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봉우리 / 김민기

샌. 2024. 7. 24. 10:32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길 해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

나한텐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잊어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보는 거야

봉우리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 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거기 부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겠지 뭐

혹시라도 가끔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올 땐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고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 속에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가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 봉우리 / 김민기

 

 

지난 21일에 김민기 님이 세상을 뜨셨다. 1951년생이니 향년 73세, 나와 같은 시기에 대학 생활을 하신 분이다. 선생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된 것은 지난봄에 SBS TV에서 방영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라는 3부작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어렴풋한 이미지만 가지고 있던 선생이 이렇게 대단하신 분인 줄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선생의 대표작 중 하나인 '지하철 1호선'을 봤던 기억도 아련하다. 선생을 생각하면 먼저 '저항'과 '민중'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은 이 연극의 영향이 컸다. 신랄한 사회 비판과 풍자가 어우러졌던 무대였다. 그렇다고 선생이 사회 변혁에 앞장을 선 활동가는 아니었다. '뒷것'이라는 명칭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큰 역할을 하신 분이다. 

 

돌아보니 김민기 '정신'이란 게 존재하는 것 같다. 인간에 대한 -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 - 연민과 사랑을 말이나 구호가 아니라 삶과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진보를 표방하지 않았지만 가장 진보적인 삶을 사신 분이 아니었나 싶다. 경영난으로 학전이 문을 닫게 된 배경에는 돈이 되지 않는 문화 공연에 집중한 탓이 크다고 한다.

 

님은 말이 없고 드러나지 않았어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큰 스승의 울림을 준다. 우리 사회에 더 따스한 온기를 전해줄 수 있었을 텐데 일찍 가시게 되어 안타깝다. 선생의 명복을 빌며 내가 좋아했던 노래 '봉우리'를 선생의 목소리로 다시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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