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 24

비 오는 날 부침개

새벽 빗소리에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잠들었다. 가을비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내린다. 하늘은 짙은 먹구름으로 덮여 있고 밖은 어두침침하다. 열린 양쪽 창문으로 낙숫물 소리가 구슬픈 음악처럼 울린다. 지금 같은 초가을의 때, 가을비는 기분을 멜랑콜리하게 만든다. 누가 어깨를 툭 치면 찔끔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다. 아침에는 가까운 공원을 산책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낮이 되니 만사가 귀찮다. 이럴 때는 부침개와 막걸리 한 잔이 내 따스한 위로가 되어 준다. 아내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 손주 얘기, 이웃 얘기, 텃밭과 터 얘기 등이 또 다른 반찬이다. 과거 회상으로 접어들려는 아내를 나는 한사코 말린다.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고단한 일일 거라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도..

사진속일상 2021.09.29

오징어 게임

'오징어 게임'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넷플릭스 시청 순위 1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드라마가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워낙 핫한 드라마라 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데스 서바이벌 게임이라 사람이 너무 많이 죽고 섬찟한 장면도 자주 나온다. 456명이 게임에 참가하여 마지막 승자가 456억을 가져간다. 누가 이런 잔인한 게임을 만들고 즐기는지는 드라마 끝에 나온다.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다음 회를 계속 보게 되는 마력이 있는 드라마다. 단순한 킬링 타임용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빈부 문제를 다룬 주제 의식도 돋보인다. 천민자본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우리나라라서 이런 드라마가 실감 나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 같다.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참가..

읽고본느낌 2021.09.28

마르코복음[25]

헤로데 왕이 예수 소문을 들었다. 그분 이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 가운데서 살아났구나. 그러기에 기적을 이루는 힘이 솟아나지" 하였다. 더러는 "엘리야다"라고도 하고, 더러는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과 같은 예언자다"라고도 하였다. 이런 소문을 듣고서 헤로데는 말했다. "내가 목을 벤 요한 그 사람이 살아났구나." 사실 헤로데가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다 감옥에 묶어 두었던 것은 동기간인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로 말미암은 일이었다. 헤로데가 그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래서 요한이 "동기의 아내를 데리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헤로디아는 앙심을 품고 요한을 죽이려 애썼으나 그럴 수 없었다. 헤로데가 요한이 의롭고 성스러운 사람임을 알아보고 ..

삶의나침반 2021.09.27

은퇴자가 노는 법

단톡방에서 심심치 않게 보는 글이다. 잊을 만하면 누군가 올리는 걸 보면 다들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가 보다. 내용은 이렇다. 보편적 대한민국 노인 백수의 노는 법은, 1. 주야장천 배낭에 막걸리 한 병 넣고 청계산에서 북한산으로 휴대폰에 미스트롯 뽕짝 백 곡 깔아 볼륨 맥스로 틀어 놓고 무릎 연골 남아 있을 때까지 심마니 흉내 내며 살아가기. 1. 손주가 좋아 죽겠다고 카톡 프로필까지 손주 사진으로 도배해 놓고 할아버지가 외계인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7살이 될 때까지 보육원장 놀이하기. 1. 허리가 온전한 그날까지 선블록 떡칠하여 전국 골프장 순회하며 나이스 샷에 중독되어 닐니리야 하다가 죽을 때도 호주머니에 티 넣고 화장터 가기. 1. 30만 원 들여 방통대 중국어과에 등록하여 뭔가 좀 남달리 학구적으로..

길위의단상 2021.09.26

내가 몰랐던 일 / 이동순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저녁밥을 기다리던 수백 개의 거미줄이 나도 모르게 부서졌고 때마침 오솔길을 횡단해가던 작은 개미와 메뚜기 투구벌레의 어린 것들은 내 구둣발 밑에서 죽어갔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방금 지나간 두더지의 땅속 길을 무너뜨려 새끼 두더지로 하여금 방향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었고 사람이 낸 길을 초록으로 다시 쓸어 덮으려는 저 잔가지들의 애타는 손짓을 일없이 꺾어서 무자비하게 부러뜨렸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풀잎 대궁에 매달려 아침 햇살에 반짝이던 영롱한 이슬방울의 고고함을 발로 차서 덧없이 떨어뜨리고 산길 한복판에 온몸을 낮게 엎드려 고단한 날개를 말리우던 잠자리의 사색을 깨워서 먼 공중으로 쫓아버렸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이처럼 나도 ..

시읽는기쁨 2021.09.25

다읽(12) -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수많은 세대의 허다한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받들어 왔지만, 그 예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적다. 더구나 예수가 뜻한 바를 실천에 옮긴 사람은 더욱 적다. 예수의 말은 별의별 뜻으로 왜곡되어 아무 뜻도 없게까지 되었다. 예수의 이름은 범죄를 정당화하고 어린이들에게 겁을 주며 필부들에게 어리석은 영웅심을 불어넣는 데에 이용, 아니 악용되어 왔다. 예수는 자기가 뜻한 것보다 뜻하지 아니한 것으로 더 자주 찬양과 숭배를 받아 왔다. 무엇보다 큰 역설은 예수가 세상에 살면서 가장 강력히 반대하던 바에 속하는 바로 그런 것들이 종종 되살아나서는 온 세상에 널리 설교,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는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있다. 기독교 교리라는 안개가 예수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보..

읽고본느낌 2021.09.24

옛골에서 청계산 한 바퀴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청계산으로 빠지는 길을 지나쳐 제2경인고속도로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는 데 30km나 헛바퀴를 돌렸다. 나이가 드니 총기가 떨어진 탓이다. 청계산 옛골에서도 원래 생각한 코스의 입구를 찾지 못하고 마을 끝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엉뚱하게 계곡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길은 급경사의 긴 계단이 호흡을 가쁘게 했다. 능선에 올라서서야 시원한 바람이 고된 걸음의 보상이 되어 주었다. 이수봉, 석기봉을 지나 망경대로 가는 길은 평탄했다. 망경대를 오르려고 하다가 너무 경사가 가팔라 우회길로 돌았다. 청계산은 여러 차례 왔으나 꽤 오래전이라 길이 눈에 익은 듯 낯설다. 잘못 들어 되돌아 나오기도 한 차례 했다. 길은 성남누비길과 겹친다. 성남누비길 일곱 구간 중에 여기가 제일 난..

사진속일상 2021.09.23

추석날 동네 산책

추석이지만 연 이태째 고향에 못 내려갔다. 예전에 어느 정치인이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는데 지금 내 사정이 그러하다. 교통 정체를 안 겪고 번거로운 만남이 생략되니 몸은 편해도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쓸쓸한 추석 명절이다. 오전까지 비가 내리더니 오후가 되자 짙은 구름이 사라지고 밝은 가을 하늘이 열렸다. 비 내리다가 맑아지고, 맑다가 다시 흐려지고, 하는 것은 인생사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시름을 잊으려 동네 산책길에 나섰다. 집 앞 공터에 이제서야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었다. 뜸 들인지 10년 만이다. 이 동네에 이사온 뒤로 아파트가 엄청 많이 들어서고 있다. 전에는 상수원 보호 구역이라 아파트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모두 해제된 모양이다. 경기광주역 주변의 역세권 개발로..

사진속일상 2021.09.22

디오게네스의 자신감

고등학생일 때 윤리 과목을 좋아했다. 선생님이 전해 주는 여러 철학자들의 삶과 일화가 재미있었고, 그들의 명언이 멋지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제일 감명을 받았던 철학자는 디오게네스였다. 사람을 찾는다고 대낮에 등불을 들고 아테네 거리를 돌아다녔다거나, 알렉산더 대왕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도리어 햇빛을 가리니 비켜달라고 했다는 얘기는 너무나 통쾌했다. 저렇게 당당하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디오게네스는 견유학파에 속한다. '견유(犬儒)'란 '개 같은 선비(철학자)'라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모욕적인 명칭으로 들리지만 디오게네스가 스스로를 '개'라고 지칭했으니 잘못된 것도 아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그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며 놀리자 개처럼 한 발을 들고 오줌을 갈겨댔다는 일화가 전한다. '견유..

참살이의꿈 2021.09.21

마르코복음[24]

예수께서는 촌락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불러 둘씩 짝지어 보내며 더러운 영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다. 아울러 길을 떠날 때 지팡이말고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 것을 명하셨으니, 곧 빵도 자루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 것이며 다만 신발은 신되 속옷도 두 벌 껴입지 말라고 하셨다. 이어서 말씀하셨다. "일단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머물러 있으시오. 또한 어느 곳이든 여러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러분의 말도 듣지 않거든 거기를 떠나면서 발밑에 붙은 티끌을 털어 증거로 남기시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했다. 또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쳐 주었다. - 마르코 6,7-13 제자를 파견함으로써 예수는 하느님 ..

삶의나침반 2021.09.20

이미 너무 많이 가졌다 / 이희중

1 젊은 날 녹음해서 듣고 다니던 카세트 테이프 를 꺼내 듣다가, 까맣게 잊었던 노래 그 노래를 좋아했던 시간까지 되찾고는 한다. 그러니 새 노래를 더 알아 무엇 하나, 이미 나는 너무 많은 노래를 좋아했고 그 노래들은 내 한 시절과 단단히 묶여 있는데 지금 들으면 간주마다 되새길 서사가 있어 귀에 더 두툼하고 묵직하니 이제, 모아둔 음반, 가려 녹음해둔 테이프 를 새겨듣기에도 내 세월이 넉넉하지 않음을 안다. 2 옷장을 열어보면, 기워 입지 않고 버리는 부유한 세상으로 건너오며 한 시절 내가 골라 입었던 적지 않은 옷들, 오늘 내 생애처럼 걸려 있거나 쌓여 있다. 다 아직 입을 수 있는 옷들, 반팔, 반바지는 헌 자리 하나 없다. 그러니 새 옷을 더 사 입어 무엇 하나, 문득 열 해, 스무 해 전 옷을..

시읽는기쁨 2021.09.19

뒷산에서 본 가을 하늘

추석 연휴 첫날, 뒷산을 한 바퀴 돌다. 청명한 날씨에 초가을 하늘이 높고 푸르다. 이 정도면 뉴질랜드의 하늘이 부럽지 않다. 미세먼지 걱정을 잊은 지도 한참 된 것 같다. 아직은 한낮 기온이 높다.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 탓인가 보다. 코로나가 덮친 이후로 공기가 좋아진 걸 체감한다. 코로나와 미세먼지와의 역학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조사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인간 활동이 유의미하게 감소한 때문인지, 어쨌든 코로나 이후로 미세먼지나 황사의 시달림에서 벗어난 건 사실이다. 코로나가 준 선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느긋하게 앉아 구름 구경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산모기가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 산길에서도 연신 수건을 휘두른다. 그래도 팔에 앉는 놈은 어쩔 수 없이 살생을 해야 한다. 10월은 ..

사진속일상 2021.09.18

중앙공원 꽃무릇(2021)

분당 중앙공원 꽃무릇이 작년에 비해 개화 시기가 열흘 정도 빨라졌고 개체수도 많아져서 풍성해 보인다. 가까이서 꽃무릇 꽃밭을 구경할 수 있는 이런 장소가 있다니, 초가을이 주는 고마움 중의 하나다. 꽃무릇은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본에서는 피안화(彼岸花)라고 부른다고 한다. 종교적인 느낌의 이름인데 그래선지 주로 사찰에서 길렀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선운사와 불갑사 꽃무릇이 유명하다. 붉게 물든 꽃무릇 길을 거닐 때면 세상 시름 다 잊고 피안에라도 온 것처럼 탄성을 연신 터뜨리게 될 것이다.

꽃들의향기 2021.09.17

터닝 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9/11 테러가 일어난 지 20년이 지났다. 며칠 전에 그라운드 제로에서 추도식이 열리는 뉴스를 봤다. 21세기에 접어들자마자 발생한 이 미증유의 테러로 미국만 아니라 전 세계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여객기가 무역센터에 충돌하고 이어서 건물이 붕괴하는 장면은 지금 봐도 모골이 송연하다. 최근에 넷플릭스에 나온 다큐멘터리 드라마 '터닝 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Turning Point: 9/11 and the War on Terror)'은 테러가 일어난 배경과 미국의 보복 과정을 복기하듯 보여준다. 사건에 관여한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9/11과 이후 경과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실성 높은 다큐멘터리다. 발단은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었다. 미국은 반..

읽고본느낌 2021.09.16

국민 약 올리기

말 많은 5차 코로나 재난지원금이 일인당 25만 원씩 소득 기준 하위 88%에게 지급되고 있다. 그런데 소득을 가르는 기준이 납부하는 건강보험료 액수다. 문제는 건강보험료가 소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나는 재난지원금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한 친구는 나보다 소득이 많은데도 재난지원금을 받는다. 둘 다 연금 생활자면서 경기도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처지는 비슷하다. 다른 점은 친구는 직장에 다닌다는 사실밖에 없다. 친구는 퇴직 후 노는 게 심심하다면서 용케 물류회사에 일자리를 구했다. 그러니 건강보험이 직장가입자 자격이 되어 보험료 납부액이 지역가입자인 나보다 1/3밖에 안 된다. 월 수입은 내 두 배 가까이 되면서 건강보험료는 적게 내고 재난지원금도 탄다.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주..

길위의단상 2021.09.15

감악산에 오르다

파주에 있는 감악산(紺岳山, 675m)에 올랐다. '감악'은 이름대로라면 '감색 바위'라는 뜻인데 굳이 찾자면 산 아래 운계폭포 부근 암벽이 감색에 가까운 데가 있었다. 감악산에서 제일 큰 임꺽정봉을 비롯해 대부분은 밝은 화강암이다. 감악산 지역은 옛날 군대 생활할 때 우리 사단 관할이었다. 산악 행군을 할 때 감악산을 지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기억이 가물거린다. 집에서 가까운 산에 가기로 하고 배낭을 꾸리면서 불현듯 감악산이 떠올라서 행선지를 바꿨다. 집에서 감악산까지는 대중교통이 불편해 자가용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거의 두 시간이 걸린다. 산행 기점은 출렁다리로 정했다. 등산이 아니라 출렁다리만 구경하러 온 사람이 훨씬 많았다. 2016년에 개통한 이 출렁다리 덕분에 감악산이..

사진속일상 2021.09.14

40년 기념 속초 여행

4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묵직하다. 그때는 이만큼 오래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너무 아득해서 가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나고 보면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다. 꿈을 꾸면서 문득 꿈임을 알아채게 되는, 인생의 매듭을 통과할 때마다 드는 씁쓸함이다. 결혼 40주년을 맞아 아내와 속초에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저녁은 대포항 어시장에서 회(방어, 광어, 오징어)를 포장해 와서 숙소에서 오붓이 즐겼다. 푹 끓인 매운탕이 특별히 맛있었다. 예식을 마치고 김포공항에 갔는데 황망 중에 주민등록증을 챙겨 오지 않아서 신혼여행이 펑크 나는 줄 알고 무척 당황했었다. 안절부절못하다가 공항에 파견 나온 중앙정보부 사무실에 가서 확인서를 발급받고 겨우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때 직원이 신혼부부라 특..

사진속일상 2021.09.11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 이유경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가 있는 걸까 십여 년 외딴 곳에서 하루하루 보내다가 이 번잡한 광화문사거리 다시 와 서보니 주름진 얼굴 된 나만 산 것 같다 우리 기다려주던 사람이나 나무들 풍경 하나씩 바꾸며 없어져 갔고 옛것들 다 비켜서라!며 새것들 차례로 와서 치장할 거고 그들끼리는 쉽게 친해지겠지 그렇지, 그들끼리는 그들 세상을 공들여 만들어가겠지 다음 또 다음 우리가 보낸 세월까지도 지우면서 - 너 여기서 무엇 하고 있느냐 누구 내 어깨라도 툭 쳐줬으면 싶다 -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 이유경 이유경 시인의 시집 을 샀다. 흘러간 세월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쓸쓸하다. 늙는다는 건 익숙한 것에도 자꾸 낯설어지는 것 같다. 사람도 장소도 마찬가지다. 한 달에 몇 차례씩 만나는 대학 동기 모임이 있다. ..

시읽는기쁨 2021.09.07

마르코복음[23]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고향으로 가셨다. 제자들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많은 사람이 듣고 무척 놀랐다. "이 사람이 어디서 힘을 얻어 이런 일을 하는가? 이 사람한테 내린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 손에서 이런 기적들이 이루어지다니? 이 사람은 고작 장인이며, 마리아의 아들로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여기서 우리와 함께 지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친척들과 자기 집 밖에서는 푸대접받는 일이 없습니다." 고향에서 예수께서는 병자 몇 사람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셨을 뿐,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고 그들이 믿지 않는 데 놀라워하셨다. - 마르코 6,1-5 예수에 대한 몇..

삶의나침반 2021.09.06

칸나

사람 이름을 닮아선지 '칸나(Canna)'라고 부르면 먼 이국의 고혹적인 여인이 윙크를 하며 바라볼 것 같다. 그리고는 넓은 치마폭을 흔들며 정열적인 춤을 출지 모른다. 칸나의 진홍색은 태양의 정수가 한데 모인 듯 손이라도 데면 타버릴 듯 뜨겁다. 가을 초입의 경안천변에서 칸나를 보았다. 산책로를 따라 길게 심어져 있는 칸나 길이다. 칸나는 여름에서 초가을에 이르기까지 피고지고를 반복하는 꽃이다. 꽃만 아니라 파초처럼 넓은 잎이 특색이다. 많이는 말고 창가에 서너 송이 정도 심어둔다면 여름의 정취를 즐기는 데 적당할 것 같다. 특히 비 오는 날이라면 창문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꽃들의향기 2021.09.05

무거운 밤

어설프게 술을 마신 뒤에는 잠을 설친다. 비몽사몽 상태에서 온갖 꿈이 난무한다. 꿈은 대체로 어둡고 무겁다. 가위눌릴 정도는 아니어도 영 기분이 씁쓸하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어제는 직장과 군대 꿈에 시달렸다. 둘 모두에서 나는 불성실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나온다. 직장은 학교 교무실과 교실이 주무대다. 늘 나는 수업에 들어가는 게 늦거나 교실을 찾지 못해 허둥댄다. 시간표를 착각해서 아예 수업을 빼먹기도 한다. 교실에 들어가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서툴다. 수업 준비를 안 해서 무엇을 가르칠지 몰라 진땀을 흘린다. 나는 교무실 동료나 교실의 아이들한테서나 왕따 신세다. 35년 동안 한 선생 노릇이다. 어떤 강박관념이 있길래 퇴직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이따위 꿈에 계속 시달리는지 모르겠다. 교직이 적..

참살이의꿈 2021.09.04

다시 등산을 시작하다

작년 10월에 도봉산을 찾은 이래(힘들어 정상에는 오르지 못했음) 등산과는 거리가 멀었다가 이제 다시 시동을 건다. 스틱을 꺼내는 것도 11개월 만이다. 뒷산은 심심치 않게 가지만 낮은 산이라 그저 산길 걷기 정도이니 등산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시 시작하는 등산의 첫 상대는 검단산(657m)이다. 집에서 가까운 윗배알미에서 출발한다. 단점은 대중교통이 불편하여 자가용을 이용해야 한다. 그래서 하산할 때도 같은 코스로 내려온다. 대신 사람이 적은 한적한 산길이다. 마스크를 신경 안 써도 되니 요즈음 같은 코로나 시대에 맞는 길이다. 윗배알미 쪽은 계곡이 길다. 검단산에서 가장 계곡이 깊고 수량이 많지 않나 싶다. 이곳 물은 경안천으로 들어가 팔당호에 합류한다. 상수원 수질 보호를 위해 상당한 높이까지 계..

사진속일상 2021.09.02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

오랜만에 읽는 한수산 작가의 글이다. 소설이 아닌 산문집이지만 작가 특유의 감성적인 문체에서 젊은 시절에 읽었던 작품이 떠올랐다. 벌써 40년 전으로 서커스단원들의 애환을 다룬 가 제일 기억난다. 은 이제 70대가 된 작가가 과거를 향해가는 추억 여행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작가에게 영향을 끼친 스승들에 대한 추억, 잊지 못하는 장소 등의 이야기가 애조 띤 문장으로 펼쳐진다. 시간 속에서 덧없이 흘러가고 소멸하는 인간의 삶이지만, 돌아보면 노을이 아름다웠던 아침과 저녁도 있었다. 삶의 신산을 겪은 사람의 눈에 비친 노을은 의미가 남다를 것이다. 한수산 작가 하면 먼저 '한수산 필화사건'이 생각난다. 1981년에 신문 연재소설에 쓰인 구절을 문제 삼아 작가와 관련자에게 모진 고문을 가한 사건이다. 그 일로 ..

읽고본느낌 2021.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