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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바. 라. 기.
미시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원자들의 아득한 이합집산이라는 운동 외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은 우주의 태초 이래 형성된 것들로 일시적으로 지금 내 몸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백 수십 억년 전에 만들어진 원자들이 잠시 이런 결합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때가 되면 다시 흩어질 것이다. 우리 앞을 살았던 선조들 몸속에 있었던 모든 원자들은 땅이나 대기, 다른 생명체의 성분이 되어 있다. 세종대왕의 몸속에 있던 원자가 현재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원자로 연결된 하나다. 인연이 되면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진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른 배열, 다른 패턴을 지을 뿐이다. 창 밖으로 소나무가 보인다. 소나무의 목질을 구성하는 탄소는 광합성 과정을 거쳐 대기 중에서..
"노목은죽지 않고다만 사라질 뿐이다" 널 보며알게 되었지 사라진다는 건없어지는 게 아니란 걸다만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될 뿐이란 걸 (150701) 널 보면주근깨 투성이의그 아이가 생각난다 엄마 치맛자락에 매달려감자 한두 알로끼니를 때우던 냇가에서 빨래하며교복 입은 또래 보고고개를 들지 못하던 철없던 우리는물수제비 날리며놀려대곤 했지 "미안해" 속죄의 뜨거움으로 피어 난 너 (150702) 멀리서나 가까이서나어느 각도에서나예쁘다꽃은 꽃을 닮은 너도 (150703) 화원(花園)이든화택(火宅)이든 옳음도그름도 아닌 진지하게조심스럽게 오직그 걸음으로 (150704) 귀 기울여본 적 있나요 남이나세상이 아닌 내 안의작고 쓸쓸한 그 아이의목소리에 (150705)
몸이 편찮으신 수녀님을 뵈러 아내와 함께 S수녀원에 찾아갔다. 회복 중이시라 아직 수척하신 모습이 안쓰러웠다. 같이 점심을 나누고 작고 조용한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주로 신앙에 관한 대화였다. 수녀원 성당에서는 2027년 8월에 열리는 세계청년대회를 위한 나무 십자가가 모셔져 있었다. 1983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젊은이들에게 전달한 십자가라고 한다. 이 십자가는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전국의 수도원과 성당을 순회하며 전시한다. 수녀님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 부부의 손을 잡고 기도해 주셨다. 신앙심(信仰心), 종교심(宗敎心)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너무 막막하다. 인간이란 무엇인지,라는 질문이 먼저 앞을 가로막고 나아갈 길을 막는다. 긴 냉담 기간을 거치며 나는 유물론자가 되어 버렸다. 지..
듣기 싫은 말만 들리고 원치 않은 일만 생기면마음과 몸을 닦는 숫돌을 얻을 것이고즐거운 말만 들리고 흐뭇한 일만 생기면스치기만 해도 죽는 독을 얻게 될 것이다 耳中常聞逆耳之言 心中常有拂心之事 纔是進德修行的砥石 若言言悅耳 事事快心 便把此生 埋在鴆毒中矣 - 채근담 6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더 깊이 들어가는 길이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단련이 있어야 한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다. 듣기 싫은 말이 들리고 원치 않은 일이 생길 때 마음과 몸을 닦는 기회이구나,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별다른 고민이나 고통 없이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이 있다. 찬탄하는 말만 들리고 흐뭇한 일만 생긴다. 남들의 부러움을 산다. 그걸 복이..
베란다에 있는 풍란이 꽃을 피웠다. 이사 오면서 다육이들과 함께 이 풍란을 샀으니 벌써 15년째다. 초기에는 매년 꽃을 피웠는데 언제부턴가 해를 거르며 뜸해졌다. 일기를 보니 9년 전에 꽃 피웠던 기록이 적혀 있다. 오래 지나다 보니 베란다에 있는 식물에 관심이 떨어지고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꽃 피우는 것도 관심도와 관계가 있는가 보다. 여러 개체를 샀는데 반 이상이 죽고 일부만 살아남아 있다. 그런데도 아랑곳없이 하얀 꽃을 피워냈다. 가만히 너를 들여다본다. 코를 가까이 대 보니 향기가 진하다. 누구를 불러오려고 이토록 고운 향을 만들었단 말인가. 방충망으로 차단되어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데 말이다.
쥘상치 두 손 받쳐 한입에 우겨넣다 희뜩눈이 팔려 우긴 채 내다보니 흩는 꽃 쫓이던 나비울 너머로 가더라 - 상치쌈 / 조운 토속적인 정경이 훤하게 그려진다. 두 손 받쳐야 하는 상추쌈이니 엄청 클 것이다. 입에 '우겨넣다'라는 표현과 잘 맞는다. 여름 농사일 뒤에 먹는 맛이 얼마나 달 것인가. 이때 뭔가 눈을 스치는 게 있다. 작은 나비의 움직임도 눈치챌 만큼 고요한 정경이라는 뜻이겠다. 시인은 잠시 멈추고 울 너머로 날아가는 나비를 바라본다.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무식하게스리 먹는 행위와 나풀거리는 나비가 묘한 대비를 이룬다. 산다는 것은 이런 속(俗)과 성(聖)의 어울림이 아니겠는가. 아니, 아예 그런 구별 자체가 없는지도. 장자의 '나비의 꿈'도 연상된다. 시인은 순간 나비가 되었는..
젊었을 때는 성격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어떻게 해야 내향성에서 탈피할 수 있는지 온갖 시도를 해 보았다. 하나 같이 실패했다. 도리어 벽은 더 높아만 갔다. 중년이 되어서야 주어진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늘이 내린 성격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포기하니까 마음이 편해졌다. 은 내 구미에 딱 맞는 책이다. 부제가 '은둔과 거리를 사랑하는 어느 내향인의 소소한 기록'으로 지은이는 김지선 작가다. "그래 맞아, 이건 내 얘기야"라며 많이 흐뭇해했다. 같은 과를 만나게 되면 낯선 외국의 거리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반갑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힘들어하는 동지가 있다는 건 위로가 된다. '예찬'이라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늙을수록 점점 더 그러하다. 어울리고 나대기를 좋아하는 것보다..
전국이 장마 속에 들어 있다. 올해 장마는 조금 늦어서 7월 초순에 시작되었다. 현재까지는 장마가 얌전하게 진행되고 있다. 가끔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지지만 집중호우는 아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잠시 그친 틈을 이용해 여수천에 나갔다. 천 산책로로 진입하는 모든 입구에는 출입금지 푯말과 함께 줄로 가로막아 놓았다. 갑작스러운 폭우에 대비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너무 획일적인 조치 같다. 무시하고 그냥 내려갔다. 약간의 통쾌함도 느끼면서 텅 빈 산책로를 걸었다. 어쩌다 보이는 사람이 반가웠다. 저 사람도 줄을 넘어 들어왔을 것이다. 인생길에서는 세상을 냉소하면서 서로 낄낄댈 수 있는 비슷한 과가 필요한 법이다. Y가 말했다."우리 나이에 제일 문제는 열정이 사라졌다는 거야. 그걸 어떻게 ..
누르면 쑝, 하고푸른 하늘로 던져질 수 있지 인생에도위기의 순간에 누를 수 있는비상 버튼이 하나 있다면 (150501) 얘야,왜 하필거기냐고 그럼에도 생명은꽃을 피운다 나도살아야겠다 (150502)
한 달 전부터 AI와 바둑 두는 재미에 빠져 있다. 보통 인터넷으로 바둑을 많이 두지만 나는 성격상 아무 사람과 상대하는 게 피곤하다. 온라인에서는 무례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는 바둑을 승부보다는 기도(棋道)나 기예(棋藝)로 생각하려 한다. 시간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음미하며 즐겨야 한다. 주로 속기로 진행되는 인터넷 바둑은 이런 성격과는 대척점에 있다. 바둑을 두면서 왜 그리 쫓겨야하는지 모르겠다. AI 바둑의 장점은 시간이 무제한이라는 점이다. 오래 생각해도 눈치 주지 않는다. 시간이 무제한이어도 AI는 금방 둔다. 시간을 끄는 것은 인간인 나다. 불공평하긴 하나 어쨌든 마음이 편하다. AI와 바둑을 두면서는 바둑의 정수(正手)를 배울 수 있다. AI는 엉터리 수를 두지 않는다. 또 AI는 수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