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7617

토지(6, 7)

6권과 7권은 하동, 용정, 경성을 무대로 나라 잃은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그린다. 일제에 빌붙어 약삭빠른 처신을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권세를 누리며 호의호식하지만 대부분의 민중은 뿌리 없는 부평초 같은 삶을 살아간다. 고향에서 쫓겨나 연해주나 간도로 이주한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싶다. 다행이랄까 서희는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많은 돈을 모으고 용정의 중심인물로 부상한다.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며 일본과 척을 지지 않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 조준구에게 복수하려는 일념 때문이다. 7권 끝에는 공 노인을 통해 조준구에게 옛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면서 은밀한 복수 작업이 시작된다. 두 권에는 의병 및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도 펼쳐진다. 주로 옛 동학교도들이 모여서 나라를 되찾으려는 시도다. 중심인물은 환, ..

읽고본느낌 2025.01.12

솟구쳐 오르기 1 / 김승희

억압을 뚫지 않으면억압을억압을억압을 악업이 되어악업이악업이악업이 두려우리라 절벽 모서리에 뜀틀을 짓고절벽의 모서리에 뜀틀을 짓고내 옆구리를 찌른 창을 장대로 삼아하늘 높이장대높이뛰기를 해보았으면 눈썹이 푸른 하늘에 닿을 때까지푸른 하늘에 속눈썹이 젖을 때까지 아, 삶이란 그런 장대높이뛰기의 날개를원하는 것이 아닐까상처의 그물을 피할 수도 없지만상처의 그물 아래 갇혀 살 수도 없어 내 옆구리를 찌른 창을 장대로 삼아장대높이뛰기를 해보았으면억압을 악업을그렇게 솟아올라아, 한번 푸르게 물리칠 수 있다면 - 솟구쳐 오르기 1 / 김승희  알고리즘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는다. 구체적으로는 유튜브를 볼 때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알아서 찾아주니 편리하긴 한데, 세상을 보는 시야를 좁게 만드는 단점..

시읽는기쁨 2025.01.11

겨울이 좋지만

나는 겨울이 좋다. 이유는 단 하나다. 칩거하는 데 이만한 계절이 없기 때문이다. 겨울은 다른 계절처럼 바깥 날씨가 유혹하지 않는다. 나갈까 말까 망설일 필요가 없다.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될 핑계는 충분하다. 따뜻한 아랫묵에서 딩굴딩굴하는 호사도 겨울이라야 누릴 수 있다. 옛날과는 차이가 있지만 아파트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영하의 찬바람에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종종거리며 지나간다. 학교로, 직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다. 내 처지가 행복하다고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겨울이 아니라면 이런 안온감과 포만감을 누가 주겠는가. 안과 밖의 대비가 겨울만큼 극적인 계절은 없다. 어머니 자궁 속 태아의 편안함이 이와 같을까. 바르르 떠는 문풍지 소리도 정겹다. 사각사각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

참살이의꿈 2025.01.10

사기[34]

그러고는 마침내 자기 목을 찌르며 빈객에게 자신의 목을 받들고 사신을 따라 말을 달려가 고제에게 아뢰도록 하였다. 고제가 말했다."아, 역시 까닭이 있었구나! 한낱 평민에서 몸을 일으켜 세 형제가 번갈아 왕이 되었으니 어찌 어질지 않겠는가!"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는 두 빈객을 도위로 삼고 군졸 2000명을 뽑아 왕의 예를 갖추어 전횡을 장사하였다.그러나 장례가 끝나자마자, 두 빈객은 무덤 곁에 구덩이를 파고 모두 스스로 목을 메고 거꾸로 처박혀 전횡을 따라 죽었다. 고제는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놀라며 전횡의 빈객이 모두 어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그 나머지 500명이 여전히 바다 가운데에 있다고 들었으므로 사신을 시켜 불러오게 했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전횡의 죽음을 알리자 모두 스스로 목숨을..

삶의나침반 2025.01.09

찬바람 맞으며 경안천을 걷다

날이 추워졌다. 올겨울 들어 처음으로 한낮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이틀 전이 소한(小寒)이었다. 옛날 어른들이 '소한이 대한네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 무렵이면 한차례 추위가 지나갈 만한 때다. 앞으로 사나흘간 강추위가 몰려올 것이라는 예보다. 더 추워지기 전에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에 경안천에 나갔다. 중무장을 했건만 찬바람이 세게 불어서 눈물, 콧물이 줄줄 흘렀다. 몸도 자꾸 수굿해졌다. 그러나 한남동에서 밤을 새우며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부끄러웠다.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맞으며 앉아서 버틴 '키세스 시위대' 사진에 가슴 뭉클했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툴툴댄단 말인가.  백로나 왜가리가 드문드문 눈에 띄고,  이 왜가리는 가까이 다가가도 피하지를 않는다. ..

사진속일상 2025.01.08

더 글로리

이 드라마가 방영될 즈음이었다. 어릴 때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선배한테서 장문의 카톡이 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헤어진 뒤에는 만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전화 통화조차 없었던 선배였다. 그러니까 거의 60년 만의 연락이었다. 카톡은 어렸을 때 나를 괴롭힌 일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선배는 구체적인 상황까지 묘사하며 잘못을 빌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나는 그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배와 관련된 추억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은 황당한 마음으로 나는 기억조차 못하고 있으니 미안해할 것 없다고 답신을 보냈다. 최근에 드라마 을 봤다. 2년 전에 인기리에 방영된 학폭을 주제로 한 드라마다. 고등학생 때 일진들로부터 학대를 당한 피해자 문동은이 30대가 ..

읽고본느낌 2025.01.07

퍼펙트 데이즈

도쿄에서 공중화장실 청소를 하며 살아가는 독신인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일상은 규칙적이며 단조롭다. 아침에 일어나 화분에 물을 주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서 미소를 띠며 하늘을 쳐다보고,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고, 카세트페이프로 올드 팝을 들으며 출근하고, 정성을 다해 화장실을 청소하고, 신사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고, 필름 카메라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찍고, 단골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책을 읽다가 잠이 드는 똑같은 루틴의 매일이다. 짜인 듯 틀에 박힌 생활이 답답할 것 같은데 히라야마는 더없이 행복하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살아가는 그의 절제된 모습은 단정하고 아름답다. 꼼꼼하게 화장실을 청소하는 모습은 그가 인생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는지 말해준다. 마치 한 편의 예술 작품을 대하..

읽고본느낌 2025.01.05

토지(3, 4, 5)

4권에서 1부가 끝나고, 5권부터는 2부가 시작된다. 1부는 하동 평사리의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일강제병합이 되는 20세기 초의 격동기에 전통적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최참판댁은 몰락하고 마을 사람들과 간도로 이주하면서 1부는 끝난다. 일본의 위세를 등에 업은 조준구에 의해 서희는 집과 땅을 빼앗긴다. 젊은이들은 의병이 되어 마을을 떠나고 전염병과 흉작으로 평사리는 쑥대밭이 된다. 를 통해 1900년대 초의 나라 상황과 민초들의 삶을 그림으로 보듯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서희가 정면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녀의 잠재력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서희의 성격 묘사 중에 '포악스럽고 음험하고 의심 많고 교만하다'는 표현이 이색적이었다. 2부는 2011년의 용정 마을 대화재로 시작한다. 불은 시가의..

읽고본느낌 2025.01.04

사기[33]

태사공은 말한다."한신과 노관은 본래 덕을 쌓고 착한 일로 처세한 것이 아니라 한순간의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으로 벼슬을 얻고 간사함으로 공을 이루었다. 한나라가 천하를 막 평정했을 때 만났으므로 땅을 갈라 받고 왕 노릇 하며 고(孤)라고 일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라 안으로는 지나치게 강해지고 커졌다는 의심을 받았고, 나라 밖으로는 만맥을 원조자로 믿고 기댔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조정과 멀어지고 자신들까지 위태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일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지혜가 다하자 흉노로 달아났으니 이 어찌 애처롭지 않으랴!아. 슬프도다! 대체로 계책의 설익음과 어지러움이 사람에게 성공과 실패로 끼치는 영향은 또한 깊구나!" - 사기(史記) 33,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뒤 공이 많은 ..

삶의나침반 2025.01.03

인생은 아름다워 / 쥘 르나르

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이렇게 말해 보는 것도 좋을 거예요. 눈이 보인다.귀가 들린다.몸이 움직인다.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 고맙다!인생은 아름다워. - 인생은 아름다워 / 쥘 르나르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요양병원 앞을 지나간다. 전에는 정신병원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요양병원으로 바뀌었다. 병원 주변은 항상 적막에 잠겨 있다.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가 보이기도 한다. 지나갈 때마다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들은 안에 있고 나는 밖에 있지만, 시간문제일 뿐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생로병사는 생명이 겪어야 하는 숙명이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그날이 오면 쓰나미처럼 모든 걸 휩쓸고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어진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낼 의무가 생명에게는 있다...

시읽는기쁨 2025.01.02

2025 첫날의 산책

열흘 만에 외출을 하다. 고뿔 손님을 접대하느라 밖에 나갈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랄까, 이제는 얌전해진 손님을 집에 두고 조심스레 동네 산책을 하다. 2025년의 첫날이다. "가는 년(年)은 가고, 오는 년(年)은 온다." 오는 년이라고 가는 년과 달리 특별하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 년이 그 년인 것이다. 1월 1일의 거리는 한산하다.  날은 맑고 포근하다.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 번잡한 세상사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여객기 한 대가 미미한 소리를 남기고 동쪽으로 날아간다.  어쩌다 보니 뒷산도 두 달 만이다. 산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받아준다. 박새가 이 가지 저 가지로 자발스럽게 옮겨 다닌다. 모든 것을 품은 산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이대로 족하다!"  새해 첫날 점..

사진속일상 2025.01.01

따스한 연대

12월 3일에 윤석열의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로 나라가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14일에 국회에서 힘들게 탄핵이 의결되었지만, 헌재에서 탄핵 심판을 하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다. 이 와중에 무안공항에서 제주항공 여객기가 추락하여 179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나라에 망조가 든 건 아닌지, 2024년의 끝날이 심란하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은 위대했다.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국가 폭력에 저항했다. 계엄 날 밤에는 국회를 지키고 군용차량을 막아세웠다. 이번에는 새로운 시위 문화가 등장했다. 촛불 대신 형형색색의 응원봉이 등장하여 흥겨운 음악과 함께 국민의 마음을 밝혔다. 축제 같은 시위였다. 참가하지 못한 시민은 음식과 보온용품을 지원하며 이들을 응원했다. 21일과 22일..

참살이의꿈 2024.12.31

응답하라 1988

고뿔이 찾아온 지 일주일 째다. 1년에 한두 번씩 겪어야 하는 연례행사가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찬 기운을 좀 쑀다고 금방 탈이 난 것이다. 그렇다고 온실 속 화초처럼 바깥출입을 안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 이상 더 어떻게 하라는 건지, 거울 속 비실이를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쉰다. 머리가 띵 하고 얕은 기침, 콧물이 흐르는 감기 몸살이다. 심하면 병원이라도 가겠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하니 버텨본다. 내일이면 덜해지겠지,하는 기대를 품게 하니 얄밉다. 요만한 병에도 내 일상은 깨어졌다. 독서와 블로그 글쓰기가 전혀 안 된다. 아예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이럴 때는 드라마에 빠지는 게 제일 낫다. 이번에 고른 드라마는 '응답하라 1988'이었다.  2015년에 방영된 '응답하라 1988'은 1980년대와 ..

읽고본느낌 2024.12.30

자전거 / 이원수

달 밝은 저녁에 학교 마당에오빠가 자전거를 배웁니다. 비뚤비뚤 서투른 오빠 자전거뒤를 잡고 밀어주면 곧잘 가지요. 중학교 못 가는 우리 오빠는 어제부터 남의 집 점원이 되어 쏜살같이 심부름 다닌다고달밤에 자전거를 배운답니다. - 자전거 / 이원수  자주 나가는 야탑역 광장 한편에 '이동노동자 간이쉼터'가 있다. 컨테이너로 된 작은 건물인데 볼 때마다 마음이 따스해진다. 이름 그대로 배달 기사나 대리운전기사를 위한 짧은 쉼터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작지만 이런 배려를 할 수 있다는 게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이 동시는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에 발표되었다. 그때는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을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한 1960대 중반에도 우리 반에서 중학교에 진학한 ..

시읽는기쁨 2024.12.24

사기[32]

한나라 5년 정월에 제나라 왕 한신을 옮겨서 초나라 왕으로 삼고 하비에 도읍을 정하게 했다. 한신은 초나라에 이르자 일찍이 밥을 먹여 주었던 무명 빨래를 하던 아낙을 불러 1000금을 내렸다. 또 하향의 남창 정장에게 100전을 내리면서 말했다."그대는 소인이다. 남에게 은덕을 베풀다가 중도에서 그만뒀기 때문이다."또 자기를 욕보인 젊은이들 가운데 자기에게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게 하여 모욕을 주었던 자를 불러 초나라의 중위로 삼고, 여러 장군과 재상에게 알렸다."이 사람은 장사일지니, 나에게 모욕을 주었을 때에 내 어찌 이 사람을 죽일 수 없었겠는가? 그를 죽인다 하더라도 이름이 드러날 것이 없기 때문에 참고 오늘의 공을 이룬 것이다." - 사기(史記) 32, 회음후열전(淮陰候列傳)  한신(韓信)은 젊..

삶의나침반 2024.12.22

2024년 기상사진과 오로라

영국 왕립기상학회가 주관하는 기상사진 공모전이 매년 열린다. 2024년 올해는 고공에서 발생하는 번개인 '스프라이트'를 찍은 사진이 대상을 받았다. 스프라이트(sprite)는 대기권의 중간권에 해당하는 50~90km 높이에서 생긴다. 보톻의 번개는 10km 밑에서 발생한다. 스프라이트는 양전하가 일으키는 번개로, 양전하가 질소 원자와 충돌하면서 붉은색을 띈다. 지속 시간도 매우 짧다. 스프라이트는 보통 번개가 200번 칠 때 한 번 발생할 정도로 드물어서 관찰하기가 어렵다. 이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 왕신은 상하이 하늘에 번개가 몰아치자 충밍으로 달려가 카메라를 설치하고 수 시간을 기다린 끝에 이 스프라이트를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스마트폰 부문 3위를 차지한 원형 무지개다. 여객기가 미국 시애틀 공항..

길위의단상 2024.12.21

경안천 버들(241219)

1년 만에 대면하는 경안버들이다. 한결 더 의젓해진 것 같다. 지난 폭설에 부러진 가지가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멀쩡하다. 수평으로 누운 가지들이 엄청난 눈의 무게를 견뎌냈다는 게 신기하다. 경안천은 살얼음이 살짝 얼어 있다. 나무 너머에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고니 떼가 자그마하게 보인다. 강이 꽁꽁 얼면 올해는 나무 곁으로 가 볼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겠다. 한 번 정도는 된통 추웠으면 한다.

천년의나무 2024.12.20

고향에 다녀오다(12/16~19)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를 뵙고 왔다. 겨울로 들어선 계절이 고향집의 안팎 풍경을 스산하게 했다. 집에 있었던 3박4일 동안 두문불출하고 방 안에서 어머니하고만 지냈다. 고향에 내려가면 게으른 몸이 더 게을러져 나무늘보가 된다.   감사하게도 어머니는 무탈하게 잘 지내시는 편이다. 지남력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외로움을 많이 타신다. 90대 중반이니 친구들이 대부분 떠나고 이제는 말상대가 거의 없다. 장수한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몫인 것 같다.   어머니의 조각그림 맞추기 속도는 나보다 낫다. 시력, 청력도 젊을 때와 같다. 허리가 아픈 걸 빼면 신체에 다른 이상도 없다. 그럼에도 고령의 연세로 혼자 지내시기 때문에 자식 입장에서는 늘 걱정이며 불안 요소다. 언젠가 지인에게 이런 심정을 하소연..

사진속일상 2024.12.20

저들에겐 총이 우리에겐 빛이 / 박노해

이 한겨울에 우리 다시 만나니슬프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여눈물과 미소로 너를 바라본다 용기 내줘서 고마워살아있는 네가 눈부셔우린 꼭 이겨낼 거야 저들에겐 총이우리에겐 빛이 우리, 서로가 서로를 지키고우리, 서로가 나라를 지키고될 때까지 우리 함께 할 거야 역사의 악인은 얼굴을 바꾸며교과서 밖으로 걸어 나오지만우리는 지금 살아있는 빛으로승리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으니 세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아이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어선령들이 우리를 가호하고 있어 저들에겐 탐욕이 우리에겐 영혼이저들에겐 총칼이 우리에겐 사랑이저들에겐 파멸이 우리에겐 희망이 우리 인생의 '별의 시간'에다치지 말고 지치지 말고빛으로 모이자, 될 때까지 모이자 - 저들에겐 총이 우리에겐 빛이 / 박노해  윤석열이 지난 12월 3일에 '아닌 밤..

시읽는기쁨 2024.12.16

유유히

전국 대학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도량발호(跳梁跋扈)'를 선정했다.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는 뜻이다. 12월 3일 이전에 고른 것이지만 묘하게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맞아떨어졌다. 어제는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국민이 준 권력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광란의 칼춤'을 추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누구의 말대로 그는 오로지 '자신을 탄핵시킬 능력'만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번 탄핵 과정에서 국회 앞에 모여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시민들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특히 이번에는 8년 전의 촛불 시위와 달리 10대와 20대의 여성들이 많이 나왔다. 정치에 무관심한 MZ세대라고 폄하했었는데 내 잘못된 선입견이었다. 다양한 색깔로 빛나는 응원봉을 흔들며 시위를 축제 마냥 즐기는 그..

참살이의꿈 2024.12.15

소년이 온다

지난 10일에 스톡홀름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국내 정세가 급박하여 관심을 덜 받고 지나갔지만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 장면은 감격이었다. 시상식 전후로 수상 소감과 강연도 있었다. 최근에 작가의 를 읽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이 작가의 부드럽고 감성적인 문체로 애절하게 그려졌다. 그래서 더 슬펐는지 모른다. 잔인한 폭력과 고통, 동시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국가 폭력은 쉬지 않고 반복되어 나타난다. 책에 나오는 대로 폭력에 노출된 인간은 방사능 피폭처럼 오랜 기간 인간성을 파괴한다. 광주는 수없이 되태어나고 인간을 살해한다. 작금에 윤석열에 의해 저질러진 비상계엄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에 나오는 인상적인..

읽고본느낌 2024.12.13

토지(2)

올 겨울에는 박경리 작가의 를 읽으려 한다. 1969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26년 만인 1994년에 완성한 5부작, 20권으로 된 대하소설이다. 처음 나왔을 때 1부까지 읽고 나머지는 뒤로 미루어뒀는데 이제야 완결 지으려고 한다. 지난달 통영에 있는 박경리기념관에 갔을 때 한 결심이다. 전집을 사서 읽을까, 도서관에서 빌려 볼까, 고민했는데 후자를 택했다. 도서관에는 다산책방에서 나온 20권 전집이 있다. 그런데 서가에 1권만 빈 채로 있어서 2권부터 시작한다. 오래 전이긴 하지만 한 번 읽은 적이 있으니 큰 지장은 없을 듯하다. 그렇지만 눈에 익은 등장인물은 최치수, 서희, 길상 정도다. 40년도 더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2권에서는 최치수의 죽음과 함께 최참판 댁의 몰락이 시작된다. 1890년대 후..

읽고본느낌 2024.12.12

사기[31]

영포의 총애를 받는 희첩이 병들어 의사에게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의사의 집은 중대부 비혁의 집과 문을 마주 보고 있었다. 희첩은 자주 의사의 집에 갔다. 비혁은 자신이 한때 영포의 시중이었으므로 많은 선물을 바치고 그녀를 따라가 의사의 집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희첩이 왕을 모시면서 무슨 말 끝에 비혁의 장점을 칭찬하니, 왕이 화가 나서 말했다."너는 그를 어디서 알게 되었느냐?"희첩이 사정을 자세히 말하자 왕은 그와 정을 통하지 않았나 의심하였다. 비혁은 겁이 나서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왕이 더욱더 화가 나서 비혁을 체포하려 하니, 그는 영포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밀고하려고 역마를 타고 장안으로 떠났다. 영포는 사람을 보내 뒤쫓게 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비혁은 장안에 이르러 글을 올려..

삶의나침반 2024.12.11

5연속 우승과 30연승

그저께 밤에 벌어진 여자 프로당구[LPBA] 결승에서 김가영 선수가 김보미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5연속 우승에 개인 투어 30연승이라는 대기록이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당구는 유독 운이 많이 작용하는 게임이다. 그날의 컨디션이나 심리 상태도 중요하다. 실력보다 외적 요인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나도 여러 운동을 즐겼지만 당구만큼 미묘하고 종잡을 수 없는 종목도 없다. 언제든 이변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5연속 우승과 30연승을 한다는 것은 탁월한 실력과 함께 플러스알파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른 종목의 30연승과는 다르다. 당구를 즐기기 때문에 2019년에 LPBA가 출범했을 때부터 쭉 경기를 봐 왔다. 김가영 선수는 포켓볼에서 쓰리쿠션으로 옮긴 뒤 초기에는 적응이 안..

길위의단상 2024.12.10

거인의 나라 / 신경림

모두들 큰 소리로만 말하고큰 소리만 듣는다큰 것만 보고 큰 것만이 보인다모두들 큰 것만 바라고큰 소리만 좇는다그리하여 큰 것들이 하늘을 가리고큰 소리가 땅을 뒤덮었다작은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아무도 듣지를 않는작은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아무도 보지를 않는그래서 작은 것 작은 소리는싹 쓸어 없어져버린 아아우리들의 나라 거인의 나라 - 거인의 나라 / 신경림  거인이 되고 싶은 욕망들이 모여 여기 한 거인을 만들었다. 그 거인은 나흘 전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거리낌 없이 너무나 당당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거인이 하늘에서 별안간 툭 떨어질 리 없다. 그리고 우리는 박수를 쳤다.  "(거인이) 권력을 잡게 되면, 그는 어떤 죄를 지어도 괜찮은 자유를 얻기 위해 권력을 사용한다."

시읽는기쁨 2024.12.08

김대중 육성 회고록

이 책을 읽는 도중에 윤석열의 황당한 비상계엄 선포가 있었다. 어리석은 지도자가 나라를 어떻게 절단 내는지 생생하게 보고 있다. 반면에 이 책에서는 김대중이라는 큰 정치인의 모습이 대비되어 빛나 보였다. 우리나라 국민이 제일 좋아하는 대통령은 노무현이다. 올해 조사에서는 31%의 지지를 받았다. 그 뒤를 박정희, 김대중이 따른다. 이것은 정서적 선호도가 크게 작용한 결과인 것 같다. 능력이나 인품면에서 제일 뛰어난 대통령은 김대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더욱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은 2006년부터 1년여에 걸쳐 대통령을 인터뷰한 내용을 풀어쓴 것으로 올 여름에 한길사에서 펴냈다. 전기나 평전과 달리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니 바로 옆에서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실감이 났다. 한 인간의..

읽고본느낌 2024.12.07

사기[30]

여후(呂后)는 고제(高帝)에게 이렇게 말했다."팽월은 장사이므로 지금 그를 촉 땅으로 옮겨 보내는 것은 스스로 근심거리를 남겨 두는 일이니, 그를 죽이는 편이 더 낫습니다. 그래서 소첩이 삼가 그를 데리고 왔습니다."그리고 여후는 곧 팽월이 사인을 시켜 팽월이 다시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말하게 했다. 정위 왕염개가 그의 일족을 모두 죽이자고 청했다. 고제가 허락하니, 마침내 팽월의 일족은 모두 죽고 그의 나라도 없어졌다. - 사기(史記) 30,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팽월과 위표는 초한전쟁 시기에 한나라 유방/고제를 도와 큰 전공을 세운 장군이다. 팽월은 도둑질을 하며 지내던 놈팽이였으나 진나라가 망해가는 혼란한 시기에 민란에 합류해서 우두머리가 되어 높은 지위까지 오르고 왕이 되었다. 위표도 비슷..

삶의나침반 2024.12.06

오흥리 느티나무(2)

5년 만에 다시 만나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다. 그때는 가을이었는데 이번에는 겨울이라 느낌이 다르다. 안성에서 금광호수로 가는 도로변에 있어 쉽게 눈에 띈다. 두 나무는 수령이 400년 정도로 비슷해 보인다. 한 나무에는 할아버지나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데,옆에 있는 나무는 할머니나무로 불러도 될 듯 싶다. 느티나무는 한자로 괴목(槐木)이라 하는데, 어떤 나무는 '괴(槐)' 대신 '괴(怪)'가 먼저 떠오른다. 여기 나무도 그러하다. 주변은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천년의나무 2024.12.05

성지(38) - 배티성지

성지 53. 배티성지(충북 진천군 백곡면) 경기도 안성에서 충북 진천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배나무 고개'라는 뜻의 배티다. 산에 돌배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고 한자로는 '이치(梨峙)'라고 쓴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기 시작하고 교우촌이 만들어졌다. 1850년에는 작은 초가집에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졌고, 최양업 신부님이 이 초가집에 살면서 신학생들을 지도했다. 배티성지는 박해시대 비밀 교우촌이었고, 조선대목구 최초의 신학교가 있던 곳이며, 최양업 신부님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사목 중심지였고, 무명 순교자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배티성지에는 최양업 신부를 기념하는 성당과 박물관, 옛 신학교, 피저의 집, 순교자의 무덤 등이 있다.  오랜만에 배티성지를 찾으니 새로운 곳에 온..

사진속일상 2024.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