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 28

여름이 싱겁게 지나간다

한여름의 기세에 비해서는 여름이 싱겁게 지나간다. 가을한테 자리를 내어주면서 여름은 홀가분한가 보다. 아무 미련이 없는 모습이 허허롭다. 자연의 변화는 이토록 무심하다. 경안천을 걸으러 나섰다. 이번에는 하류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여기는 천의 한쪽으로만 길이 나 있어 같은 길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찾는 빈도가 적은 편이다. 하지만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3년 전만 해도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가는 흙길이어서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는데 지금은 포장이 되어서 사라져 버렸다. 서하리 천변에는 45도로 기울어진 밤나무가 있다. 이 길에서 만나는 나무 중 그나마 눈에 띄는데, 나무 무게를 어떻게 버텨내는지 힘들어 보인다. 대체로 여기까지 걷고 되돌아간다. 길을 계속 가면 경안천습..

사진속일상 2021.08.31

도토리 두 알 / 박노해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 도토리 두 알 / 박노해 분별하고 비교하는 것은 인간의 일일 뿐, 잘난 도토리 못난 도토리가 어디 있겠는가. 땅에 떨어져서 청설모의 먹이가 되든, 어찌해서 참나무로 자라든, 도토리는 각자의 몫을 한 것뿐 거기에 우열은 없다. 들에 핀 꽃이나..

시읽는기쁨 2021.08.30

마르코복음[22]

예수께서 배를 타고 다시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모여와서 호숫가에 있었다. 그런데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와서 뵙고 엎드려 간청했다.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와서 손을 얹어 주시어, 아이가 구원받아 살도록 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와 함께 그곳을 떠나시는데, 많은 군중이 뒤따르며 그분을 밀쳤다. 그 가운데 한 부인은 열두 해 동안 하혈을 해 왔는데 여러 의사를 찾아다니며 숱한 고생을 하고 가진 것을 모두 털어 썼지만 아무 효험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 부인이 예수 소문을 들은 바 있어, 군중 속에 끼여들었다가 뒤에서 그분 옷을 만졌다. 속으로 "옷만 만져도 구원받겠지" 했던 것이다. 그러자 곧 피 나던 곳이 말랐고, 부인은 병고에서 나은 것을 몸으로 느껴..

삶의나침반 2021.08.29

코로나 시대의 당구장

코로나 때문에 바깥 만남을 자제하다가 두 달만에 당구장에 나갔다. 친구들은 매주 당구 모임을 갖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겁이 많은가 보다. 현재 거리두기 4단계가 실시되고 있어 당구 치러 오는 사람이 적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낮 1시인데도 노는 테이블이 없었다. 1차 당구를 한 뒤 점심을 먹고 다시 찾으니 아예 자리가 없었다. 이웃 당구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네 번째로 간 어느 지하 당구장에서 겨우 빈 테이블을 발견했다. 당구장으로만 보면 코로나 이전보다 훨씬 더 사람으로 북적인다. 4단계 방역 지침이 무색하다. 당구장 주인장은 주인장대로 불만이다. 오후 6시 이후에는 테이블당 두 명만 칠 수 있단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다. 실제 당구장에 있어보니 전부 마스크를 쓰고 있어 코로나 ..

사진속일상 2021.08.28

8월의 애기장미

동네를 산책하는 재미 중 하나는 장미를 만나는 일이다. 지금은 여름의 끝자락인 8월 하순, 그런데도 마을 골목길의 장미는 여전히 붉고 환하다. 줄기에서는 새로운 꽃봉오리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니 가을이 되어도 이 붉은 장미를 계속 볼 수 있을 것이리라. 무슨 품종인지 모르지만 자그마한 이 장미에 나는 '애기장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귀엽고 앙증스러워 뽀뽀라도 해 주고 싶다. 이 장미가 있는 집은 작고 아담한 농가다. 집 앞 세 평 정도 되는 마당에는 꽃밭이 있고, 집 둘레로 장미가 울타리를 만들고 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만 들었을 뿐 주인 얼굴은 보지 못했다. 꽃처럼 마음씨가 고운 분이리라 믿는다. 나도 마당 있는 집을 갖게 된다면 애기장미를 키워보고 싶다. 그전에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가능할지 실험을 ..

꽃들의향기 2021.08.27

양평 나들이

정체전선이 한반도에 머물며 연일 비가 내린다. 이틀 전에는 태풍 오마이스가 남부 지방을 지나갔다. 여름의 끝자락에 궂은 날씨가 이어진다. 비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함께 양평으로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이웃의 지인이 양평 강상면에 마련한 터에 들리고, 천서리에서 점심으로 막국수를 먹었다. 양평으로 가는 길은 예전에 밤골 생활을 할 때 어지간히 오갔던 길이다. 어느덧 20년 전인데, 이 코너를 돌면 무슨 음식점이 있었고 어떤 맛이었는지, 길을 달리니 옛 기억이 오롯이 떠올랐다. 무엇에 홀려 그렇게 올인했는지, 지나 보니 씁쓰레한 꿈이었다. 두물머리를 찾았을 때는 다행히 비가 멎었다. 산책로를 따라 1시간 정도 걸었다. 평일이고 날씨가 궂어 사람이 없으리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두물머리 느티나무 주변은 바람 쐬러 ..

사진속일상 2021.08.26

이포리 느티나무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에 있는 느티나무다. 이포리(梨浦里)를 이름 그대로 풀면 '배나무가 많은 포구 마을'이 된다. 실제로 마을 가까이 남한강이 있으니 나루터가 있었을 법하다. 이 나무는 금사농협 옆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이 건국할 때 새 도읍지를 알아보던 무학대사가 여기를 지나다가 심은 나무라고 한다. 그런데 안내판의 수령은 500년으로 되어 있다. 고목을 두고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 허리가 아픈지 나무는 구부정하게 서 있다. 나무 높이는 20m, 줄기 둘레는 2.8m다.

천년의나무 2021.08.25

귓꺼풀도 있었으면

하느님이 인체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드셨지만 하나 아쉬운 게 있다. 눈꺼풀을 만드실 때 귓꺼풀은 왜 안 만드셨을까? 눈과 귀는 인간의 대표적인 감각 기관이다. 전방의 경계 초소와 같다. 둘 중 하나만 없었어도 약육강식의 험한 자연환경에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 경계병도 쉬어야 할 때가 있다. 하느님은 눈을 위해 눈꺼풀을 만드셨지만, 귀는 소홀히 하셨다. 몸은 잠들어도 귀는 잠들 수 없다. 현대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도시인은 피곤하다. 그중에서도 주범은 소음 공해가 아닐까. 도시인은 24시간 소음에 노출되어 있다.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과도한 소음에 노출되면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진다. 일에 집중할 수 없다. 하느님은 선견지명이 그리 없으셨나. 이럴 때 귓꺼풀이 있어서 마치..

길위의단상 2021.08.24

무심하게 산다

제목에 끌려 고른 책이다. 가쿠타 미쓰요(角田光代)라는 일본 작가의 에세이로, 제목을 봤을 때는 작가가 노년이 아닐까 싶었는데 1967생이다. 책에 실린 글은 대개 40대 중후반에 썼다. 무심하게 산다고 하기에는 젊은 나이다. 작가 자신의 몸에 대한 관찰이 주된 내용이다. 나이을 먹어감에 따라 생기는 변화를 담담히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일본 여성 특유의 감성이 살아 있다.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에세이다. 아마 여자라면 더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의 원제가 인데 '나란 사람을 담는 그릇' 쯤으로 해석되는가 보다. 그릇은 몸이지만 그 내용물은 성질이나 성격이어서 나이가 들면서 변해가는, 또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성향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읽고본느낌 2021.08.23

어리석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 메리 올리버

가끔 나는 나무 한 그루의 잎들을 세느라 종일을 보내지. 그러기 위해선 가지마다 기어올라 공책에 숫자를 적어야 해. 그러니 내 친구들 관점에서는 이런 말을 할 만도 해. 어리석기도 하지! 또 구름에 머리를 처박고 있네. 하지만 그렇지 않아. 물론 언젠가는 포기를 하게 되지만 그때쯤이면 경이감에 반쯤은 미쳐버리지 - 무수한 잎들, 고요한 나뭇가지들, 나의 가망 없는 노력. 그 달콤하고 중요한 곳에서 나, 세상-찬양 충만한 큰 웃음 터뜨리지. - 어리석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 메리 올리버 Sometimes I spent all day trying to count the leaves on a single tree. To do this I have to climb branch by branch and wr..

시읽는기쁨 2021.08.22

여름 가는 경안천

기세등등하던 여름의 기운이 꺾였다. 아침저녁 공기는 시원하다 못해 냉기가 서려 있다. 한낮에 햇빛을 맞으며 걸어도 크게 더운 줄을 모르겠다. 얼굴이나 목에 맺히는 작은 땀방울을 가끔씩 닦아주면 된다. 그렇더라도 아직 여름인지라 해가 중천인 경안천 길에는 사람이 드물다. 타박타박 혼자서 걷는다. 사람이 없으면 마스크를 안 써도 되어 좋다. 아직 습관이 안 되어서 그런지 마스크를 쓰면 답답해서 자꾸 손이 가고 벗게 된다. 길에서도 사람을 만나면 넓은 길이라면 간격을 벌리고 피해 가지만, 좁은 길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마스크를 꺼내야 한다. 나보다도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들은 마스크를 참 잘 쓴다. 경안천처럼 사람 드문 곳에서도 꼭 마스크를 쓰고 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야외에..

사진속일상 2021.08.21

마르코복음[21]

그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 지방으로 갔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 살았는데, 이제 누구든 쇠사슬로도 묶어둘 수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인 적이 있지만, 쇠사슬도 끊고 쇠고랑도 부수어 버려서 아무도 그를 휘어잡지 못했다. 그는 밤낮없이 늘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했다. 그런데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는 달려와 절하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 이름으로 말합니다. 제발 괴롭히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니, 그가 "군단입니다..

삶의나침반 2021.08.20

찌질한 위인전

인간에게는 누구나 찌질한 면이 있다. 소위 위인이라고 불리는 인물도 예외가 아니다. 보통의 위인전은 찌질한 면은 드러내지 않고 비범한 능력이나 업적만 자랑한다. 지나친 미화에 실상 왜곡이다. 어릴 때는 누구나 위인전을 보며 자란다. 훌륭한 사람을 본받으라지만 지금 돌아보면 위인전이 과연 아이들 인성에 선한 작용을 하는지 의문이 든다. 전쟁을 일으키고 수만 명을 죽인 놈도 위인에 들어가 있다. 은 그런 위인전에 딴지를 건다. 함현식 기자가 딴지일보에 연재했던 내용을 모았다. 책에는 아홉 명의 인물이 나온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아니듯, 그들 역시 완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적이고 오히려 빛나 보인다. 자신의 약점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도 있겠지만, 자신의 찌질함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맞서 싸우면서 역사에 ..

읽고본느낌 2021.08.19

살아나는 꿈

아내는 텃밭 가꾸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그동안 몇 차례 텃밭을 한 적이 있었지만, 올해처럼 몰두하는 것은 처음 본다. 수확해서 먹는 것은 둘째고, 작물을 심고 기르는 즐거움이 우선인 것 같다. 텃밭과 채소 얘기를 할 때는 얼굴에 생기가 돈다. 텃밭과 사랑에 빠진 게 틀림없다. 이번에 얻은 텃밭은 집 옆에 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아침잠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텃밭에 나간 것이다. 돌아올 때는 큰 비닐봉지에 뭔가가 한가득 들어 있다. 아내의 얼굴 표정도 밝고 환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얼굴이 부은 채 방에서 나왔을 터였다. 아내의 건강에도 텃밭이 일조를 하고 있다. 내년에도 계속 텃밭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텃밭을 포함한 주변 땅에 아파트 공사가 예정되..

참살이의꿈 2021.08.18

홍어 / 정일근

먹고사는 일에 힘들어질 때 푹 삭힌 홍어를 먹고 싶다 값비싼 흑산 홍어가 아니면 어떠리 그냥 잘 삭힌 홍어를 먹고 싶다 신김치에 홍어 한 점 싸서 먹으면 지린 내음에 입안이 얼얼해지고 콧구멍 뻥뻥 뚫리는 즐거움을 나 혼자서라도 즐기고 싶다 그렇지, 막걸리도 한 잔 마셔야지 입안의 즐거움이 온몸으로 퍼지도록 한 사발 벌컥벌컥 마셔야지 썩어서야 제맛 내는 홍어처럼 사람 사는 일도 마찬가지지 한 세월 썩어가다 보면 맛을 내는 시간이 찾아올 거야 내가 나를 위로하며 술잔을 권하면 다시 내가 나에게 답잔을 권하며 사이좋게 홍어 안주를 나눠 먹고 싶다 그러다 취하면 또 어떠리 만만한 게 홍어라고 내가 나를 향해 고함을 치면서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면서 크게 한번 취하고 싶다 - 홍어 / 정일근 삭힌 홍어 맛을 본 것..

시읽는기쁨 2021.08.17

손과 코

일전에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가 고추 따는 일을 도와드렸다. 고작 두 시간 정도 되었을까, 고추밭에서 나오니 손톱에는 온통 풀물이 들어 있고, 양손의 엄지손가락이 얼얼했다. 고추를 따느라 엄지가 눌려서 압박을 받은 탓이었다. 나중에는 건드리기만 해도 아팠고, 그날 밤은 잠을 설쳤다. 사흘이 지난 아직까지 통증이 가시지 않고 있다. 손은 내 몸에서 콤플렉스 중 하나다. 내 손은 유난히 조그맣다. 여자 손보다 더 여자 같다는 얘기를 듣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악수하기가 싫어졌다. 다른 사람의 크고 투박한 손에 잡히면 나는 이미 한 수 접히고 들어간다. 더구나 기를 죽이려는 듯 한 마디를 보태는 사람도 있다. "야, 남자 손이 뭐 이 모양이냐?" 아무리 감추려 해도 손을 통해 백면서생이라는 게 들통나 버린다. ..

길위의단상 2021.08.16

고추 따고 벌초하고

고향으로 노모를 뵈러 가는 마음이 편치 않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 같다. 자꾸 일이 뒤엉키니 어찌할 길이 없이 착잡하다. 휴게소마다 들러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마침 내려가는 때가 고추 따는 시기와 맞물렸다. 어머니의 고추 농사라야 200포기밖에 안 된다. 전에 비하면 1/5로 줄었다. 아들보다는 거드는 일손이 생긴 것에 어머니는 기뻐하신다. 올해 고추는 풍년이다. 튼실한 고추가 가지 사이에 너무 빽빽하게 달려 있어 빼내는 데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이것도 노동이라고 두 시간여 두 물째의 고추를 땄더니 양손의 엄지손가락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오후에는 어머니와 함께 선산의 벌초를 했다. 개망초로 덮여 있었는데 뽑아내니 깔끔해졌다. 이렇게 일 할 줄은 모르고 내려왔는데 고되지만 끝나고 나니 ..

사진속일상 2021.08.15

늦여름 뒷산

입추가 지나니 햇살은 따가워도 바람은 시원하다. 가을이 다가오는 신호가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한여름 동안은 쉬었던 뒷산을 이제 다시 걸어본다. 산길은 새소리 대신 풀벌레 소리로 가득하다. 이 역시 가을의 전령사다. 새와 달리 풀벌레는 날개를 마찰시켜 소리를 낸다. 인간의 악기에 비유하면 현악기에 해당한다. 숲을 가득 채우는 풀벌레 소리는 제 짝을 찾으려는 간절한 아우성일 것이다. 새들은 이미 번식기를 지났고, 이제는 풀벌레들 차례다. 온갖 소리가 요란하지만 누가 내는 소리인지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바람이 땀을 식혀주지만 늦여름 산길은 덥고 빨리 지친다. 더해서 작은 날벌레와 산모기가 덤벼들어 성가시다. 내가 가는 길의 훼방꾼을 무시할 정도로 나는 관대하지 못하다. 손수건을 휘젓지만 금방 다시 앵앵..

사진속일상 2021.08.12

마르코복음[20]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갑시다" 하셨다. 그들은 군중을 남겨 두고 배에 타신 예수를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갔다. 그런데 거센 회오리바람이 일어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와서 배가 곧 물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깨우며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이 안 되십니까?" 하였다.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있어라" 하시자 이내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그러고 나서 "왜 겁냅니까? 아직도 믿음이 없습니까?" 하셨다. 그들은 몹시 질려 두려워하며 서로 말했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시길래 바람과 호수조차 복종할까?" - 마르코 4,35-41 예수의 활동 ..

삶의나침반 2021.08.11

남한산성의 여름 하늘

입추가 지나니 공기의 느낌이 다르다. 길었던 더위도 이제 막바지다. 어제는 파란 하늘과 시원한 바람에 끌려 남한산성에 갔다. 탁 트인 곳에서 하늘의 구름을 맘껏 보며 걷고 싶었다. 하늘의 구름은 천변만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잠깐 한눈을 팔고 다시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하늘 전망이 좋은 그늘에 앉아 구름 구경만 해도 하루 해가 짧을 것 같다. 남한산성은 여러 달 공사를 하더니 시멘트로 된 길 양 켠에 코코넛 매트를 깔아서 걷기에 훨씬 편해졌다. 북문은 완전히 헐고 새로 짓는 중이었다. 남문, 수어장대, 북문을 지나 샛길을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려 했으나 통행금지가 되어 있었다. 남한산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 그만큼 관리 및 유지하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휴가철이라 ..

사진속일상 2021.08.10

마음의 맷집

초등학생 때 A는 씩씩하고 담대해서 우리의 부러움을 샀다. 적어도 교실 안에서는 그랬다. 담임 선생님한테 야단이나 매를 맞을 때면 다들 무서워하고 벌벌 떨었지만 A는 달랐다. 뭘 그 정도를 가지고 그러냐면서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A는 술고래인 아버지한테 욕먹고 얻어터지는 게 일상이었다. 지게 작대기에 단련된 A의 몸이 선생님의 회초리는 애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와는 별개로 A의 몸은 살아남기 위해 맷집이 생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맷집은 시련을 통해 생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리라.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가 야생의 풀과 경쟁할 수는 없다. 백신을 맞는 것도 같은 원리다. 병원균에 미리 노출시켜서 적응력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호르메시스(Horme..

참살이의꿈 2021.08.09

그 샘 / 함민복

네 집에서 그 샘으로 가는 길은 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물 길러 가는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지요. 서로 짠 일도 아닌데 새벽 제일 맑게 고인 물은 네 집이 돌아가며 길어 먹었지요. 순번이 된 집에서 물 길어 간 후에야 똬리 끈 입에 물고 삽짝 들어서는 어머니나 물지게 진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지요. 집안에 일이 있으면 그 순번이 자연스럽게 양보되기도 했었구요. 넉넉하지 못한 물로 사람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던 그 샘가 미나리꽝에서는 미나리가 푸르고 앙금 내리는 감자는 잘도 썩어 구린내 훅 풍겼지요. - 그 샘 / 함민복 우리는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는 살벌한 세상을 살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불문율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호혜의 정신 대신 탐욕과 시기만 남았다. '영끌'은..

시읽는기쁨 2021.08.08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

작년에 넷플릭스 드라마를 통해 빨강머리 앤을 만난 뒤 소녀 앤의 매력에 푹 빠졌다. 오래전에 애니메이션으로 빨강머리 앤을 본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책을 읽은 기억은 없다. 은 앤을 사랑하는 백영옥 작가의 에세이다. 책을 통해 앤이 주는 희망과 따스한 위로를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나 보다. 나 역시 앤을 다시 만나보고 싶어서 고른 책이다. 책에는 앤의 어린 시절을 그린 '안녕 앤'이라는 애니메이션의 예쁜 장면이 많이 나온다. 드라마에서는 초록 지붕 집에 오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하는데, 이 책은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살기 전의 더 어릴 때 이야기가 중심이다. 그래서 인물의 이름이나 내용에서 모르는 것이 많았다. 어려도 앤의 천진한 낙천성이나 긍정 마인드는 마찬가지였다. 앤한테서는 어디서 그런 명랑함..

읽고본느낌 2021.08.07

여름 불꽃, 배롱나무꽃

불꽃나무로 불러도 되겠다. 꽃이 활짝 핀 배롱나무는 나무 전체가 붉은 화염으로 불타 오르는 것 같다. 여름 한낮에 배롱나무 가까이 가니 불에 데일 듯 뜨겁다. 이열치열 꽃구경으로는 배롱만 한 나무가 없겠다. 손주 데리고 의왕에 갔다 오는 길, 갈미한글공원에서 정열의 붉은 배롱나무를 만났다. 아이에게 배롱나무를 설명해주다가 문득 이름의 연원이 궁금해졌다. 배롱나무는 백일 동안 꽃이 핀다고 '(목)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데, '백일홍'이 '배기롱'으로, 다시 '배롱'으로 발음의 편의상 변한 것이라는 설명이 그럴듯하다.

꽃들의향기 2021.08.06

경안천 참나리

경안천을 걷는 도중에 길 옆에 핀 참나리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줄기 아래쪽에 피었던 참나리는 다 졌고, 지금은 줄기 끝에서 마지막 참나리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참나리마저 지면 여름도 끝에 다다를 것이다. 지난 주말에 온 손주에게 빨강머리 앤 얘기를 해 줬는데 참나리를 보니 빨강머리 앤 생각이 절로 났다. 참나리도 얼굴에 생긴 주근깨 때문에 고민이 많을까. 그러나 겉모양은 절대 그런 것 같지 않다.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마음씨인가. 그런 점에서 참나리와 빨강머리 앤은 닮았다. 빨강머리 앤에게와 마찬가지로 나는 참나리에게도 속삭인다. "고마워, 참나리!"

꽃들의향기 2021.08.04

무더위 속 경안천 걷기

땡볕 무더위가 20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 한낮에는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내겠다. 어제는 오랜만에 가끔 비가 지나면서 구름 많은 날씨였다. 기온이 30도 아래로 떨어지긴 했으나 습도가 높아서 후덥지근했다. 그래도 햇볕이 가려지니 다행이다 싶어 경안천 걷기에 나섰다. 순전히 걷기 목적으로 경안천을 찾은 것은 반년이 넘은 것 같다. 여름에는 안 그래도 더운데 마스크까지 써야 하니 너무 답답해서 사람이 많은 데는 가지 않는다. 경안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여름은 사정이 다르다. 그늘이 없는 경안천 길을 걸을 사람은 별로 없다. 예상대로 경안천에서는 아주 드문드문 사람을 만날 뿐이었다. 여름 경안천은 억새 사이에서 기생초가 많이 피어 있었다. 군데군데 꽃길로 조성해 놓았다. 진하고 화려한 화장을 한 듯해서 ..

사진속일상 2021.08.03

간절함이 통(通)하다

코로나 때문에 개최할 수 있느니 마느니 하던 도쿄올림픽이 1년 연기되어 열리고 있다. 경기장에는 관중이 없고, 시상식 때 메달도 본인이 직접 목에 거는, 코로나 시대의 특이한 올림픽이다. 손주가 찾아온 그저께 저녁에는 구기 종목인 축구와 야구, 여자 배구가 같은 시간대에 경기가 벌어졌다. 나는 축구와 야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처음부터 여자 배구만 봤다. 특히 여자 배구는 한일전이라 더 흥미로웠다. 참가 16개국 중 객관적 실력으로 우리나라는 하위권이다. 세계 랭킹이 우리나라가 14위, 일본이 5위다. 승리할 가능성이 낮으니 지상파 TV에서 중계를 안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일전은 드러난 실력만으로 판가름이 나지 않는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4세트까지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마지막 5세트에 들..

길위의단상 2021.08.02

마르코복음[19]

또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됫박 밑에나 침대 밑에 놓겠습니까? 등경 위에 놓지 않겠습니까?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으시오." 또 말씀하셨다. "새겨들으시오. 여러분이 되어 주는 되만큼 여러분에게 되어 주실 것이고 거기에 더 보태어 주실 것입니다.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실 것이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진 것마저 빼앗으실 것입니다."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습니다. 어떤 이가 땅에 씨를 뿌리고 나서 자고 일어나고 하는 가운데 밤과 낮이 가는데, 그가 모르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땅이 절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처음에는 줄기가 자라고,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또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

삶의나침반 2021.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