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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17, 18)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해서 미국에 도전하지만 전세는 기울어진다. 국민총동원령을 내려 조선인 강제 징용과 징병제를 실시한다. 요주의인물에 대한 예비검속령으로 김길상, 서의돈, 유인성, 선우신 등이 감옥에 들어가고 남은 사람들은 숨 죽이며 사태를 관망한다. 일제의 패망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며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시절이다. 쭉 그래 왔지만 소수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방관자로 살아간다. 민족의식을 가진 지사들은 대부분 시대의 제물이 되어 망가진다. 17, 18권에 나오는 여옥과 명빈이 대표적이다. 둘은 운동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폐인이 될 정도로 고통을 받는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몸이 점차 회복된다.  후반부로 가면서 등장인물은 2, 3세대가 주역이 된다. 자주 나..

읽고본느낌 10:02:23

탄천 산수유

야탑 모임에 가는 길에 탄천에 나가봤더니 산수유가 활짝 폈다. 역시 산수유는 봄의 전령사가 분명하다. 사람 세상이 시끄럽든 말든 봄은 온다. 인간이 하는 꼬라지를 보고 봄이 고개를 내젓는다면 어찌 하겠는가. 무심한 자연의 변화가 고맙기만 하다.  봄철 꽃나무를 찾는 단골 손님은 직박구리다. 직박구리는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봄나들이를 즐긴다. 가까이서 이런 포즈를 취해주는 새는 드물다.

꽃들의향기 2025.03.20

두 친구

자주 만나지 못하는 두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둘 다 첫마디가 "참 오랜만이다!"였다. 40대 때만 해도 한 해에 두세 번은 만났는데 그 뒤로는 빈도가 점점 떨어졌다. 그러다가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묻게 되고, 그마저도 해를 넘기기 일쑤였다. 늙어지면 대개 그렇게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천태만상이다. 같은 인간인데 어쩜 이리 다양할까, 신기한 생각이 든다. 처한 환경이나 사고방식, 건강 상태까지 각양각색이다. 젊을 때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노년이 될수록 삶의 스펙트럼의 폭이 확대되는 것 같다.  A는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다리에 괴사에 생겨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받았다. 발가락을 잘라냈고 아직도 병원 치료중이다. 걷지를 못하니 바깥출입을 하지 못한다.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

길위의단상 2025.03.19

3월의 풍성한 눈

3월 하순으로 접어드는데 한겨울 같은 눈이 내렸다. 어젯밤에 대설 특보가 내리고 아침까지 계속되다가 그쳤다. 습기를 머금은 무거운 눈에 소나무 가지가 부러질 듯 휘청인다. 오후에는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나와 있으니 곧 작별을 해야 할 마지막 눈일 듯싶다.  올 겨울은 눈이 많았다. 농경사회에서 눈은 풍년을 약속하는 반가운 존재였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공휴일이 되는 나라도 있다. 얼마나 낭만적이면 이런 기념일도 있을까.     어제는 수서에서 면목회 모임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차를 나누며 40여 년 전의 옛이야기에 젖었다. 각자가 소환하는 얼굴들에서 갖가지 추억들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지금은 다들 어떻게 지낼까 궁금해지기도 하면서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인연과 우연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었다. 눈은 곧..

사진속일상 2025.03.18

인사는 잠깐인데 우리는 오래 헤어진다

늙어가면서 감성을 잃지 않고자 젊은 여성의 글을 일부러 찾아 읽는다. 이 책도 그렇게 해서 서가에서 골랐다. 지혜 작가가 쓴 에세이로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이 함께 있어 좋았다. 작은 빛을 찍은 사진이 많았다. 책을 다 읽은 뒤 사진만 따로 음미하는 느낌이 좋았다. '인사는 잠깐인데 우리는 오래 헤어진다'라는 제목에 가족의 슬픈 사연이 숨겨져 있어 가슴 아팠다. 작가는 부모가 있음에도 고모 손에서 자랐다. 낳은 부모, 기른 부모를 경험한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 작가의 글이 오롯이 담고 있다. 쓸쓸하면서 따스한 풍경들이다. 살아간다는 일이 그러하듯이. 책을 읽으면서는 자주 시선이 돌려져 창밖을 바라보게 된다. 글 일부를 옮긴다. - 어젯밤 버스 의자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우는 사람의 뒷모습을 봤다. 그건 ..

읽고본느낌 2025.03.17

주막 / 백석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八)모알상이 그 상 우엔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戔)이 뵈였다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울파주 밖에는 장군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 주막(酒幕) / 백석  장날 주막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장날이 되면 주막은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동무의 집에서 주막을 했던 모양이다. 거기서 얻어먹던 붕어곰의 맛이며, 주막 안팎의 광경이 정겹게 다가온다. 어릴 적에 어른들을 따라 장에 갔을 때 봤던 주막의 모습도 어슴프레 떠오른다. 어린 나는 주막에 딸린 작은 방에 들어가 따끈한 국수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문 밖에서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드물게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나는 놓치지..

시읽는기쁨 2025.03.16

사기[39]

숙손통이 한왕에게 항복하였을 때 그를 따르던 유생과 제자는 100명이 넘었다. 그러나 숙손통은 그들을 한왕에게 추천하여 벼슬길을 열어주지 않고 도적이나 장사치만을 추천하여 나아가게 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뒤로 숙손통을 욕하며 말했다."선생을 여러 해 동안 섬겼고, 다행히 선생을 따라 한나라에 항복하게 되었는데 지금 선생은 저희들을 추천하지 않고 아주 교활한 사람들만 오로지 추천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숙손통은 이 말을 듣고서 이렇게 말했다."한왕은 화살과 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하를 다투고 있는데, 여러분이 어찌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먼저 적장의 목을 베고 적기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믿고 잠시 기다리십시오. 나는 여러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한왕은 숙손통..

삶의나침반 2025.03.15

청계산 진달래능선을 걷다

용두회의 이번달 걷기는 청계산 진달래능선이었다. 진달래가 피는 때에 맞추었더라면 금상첨화였겠으나 꽃이 나오기 전 이른 봄의 산도 좋았다. 산길에서는 봄이 오는 소식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청계산역 2번 출구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원터골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원터골 계곡에서는 얼음 녹은 물이 봄을 재촉하듯 재잘거렸다.   진달래능선을 따라 옥녀봉으로 올라간다. 약간의 황사가 있었으나 크게 개의할 정도는 아니었다.   진달래는 긴 겨울잠에서 이제 막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4월 초가 되면 이 길은 분홍색 꽃물결로 일렁이리라.   유일하게 생강나무꽃이 샛노란 봉오리를 선보이고 있었다.  진달래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강남의 모습이다. 먼 시야는 흐릿했다.  친구들은 중턱까지 오르더니 못 가겠다며 다들 쉼..

사진속일상 2025.03.14

2025 기상사진

기상청이 주관하는 '제42회 기상기후 사진 영상 공모전'의 수상작이 결정되었다. 이번 공모전에는 사진 3394점, 영상 115점 등 총 3509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다고 한다. 해가 갈수록 작품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올해의 대상은 김정국 작가의 '물기둥'이 받았다. 지리산 위로 여러 개의 물기둥처럼 소나기가 내리는 풍경을 찍은 사진이다. ▽ 대상: 물기둥(김정국), 구례, 2023. 8. 25. 06:13  ▽ 금상: 한옥마을 위 무지개(유광현), 전주, 2024. 10. 4. 15:20  ▽ 은상: 버섯구름(신규호), 경기도 광주, 2024. 8. 16. 18:15  ▽ 은상: 마른 하늘의 날벼락(유진희), 서귀포, 2024. 8. 17. 22:50  ▽ 동상: 안개가 목포를 점령한 날(홍희..

길위의단상 2025.03.13

토지(16)

16권은 신경에서 생활하는 홍이 1940년 8월 1일자 신문을 읽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권의 시대 배경은 1940년대 초반으로 일제가 전쟁을 확대하며 민족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던 때다. 길상의 손자 돌잔치 장면을 그린 대목에서 당시의 암담한 시대 상황을 묘사한 부분이다. "불안과 공포, 억압에서 빚어진 습성 같은 것이지만 이제는 북녘땅에서 실려오던 신화 같은 것은 없다.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 있을 뿐 전쟁의 함성, 전과(戰果)만 대서특필 전해질 뿐, 모든 것은 일본이 파놓은 깊이 모를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 지원병제도, 민족신문의 폐간, 노동력 차출, 식량 공출, 유명무명의 조직 확대, 관리들과 학교 교사까지 준군복(準軍服)인 카키복 국민복으로 갈아입..

읽고본느낌 2025.03.12

시간이 남아서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갔는데 약속 시간에 30여 분 일찍 도착했다. 약속 장소가 20년 전에 살았던 동네라 옛 추억을 되살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살았던 아파트 단지 안에도 들어가 보고, 자주 왕래하던 길도 걸었다. 골목길 모퉁이의 편의점은 그대로였고, 음식점은 간판만 바뀌었을 뿐 그때에 비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서울치고는 변화가 적은 동네였다. 20년의 중첩된 세월을 경험하는 기분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씁쓰레한 추억이 몇 개 떠올랐다. 그때는 내 잘못으로 서울 집을 잃고 전세살이를 하던 시기였다. 마침 계약이 만료되어 가는데 집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집값이 폭등하면서 덩달아 전셋값도 치솟았다. 집주인이 터무니없이 값을 올려서 같은 집에 계속 살 수는 없었다. 작은 집으로 가든지..

참살이의꿈 2025.03.11

봄 오시는 동네를 산책하다

봄 오시는 발걸음이 느리다. 시베리아의 한기가 늦게까지 한반도를 덮고 있었던 탓이다. 꽃 피는 시기가 예년에 비해 한두 주는 늦는 것 같다. 덩달아 세상살이에도 냉기가 걷히지 않고 있다. 우리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민주주의와 인류애라는 가치를 지키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실감한다. 그래도 때가 되면 봄은 온다. 자연의 철리는 어김이 없다. 내복을 벗고 동네 산책에 나섰다.  밖에서 놓아먹이는 닭을 만났다. 장닭 한 마리와 암탉 두 마리가 흙을 파헤치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자유롭고 기운찬 모습이 반가웠다. 특히 장닭의 기세는 지구를 떠받칠 듯 늠름했다. 셋은 기분이 좋은 듯 연신 꼬꼬 거리며 만족스러운 소리를 냈다. 닭장 안이 아니라 이렇듯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닭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

사진속일상 2025.03.09

산창을 열면 / 조오현

화엄경 펼쳐놓고 산창을 열면이름 모를 새들이 이미 다 읽었다고이 나무 저 나무 사이를 포롱포롱 날고.... 풀잎은 풀잎으로 풀벌레는 풀벌레로크고 작은 푸나무들 크고 작은 산들 짐승들하늘 땅 이 모든 것들 이 모든 생명들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하나로 어우러져몸을 다 드러내고 나타내 다 보이며저마다 머금을 빛을 서로 비춰주나니.... - 산창을 열면 / 조오현  을 접하지는 못했으나 '화엄세상'이란 말은 자주 들었다. '세상 모든 존재가 함께 어우러져 장엄하게 빛나는 세상'이라는 의미로 알고 있다. '화엄'하면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구슬로 된 인드라망이 떠오른다. 우주의 모든 개체는 홀로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작용이라는 관계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개체는 개체가 아니고 하나는 하나가 아니다. ..

시읽는기쁨 2025.03.08

티격태격하면서

부부는 티격태격하면서 살아간다. 노년이 되어도 다르지 않다. 젊었을 때보다 빈도나 강도가 줄어들 뿐이다. 그저께는 아침 식탁에서 아내와 하찮은 일로 입씨름을 했다. 그러고는 감정이 상해 입을 닫았다. 차분하게 대화로 풀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잘 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침묵이 나은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침묵하면서 둘의 관계를 들여다보게 되면 얼마 가지 않아 연민에 닿는다. 연민은 너나 나나 모두 가련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서 오는 느낌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에 대한 원망도 봄눈 슬듯 사라진다. 또한, 나보다 상대가 받은 상처가 어떠했을지를 헤아리게 된다. 연민은 용서보다 힘이 세다. 부부간의 마찰이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적절한 긴장과 스트레스가 삶에 활력을 주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추어탕에..

참살이의꿈 2025.03.07

토지(15)

15권은 4부의 마지막 권이다. 소설의 무대는 1930년대 후반으로 일제의 중국 침략이 시작되어 남경 학살이 벌어지면서 세계대전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시기다. 국내 정세도 전시 분위기로 바뀌면서 폭압이 심해진다. 그와 함께 어두운 시대를 극복하려는 조선인들의 고투도 이어진다. 고향에 내려온 길상은 은인자중하며 지낸다. 서희와 두 아들이 있기에 함부로 앞장설 수도 없다. 이 시기에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 투척이 있었다. 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부끄러운 역사인 배화(排華) 폭동이 일어났다. 만주에서 일어난 중국과 조선 농민의 충돌을 조선일보가 과장되게 보도하면서 국내에서 화교를 습격하고 학살하는 만행이 일어난 것이다. 일제의 농간에 놀아난 참극이었다. 군중들이 얼마나 쉽게 사악한 정치 세력들에 ..

읽고본느낌 2025.03.05

임계장 이야기

제목에 나오는 '임계장'이 직책인 줄 알았더니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어서 씁쓰름했다. 이 책은 공기업에서 퇴직한 후 시급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조정진 씨의 노동 일지다. 그는 버스 회사 배차계, 아파트 경비원을 거쳐 빌딩 주차 관리 및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가정 형편이 그를 힘든 노동 현장으로 내몰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동네에서도 자주 마주치는 아파트 경비원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알게 되었다. 피상적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딴판의 현실이 숨어 있었다. 노동의 강도만 아니라 관리사무소나 입주민 사이에 생기는 심적 갈등이 그분들을 힘들게 했다. 소수지만 어디에나 못된 인간이 있기 마련이다.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만 횡포를 부리거나 갑질을 하는 건 아니다. 그들에게 임시계약직은 좋은 먹잇..

읽고본느낌 2025.03.04

오우가 / 윤선도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동산에 달 떠오르니 그 또한 반갑구나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빛이 좋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바람소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많은지라좋고도 그칠 때가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풀은 어찌하여 푸르듯 누르나니아마도 변치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소나무야 너는 어찌하여 눈과 서리를 모르느냐땅속 깊이 뿌리가 곧은 줄을 그것으로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저러고 사철을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비추니밤중에 밝은 빛이 너만 한 것 또 있겠는가보고도 말이 없으니 내 벗인가 하노라 - 오우가(五友歌) / 윤선도  꽃을 품평하여..

시읽는기쁨 2025.03.03

사기[38]

고조가 직접 나서서 진희를 치려고 하자, 주설이 울면서 말하였다."일찍이 진나라가 천하를 칠 때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간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언제나 직접 나가시는데 쓸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러십니까?"고조는 '나를 아끼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궁궐 문을 들어서서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아도 되고, 사람을 죽여도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는 특전을 내렸다.효문제 5년에 주설이 타고난 수명을 누리고 죽자 시호를 정후라고 했다. - 사기(史記) 38, 부근괴성열전(傅靳蒯成列傳)  이 편은 유방을 보좌한 세 명의 장군(부근, 근흡, 괴성후/주설)에 대한 짧은 전기다. 셋 중에서 주설(周緤)은 유방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평생을 유방 곁에서 주군을 지킨 사람이다. 그는 유방이 싸움터에 나갈 때마..

삶의나침반 2025.03.02

양양, 속초 여행(2)

방음이 잘 안 되어 잠을 설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밤 10시가 넘으니 시끄럽던 옆방도 조용해져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온돌방 바닥도 따스했다.  일어나서 리조트 15층에서 바라본 영랑호 주변의 속초 풍경이 아스라했다. 아침 해는 빌딩 사이로 솟아오른 뒤였다.  리조트에서 나오는 조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바로 영랑호를 걸었다. 역시 바닷가에서는 아침과 저녁에 부는 해풍이 차고 거셌다. 그럼에도 설악산을 배경으로 한 영랑호 풍경은 아름다웠다.  원래는 한 바퀴를 돌 생각이었으나 날씨가 망설이게 했다. 결국 반 바퀴만 도는 것으로 수정했다. 산책로를 따라 벚나무가 도열해 있는데 봄에 오면 참 멋질 것 같다.  이번에는 범바위에 올라가 보았다. 위에는 거인의 공깃돌 같은 바위들과 영랑정(永郞亭)이 있었다. ..

사진속일상 2025.03.01

양양, 속초 여행(1)

아내와 2박3일로 양양과 속초 여행을 다녀왔다. 첫날은, 양양으로 가서 남대천을 걸었다. 2월 하순이지만 바닷바람이 너무 거세고 차가워서 오래 걷지는 못했다. 대신에 양양 5일장이 서는 날이라 전통시장을 구경했다.  이어서 하조대해수욕장을 찾았다. 하조대전망대에서 바다 풍경을 구경하고, 백사장을 밟으며 산책을 했다.  4시쯤 낙산비치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낙산해수욕장과 동해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었다. 젊었을 때 낙산에 놀러 오면 늘 바닷가 민박이나 모텔에 묵었다. 언덕 위에 있는 하얀색의 비치호텔을 보면서 언젠가는 저기에서 잠잘 때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이제야 이루어졌다.   객실에서 바다 일출을 보았다. 운좋게 오메가 일출을 보는 행운이 찾아왔다.  호텔에서 뷔페식 조식을 먹고 바로 옆에 ..

사진속일상 2025.02.28

낙산사 복수초(25/2/25)

길게 이어지는 2월 추위로 전국의 봄꽃 개화 시기가 늦다. 낙산사 복수초도 다른 해에 비해 늦은 편이다. 아직 꽃봉오리 상태인 개체도 눈에 띈다.  낙산사를 찾은 날은 춥고 바람이 거셌다. 강풍주의보까지 내려졌다. 꽃잎을 열었지만 복수초도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듯하다. 차가운 눈을 뚫고 꽃을 피우는 복수초이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어쨌든 예년 같으면 만개해서 끝물이 되었을 시기다. 다른 지역 복수초도 예년 같은 싱싱함은 보여주지 못한다. 날씨 변화는 요량하기 힘들다. 날씨만큼이나 시국도 얼어붙고 뒤숭숭한 이즈음이다. 그래도 봄은 기어코 찾아오고야 말리라. 자연의 순리에 거역할 힘을 누가 가지고 있으랴. 한 달 뒤에는 온누리에 대자연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다.

꽃들의향기 2025.02.27

토지(13, 14)

4부의 시작인 이 두 권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고착화되면서 지식인들은 좌절하고 패배 감정에 젖게 되는 시기다. 처세를 위해 친일에 영합하는 부류도 많이 생겨나고, 민중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13권의 서두에서는 이때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훌륭한 개명파 지식인들, 일본을 마시고 서양서 온 기독교에 목욕한 사람들, 미신타파를 외치고 민족개조를 외치고 조선인을 계몽하려고 목이 터지는 사람들, 미신타파하면 땅을 찾고 수천 년 내려온 조선의 문화를 길바닥에 내다 버려야 땅을 찾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이만하면 대장부 살림살이, 대신 사탕 빨고 우동 사 먹어야 땅을 찾을 것이던가, 사실은 긴구치나 히마키를 피우는 족속, 금종이 은종이에 싼 과자 먹는 족속, 우리 것을 길바닥에 내다버리는 족속 때문..

읽고본느낌 2025.02.23

배우의 죽음

김새론 배우를 처음 안 건 10여 년 전 영화 '여행자'를 통해서였다. 영화에서 김새론은 해외입양을 기다리며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진희 역을 맡아 진한 감동을 주었다. 어린이임에도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는 뛰어난 연기로 나중에 대배우가 될 거라는 예감을 가졌고, 이 배우를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16일에 김새론 배우가 극단적 선택을 하여 유명을 달리했다. 한창 뻗어나갈 25살의 아까운 나이였다. 보도로는 3년 전 음주운전 사고로 작품 활동이 중단된 후 악플과 생활고에 시달렸다 한다. 짧은 보도만으로 저간의 사정을 헤아리기 힘들지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실수를 한 인간에 대해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지를 묻는다. 그렇다고 음주운전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잘..

길위의단상 2025.02.22

어느 하루

일주일에 한 번 분당에서 당구 모임이 있다. 이날은 일부러 목적지보다 대여섯 정거장 전에서 버스를 내린다. 걷기 위해서다. 천변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좋은 산책로가 있는데, 매번 이 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이다. 30여 분 걸을 뿐이지만 나에게는 하루를 시작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당구는 11시부터 시작한다. 회원은 아홉이나 보통 대여섯 명 정도 모인다. 두 테이블로 나누어 4구와 3쿠션 게임을 한다. 나는 하수지만 주로 3쿠션을 친다. 수지는 몇 년째 10이다. 작년에는 책과 유튜브를 보면서 연구를 했지만 별 진척이 없다. 공 다루기가 당구만큼 어려운 종목도 없다. 나이 들어서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절감한다. 이젠 실력이 느는 건 포기했다. 그저 즐기기로 하니 마음이 편하다. 오후 2시경..

사진속일상 2025.02.21

노예 12년

전에 영화로 본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책으로 읽었다. 뉴욕주에서 살던 솔로몬 노섭이라는 자유인 신분의 흑인이 있었다.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중 노예 상인에게 납치되어 남부로 팔려가고, '플랫'이라는 새 이름으로 12년간 여러 주인을 거치며 끔찍한 노예 생활을 한다. 고통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탈출을 계획하던 중 백인 의인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루이지애나 주의 목화밭에서 구조되는 이야기다. 1853년에 노섭은 자신의 경험을 담은 자서전인 을 써서 노예 제도의 문제점과 노예들의 비참한 실정을 고발했다.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기 10년 전이었으니 노섭의 이 책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영화로 대체적인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책으로 읽으니 훨씬 실감나면서 야만적인 노예 제도의 실..

읽고본느낌 2025.02.21

수동리 팽나무

우리나라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팽나무가 4그루 있다. 그중 하나가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에 있는 이 팽나무다. 안내문에는 우리나라 팽나무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다고 적혀 있다. 나무 높이는 12m, 줄기 둘레는 6.6m, 나뭇가지가 펼쳐진 너비는 26m에 이른다. 수령은 400여 년으로 추정한다. 이 팽나무는 정월 대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당산제를 지내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던 당산나무로, 오랫동안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자 마을을 지켜주는 신으로 여겨졌다. 예전에는 나무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갯골을 따라 들어온 배가 이 팽나무에 밧줄을 감아 정박했다고 한다. 지금은 간척이 되어 주변이 너른 평야로 변해 있다. 팽나무가 위치한 곳이 인가에서 조금 떨어진 얕은 언덕 위다. 주위에는 다른 큰 나무가 ..

천년의나무 2025.02.20

모양성 용트림소나무

고창 모양성 안에 맹종죽림(孟宗竹林)이 있다. 맹종죽은 1938년에 유영하 선사가 불전의 포교를 위해 절을 지으면서 심었다고 한다. 맹종죽림과 송림의 경계에는 일부 소나무가 대나무과 얽혀 자란다. 대나무 사이을 뚫고 자라는 소나무 모습이 승천하기 위해 용트림하는 것 같다. 이 광경을 보면서 '적대적 공생'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하늘을 가리는 대나무가 얄미웠을 것이다. 대나무는 소나무의 생명력을 전투적으로 부추겼고, 소나무가 승천의 꿈을 꾸게 만들지 않았을까. 소나무와 대나무는 이제 둘도 없는 동반자가 된 듯싶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 빚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천년의나무 2025.02.19

전주, 군산, 고창

전주 구시가지에는 6, 70년대에 지은 단독주택이 많이 남아 있다. 일부는 빌라나 다세대주택으로 변했지만 아직 옛 모습을 간직한 집이 상당하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개발할 여력이 안 되는 동네다. 전주에는 한옥마을이 유명하지만 특정 지역일 뿐이고 대부분은 시멘트로 지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골목길을 걸으며 옛집들 풍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담장 너머로 작은 마당이 있으며 대개 유실수 몇 그루가 지붕까지 닿아 있다. 벽이 도로에 맞닿아 옹색한 집도 있다. 서로 이마를 맞대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다. 어수선해 보여도 사람 살아가는 향취가 느껴진다. 전주의 골목길을 산책한 이른 아침이었다.  장모님이 소환해서 형제들이 모두 모였다. 파티가 열렸고, 하사하는 금일봉을 받았고, 밤늦게까지 시..

사진속일상 2025.02.19

좋을 대로 해라 / 김규동

천상병이 좋아한 것은 막걸리공초 오상순은 그저 담배문익환이 사랑한 것은 반독재 집회김정환은 철학과 맥주에즈라 파운드가 좋아했던 것은 시경말로가 흠모한 것은 영웅이다정지용이 사랑한 것은 말을 만드는 일과 염소수염이상이 그리워한 것은 인간의 사랑이다이병기가 사랑한 것은 난초김기림은 지성을권정생이 사랑한 것은 길가의 민들레꽃김남천이 사랑한 것은 노동자 농민이고임화가 사랑한 것은맨발로 뛰어다니는 한국의 아이들이다여운형이 가장 좋아한 것은 대중을 만나는 일손기정이 좋아한 것은 끊임없이 달리는 것김구가 사랑한 것은 나라의 독립이다 얘들아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집에서 학교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아너무 괴로워하지는 마라네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된다그것만이 너 자신을 살리는 길이니라천재는 거기 있다좋을 대로 해라 좋을 대로 ..

시읽는기쁨 2025.02.15

최선의 삶

이런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도 있구나,라고 가슴 아프게 읽었다. 범생이로 보낸 나로서는 전혀 다른 세상을 대하는 충격이 컸다. 은 소설이지만 작가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둔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중학생 때 가출하고 고등학교는 중퇴해서 24세 때 한예종에 들어간 작가의 이력이 소설의 구성과 비슷하다. 임솔아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작가가 방황하던 16살 때부터 10년간 써 온 소설이라고 한다. 오랜 기간 놓지 못한 것은 글로 드러냄으로써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란 간절함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작가가 다시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기를 바란다. 소설은 강이, 아람, 소영 세 소녀의 심한 성장통에 시달린 중고등 시절 이야기다. 강이는 뚜렷한 이유 없이 친구 따라 가출해서 험..

읽고본느낌 2025.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