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 33

보신탕 한 그릇

염제(炎帝)의 위력이 대단하다. 매일 에어컨 신세를 지는 게 어느덧 두 주째다. 무더위 속에서 무리할 일은 없지만 활동량이 적으니 몸의 기력이 떨어지는 게 확연하다. 에너지 보충을 위해 아내와 보신탕 집을 찾았다. 근년에는 보신탕 먹을 기회가 한 해에 한두 번밖에 안 된다. 전에 비해 확 줄었다. 대신 추어탕을 주로 한다. 그래도 한여름이 되면 가끔 보신탕에 구미가 당긴다. 아내가 뇌 수술을 받은 뒤에 조리를 하면서 보신탕을 참 많이 먹었다. 의사도 기력 회복과 상처가 빨리 아무는 데 도움이 된다고 권했다. 거의 한 달은 상식을 했을 것이다. 나는 퇴근하면서 보신탕을 사 가지고 가는 게 일과였다. 아내가 회복하는 데 보신탕의 도움이 컸다고 확신한다. 어느 신부님이 하는 말을 들었다. 오래전 신학교에 다닐..

사진속일상 2021.07.30

새 / 정유경

새는 길을 외어 두지 않아요 새는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하늘을 날고 그래서 새가 가는 길은 늘 새 길 - 새 / 정유경 새는 늘 '새' 길을 날아서 이름이 '새'인가 보다. 반면에 더위가 계속된다고 짜증 내고, 매일이 그저 그렇고 그런 날이라고 불평하는 나는 '헌'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게다. 기억의 찌꺼기를 걷어내면 오늘은 얼마나 찬란한 하루인가. 마침 창 밖으로 물까치 한 마리가 짧은 선을 긋고 지나간다. 저 상쾌한 가벼움에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그 흔적을 바라본다.

시읽는기쁨 2021.07.29

마지막 차르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와 가족의 몰락을 다룬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드라마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황실 가족은 유폐되었다가 일곱 가족이 동시에 처형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마지막 차르'는 니콜라이 2세가 알렉산드라와 결혼하고 차르로 즉위하는 1894년부터 마지막 때인 1918년까지의 이야기다. 워낙 격변기였는 데다 흥미진진한 요소가 많아 6부작이 짧을 정도로 몰입해 봤다. 역사학자의 고증을 통해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한 점도 좋았다. 니콜라이 2세는 사람은 좋지만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무능한 황제로 나온다. 거기에 황후마저 요승 라스푸틴에 빠져 가족의 안위만 살필 뿐 백성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하느라 황제가 전선에 나가 있는 동안 황후..

읽고본느낌 2021.07.28

개똥지빠귀도 "덥다 더워"

여름 한낮, 나뭇가지에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입을 벌린 채 힘겹게 앉아 있다. 가까이 다가가도 만사가 귀찮다는 듯 거들떠보지 않는다. 보통 때 같으면 작은 인기척에도 훌쩍 도망갔을 테다. 개똥지빠귀가 내쉬는 가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름 더위가 힘든 것은 새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너무 집안에만 있는 것 같아 일부러 한낮을 골라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탈까 했지만 좀 힘겹더라도 걷는 쪽을 택했다. 돌아와 샤워를 하니 개운하고 좋다. 덥다고 불평하지만 이것이 여름다운 날씨가 아닌가. 미세먼지 없이 맑은 데다 하늘은 본래 색깔대로 파랗다. 거기에 흰 구름의 장난질 치는 모습이 볼 만하다. 이 또한 멋진 계절이 아닌가!

사진속일상 2021.07.27

저녁 산책

35도를 오르내리는 더위가 열흘째 이어지고 있다. 더위 때문에 바깥출입도 뜸해졌다. 코로나 시대의 피서는 돌아다니기보다 집에 가만히 있기다. 덜 움직이고 뒹굴거리다 보면 더위도 잊는다. 며칠 전에 도쿄 올림픽이 개막해서 집안에서도 볼거리가 풍성하다. 따가운 햇살이 힘을 잃을 저녁 무렵에 아내와 동네 산책을 나선다. 먼저 텃밭에 들린다. 텃밭에는 손주가 심은 수박이 있다. 하필 수박이 제일 비실거리며 줄기가 뻗질 못한다. 이러다간 수박 달리는 걸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손주가 실망할까 봐 아내는 걱정이다. 둘이 페트병에 물을 가득 담아가서 수박에 듬뿍 준다. 올해는 텃밭에서 나오는 야채 덕을 톡톡히 본다. 고추, 가지, 상추, 깻잎, 방울토마토 등 식탁에는 텃밭에서 나오는 싱싱한 야채가 매일 오른다. 아..

사진속일상 2021.07.26

어느 청소노동자의 죽음

며칠 전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이다. 이런 서울대가 부끄럽다 / 송현숙 논설위원 모멸감. 업신여김과 깔봄을 당하여 느끼는 수치스러운 느낌. 지난달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이후 벌어지는 일들을 쫓는 내내 떼어낼 수 없었던 감정은 이 세 글자였다. 어제까지 일하던 직원의 죽음을 한사코 모른 체하려는 그 조직의 모습에, 고인이 생전 느꼈을 감정이 어땠을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난달 26일 아침, 남편과 함께 출근했던 59세 서울대 청소노동자는 퇴근하지 못했다. 막내딸과의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동료들은 당시 힘들고 멍한 고인의 얼굴을 기억했다. 평소 별다른 지병 없이 건강했던 그는 관악학생생활관(서울대 925동·기숙사) 청소노동자 휴게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건이 외부로 알려진 건 사망 열흘 만이었다. 가족..

참살이의꿈 2021.07.25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 메리 올리버

나는 학교에서 나온다 재빨리 그리고 정원들을 지나 숲으로 간다, 그리고 그동안 배운 걸 잊는 데 여름을 다 보낸다 2 곱하기 2, 근면 등등, 겸손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법, 성공하는 법 등등, 기계와 기름과 플라스틱과 돈 등등. 가을쯤 되면 어느 정도 회복되지만, 다시 불려간다 분필 가루 날리는 교실과 책상으로, 거기 앉아서 추억한다 강물이 조약돌을 굴리던 광경을, 야생 굴뚝새들이 통장에 돈 한 푼 없으면서도 노래하던 소리를, 꽃들이 빛으로만 된 옷을 입고 있던 모습을. -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 메리 올리버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 1935~2019)가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듣는다. 메리 올리버는 자연의 경이와 그 속에서 소박한 삶을 사는 기쁨을 노래한..

시읽는기쁨 2021.07.24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책 제목에 나오는 '좋은 국가'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 책의 내용으로 봤을 때 지은이가 말하는 '좋은 국가'는 '선진국' '강국' '선도 국가'의 의미로 쓰인 것 같다. 나는 '좋은 국가'를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에 바탕을 둔 나라라고 생각한다. 현재 지구촌에서 찾는다면 부탄이 제일 비슷하지 않을까.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국민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나라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지나고 말았다. 는 스웨덴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스톡홀름 싱크 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최연혁 선생이 쓴 책이다. 지나온 역사에서 세계의 중심 국가로 부상했던 여러 나라 - 스페인, 네델란드, 프랑스, 영국, 독..

읽고본느낌 2021.07.23

습지공원 연꽃

경안천습지생태공원에 있는 호수는 여름이면 연밭으로 변한다. 그런데 연꽃은 볼 품이 없다. 듬성듬성 필뿐 아니라 백련 일색이라 단조롭다. 이름난 연꽃 명소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그래도 올해는 다른 때보다 연꽃을 많이 볼 수 있다. 해가 지날 때마다 조금씩 풍성해진다. 내년이면 더 나아지리라 기대해 본다. 공원 건너편 경안천 연꽃이 훨씬 더 화려하다. 그런데 저기는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 경안천습지생태공원에서는 금개구리를 가끔 만난다. 금개구리는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어 있어 특별히 보호 관리하는 종이다. 초록색 몸체에 눈 뒤로 난 금빛 줄이 선명하다.

꽃들의향기 2021.07.22

한 장의 사진(27)

40년 전쯤 여름방학 때 반 아이들을 데리고 도담삼봉으로 캠핑을 갔을 때의 사진이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시절로 학교에도 교복 자율화 등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군사 정권은 교과목 외에 학생들의 야외 활동을 장려했다. 그때 내가 근무했던 중학교의 G 교장 선생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분은 내가 만난 교장 중 가장 특이하고 개성이 있었다. 고시 출신으로 문교부에서 행정 관료로 지내다가 중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았는데, 상관과 의견 충돌로 좌천되어 내려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만큼 고집 세고 자기 소신이 강했다. 학교 점검차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하는 일이 있다. 학교에서는 대청소를 하며 손님맞이 준비를 하는 게 보통이다. 수업 참관도 하기 때문에 학생이나 교사나 귀찮고 긴장이 된다. 맨손 수업..

길위의단상 2021.07.21

동네 여름꽃

오후에 동네를 산책하다가 갑자가 쏟아지는 소나기를 두 차례 만났다. 우산을 써도 잠깐 동안에 온 몸이 다 젖었다. 그렇더라도 여름 소나기는 반갑다. 후덥지근한 대기가 한순간에 청량한 기운으로 바뀐다. 따가운 여름 햇살에 목말랐던 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범부채 △ 나무수국 △ 원추리 △ 참나리 △ 털여뀌 △ 자귀나무 △ 능소화 △ 해바라기 △ 메꽃 △ 장미 △ 채송화

꽃들의향기 2021.07.20

마르코복음[18]

예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하도 많은 군중이 모여든지라, 그분은 배에 올라 호수에 자리잡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있었다.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많은 가르침을 베푸셨다. "들어 보시오. 씨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습니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는데 흙이 깊지 않아 싹이 곧 돋아나기는 했지만 해가 솟자 타버렸습니다. 뿌리가 없어서 말랐습니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우거지자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 무럭무럭 자라서 열매를 맺는데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맺었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시..

삶의나침반 2021.07.19

낮달맞이꽃

밤에 핀다고 달맞이꽃인데 이놈은 반대로 낮에 핀다. 자신의 정체성을 180도로 뒤바꿔 버렸다. 달맞이꽃이라는 이름을 붙여줘도 될까 싶지만, 낮에 나오는 달을 마중하는 꽃이라고 해석하기로 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들 멋대로 이름을 붙여놓고는 이러쿵저러쿵 재단하는 것이 꽃 입장에서는 같잖을지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낮달맞이꽃보다 그냥 '분홍달맞이꽃'으로 부르면 어떨까 싶다. 꽃은 분홍 바탕에 빨간색 실핏줄 같은 줄이 선연하다. 무척 곱고 순결한 분홍색이다. 중남미 지역이 원산지라고 한다.

꽃들의향기 2021.07.18

어떤 도둑질 / 윤정옥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지금껏 나는 칠순 노모의 김치를 먹고 있다 음식 비법을 전수하기 싫은 이름 난 식당 주인처럼 도대체 내가 개입할 틈을 주지 않고 해치워버린다 김장해놨으니 가져가거라 돌멩이 맞을 소리지만 왜 그랬냐고 날 부르지 그랬냐고 하면서도 한 시간 후에는 소요산쯤을 지나고 있다 차로 한 시간 반 거리 철대문을 요란스럽게 열고 들어가 고구마, 마늘, 김치, 만두, 가래떡을 한 아름 들고 나온다 도둑질을 당당하게 하고 나온다 아마 나는 엄마의 인생에서 알토란 같은 시간을 도둑질했을 것이다 단번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서너 번의 분절로 허리 펴 선 자리, 발끝마저 점점 흐릿해지는 엄마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금껏 바윗덩이를 지고 무심한 산을 올랐듯 오르는 것밖에는 알지 못하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

시읽는기쁨 2021.07.17

물빛버즘(210716)

7월의 물빛버즘은 잎은 초록으로 성장(盛裝)을 했지만 줄기는 껍질이 갈라지고 떨어지며 어수선하다. 버즘나무가 껍질을 벗는 시기가 있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다. 주로 도시의 가로수로 만나는 버즘나무는 가지가 잘려서 기형이 되어 볼 품이 없다. 소음과 빛 공해로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다. 그러나 이 버즘나무는 자연 상태 그대로의 온전한 수형으로 자란다. 생육 환경이 아주 좋다. "넌 복 받은 나무야. 네 품성을 마음껏 뽐내며 잘 자라다오!"

천년의나무 2021.07.16

물빛공원으로 쫓겨나다

아침부터 30도에 육박하는 더위다. 장마 뒤끝이라 습도가 높아 체감 기온은 훨씬 더 높게 느껴진다. 오죽하면 베트남 사람조차 한국의 더위를 견디기 힘들다 하겠는가. 설상가상으로 우리 동의 한 집이 이 여름에 수리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동의서를 받아갔는데 간간이 들리던 공사 소음이 어제부터 심해졌다. 오늘은 일찍부터 벽을 울리는 드릴 소리 때문에 집에 있지를 못하겠다. 코로나 때문에 학생들은 재가학습을 할 텐데 다른 집은 어떻게 견디는지 모르겠다. 할 수 없이 가까운 물빛공원으로 아내와 피난을 갔다. 여름 하늘은 눈부시게 파랗다. 그러나 햇살이 따가우니 공원 둘레길에서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 신경이 쓰이지 않으니 좋은 점도 있다. 물빛공원의 상징물은 이 꽃돌고래다. 저수지와 돌고래가 어울리지는 않지만 하..

사진속일상 2021.07.16

오쇼 라즈니쉬의 문제적 유토피아

1980년대 후반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오쇼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내 책장에도 그때 사서 읽었던 오쇼 책이 10여 권 꽂혀 있다. 기성 종교나 체제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던 사람들이 오쇼에 심취했다.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를 넘나들며 펼치는 그의 화려한 필체에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뭔가가 있었다. '오쇼 라즈니쉬의 문제적 유토피아'는 넷플릭스에서 만든 6부작 다큐멘터리다. 1981년에 오쇼는 인도 아쉬람을 정리하고 미국 오리건주 앤털로프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다.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오쇼의 비서였던 쉴라였다. 이 다큐멘터리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공동체 실험의 시작부터, 주민과의 갈등으로 실패해서 1985년에 철수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쉴라를 비롯해서 그때의 운동에 함..

읽고본느낌 2021.07.15

알지 못하는 사람의 죽음

반년 전이었다. '양자인문학'이라는 재미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친구의 소개로 B 선생의 블로그를 찾게 되었다. 양자론은 물리를 공부한 나도 몇 문장 쓰기 어려운데 하물며 인문학을 전공한 분이라니, 라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블로그에서 만나게 된 B 선생은 다방면으로 박식하고 영민한 분이었다. 그분 블로그에는 종교, 철학, 예술, 여행, 과학 등에서 수준 높은 글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B 선생은 암 투병중이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양자인문학' 등 다양한 글을 쉼 없이 쓰는 게 인상적이었다. 물론 암 투병 과정도 블로그에 올리고 있었다. 힘든 과정에서도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인생을 긍정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B 선생은 항암치료를 '살래의 길'이라고 명명하며 생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나는 연..

참살이의꿈 2021.07.14

털여뀌

털여뀌는 여뀌 종류 중에서도 제일 체구가 크다. 키는 내 만하고, 잎은 내 손바닥 두 개를 겹친 만큼 넓다. 한마디로 시원시원하게 생겼다. 줄기에 보송보송한 털이 나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털여뀌인가 보다. 붉은색의 꽃이 여름에 총총하게 맺힌다. 이제 장마가 시들해지면서 무더위가 찾아왔다. 사소한 일에 짜증을 부리지 말고 털여뀌처럼 건들건들 호탕하게 살아야겠다.

꽃들의향기 2021.07.13

민망하다

얼마 전에 뒷산길을 걸을 때였다. 굽은 길을 돌아나가다가 화들짝 놀랐다. 길 옆에서 한 여자가 달덩이 같은 엉덩이를 드러내고 볼일을 보고 있었다. 거리는 5m 정도로 무척 가까웠다. 뒤로 비스듬히 돌아앉은 여자는 외간남자가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황당 시추에이션을 어떡 하지? 나는 알아채지 못하게 돌아서서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도망쳤다. 다행히 서너 걸음만 걸으면 보이지 않게 길은 굽어 있었다. 그리고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인기척이라도 내서 여자가 알아챘더라면 얼마나 당황했을 것인가. 내가 민망한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었다. 방심은 가끔 이렇게 황당한 일을 생기게 한다. 사전에 여자는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했을 테지만 때로 투명인간이 있음을 잊은 것 같다. 4..

길위의단상 2021.07.13

풍선초

이웃에서 준 풍선초 씨앗을 베란다 화분에 심었더니 한 달여 전에 싹이 나왔다. 힘들게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더니 그 뒤로는 쑥쑥 크기 시작했다. 바라볼 때마다 키가 달라졌고 순식간에 내 키를 넘어섰다. 풍선초는 덩굴식물이라 지지대를 세우고 실로 천정에 있는 빨래걸이와 연결해 줬다. 여름에 들어서는 이놈 바라보는 재미에 빠져 있다. 덩굴손으로 실을 움켜쥐는 솜씨가 놀라워 경탄한다. 지금은 꽃을 피우고 풍선 같은 열매집도 생겼다. 풍선초는 꽃이나 열매, 자라는 형태 등이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식물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기르면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풍선초는 올해 나에게 생긴 새로운 친구다.

꽃들의향기 2021.07.12

제법 안온한 날들

"사람은 일방적으로 불행하지 않다." 이 책에서 건진 한 문장이다.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한 글쓴이는 수많은 죽음과 불행을 지켜보며 인간은 조건이 아무리 척박하더라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러이러하니까 타인이 불행하다고 재단하는 것은 나의 오만일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을 안고 당당하게, 당연하게 살아간다. 정도의 차이일 뿐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 은 이대목동병원 임상조교수로 재직중인 남궁인 님이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했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의 삶과 죽음, 사랑을 감성적인 필체로 보여주는 책이다. 가슴 뭉클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사연들이 많다. 저자는 살벌한 응급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싶을 정도로 여리고 따스한 분인 것 같다. 인간의 고통을 곁에서 접하며 그는 삶과 죽음에..

읽고본느낌 2021.07.11

나쁜 짓들의 목록 / 공광규

길을 가다 개미를 밟은 일 나비가 되려고 나무를 향해 기어가던 애벌레를 밟아 몸을 터지게 한 일 풀잎을 꺾은 일 꽃을 딴 일 돌멩이를 함부로 옮긴 일 도랑을 막아 물길을 틀어버린 일 나뭇가지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피해서 다닌 일 날아가는 새의 깃털을 세지 못한 일 그늘을 공짜로 사용한 일 곤충들의 행동을 무시한 일 풀잎 문장을 읽지 못한 일 꽃의 마음을 모른 일 돌과 같이 뒹굴며 놀지 못한 일 나뭇가지에 앉은 눈이 겨울꽃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털어버린 일 물의 속도와 새의 방향과 그늘의 평수를 계산하지 못한 일 그중에 가장 나쁜 것은 저들의 이름을 시에 함부로 도용한 일 사람의 일에 사용한 일 - 나쁜 짓들의 목록 / 공광규 요즈음 정치에 입문한 어떤 분이 '십 원 한 장' 남에게 피해를 끼..

시읽는기쁨 2021.07.10

고향의 여름꽃

고향 마을을 산책하다가 과수원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를 만났다. 옛 친구지만 고향에 내려가도 오가다가 마을길에서 우연히 만나 얼굴을 본다. 서로 연락해서 식사 한 끼 할 기회가 별로 안 생긴다. 사람을 만나기보다 조용히 있다가 오고 싶은 내 성향 탓이 크다. 친구의 사과 농장 입구에 능소화가 환하게 피어 있다. 고향집에 어머니가 키운 접시꽃이다. 어머니는 집만 아니라 동네 골목에도 꽃을 심고 잡초를 뽑으며 깨끗하게 만드신다. 부지런하기로 치면 어머니를 당할 사람은 없으리라.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그런데 아들인 나는 반대이니 이 역시 불가사의다. 이웃집 마당의 무궁화가 여느 해보다 더 풍성하고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꽃들의향기 2021.07.09

어머니와 들깨를 심다

어머니의 경작 본능을 무슨 수로 말릴까. 올해도 어김없이 들깨 농사를 시작했다. "가만 두어라.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못 한다." 10년 전부터 돌아오는 똑같은 대답이다. 밭은 집에서 1km나 떨어져 있고 산자락도 넘어야 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나한테도 숨이 차다. 밭도 500평이나 된다. 그런데도 매일 왕복하며 가꾸어놓은 밭이 정원처럼 말끔하다. 관리하기 쉬워 들깨를 심는다지만 아흔 넘은 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동네 사람들도 혀를 내두른다. 그런데도 당신은 "내 좋아서 하는 일, 끄떡없다!" 하신다. 밭일보다도 오가는 과정이 걱정이다. 경사진 산길에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찌될까. "넘어지려고 하면 평지에서도 넘어진다. 산길은 조심해서 오히려 괜찮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농사 욕심은 ..

사진속일상 2021.07.09

마르코복음[17]

예수께서 집으로 돌아오시니 군중이 다시 모여드는 바람에 일행은 먹을 겨를도 없을 지경이었다. 예수의 친척들은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들러 나섰다. 사실 그분이 미쳤다고들 말하고 있었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사들은 "그가 베엘제불에 사로잡혔다"느니, "귀신 두목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느니 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습니까? 한 나라가 갈라지면 그 나라는 지탱할 수 없고 한 집안이 갈라지면 그 집안은 지탱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지면 지탱할 수 없고 끝장이 납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 수 없습니다. 묶어 놓아야 그 집을 털게 ..

삶의나침반 2021.07.05

화가 난 물까치

길을 걷다가 나무에 앉아 있는 물까치 유조를 보았다. 이제 막 둥지에서 나온 듯 날개를 파닥이지만 날지는 못했다. 고개를 들고 지켜보고 있는데 주변에서 물까치 우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새끼를 낳고 길렀을 암수 두 마리가 나에게 보내는 경고 신호임이 틀림없었다. "빨리 지나가지 않을래? 가만 두지 않는다." "그래, 알겠다. 네 새끼 해칠 생각이 없는데 왜 이러냐?" 새끼 때문에 애타는 물까치를 괴롭히고 싶지 않아 사진 몇 장만 찍고 자리를 떴다. 그런데 그중 한 놈이 나를 따라오며 계속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나무라는 소리가 요란했다. "깍~ 깍~, 더 멀리 안 갈래? 앞으로는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약 50m는 따라왔으리라. 집요한 녀석이었다. 아마 외곽 경비를 책임지는 수컷이 아니었을까..

사진속일상 2021.07.04

탁월한 사유의 시선

최진석 선생이 2015년에 건명원(建明苑)에서 한 철학 강의를 묶은 책이다. 우리는 이때껏 남의 사상을 빌려서 살아왔다. 옛날에는 중국에서, 근대에 들어서는 서양의 생각을 수입해 종속적으로 살아온 것이다. 이래서는 독립된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선도력을 가진 선진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생각과 철학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제 종속적인 단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국가뿐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다. 은 이러한 시대정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과제를 준다. 건명원은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분열된 삶에서 벗어나 해와 달을 동시적 사건으로 장악하는 활동성[明]을 통해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곳[苑]으로 건너가는 도전을 감행하고자 세워진[建] 인문-과학-예술 혁..

읽고본느낌 2021.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