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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바. 라. 기.
당구와 2차 술자리를 마치고 밖에 나서니 초가을의 저녁 햇살이 환했다. 은은하고 다정한 햇빛에 끌려 여수천을 산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석양에 물드는 하늘이 눈물겹게 고왔다. 가을이 불쑥 다가왔다. 선물처럼 내리는 저녁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햇볕의 온기는 따스했고 가만히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이런 저무는 저녁 시간이 행복하다. 대낮의 소란과 헛소리들을 위무시켜 주는 포근한 저녁이다. 길 위에 선 사람이나 오리도 정다웠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가 아니던가. 그래서 그대를 필요로 하는데, 다가서면 손톱을 드러내기도 하고, 내 방식이 너의 방식과 충돌하고,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느냐고 한탄하고, 그리하여 상대의 마음에 상채기를 내면서, 티격태격 살..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와 나흘을 지내고 돌아왔다. 있는 내내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씨였다. 하루는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들러 고혈압 처방을 받고, 시장에서 밭에 심을 무 씨와 쪽파를 샀다. 어머니 연세 아흔여섯, 여전히 농사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신호다. 젊었을 때부터 가까이 지내던 친구 서른 명 중 지금까지 살아계신 분은 넷이라 한다(유추하면 90을 넘기는 사람은 대략 10%쯤 된다는 얘기다). 그중에서도 텃밭 출입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유일하다. 반짝 햇빛이 나는 때가 있었다. 집 주변의 해바라기가 환했다. 풍선덩굴도 연등처럼 매달려 노랗게 익고 있다. 밖에서는 제비 십여 마리가 잽싸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멀리 떠날 비행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제비의 집단 군무는 어..
최근에 읽은 소설 세 권이다. 은 정유정 작가의 스릴러 장편소설이고, 는 정보라 작가의 호러 판타지 계열의 단편소설집이다. 그리고 은 성수진 작가의 장편소설로 제2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이다. 그동안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을 비롯해 세 권을 읽었다. 그중에서도 으뜸이 이 인 것 같다. 이야기 전개가 치밀하고 빈틈이 없다. 작가는 살인을 통해 인간 본성의 악한 면을 드러낸다. 제목처럼 소설을 통해 인간 본성에 깃든 악성의 기원을 탐구하고 싶었나 보다. 작가의 작품에는 피냄새가 잔뜩 풍긴다. 에는 사이코패스가 등장하여 친족 살인을 서슴지 않고 자행한다. 섬뜩하다. 어떻게 보면 그는 그렇게 타고난 죄밖에 없다고 보이는 면도 있다. 타고나면서 동시에 만들어지기도 할 것이다. 소위 선진국일수록 사이코패스의 비율이 ..
여수천 산책로에 사람이 많이 나온 걸 보니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한다. 한여름 고생했던 에어컨도 이젠 쉴 때가 되었다. 기세등등하던 염제(炎帝)는 슬슬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고 있다. 이 또한 상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당구 모임 후 오랜만에 2차 술자리를 했다. 너무 배가 불러서 바로 버스를 타는 대신에 여수천 산책을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기분은 왜인지 슬프면서 쓸쓸했다. 가을이 반가우면서도 거북한 걸까. 낡아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쓰디씀일까. 뭔가 변죽만 울리면서 어릿광대 짓거리로 살아가는 것만 같다. 무거워진 마음은 역설적으로 한없이 가볍다. 미풍에도 쉽사리 흔들린다. 사소한 자극에도 무너지려 한다. 뭐, 버텨나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여태껏 그리 살아오지 않았는가. 어쨌든 살아지게 되..
봄여름가을겨울 (150820)) 나 하나의 무게에도허덕이며 쩔쩔매는데 당신은 대체어떤 분이시길래 (150821) 그대 오시나, 미련 두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150822) 높고푸르고장쾌하게 네 꿈도 그러하기를 (150823)
여름 막바지, 전주 가는 길에 대천해수욕장에 들렀다. 해수욕은 못 할망정 바닷물에 발이라도 담가보고 싶어서였다. 휴일이었지만 해수욕장은 썰렁했고 파장 분위기였다. 어린 손주가 있었으면 즐겁게 놀 수 있었으리라. 튜브를 빌려서 아내도 기꺼이 물 속에 들어갔으리라. 그러나 두 노인네만으로는 흥이 나지 않았다. 끝내고 샤워하면서 뒷정리하는 것도 귀찮을 뿐이었다. 대신 바닷물이 들고나는 경계를 걸으며 즐거워하는 표정의 뭇 남녀들을 구경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나만한 나잇대가 보이지 않았다. 이젠 어딜 가나 그러하다. 기원과 당구장만 빼고는. 장모님을 뵈러 전주에 가서 사흘을 있었다. 첫날 저녁에 마신 반주가 과해서 다음날 애먹었다. 둘째 날, 장모님을 정형외과와 은행에 모시고 간 것 외에는 집안에서 빈둥거렸다...
마음을 깨우고남에게 베풀고물질을 아껴라. 이 셋으로세상을 살피고 사람을 살리고 자신을 살찌울 수 있다. 不眛己心 不盡人情 不竭物力 三者可以爲天地立心 爲生民立命 爲子孫造福 - 채근담 11 노자의 삼보(三寶)가 떠오르는 구절이다. '마음을 깨우고'는 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에, '남에게 베풀고'는 자(慈)에. '물질을 아껴라'는 검(儉)과 대응한다. 겸손, 사랑, 검소함이다. 왜 그리 해야 하는가? 여기에는 적극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뒤로 물러나는 것은 숨어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함으로써 남보다 앞설 수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베풀고 물질을 아끼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살리면서 자손이 복을 받게 된다. 고담준론이 아니라 중국인의 현실적인 체세훈인 셈이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뿐. ..
잘 만들었다고 세평이 자자해서 극장에 찾아가서 봤다. 그러나 지인 중에서는 별로라는 사람도 있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소문처럼 대단하지는 않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지루하지도 않았지만. 영화는 호메로스의 원작에 충실하려고 했으나 그게 오히려 족쇄가 되지 않았나 싶다. 어차피 신화적 요소가 강한데 더 상상력의 날개를 폈다면 좋았으련만. '오디세이'는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10년 동안의 여정을 다룬다. 외눈박이 거인, 갑옷 거인족, 마녀, 세이렌, 바다 괴물, 포세이돈 신의 도전을 받으며 부하를 모두 잃고 혼자 남겨진 오디세우스는 여신 칼립소의 섬에서 7년 동안 갇혀 지낸다. 오디세우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타카에서는 그의 왕위를 노리는 무리..
내 고향 남쪽 바다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꿈엔들 잊으리요그 잔잔한 고향 바다지금도그 물새들 날으리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어디 간들 잊으리요그 뛰놀던 고향 동무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고향에 다 있는데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온갖 것 다 뿌리치고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 같이 살고지고내 마음 색동옷 입혀웃고 웃고 지나고저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 치고물 들면 뱃장에 누워별 헤다 잠들었지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 보나내 몫엣 즐거움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을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가 안기자 가 안겨 처녀들 어미 되고동자들 아비 된 사이인생의..
광복절을 전후해 넷플릭스에서 '미스터 션샤인'을 봤다. 믿음직한 지인이 추천해 주어서였다. 2018년에 tvN에서 24부작으로 방영된 드라마다. '미스터 션샤인'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의 초기를 시대 배경으로 한다. 신미양요 때 미국으로 건너간 유진이 미군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애신과 만나면서 생기는 사랑과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들의 투쟁을 그렸다. 고전적인 사랑과 우정, 의리, 그리고 대의를 향한 용기와 희생이 전편에 깔려 있다. 구한말의 시대상을 잘 그려냈다고 본다. 24부작을 한꺼번에 몰아보는데 부담이 되었다. 추천을 받으면서는 기대를 많이 했는데 몰입도가 그렇게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사랑과 의병 투쟁의 두 축으로 전개되는데 전체적으로 간지럽다는 느낌이었다. 여성적인 감성이 남성들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