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 29

쇠비름 비빔밥 / 조성순

입에 녹는 안심살, 감칠맛 돌가자미, 세상의 별난 음식 먹어봐도 몇 번이면 물리고 말지. 고구마밭 지심맬 제 이랑 고랑 지천으로 자라 뽑아도 뽑아도 질긴 생명력으로 힘들게 하던 쇠비름, 다른 놈들은 뽑아서 흙만 털어놓으면 햇볕에 말라 거름이 되는데 이놈은 말라죽기는커녕 몇 주 후라도 비가 오면 어느새 뿌리를 박고 살아나지. 하는 수 없이 밭고랑 벗어난 길에 던져놓아 보지만 오가는 발길에 수없이 밟혀 형체도 분간 못할 지경이 되고서도 비만 오면 징그럽게 살아나는, 시난고난 앓고 난 뒤, 먹고 싶었다. 푹 삶은 쇠비름, 된장 고추장 고소한 참기름으로 비빈 - 쇠비름 비빔밥 / 조성순 쇠비름을 보면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중학생 시절 읍에서 외할머니와 둘이 살 때, 여름 별미는 된장으로 무친 쇠비름이었다. 보..

시읽는기쁨 2021.06.29

텃밭 네 이랑

한 이랑으로 시작한 텃밭이 야금야금 넓어지더니 네 이랑으로 늘어났다. 작물을 가꾸다 보니 아내는 자꾸 욕심이 생기나 보다. 작은 텃밭이지만 자라는 채소가 12종이나 된다. 어제는 새로 만든 이랑에 거름을 넣고 비닐을 덮는 작업을 했다. 힘이 들어가는 일은 내가 도와주지만 대부분의 텃밭 관리는 아내의 몫이다. 억지로가 아니라 본인이 원해서 하는 일이다. 텃밭에 나가 흙을 만지면 잡념이 사라져서 좋다고 한다. 처음 시작할 때 남자의 도움이 필요한 일 외에는 나는 관여하지 않기로 다짐을 받았다. 다행히 올해는 비가 자주 내려서 물 주는 수고도 할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우리 식탁에는 상추, 겨자, 고추, 깻잎 등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점심은 거의 쌈이다. 바로 따온 싱싱한 채소는 훨씬 더 맛이 있다...

사진속일상 2021.06.29

무서운 의학사

인류가 지금과 같은 의학 지식과 의료 시스템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많은 도전과 시행착오가 있었는지를 에피소드 중심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19세기 이전에는 의사들이 환자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해악을 끼친 면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현대 의학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겠다. 는 '무서운 병', '무서운 사람들', '무서운 의사', '무서운 의료'의 네 파트로 되어 있으며 짧은 에피소드로 소개하는 이재담 작가가 쓴 서양 의학사다. 책에 소개된 몇 개를 골라본다. # 1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1194~1250)는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으로 유명한 왕이었다. 그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절대로 납득하지 않아 주위 사람을 곤란하게 했다. 의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왕은 의..

읽고본느낌 2021.06.28

모감주나무꽃

이맘때면 노란 물감으로 칠한 듯 황금색으로 덮이는 나무가 있다. 모감주나무다. 나무 꽃이 노란색은 드문 편이라 더욱 눈에 잘 띈다. 자세히 보면 꽃잎에 빨간색이 섞여 있기도 하다. 가을에 맺히는 딱딱한 열매로는 염주를 만든다. 색깔이 황금빛이어선지 모감주나무 꽃말이 '번영'이다. 지난 2018년에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숙소인 백화원 뜰에 모감주나무를 심는 기념식수를 했다. 남북이 함께 화합하고 번영해 나가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비슷한 나무에 무환자나무가 있는데 둘을 헷갈려서 부르다가 '모감주'가 되지 않았나 싶다. 모감주나무의 영어 이름은 'golden rain tree'다. 꽃이 떨어지는 모양에서 황금비가 내리는 것으로 연상했나 보다. 다른 나무와 달리 초여름에 샛노란 꽃을 피우며 존재감..

꽃들의향기 2021.06.27

석 달만에 당구와 놀다

어제는 석 달만에 서울에 나가 당구를 치며 놀았다. 대상포진이 오래 지속된 통에 이제야 자유롭게 바깥출입을 하게 된 것이다. 멤버 여섯 명이 모였으니 출석률도 좋은 편이었다. 우리는 이른 시간에 만나기 때문에 당구장이 한산한 편이다. 상대적으로 코로나 걱정도 적다. 여섯 중에 넷은 코로나 백신 접종을 마쳤고, 둘은 소신에 따라 접종을 안 하고 있다. 그 또한 개인의 선택 사항이니 뭐라고 할 일은 아니겠다. 두 시간 정도 당구를 치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반주로 소주 한 병 정도를 했다. 오랜만에 만난 멤버들이 반갑기도 하고 심드렁하기도 했다. 친구들과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고 돌아온 Y도 있었다. 우리 중에서는 제일 젊고 활발하게 산다. 다시 당구장으로 들어가는 멤버들과 헤어져 나는 가까이 있는 양재시..

사진속일상 2021.06.26

아침이슬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1971년에 나왔으니 올해로 50년이 된다. '아침이슬'은 긴 세월 동안 국민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는 대표곡 중 하나다. 반정부 집회에서 많이 불려진 탓인지 70년대 중반에는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인기를 끌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를 만든 김민기가 부르는 '아침이슬'이 좋다. '아침이슬'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 학교에 근무할 때 만난 후배 P 여선생이다. P는 출근하는 첫날부터 남달랐다. 다른 신임교사들은 일찍 나와 교무회의에서 인사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P만 보이지 않았다. 교감이 신임교사 소개를 하려는 찰나 교무실 문이 꽈당 열리며 등산복에 배낭을 멘 젊은 여자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P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

길위의단상 2021.06.25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서울대병원에서 종양내과 전문의로 근무하고 있는 김범석 선생이 쓴 책이다. 암 환자를 담당하는 의사로서 만난 여러 죽음과 사연을 소개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성찰하게 한다. 부제가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Hodie Mihi, Cras Tibi" - 로마 시대 때 공동묘지 입구에 적혀 있었다는 글귀인데,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뜻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갈래의 인생길을 걸어가지만 끝은 똑같다. 오늘 누군가의 죽음이 내일 나의 죽음이 된다. 타인의 죽음은 바로 나의 죽음을 대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례들이 남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며, 그래서 너무나 절절이 가슴을 울린다. 여러 사례 중에서 중환자실에서 마지막을 맞은 어느 할머니의..

읽고본느낌 2021.06.24

내가 사랑하는 길

이웃 동네로 넘어가자면 산자락으로 난 이 길을 지나야 한다. 내가 제일 아끼며 사랑하는 길이다. 길이가 200m 남짓 정도로 짧지만 여기에 들면 아늑하고 편안해진다. 사람의 통행도 거의 없다. 돌더라도 다들 차를 이용하지 산길을 걸어서 옆 동네로 갈 사람은 없다. 어쩌다 드물게 나 같은 어슬렁족을 만나기도 한다. 곧 여기에 아파트 건설이 예정되어 있어 이 길도 상당 부분이 훼손될 것이다. 이미 길 곳곳에 포클레인이 할퀸 흔적이 보인다. 진즉에 이 길의 사계를 담아둘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는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단풍나무가 많아 길 한편이 붉게 물들면 여느 이름난 단풍 명소 못지않다. 올 가을 단풍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길을 지나 이웃 동네로 넘어가서 목현천과 경안천으로 이어지는 길을 ..

사진속일상 2021.06.23

후배의 독서당

후배 H가 북한강변에 독서당(讀書堂)을 마련해서 조용히 책 읽고 글 쓰며 살고 있다는 얘기는 연전에 들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마침 통화가 되었고, 몇 번 약속이 어긋나다가 마침내 어제 찾아가 보게 되었다. H는 교직에 있으면서 늦은 나이에 대학원을 다니고 박사 학위를 딴 학구적인 후배다. 퇴직을 하고 책을 원 없이 읽고 싶다며 남양주에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강변에 자리 잡은 전원주택의 2층에 세를 들어 지내고 있었는데, 내가 상상한 소박한 오두막과 달리 넓고 럭셔리했다. "언제 이렇게 부르주아로 변신한 거야?" "그동안 고생한 나에게 내가 주는 선물인 거죠." 주위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는 후배가 대견하고 부러웠다. 나도 세컨드 하우스 개념의 이런 공간 하나 빌리고 싶은 것..

참살이의꿈 2021.06.22

마르코복음[16]

예수께서 산에 올라 마음에 두신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당신 앞으로 나아왔다. 그리고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이름 지으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는 것이요 또한 그들을 보내어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 내쫓는 권능을 갖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열둘을 뽑으셨는데, 시몬에게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는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주셨으니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이다. 그밖에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당신을 넘겨준 유다 이스가리옷이었다. - 마르코 3,13-19 예수의 열두 제자 명단은 세 복음서에 나오는데,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시몬(베드로) 제베대..

삶의나침반 2021.06.21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미상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나는 잠들지 않습니다 나는 천의 바람, 천의 숨결로 흩날립니다 나는 눈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입니다 나는 무르익은 곡식 비추는 햇빛이며 나는 부드러운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아침 소리에 깨어날 때 나는 하늘을 고요히 맴돌고 있습니다 나는 밤하늘에 비치는 따스한 별입니다 내 무덤 앞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나는 죽지 않습니다. -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미상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I am the diamond glint on snow. I am the sunlight on ripe..

시읽는기쁨 2021.06.20

다읽(11) - 월든

이번에 수문출판사에서 안정효 선생의 번역본이 나왔다. 새로운 번역은 어떤 맛일까 싶어 책을 사서 읽었다. 책 제목은 소로우의 원제 그대로 써서 이다. 을 다시 읽으니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20여 년 전의 내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지금 책장에 있는 책 중에서 다섯 권을 남기라면 도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만큼 나에게는 소중했으며 지금도 역시 귀한 책이다. 내 내면의 북소리가 울릴 때 그 울림을 외면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는 책이 이다. 그리고 이 책에 스며 있는 '월든 정신'을 나는 사랑한다. '월든 정신'은 소로우가 숲으로 들어간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 잘 나와 있다. "내가 숲으로 들어간 까닭은 인생을 생생하게 의식하며 살아가고, 삶의 본질적인 면목들만 접하여, 인생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를 내가..

읽고본느낌 2021.06.19

여름 속 가을 하늘

파란 하늘, 향기로운 바람, 녹색 숲길, 일 년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청명한 하늘이 열렸다. 집에만 있기에는 너무 아까울 텐데 마침 트레커에서 아차산 등산이 약속된 날이었다. 트레커와 함께 산행하는 것은 8개월만이다. 오랜만의 만남을 축복하듯 이렇게 복된 날씨가 펼쳐졌다. 우선 산 아래에서 커피 한 잔으로 담소를 나누고, 김밥을 사 가지고 산에 올랐다. 아차산 산길은 전망대도 많고 쉼터도 많았다. 아래로는 아무리 봐도 신기하고 감사한 하늘이 눈이 시리게 빛났다. 산길에서 체력 테스트 겸 속력을 내 봤는데 몸은 그런대로 쓸 만했다. 우리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오솔길을 따라 4보루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걸음수가 18,000보가 찍혔다. 멋진 날씨에 상쾌한 걸음이었다.

사진속일상 2021.06.17

평화를 빕니다

처음 가톨릭 미사에 참예하였을 때 인상적인 두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죄를 회개하면서 "내 탓이오"라고 오른손으로 왼편 가슴을 세 번 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미사 끝 부분에서 "평화를 빕니다"라고 신자들끼리 나누는 인사였다. 요사이는 성당 미사에 가뭄에 콩 나듯 나가면서 마지못해 앉아 있지만, 이 두 장면에서만은 여전히 가슴이 뭉클해진다. 종교의 알짬이 이 둘 속에 스며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종교심(宗敎心)이란 내면적으로는 '내 탓'이라는 자기 반성이 핵심이다. 자기 성찰 없는 믿음은 위선이며 기만일 뿐이다. 바리사이인들이 예수한테서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비난을 받은 것은 그들의 믿음에 자기 성찰이 빠지고 오만과 독단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선을 안으로 수렴하고 겸손해지도록 가르치는 것이..

참살이의꿈 2021.06.15

뒷산 털중나리

꽃이 귀한 뒷산에서는 무슨 꽃이든 반갑다. 그런데 여름 산길을 상징하는 털중나리가 뒷산에도 있다는 걸 이제야 발견했다. 솔직히 말하면 중나리, 털중나리, 말나리 등을 구분할 실력이 나에게는 없다. 각각의 특징을 설명할 걸 봐도 잘 모르겠다. 그저 제일 흔하게 볼 수 있으니 털중나리라고 추정할 뿐이다. 어쨌든 반가운 털중나리다. 당분간은 네가 산길을 걷는 또 하나의 기쁨이 되어 줄 것이다.

꽃들의향기 2021.06.14

뻐꾸기를 따라간 뒷산

뻐꾸기가 뒷산을 호령하는 계절이다. 이때가 되면 뻐꾸기와 검은등뻐꾸기 노랫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하루 종일 집안을 채운다. 뻐꾸기는 자신이 뒷산의 주인이라는 듯 소리도 우렁차다. 오래전부터 검은등뻐꾸기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오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뒷산을 오른다. 다행히 검은등뻐꾸기는 먼 곳이 아니라 산길 주변을 맴돌며 노래한다. 내 머리 바로 위에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소리만 들릴 뿐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여름이 되면 나뭇잎이 무성해서 새와 만나는 데 방해가 된다. 새들은 은폐하기 좋겠지만 탐조가는 애간장을 태워야 한다. 들리는 소리를 짐작해 검은등뻐꾸기가 있을 나무를 지목하고 샅샅이 훑어도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중..

사진속일상 2021.06.13

교실 안의 야크

처음 만나는 부탄 영화다. 부탄이라고 하면 불교 국가면서 은둔의 왕국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국민 행복을 국가 경영의 최우선에 두는 탓에 세계 행복도 조사에서 항상 상위권을 차지한다.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마음이 부자인 나라다. 이 영화의 주제는 역시 행복이다. 유겐이라는 젊은 교사가 부탄에서도 가장 외진 벽지 학교로 발령을 받는다. 일주일을 걸어가야 하는 해발 5천 미터 되는 '루나나'라는 산골 마을이다. 호주로 이민을 꿈꾸는 유겐인지라 처음에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유겐에게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고립된 오지 생활은 적응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청정한 대자연 속에서 순박한 아이들과 주민을 만나면서 유겐의 마음은 조금씩 열린다. '교실 안의 야크'라는 제목대로 아이들이 수업을..

읽고본느낌 2021.06.12

작은 것을 위하여 / 이기철

굴뚝새들은 조그맣게 산다 강아지풀 속이나 탱자나무 숲 속에 살면서도 그들은 즐겁고 물여뀌 잎새 위에서도 그들은 깃을 묻고 잠들 줄 안다 작은 빗방울 일부러 피하지 않고 숯더미 같은 것도 부리로 쪼으며 발톱으로 어루만진다 인가에서 울려오는 차임벨 소리에 놀란 눈을 뜨고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에 가슴은 떨리지만 밤과 느릅나무 잎새와 어둠 속의 별빛을 바라보며 그들은 조용한 화해와 순응의 하룻밤을 새우고 짧은 꿈속에 저들의 생애의 몇 토막 이야기를 묻는다 아카시아꽃을 떨어뜨리고 불어온 바람이 깃털 속에 박히고 박하꽃 피운 바람이 부리 끝에 와 머무는 밤에도 그들의 하루는 어둠 속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날빛을 맞으며 가을로 간다 여름이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들녘 끝에 개비름꽃 한 점 피웠다 지우듯이 가을은 아무도..

시읽는기쁨 2021.06.11

마르코복음[15]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시니, 갈릴래아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또한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 요르단 강 건너편, 그리고 띠로와 시돈 근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몰려왔다. 예수께서는 군중이 마구 밀어붙이지 못하도록, 당신이 타실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예수께서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이 너도나도 그분을 만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들도 그분을 뵐 적마다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나게 알리지 말라고 그들을 크게 꾸짖으셨다. - 마르코 3, 7-12 갈릴래아 민중들이 주로 예수를 따라 다녔지만 여기 나오는 대로 먼 이..

삶의나침반 2021.06.10

<월든> 두 권이 오다

주문한 두 권이 왔다. 한 권은 은행나무에서 펴낸 책으로 50만 부 특별판이다. 1993년 초판이 나온 이래 그동안 50만 부가 출판되었다니 대단한 기록이다. 기념이 될까 해서 소장본으로 샀지만 근간에 만나게 될 책을 좋아하는 후배에게 선물할 예정이다. 다른 한 권은 안정효 선생이 새로 번역한 이다. 수문출판사에서 이번에 처음 나온 책이다. 새 번역본으로 다시 읽어 보고 싶어 구입했다. 은 내 사추기(思秋期) 때 살아갈 방향을 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책이다. 그때를 되돌아보면 아련히 가슴이 저며온다. 한 권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지금 여기에 이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은 소로우의 을 만났기 때문이다. 탓이라고 해야 할지,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안정효 선생이 번역한 을 읽고 있다. 정말..

사진속일상 2021.06.09

초여름 삼패공원

낮 기온이 30도 가까이 올랐다. 남양주에 있는 삼패공원에 나가보니 여름이 가까워진 걸 알겠다. 따가운 햇볕에 30분 정도 걸으니 금방 지쳐버린다. 이젠 걷기도 한낮 시간은 피해야 할 것 같다. 지금 삼패공원에는 수레국화 꽃밭이 펼쳐져 있다. 사이사이에 꽃양귀비가 섞여 있어 보라색만의 단조로움을 지워준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꽃 감상을 제대로 못해 아쉬웠다. 새소리가 요란스러워 따라가니 찌르레기가 떼로 몰려서 공원을 휘젓고 다닌다. 삼패공원이 찌르레기의 단체 서식지 같다. 얼마나 텃세가 심한지 드센 까치조차 여기서는 얌전하다. 한참 동안 찌르레기들이 노는 모양을 구경했다.

사진속일상 2021.06.08

물빛버즘(210604)

올해 봄은 나에게는 잃어버린 봄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경계하고, 대상포진 바이러스와는 싸우느라 주변을 둘러볼 틈이 없었다. 사태가 좀 진정된 뒤 나가 본 물빛공원의 버즘나무의 초록에 그래서 더욱 눈이 부셨다. 이 버즘나무는 물빛공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나무다. 연륜이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대신 싱싱한 생명력을 내뿜는 혈기왕성한 나무다. 나무 옆에 서면 나무가 가진 에너지를 담뿍 받는 것 같다. 앞으로 이 나무를 물빛공원의 '나의 나무'로 정하고 친구로 삼기로 한다. 친구를 한다는 것은 널 유심히 지켜보며 말을 걸겠다는 뜻이다. 앞으로 자주 만나기로 하자!

천년의나무 2021.06.07

경계에 흐르다

최진석 선생의 철학 산문집이다. 철학이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것일진대, 제목처럼 이 책의 중심 주제는 '경계적 삶'이다. 여러 매체에 발표한 글을 모은 탓에 산만하긴 하지만 선생이 말하려는 바는 명료하게 읽힌다. '경계, 비밀스러운 탄성'이라는 서문에서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경계에 있을 때만 오롯이 '나'다. 경계에 서지 않는 한, 한쪽의 수호자일 뿐이다. 정해진 틀을 지키는 문지기 개다. 경계에 서야 비로소 변화와 함께 할 수 있다. 변화는 경계의 연속적 중첩이기 때문이다. '진짜 나(眞我)'는 상相에 짓눌리지 않는 존재다. 이러면 부처가 되는 필요조건은 일단 채워진다. 동네 부처라도 될 요량이면 경계의 흐름 속으로 비집고 스며들어야 한다. 경계에 서 있으면 과거에 붙잡히지..

읽고본느낌 2021.06.06

늙어서 그래요

대상포진을 맞이한 지 50일이 지났다. 이제야 종착역이 가까워 보이지만 아직 끝은 아니다. 얼굴에 난 포진은 3주 정도 지나니 아물었지만 가려움증의 여진은 계속이다. 개미 한 마리가 멋대로 내 얼굴을 기어 다니고 있다. 대상포진은 뒤끝이 사나운 질병이다. 만만히 볼 게 아니다.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고 의사가 말했지만 끈질긴 개미 한 마리 때문에 내 발로 다시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낫지 않느냐는 질문에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늙어서 그래요." (젊은 의사는 "노화 탓입니다"라고 말했지만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늙어서 그래요. 시간이 약이니 그냥 느긋이 기다리세요.") 서운했으나 의사 말이 틀리지 않다. 늙었으니 늙었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노년이 되니 이상이 생긴 뒤의..

길위의단상 2021.06.05

물빛공원 장미

물빛공원에는 장미 터널이 있다. 때가 지나기는 했지만 장미 구경 겸 산책을 하기 위해 물빛공원에 나갔다. 꽃잎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으나 아직은 장미가 볼 만했다. 장미가 진다는 것은 봄이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다는 신호다. 이제야 긴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올봄에 느닷없이 닥친 일들을 통해 나는 더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다 공부지요!"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여유를 찾을 것도 같다. 그동안 '봄장마'라 할 정도로 흐리고 비 오는 날이 잦았다. 오늘은 모처럼 맑게 갠 화창한 날이다.

꽃들의향기 2021.06.04

AZ 백신을 맞다

어제 아내와 같이 동네 내과에서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 AZ) 백신을 맞았다. 병원 대기실은 백신을 맞은 사람과 맞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약 20분 정도 기다리니 우리 순서가 왔다. 의사의 간단한 문진을 거친 뒤 주사 맞는 시간은 잠깐이었다. 개운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했다. 백신의 부작용 때문에 온갖 설이 SNS를 달구고 있다. 사람들이 너무 호들갑을 떤다 싶다. 솔직히 나는 코로나 백신도 독감 백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사의 부작용은 어디에나 있는 것인데, 굳이 코로나 백신을 불신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기저질환이 있을 경우에는 조심히 살펴보는 게 마땅하지만, 건강한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지나치다 싶다. 주사를 맞은지 하루가 지났지만 나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 오..

사진속일상 2021.06.03

내가 생각하는 것은 / 백석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단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단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류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 내가 생각하는 것은 / 백석 1935년, 친구의 결혼식 축하 모임에서 만난 여학생(박경련, 蘭)에게 백석은 한눈에 반한다...

시읽는기쁨 2021.06.02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작가가 북한에서의 시인 백석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에서는 본명인 백기행으로 나온다. 해방 뒤 북한에 남은 백석은 전쟁을 거치고 숙청의 파도에서 살아남아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일곱 해'란 백석이 동시를 쓰기 시작한 1956년부터 삼수에 있는 관평협동조합으로 추방되어 완전히 절필하게 된 1962년까지를 말한다. 백석의 북한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으므로 은 많은 부분이 작가의 상상으로 그려져 있다. 전쟁 뒤 북쪽은 김일성의 유일사상만 통하던 통제된 사회였다. 문학도 혁명의 도구일 뿐이어서 백석 같이 감성이 풍부한 순수시를 썼다가는 반동분자로 몰리는 세상이었다. 생존하기 위해서 백석은 옛 시를 잊고 혁명과 증오를 부추기는 동시를 써야 했다. 백석이 그때 쓴 동시를 보면 ..

읽고본느낌 2021.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