사정없이 캐고 뜯고 훑어왔었는데 그 손님 꽃 도둑이면 난 영락없는 봄 도둑이네 - 소문이 돌다 / 정윤옥 그렇다면 나 역시 이 화려한 봄날의 활동사진을 공짜로 구경하는 도둑놈이 아닌가. 모델료를 내지 않고도 예쁜 꽃을 마음대로 찍는다. 멋진 자태의 홍매와 데이트를 하며 희희낙락한들 희롱죄로 고소 당하지도 않는다. 공으로 남의 것을 누리면서 뭘 더 바란단 말인가. 그런데 이 요염한 봄의 유혹에 누군들 좀도둑이 되지 않으리. 하느님도 슬며시 미소를 띠며 바라보실 것 ..

시읽는기쁨 2021.03.20

화엄사 홍매

어머니와 고흥에서 올라오는 길에 화엄사에 들렀다. 홍매를 보기 위해서였다. 재작년 봄에 직장 동료들과 가서 처음 만난 화엄사 홍매가 워낙 인상에 남았기 때문이다. 마침 이번 주가 화엄사 홍매의 절정기다. 화엄사 홍매는 나무의 자태와 함께 꽃 색깔이 유난히 붉고 진하다. 오죽하면 흑매(黑梅)라는 별칭이 있을까. 누구나 이 나무 앞에서 한두 번의 감탄사로는 부족하리라.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셔서 나는 30분 정도의 여유밖에 없었다.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사진 찍느라 분주하기만 했다. 반면에 느릿느릿 걸으시며 지긋이 눈으로 바라보시는 분이 계셨다. 그 모습이 꽃만큼 아름다웠다. 사진을 왜 찍는가, 라는 의문이 들지만 그래도 어딜 가면 카메라부터 챙기는 걸 보니 나도 어지간히 중독된 모양이다.

꽃들의향기 2021.03.19

동백과 동박새

어머니를 모시고 고흥에 다녀왔다. 고향에서 고흥까지 가는 데만 일곱 시간이 걸리는 긴 길이었다. 동생이 고흥에서 농장을 시작했는데 동백나무가 많다. 꽃이 피었다고 해서 꽃구경 겸 어머니와 함께 내려갔다. 개량 동백이라 수형은 정돈되고 멋진데 꽃은 토종만 못하다. 지금이 한창이니 춘백(春栢)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첫 번째 목표는 동박새를 보는 것이었는데 마지막 날 겨우 소원을 이루었다. 농장 주변의 동백꽃 풍경이다. 동백나무에는 직박구리, 박새, 곤줄박이가 주로 찾아왔다. 그중 열에 하나 동박새가 끼여 있다. 동박새는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카메라를 가져가면 이미 사라지고 없다. 한 곳에 1초 이상 머무르지 않는다. 사흘간 있는 동안 끝날에 겨우 몇 장 사진을 찍었다. 나에게는 그만큼 귀한 사진이다. ..

사진속일상 2021.03.19

새들에 관한 짧은 철학

작은 책이지만 내용은 알차다. 프랑스의 조류학자인 뒤부아(P. J. Dubois)와 철학자인 루소(E. Rousseau)가 함께 썼다. 새는 1억 5천만 년 전에 공룡에서 생겨난 아주 오래된 생명체다. 저자들은 새를 '작은 철학자'라고 부른다. 가볍고 조용히 살아가는 새들에게서 그들이 가진 철학을 발견한 것이다. 은 새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나 가르침을 열린 마음으로 들으면서 전하고 있다. 이 책에는 오리를 비롯해 22종의 새가 등장한다. 사랑, 번식, 싸움, 절제, 열정 등 각각이 가진 특징이 재미있고 묘사되어 있다. 오리의 털갈이 이클립스(eclipse), 암탉이 모래 목욕을 할 때의 행복, 바위종다리 부부의 유별난 바람기, 새장 밖을 떠날 줄 모르는 카나리아, 거위의 정신적 젖떼기, 도요새의 신비한..

읽고본느낌 2021.03.14

우리 동네에도 찾아온 봄

멀리서 전해오는 꽃소식만 들었는데 드디어 우리 동네에도 봄이 찾아왔다. 여기는 서울보다 위도가 낮지만 기온은 이삼 도 정도 낮은 지역이다. 봄이 늦게 찾아온다. 며칠 만에 밖에 나섰더니 집 주변은 꽃들로 환하다. 언제 이렇게 폭발하듯 나타났는지 신기하다. 봄까치꽃, 제비꽃, 산수유, 매화, 민들레를 같은 장소에서 한꺼번에 만났다. 봄까치꽃의 원래 이름은 개불알풀이다. 이름이 민망하다고 봄까치꽃으로 부른다. 전해지는 이름에는 나름의 이유와 정서가 녹아 있는데 쉽게 바꾸는 데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개불알풀은 일본명을 직역한 것이라 변경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너도나도 바구니 옆에 끼고서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시냇가에 앉아서 다리도 쉬고 ..

꽃들의향기 2021.03.14

나는 행복합니다

이 사나운 세상에서 그나마 주변이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술에 적당히 취할 때다. 너무 과해도 안 되고 소주 반 병에서 한 병 사이가 알맞다. 그 정도면 세상이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난다. 단, 주변이 시끌벅적하면 안 된다. 사람들의 수다 가운데서는 그런 기분을 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집에서 혼자 조용히 주신(酒神)을 영접할 때 나는 행복해진다. 아내가 처가에 갔다. 같이 내려갈 예정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사정이 생겨 아내만 내려갔다. 며칠간 혼자서 지내게 되었다. 몇 가지 계획이 궂은 날씨로 틀어지고 외출도 못한 채 집 안에서만 보내고 있다. 하필 이런 때 미세먼지가 몰려오고 하늘까지 잔뜩 찌푸릴 게 뭐람. 그러나 외로움을 즐길 좋은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평상시에..

참살이의꿈 2021.03.13

완벽한 타인

개봉한 지 벌써 2년 반이나 지난 영화다. 그때 지인한테서 재미있는 영화라고 추천받았는데 극장에 가지는 못했고, 느지막이 넷플릭스를 통해 봤다. 고향 친구 넷이 부부동반으로 집들이 모임을 갖는다. 한 사람의 제안으로 각자의 휴대폰을 테이블 중앙에 내놓고 연락 오는 내용을 모두 공개하기로 한다. 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나 할 것 없이 감추고 싶은 비밀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걸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서로의 관계는 파탄 나기 시작한다. 인간은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고 응큼하다. 만약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면 대부분의 인간 관계는 파국을 맞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가면을 쓰고 산다. '완벽한 타인'은 그런 인간의 본질을 코믹하게 잘 드러내 주는 영화다. 흔히 부부를 일심..

읽고본느낌 2021.03.12

마르코복음[8]

이른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께서 일어나 바깥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찾아 나섰다가 뵙고는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다른 데로 가까운 촌락들을 찾아갑시다. 거기서도 복음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사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온 갈릴래아에 있는 회당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셨다. - 마르코 1,35-39 고독한 예수의 모습이 읽힌다. 사람들은 복음에 귀 기울이기보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에 더 환호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주된 이유였다.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예수는 외딴 곳을 찾아가 기도를 한다. 여기서 기도는 무엇에 대한 간구이기보다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면서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

삶의나침반 2021.03.11

블랙 미러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세상의 모습을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다.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로, 전체가 19편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SF는 먼 미래를 다루어서 황당한 내용이 많지만 '블랙 미러'는 몇 년 뒤의 세상이라고 해도 괜찮을 정도로 현실감이 있다. 현재에서 조금만 더 기술이 발전하면 충분히 가능한 상황들이다. 두 달 전쯤에 본 것이지만 상당히 재미있었고, 일부는 충격적이기도 했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게 몇 편 있다. 하나는 '아크 엔젤'이다. 어린 딸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은 한 어머니가 딸의 머리에 칩을 이식한다. 그러면 집에서 컴퓨터로 위치뿐 아니라 아이가 보는 것을 직접 볼 수 있다. 밖에서 어떤 위험에 노출되는지 확인 가능하다. 심지어는 스트레스 필터를 통해 아이의 시각도 통제한다. 위..

읽고본느낌 2021.03.10

눈뜬장님 / 오탁번

연애할 때는 예쁜 것만 보였다 결혼한 뒤에는 예쁜 것 미운 것 반반씩 보였다 10년 20년 되니 예쁜 것은 잘 안 보였다 30년 40년 지나니 미운 것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눈뜬장님이 됐다 아내는 해가 갈수록 눈이 점점 밝아지나 보다 지난날이 빤히 보이는지 그 옛날 내 구린 짓 죄다 까발리며 옴짝달짝 못하게 한다 눈뜬장님 노약자한테 그러면 못써! - 눈뜬장님 / 오탁번 여자의 기억법은 특이하다. 과거의 서운했던 일은 기막히게 기억해 낸다. 둘 사이에 냉기류가 흐를 때면 어두운 창고 문이 저절로 열리나 보다. 아내의 넋두리를 들어보면 나는 무지 나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한때는 정면 대응을 했지만 이젠 흘려 넘길 수밖에 없다. 창고를 채울 자물쇠가 없다는 걸 늦게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아내도 눈뜬..

시읽는기쁨 2021.03.09

새를 기다리는 사람

새를 사랑하는 김재환 화가의 이태 동안의 탐조 일기다. 책은 사진 대신 화가가 직접 그린 그림으로 되어 있다. 같은 대상이지만 사진보다 그림은 훨씬 더 감성적이고 따스하다. 그래선지 새와 자연을 아끼는 화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올해 들어 경안천에서 황새를 보면서부터 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새를 관찰하고 기록하는지도 궁금해졌다. 책 제목처럼 새를 보는 데는 무엇보다 기다림의 인내가 필요한 것 같다. 어떤 경우에는 종일 같은 장소를 지키기도 한다. 마치 낚시를 하듯 느긋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새를 관찰하는 데도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은 새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책이다. 되도록이면 새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애쓰는 마음이 느껴져서 좋다. ..

읽고본느낌 2021.03.08

제발

제발 국민 좀 들먹거리지 말아 다오. 국민이 너희들의 호구가 아니다. 상식과 정의를 내세우는 건 이해한다. 그건 너희들의 기득권과 조직을 위한 상식과 정의란 걸 다 안다. 어깨들이 '차카게 살자'라고 한들 분노하지는 않는다. 비웃어주면 된다. 너희들의 상식과 정의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너희들은 뻑 하면 국민을 내세운다. 국민을 위해서 분골쇄신하겠다고 큰소리친다. 국민과 나라를 위한다는 그 의무감 좀 벗어줄 수 없겠니? 검찰총장이 짧은 성명을 내고 사표를 냈다. 그 중에 '국민'이 두 번이나 나온다. 제발 애꿎은 국민팔이는 하지 말아다오. 여든 야든, 어떤 이익집단이든 마찬가지다. 걸핏하면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흑심은 숨긴 채. 국민이 너희들의 들러리는 아니다. 국민은 너희들이 앞장서지 않..

길위의단상 2021.03.07

봄 맞는 뒷산

두 달 만에 뒷산을 찾다. 명색이 산이랍시고 오랜만에 오르는 산길에 숨이 가쁘다. 이제 날이 풀렸으니 산과 다시 친해져야겠다. 마침 동서가 등산화 두 켤레를 선물해서 그 값을 하기 위해서라도 산길을 부지런히 다녀야겠다고 다짐한다. 산은 봄 기운이 넉넉히 느껴지지만 시각적으로는 별 변화가 없다. 오로지 생강나무가 병아리 색깔의 꽃봉오리을 내고 있다. 이제 폭발하듯 봄꽃들이 다투어 필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산길에서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무 사이를 두리번거린다. 귀를 쫑긋하니 여러 노래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작은 새를 시야에 넣기는 좀체 쉽지 않다. 오늘은 딱따구리를 만나는 걸 목표로 하고 조심스레 탐색한다. 올라가는 길에 쇠박새를 처음 만나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딱따구리가 나무를 파는 소리가 ..

사진속일상 2021.03.06

성지(30) - 수리산 성지

성지 45. 수리산 성지 경기도 안양에 있는 수리산 성지는 최경환(崔京煥, 1804~1839)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하던 곳이다. 최경환 성인은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다. 1836년에 큰 아들을 모방 신부에 맡겨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성인은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앙 생활을 했지만 탄압을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마지막으로 수리산 밑에 정착해 살았다. 그러나 1839년 7월 기해박해 때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9월에 심한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포천옥에서 순교하였다.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사진속일상 2021.03.05

마지막 변산바람꽃

수리산에 핀 변산바람꽃을 처음 본 건 15년 전이었다. 병목안 계곡을 따라 작은 꽃밭이 펼쳐진 광경은 넋을 잃을 정도로 황홀했다. 바람 따라 살랑거리는 가녀린 변산아씨는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 뒤로 3월 초순이면 수리산을 찾아 변산바람꽃과 만났다. 그러나 해가 지날수록 소문이 나고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변산바람꽃은 사람의 발길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나중에는 눈을 부릅떠야 겨우 몇 송이를 만날 수 있었다. 너무 안타까워 더는 찾아갈 수가 없었다. 지금은 어떤 상태일까 궁금증이 일어 어제 수리산 그 장소를 찾아갔다. 찾는 사람 없이 입구가 조용한 걸 보니 예상대로 변산아씨가 사라진 게 분명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며 들어가 봤지만 역시 변산바람꽃은 없었다...

꽃들의향기 2021.03.04

3월 팔당의 고니와 기러기

하남을 지나다가 보니 팔당대교 아래에 고니와 기러기가 많이 보였다. 급히 차를 세우고 강변으로 나가 보았다. 지난번과 달리 도로에 가까운 모래톱에 주로 모여 있다. 기러기는 대부분 휴식을 취하고 있고, 고니는 활동하는 개체가 많다. 정확히 말하면 큰고니와 큰부리큰기러기로 보인다. 얘네들도 이제 떠날 때가 다가왔다. 나무고아원에서는 노랑지빠귀와 오목눈이를 보았다. 순식간에 움직여서 사진 찍기가 무척 어렵다. 새를 보는 재미에 몸을 많이 움직이고 있다. 새가 아니었으면 그냥 집에서 죽치고 있었을 텐데, 새 모습이아른거려 카메라를 들고 어디든지 나가게 된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재미와 함께 부수적으로 얻는 즐거움이다.

사진속일상 2021.03.03

3월 2일

등교하는 아이들을 오랜만에 본다. 오늘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날이다. 마스크를 쓴 채 느릿느릿 학교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코로나 때문에 작년에는 주로 재가 학습을 했으니 교실에서 친구들과 같이 공부하는 일이 낯설지 모른다. 3월 2일이 스트레스인 건 교사였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레임보다 또 어떻게 일 년을 티격태격하며 보낼까, 하는 걱정이 더 컸다.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는 것도 부담이었다. 나의 3월 2일은 늘 그렇게 납덩이처럼 무거운 심정으로 시작했다. "그래, 다섯 달만 버티면 방학이야." 이 말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출근했던 기억이 난다. 30년 넘게 교직에 있었지만 내 체질에는 맞지 않았다. 가르치는 일이 늘 사람과 접촉해야 해서 나 같이 사람과 부딪치는 게 서툰 입장에서는 가혹한 직업..

길위의단상 2021.03.02

노년에 경계할 것

감이 익어 홍시가 되듯 사람은 나이가 먹는다고 저절로 성숙해지지 않는다. 늙으면 바람 불듯 물 흐르듯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가당찮은 생각이다. 잘 익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 노년에 들어서고 보니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이 자기 독단에 빠지는 일이다. 노인은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잘못하면 자신의 경험을 과대 해석하는 착각에 빠진다. 특히 하나의 전문 분야에 평생을 보낸 사람일수록 이런 성향이 강하다. 지극히 조심해야 할 일이다. 자신의 기준이나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는 게 버릇이 된 사람을 흔하게 본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목소리가 크고 모임을 주도한다. 동조하고 따르는 사람도 많다. 자기 생각이나 믿음이 옳다고 확신하므로 남을 가르치려 하고 자신의 지식을 과시한다. 이런 함정에 빠지면 ..

참살이의꿈 2021.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