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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바. 라. 기.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어떤 결말을 지을지 궁금했다. 사적 복수를 다루는 영화에서 엔딩이 대개 찜찜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수가 통쾌하기는 하나 양심상 후련하지는 않다. 공적인 법 시스템이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해 주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용서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영화 '경주 기행'은 막내딸을 잃은 어느 가족의 복수극이다. 막내 경주는 8년 전에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당한다. 살인범은 정상 참작을 받아 짧은 형을 선고받고 피해자 가족을 두 번 울린다. 아버지는 항의해도 통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남은 어머니(옥실)와 세 딸(장주, 영주, 동주)은 출소한 범인을 경주로 찾아가 원한을 풀려하는데, 그 과정에서 온갖 해프닝이 일어난다. 살인범을 ..
남한산성 성곽을 따라 한 바퀴를 돌았다. 장경사 앞 공터에 주차하고 시계 방향으로 동문, 남문, 서문, 북문을 거치며 원 위치로 되돌아왔다. 4시간 걸렸고 15,000보가 찍혔다. 집을 나설 때는 많이 슬프고 우울했다. 아내는 먼저 나갔고, 늦게 일어난 나는 간단한 아침 후 편의점에서 빵을 사서 배낭에 넣고 출발했다. 만항재 야생화를 보러 갈 생각도 있었으나 나이가 들어선지 먼 거리가 망설여졌다. 그래서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연일 이어지는 청명한 가을 날씨였다. 땅보다는 하늘을 쳐다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하늘과 구름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거냐구. 내 속을 뒤집으려고 하는 거니, 뭐니. 걸음은 묘하다. 산길을 걸을 때 마음 속 한탄과 응어리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었다. 내 속의 ..
왜 가을을 좋아하느냐고 묻길래 나는 먼저 가을 하늘을 꼽았다. 가을이 보여주는 하늘만으로도 이 계절을 좋아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을이면 하늘을 자주 쳐다보게 된다. 이 말세로 달려가는 시대에 하늘만은 여전히 청명하다는 게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동시에 서글퍼지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 시내를 왕래하면서 본 초가을 하늘이다. 빨려들어갈 듯 마력을 가진 푸른색이다. 구름은 운동장에서 천방지축 뛰노는 개구쟁이들처럼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며 한 눈을 팔지 못하게 한다. 이럴 때는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하다. 가을 하늘이 없다면 가을의 풍요로움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가을이 더 짙어지면 하늘 색깔도 달라질 테고 마음은 스산한 바람 따라 자꾸 흔들리겠지. 그때가 되면 그때대로 견디면..
당구와 2차 술자리를 마치고 밖에 나서니 초가을의 저녁 햇살이 환했다. 은은하고 다정한 햇빛에 끌려 여수천을 산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석양에 물드는 하늘이 눈물겹게 고왔다. 가을이 불쑥 다가왔다. 선물처럼 내리는 저녁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햇볕의 온기는 따스했고 가만히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이런 저무는 저녁 시간이 행복하다. 대낮의 소란과 헛소리들을 위무시켜 주는 포근한 저녁이다. 길 위에 선 사람이나 오리도 정다웠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가 아니던가. 그래서 그대를 필요로 하는데, 다가서면 손톱을 드러내기도 하고, 내 방식이 너의 방식과 충돌하고,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느냐고 한탄하고, 그리하여 상대의 마음에 상채기를 내면서, 티격태격 살..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와 나흘을 지내고 돌아왔다. 있는 내내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씨였다. 하루는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들러 고혈압 처방을 받고, 시장에서 밭에 심을 무 씨와 쪽파를 샀다. 어머니 연세 아흔여섯, 여전히 농사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신호다. 젊었을 때부터 가까이 지내던 친구 서른 명 중 지금까지 살아계신 분은 넷이라 한다(유추하면 90을 넘기는 사람은 대략 10%쯤 된다는 얘기다). 그중에서도 텃밭 출입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유일하다. 반짝 햇빛이 나는 때가 있었다. 집 주변의 해바라기가 환했다. 풍선덩굴도 연등처럼 매달려 노랗게 익고 있다. 밖에서는 제비 십여 마리가 잽싸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멀리 떠날 비행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제비의 집단 군무는 어..
최근에 읽은 소설 세 권이다. 은 정유정 작가의 스릴러 장편소설이고, 는 정보라 작가의 호러 판타지 계열의 단편소설집이다. 그리고 은 성수진 작가의 장편소설로 제2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다. 그동안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을 비롯해 세 권을 읽었다. 그중에서도 으뜸이 이 인 것 같다. 이야기 전개가 치밀하고 빈틈이 없다. 작가는 살인을 통해 인간 본성의 악한 면을 드러낸다. 제목처럼 소설을 통해 인간 본성에 깃든 악성의 기원을 탐구하고 싶었나 보다. 작가의 작품에는 피냄새가 잔뜩 풍긴다. 에는 사이코패스가 등장하여 친족 살인을 서슴지 않고 자행한다. 섬뜩하다. 어떻게 보면 그는 그렇게 타고난 죄밖에 없다고 보이는 면도 있다. 타고나면서 동시에 만들어지기도 할 것이다. 소위 선진국일수록 사이코패스의 비율이 ..
여수천 산책로에 사람이 많이 나온 걸 보니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한다. 한여름 고생했던 에어컨도 이젠 쉴 때가 되었다. 기세등등하던 염제(炎帝)는 슬슬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고 있다. 이 또한 상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당구 모임 후 오랜만에 2차 술자리를 했다. 너무 배가 불러서 바로 버스를 타는 대신에 여수천 산책을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기분은 왜인지 슬프면서 쓸쓸했다. 가을이 반가우면서도 거북한 걸까. 낡아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쓰디씀일까. 뭔가 변죽만 울리면서 어릿광대 짓거리로 살아가는 것만 같다. 무거워진 마음은 역설적으로 한없이 가볍다. 미풍에도 쉽사리 흔들린다. 사소한 자극에도 무너지려 한다. 뭐, 버텨나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여태껏 그리 살아오지 않았는가. 어쨌든 살아지게 되..
봄여름가을겨울 (150820)) 나 하나의 무게에도허덕이며 쩔쩔매는데 당신은 대체어떤 분이시길래 (150821) 그대 오시나, 미련 두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150822) 높고푸르고장쾌하게 네 꿈도 그러하기를 (150823)
여름 막바지, 전주 가는 길에 대천해수욕장에 들렀다. 해수욕은 못 할망정 바닷물에 발이라도 담가보고 싶어서였다. 휴일이었지만 해수욕장은 썰렁했고 파장 분위기였다. 어린 손주가 있었으면 즐겁게 놀 수 있었으리라. 튜브를 빌려서 아내도 기꺼이 물 속에 들어갔으리라. 그러나 두 노인네만으로는 흥이 나지 않았다. 끝내고 샤워하면서 뒷정리하는 것도 귀찮을 뿐이었다. 대신 바닷물이 들고나는 경계를 걸으며 즐거워하는 표정의 뭇 남녀들을 구경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나만한 나잇대가 보이지 않았다. 이젠 어딜 가나 그러하다. 기원과 당구장만 빼고는. 장모님을 뵈러 전주에 가서 사흘을 있었다. 첫날 저녁에 마신 반주가 과해서 다음날 애먹었다. 둘째 날, 장모님을 정형외과와 은행에 모시고 간 것 외에는 집안에서 빈둥거렸다...
마음을 깨우고남에게 베풀고물질을 아껴라. 이 셋으로세상을 살피고 사람을 살리고 자신을 살찌울 수 있다. 不眛己心 不盡人情 不竭物力 三者可以爲天地立心 爲生民立命 爲子孫造福 - 채근담 11 노자의 삼보(三寶)가 떠오르는 구절이다. '마음을 깨우고'는 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에, '남에게 베풀고'는 자(慈)에. '물질을 아껴라'는 검(儉)과 대응한다. 겸손, 사랑, 검소함이다. 왜 그리 해야 하는가? 여기에는 적극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뒤로 물러나는 것은 숨어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함으로써 남보다 앞설 수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베풀고 물질을 아끼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살리면서 자손이 복을 받게 된다. 고담준론이 아니라 중국인의 현실적인 체세훈인 셈이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