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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읽(22) - 좁은 문

20대 때 읽은 앙드레 지드의 작품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이다. 기존의 가르침이나 규범을 타파하고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젊은 가슴에 울림을 줬다. 좋은 문장들은 노트에 필사하며 정독했던 기억이 난다. '나타나엘이여'로 시작하는 싱싱한 문장들이 지금도 떠오른다. 반면에 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제목으로 봐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이라 여겼을 텐데 기대에 못 미치지 않았나 싶다. "뭐, 사랑 이야기네" 하며 실망했던 기억이 어슴프레 남아 있다. 이제 다시 읽어 본 은 젊었을 때보다는 훨씬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지드가 사랑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보인다. 의 메시지와 연관시켜 보면 더욱 분명하지 않나 싶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외사촌간인 제롬과 ..

읽고본느낌 10:03:33

두루미를 보다가 / 유안진

하늘에 사는 이가잠깐 땅에 내려서는 것도미안하게 여겨외다리 맨발 한쪽만 딛고 서는저 겸손과 염치 있음에가슴 뜨끔해져있는가 아직도 용서 받을 여지가 - 두루미를 보다가 / 유안진  지난주에 철원에 가서 두루미를 봤다. 논에 산재해서 먹이를 먹고 있는 많은 두루미 가족을 보았다. 두루미 탐조대에서는 수백 마리가 모여 있는 장관이 펼쳐졌다. 두루미와 만났으니 올 겨울도 가득 찬 셈이다. 두루미를 보면서 인간이 어떤 경지에 올라야 그들처럼 우아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꾸미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그런 것이었다. 시인은 겸손과 염치를 떠올리며 가슴 뜨끔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용서 받을 여지가 있을지를 묻는다. 정작 용서를 빌어야 할 놈은 철면피를 한 채 큰소리를 떵떵 치는 세상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게 부끄럽고 ..

시읽는기쁨 2025.01.22

토지(8)

8권은 2부의 마지막이다. 용정 생활을 마치고 10여 년 만에 서희가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공 노인의 도움으로 조준구한테 빼앗긴 땅을 되찾고 귀향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인 길상은 서희와는 다른 뜻을 품고 있었고, 우국지사들과 함께 하기 위해 연해주에 남는다. 이 권에서 월선이 죽는다. 월선은 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마음씨가 고운 여인이다. 일편단심 한 남자를 사모하면서 갖은 고난을 겪다가 암에 걸려 죽게 된다. 대척점에 물욕으로 가득찬 임이네가 있다. 두 여자 사이에서 용이도 속깨나 끓였으리라. 산판 일을 마치고 열 달 만에 돌아온 용이 월선의 마지막을 지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8권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읽고본느낌 2025.01.21

사기[35]

항우가 희하에서 진을 치고 유방을 치려고 하니 유방은 기마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항백을 통해 항우를 만나 함곡관을 막을 일이 없다고 해명했다. 항우는 병사들에게 술자리를 열어 주었다. 범증은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유방을 죽이기 위해 항장에게 연회석에서 칼춤을 추다가 유방을 찌르라고 명령했지만, 위급한 순간마다 항백이 자기 어깨로 유방을 가려 주었다. 그때 유방과 장량만 군영 안으로 들어와 연회에 참석했고 번쾌는 군영 밖에 있었다. 번쾌는 상황이 긴급하다는 소식을 듣자 곧 바로 철 방패를 들고 군영 문 앞으로 가서 안으로 뛰어들려 했지만 군영의 보초가 번쾌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번쾌는 방패로 그를 밀어젖히고 들어가 장막 아래에 섰다. 항우가 그를 보고 물었다."이자는 누군가?"장량이 대답했다."패공의..

삶의나침반 2025.01.20

다모클레스의 칼

BC 4세기 시칠리아에 있는 시라쿠사 왕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왕이 되어 보는 것이 소원인 다모클레스라는 신하가 있었다. 하루는 디오니시우스 왕이 다모클레스에게 하루 동안 왕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다모클레스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산해진미를 맛보며 왕이 된 기분을 만끽했다.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신하들을 보면서 천하가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왕좌에 앉아 있던 다모클레스가 무심코 천장을  쳐다보니 머리 위에 예리한 칼이 가는 실에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매달려 있는 칼에 혼비백산한 다모클레스는 더 이상 왕 노릇을 못하겠다며 뛰쳐나왔다고 한다. '다모클레스의 칼(Sword of Damokles)'라는 일화다. 이 이야기는 권력의 자리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말해준다. 24..

길위의단상 2025.01.19

두루미를 보고 물윗길을 걷다

철원에 가서 두루미를 보고 물윗길을 걸었다. 새로 개통한 세종포천고속도로를 이용하니 오가는 길이 수월했다. 추위가 가시고 낮 기온이 영상으로 오른 따스한 날이었다. 아내와 함께 했다. 두루미를 손쉽게 볼 수 있는 곳은 동송읍 이길리에 있는 두리미 탐조대다. 주기적으로 먹이를 뿌려주기 때문에 두루미가 많이 몰려온다. 재두루미가 90%가량 되고, 적은 숫자의 두루미가 섞여 있다. 기러기와 고니도 있다.   이동하는 길 주변의 논에도 서너 마리씩 모여 있는 두리미 가족이 자주 눈에 띄었다. 올해만큼 두루미를 많이 본 적도 없었다. 행복한 날이었다.   오후에는 물윗길을 걸었다. 철원 물윗길 얼음 트레킹은 순담계곡에서 직탕폭포까지 한탄강을 따라가며 걷는 8.5km를 걷는 길이다. 고석정, 승일교, 내대양수장, ..

사진속일상 2025.01.18

아주 편안한 죽음

보부아르가 어머니의 입원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어머니와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자전소설이다. 동시에 인간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묻는다. 70대 후반이었던 작가의 어머니는 대퇴부골절로 입원해서 암 진단을 받고 두 달가량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강인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지만 자식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간섭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했다. 자연히 보부아르와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질병으로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모녀간의 유대감을 확인한다. 작가는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드러냄으로써 어머니를 애도하면서 자신과도 화해하게 된다. 책 중 한 대목은 이렇다.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둔 이 환자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면..

읽고본느낌 2025.01.15

날아라 고니

경안천이 대부분 얼음으로 덮였다. 일부 얼지 않은 곳에는 고니와 기러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동장군에 맞서 물을 지켜내려고 진을 치고 있는 병사들 같다. 다행히 당분간은 강추위 예보가 없다. 새들이 놀 수 있는 터전이 이만큼이라도 계속 보존되면 좋겠다.  얘들은 한낮에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휴식시간인 것 같다. 그래도 기다리다 보면 운 좋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고니를 볼 수 있다. 솟구쳐오르는 힘찬 날갯짓에 내 심장이 마구 뛴다. 유유히 비행하는 우아한 자태를 넋을 빼앗기고 바라본다.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근처에는 맹금류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사냥할 생각이 가득한 듯하나 무리지어 있으니 공격할 엄두가 안 나는가 보다. 천변을 걷다 보면 새털이 무더기로 흩어져..

사진속일상 2025.01.14

개치네쒜

최근에 재미있는 우리말을 하나 알았다. "개치네쒜!" 재채기를 한 후에 내는 감탄사로, 이 말을 외치면 감기가 들어오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감기야, 물렀거라!'라는 뜻이다. 동시에 재채기를 한 당사자에게도 건강을 비는 의미가 있다. 영미권에서 쓰는 "Bless You"와 비슷하다. 대중교통을 탔을 때 옆에 재채기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짜증이 나고 눈총을 주게 된다. 마스크라고 쓰고 있으면 다행이지만 어떤 사람은 입을 가리지도 않는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사람들은 무척 예민해져 있다. 버스 안에서 재채기를 하다가 싸움이 벌어졌다는 보도도 있었다. 개치네쒜는 내가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는 주문이면서 상대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좋은 말이다. 어원이 궁금한데 찾아봐도 분명하게 나와 있..

길위의단상 2025.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