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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바. 라. 기.
아내와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와 함께 셋이서 단촐하게 추석을 보냈다. 내려가는 길에 희방사와 희방폭포에 들렀다. 희방사는 40대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근 30년 만이었다. 아련한 추억에 잠기느라 발걸음이 무거웠다. 추석 전날 성묘를 다녀왔다. 산소와 주변 밭은 두 동생이 다할 수 없이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다. 밭을 둘러싼 야산에는 아내가 '황금어장'이라 부를 정도로 떨어진 밤이 많았다. 들고 가지를 못해서 뒤돌아서야 했다. 호박과 들깻잎도 땄다. 쓸쓸한 명절 아침을 맞는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하랴 싶다. 오랫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시지를 않았다. 나는 답답한 마음을 한껏 욕하는 것으로 달랬다. 인두겁을 쓰고 어찌 행실이 그렇단 말인가. 악몽에 시달렸고 이틀 몸살을 앓았다. 다행히 회복은 빨랐다.
초기 천주교 역사를 다루는 정민 선생의 역작이다. 이만한 객관적 시각으로 천주교의 역사를 서술한 책은 보지 못했다. 대개는 신앙이나 순교를 강조하는 책이 많았다. 선생은 오직 문헌을 통해 사실을 알아내려고 한다. 책은 900페이지나 되지만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게 읽었다. 책은 조선 천주교의 태동부터 1801년 신유박해 때까지를 다룬다. 공식적으로 조선 천주교의 시작은 1784년에 이승훈이 중국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한 뒤부터지만 그전부터 자생적으로 천주교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중심에 최초의 수덕자로 불리는 홍유한이 있고 이벽을 중심으로 한 연구 모임이 있었다. 1779년의 주어사 강학 모임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내부에서 천주교가 태동한 건 세계 가톨릭 역사상 조선이 최초라고 한다. 책을 읽으며 18세..
사람이 몇 생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이나 전화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 수렴 진주담과 만폭동 다 고만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 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 함께 흘러 구룡연 구척절애에 한번 굴러보느냐 - 구룡폭포 / 조운 구룡폭포는 길 수 없는 땅, 금강산에 있다. 아마 시인은 일제강점기 때 구룡폭포를 찾아 그 웅장한 물줄기를 보며 이 시조를 썼을 것이다. 시대적 상황 속에서 암울하고 답답했을 시인의 마음이 읽힌다. 폭포수가 되어 구척절애로 굴러 떨어지는 소망을 하다니. "사람이 몇 생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이나 전화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장엄하면서 무심한 비경을 마주 한 시인의 아프고 막막..
임플란트 치료 중에 음식 섭취가 자유롭지 못하고 무료해서 넷플릭스에서 찾아본 드라마다. 2022년도에 tvN에서 방영되었는데 20부작이라 다 보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14명의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달고도 쓴 여러 인생의 애환에 공감하며 가슴 뭉클해지는 따뜻한 드라마다. 다 보고 나서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두 사람씩 묶어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첫 편 '한수와 은희'의 애틋한 사연으로 시작해 마지막 편 '동욱과 옥동'의 모자간 눈물의 화해로 끝난다. '영주와 현'의 철부지 사랑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누군가에 의해 보듬어질 때 그 상처는 꽃으로 승화..
경기도 화성시 궁평항 인근에 있는 방풍림 역할을 하는 소나무숲이다. 바닷가를 따라 수백 미터에 걸쳐 천 그루가 넘는 해송(곰솔)이 숲을 이루고 있다. 줄기 굵기로 판단컨대 수령이 100년은 충분히 되어 보인다. 숲 사이로 산책로와 쉼터가 잘 만들어져 있어 바다 풍경을 감상하며 걷거나 휴식하기에 좋다. 솔숲 속에서 간이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았다. 예전과 달라진 모습이다. 그러기에 이 솔숲은 딱 적당한 것 같다. 특히 저녁 낙조를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앞으로 자주 찾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궁평 바닷가의 소나무 숲이다.
화성 황금해안길은 제부도와 궁평항을 잇는 길이 17km의 바다를 따라 걷는 길이다. 낙조경관길(제부마리나~송교리, 5km), 소금바다길(송교리~백미항, 4.5km), 궁평관광길(백미항~궁평항, 7.5km)의 세 구간으로 되어 있다. 그중에서 제일 인기가 있다는 궁평관광길을 아내와 같이 왕복하며 걸었다. 시간 여유가 있기에 먼저 제부도에 들러 북쪽 해안 데크길을 걸었다. 제부도는 8년 만이었다. 바지락칼국수로 점심을 먹고 궁평항으로 이동했다. 궁평관광길은 바다 위로 설치한 데크 길이 많았다. 완전 썰물이어서 넓게 갯벌이 드러나 있었다. 해송 숲길이 멋졌다. 차를 세워둔 궁평왕으로 되돌아와야 했기에 백미항 가까이 가서 유턴을 했다. 길 옆에 야자수 카페가 있어서 한 시간 반 정도 편안한 휴식을 취했..
학습관에서 일 년에 한 번 가을에 작품 전시회를 연다. 마침 때가 맞아 배우고 있는 디지털 캘리그래피 작업물을 내게 되었다. 고작 두 달 정도 배우고 작품이랍시고 제출한 것이다. 그 전시회가 지금 열리고 있다. 내가 쓴 문구는 '행복, 나만의 속도로 걸어가기'였다. 선생님이 준 글씨체를 흉내 내었고, 좋아하는 미루나무와 달팽이 그림을 그렸다. 달팽이는 다른 사람 그림을 참고했다. 언제 내 글씨와 내 그림이 나올지는 까마득하다. 부족하나마 이 정도 결과물이 나왔다는데 뿌듯하다. 짧은 기간에 이만하면 만족해야겠지. 연초에 붓 캘리그래피, 지금은 디지털 캘리그래피, 다음에는 딥펜 캘리그래피 수업을 들어보려 한다. 금년은 캘리그래피에 빠져 있는 해다. 글씨를 쓸 때면 잡념을 잊고 행복하다. 덕분에 아이패드를..
11년 만에 안산을 찾아 자락길을 걸었다. 사사모 회원 셋과 함께였다. 이 동네에는 달고 쓴 기억이 배어 있다. 달았던 것보다는 쓴 맛이 수백 배는 되었다. 아직도 마음이 편치 않은 장소다. 서대문독립공원을 지나 안산 자락길에 들었다. 석 달 만에 만나선지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얘깃거리가 많았다. 여전히 하늘 좋은 날이었다. 길은 10여 년 전과 대체로 같았으나 제일 크게 달라진 점은 새로 생긴 맨발 걷기 황톳길이었다. 길이가 길면서 관리가 잘 되어 보였다. 울창한 메타세콰이어 숲도 여전했다. 길을 따라 꽃무릇이 피어나고 있었다. 자락길을 한 바퀴 도는 데 세 시간 반가량 걸렸다. 평탄한 길이어서 힘들지는 않았다. 우리 동네 저녁 구름도 좋았다. 집에 들어오니 총 걸음수가 25,000보가 ..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어떤 결말을 지을지 궁금했다. 사적 복수를 다루는 영화에서 엔딩이 대개 찜찜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수가 통쾌하기는 하나 양심상 후련하지는 않다. 공적인 법 시스템이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해 주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용서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영화 '경주 기행'은 막내딸을 잃은 어느 가족의 복수극이다. 막내 경주는 8년 전에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당한다. 살인범은 정상 참작을 받아 짧은 형을 선고받고 피해자 가족을 두 번 울린다. 아버지는 항의해도 통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남은 어머니(옥실)와 세 딸(장주, 영주, 동주)은 출소한 범인을 경주로 찾아가 원한을 풀려하는데, 그 과정에서 온갖 해프닝이 일어난다. 살인범을 ..
남한산성 성곽을 따라 한 바퀴를 돌았다. 장경사 앞 공터에 주차하고 시계 방향으로 동문, 남문, 서문, 북문을 거치며 원 위치로 되돌아왔다. 4시간 걸렸고 15,000보가 찍혔다. 집을 나설 때는 많이 슬프고 우울했다. 아내는 먼저 나갔고, 늦게 일어난 나는 간단한 아침 후 편의점에서 빵을 사서 배낭에 넣고 출발했다. 만항재 야생화를 보러 갈 생각도 있었으나 나이가 들어선지 먼 거리가 망설여졌다. 그래서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연일 이어지는 청명한 가을 날씨였다. 땅보다는 하늘을 쳐다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하늘과 구름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거냐구. 내 속을 뒤집으려고 하는 거니, 뭐니. 걸음은 묘하다. 산길을 걸을 때 마음 속 한탄과 응어리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었다. 내 속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