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창호지 쪽유리 / 윤재철

샌. 2013. 11. 20. 09:41

유리도 귀했던 때

창호지 문에

조그맣게 유리 한 조각 발라 붙이고

인기척이 나면

그 유리 통해 밖을 내다보았지

눈보다는 귀가 길었던 때

 

차라리 상상력이 더 길었던 때

여백이 많았던 때

문풍지 우는

바람이 아름다웠던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아름다웠던 때

 

- 창호지 쪽유리 / 윤재철

 

 

날씨가 차가워지니 고향 생각, 어릴 적 생각이 자주 난다. 추웠고, 먹을 것 부족했고, 모든 게 궁핍했던 그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벽난로를 피우고 거실 한쪽 벽면을 유리창으로 환하게 만들어도, 그 옛날 창호지 유리 한 조각만큼 따뜻하지는 않다. 호롱불 아래 온 가족이 둘러앉아 서로의 온기를 나누던 밤이었다. 추워서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누우면 싸락눈이 사각거리며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이 되면 온통 어둠에 덮였던 그 시절, 눈보다는 귀가 길었던 때였다. 사랑방에는 젊은이들이 모여 새끼를 꼬았고, 외할머니 집에서는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화투를 쳤다. 무슨 얘기들이 그리 많았던지, 어른들도 아이들만큼 재미나 보였다. 아이들은 놀면서 자랐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변변찮은 옷 걸치고 눈 덮인 산을 쏘다녀도 추운 줄 몰랐다. 초가집 처마 아래 잠시 몸을 녹이면 지붕에 매달린 고드름이 햇빛에 반짝였다. 아이스케키라고 빨아먹기도 했다. 사탕 한 알 구하기도 어려웠던 시절, 그래도 그때는 따스했다. 사람의 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사람이라고 다 순박했던 건 아니지만, 사람의 욕심이 지금같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지는 않았다. 그 시절이라고 사는 게 팍팍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지금처럼 극악스럽지는 않았다. 상상력이 더 길었고, 여백이 많았던 때였다.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고, 전기가 들어오고, TV가 들어오면서 세상은 넓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유년이 박물관 유물이 되는 데 불과 한 세대가 걸리지 않았다. 세상은 급격하게 변해갔고, 또 변해간다. 요즈음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과거를 돌아볼 때 세상은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 것인가. 그들 역시 지금을 낭만의 시대였다고 회상할지 모른다. 과거는 한순간의 꿈이었다고, 지금 내가 속삭이듯 미래 세대의 인간 역시 고개를 숙이고 그리움에 잘길 것이다. 아름다웠던 유년은 너무 쉽게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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