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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 박경리

대개소쩍새는 밤에 울고뻐꾸기는 낮에 우는 것 같다풀 뽑는 언덕에노오란 고들빼기꽃파고드는 벌 한 마리애닯게 우는 소쩍새야한가롭게 우는 뻐꾸기모두 한 목숨인 것을미친 듯 꿀 찾는 벌아간지럽다는 고들빼기꽃모두 한 목숨인 것을달 지고 해 뜨고비 오고 바람 불고우리 모두 함께 사는 곳허허롭지만 따뜻하구나슬픔도 기쁨도왜 이리 찬란한가 - 삶 / 박경리  통영 미륵산 자락에 있는 박경리기념관 뜰에 이 시가 적힌 시비가 있었다. 작가가 생의 마지막에 쓴 시들에서는 소설에서 읽지 못하는 작가의 진솔한 마음을 만난다. 작가에게 다가가는 데는 소설보다 시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한 인생이 농축되어 있는 작가의 시에는 고운 영혼의 향기가 풍긴다. 그 향기는 내 마음으로도 스며들어 따스하게 위무해 준다. 작가의 시는 쉽다. ..

시읽는기쁨 2024.11.18

어느 하루

치과 진료를 위해 아침 9시에 집을 나섰다. 2024년 5월 13일, 비발디의 '사계'가 울려퍼지는 듯한 화창한 봄날이었다. 병원에 예약한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하여 가까이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렀다. 요사이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보기 때문에 서점을 찾는 일이 거의 없다. 중고서적에서 풍기는 냄새가 고향을 찾은 것처럼 아늑했다.  입구에 있는 '당신은 책 중독자인가?'라는 게시문을 보면서 과거의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책 중독'이란 책 수집벽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 같다. 마음에 드는 책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못 배기는 때가 나에게도 있었지.  올초에 앞니 하나가 부러졌다. 단골 치과에서는 임플란트 대신 브릿지를 권했다. 그래서 옆 이빨 3대를 신경치료 한 뒤 함께 브릿지 시술을 ..

사진속일상 2024.05.14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젊었을 때는 의지를 세워 열심히 노력하면 웬만한 일은 전부 이뤄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살아 보니 알겠다. 인생은 필연보다 우연에 의해 좌우되었고, 세상은 생각보다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러운 곳이었다.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원래부터 많지 않았고, 흐르는 시간을 당해 내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 인생의 슬픔은 일상의 작은 기쁨으로 인해 회복된다는 사실이다. 하루를 열심히 보내는 가운데 발견하는 사소한 기쁨과 예기치 않은 즐거움이 세월로 인한 무상감과 비애감을 달래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비로소 삶이 가벼워졌다. 미래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어떤 일에도 쉽게 좌절하지 않으며, 이유 없이 불안해하지 않게 되었고, 함부로 서운해하지도 않게 되었다...

읽고본느낌 2024.02.02

소공녀

본 지 꽤 되었지만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다. '소공녀'의 주인공인 미소는 자신만의 삶의 스타일을 지켜나가는 젊은이다. 일당 45,000원의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욕심 없이 살아간다. 또래 젊은이들이 꿈꾸는 돈이나 성공에는 관심이 없다. 미소의 소확행이라면 일이 끝난 뒤의 위스키 한 잔, 담배, 그리고 미소만큼 착한 남자 친구다. 어느 날 거처하고 있던 단칸방의 오른 월세를 부담할 수 없어 미소는 홈리스가 된다. 미소는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싸들고 나서며 길 위의 여행자로 살려고 한다. 그리고 옛날 밴드 활동을 함께 하던 멤버들을 찾아간다. 영화는 옛 멤버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함께 미소와의 교감이나 갈등을 다룬다. 집도 없으면서 위스키와 담배를 즐기는 미소를 보며 염..

읽고본느낌 2023.09.23

누가 이런 오두막집 되어줄 사람 없소? / 김영남

오두막집 하나를 장만하고 싶다.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름다운 오두막집. 그런 오두막을 장만하면 나는 호롱불의 불편함도 편안함으로 여기며 살리라. 낮이면 하얀 산꽃들로 나의 내부를 살피고, 밤이면 벽에 돋은 긴 그림자의 높이로 나의 밖을 위로하며. 겨울이 되면 위로할 게 더 많아지겠지? 눈이 오면 토끼, 노루들이 밖을 서성이겠지? 이들과는 가을 달빛에 익은 고구마를 같이 나누고, 눈길의 얼음장 깨고 옹달샘도 함께 하리라. 그러면 이들은 나와 한 마음을 정답게 이루는 훈훈한 저녁 연기요, 반가운 아침 인사가 되겠지? 사소한 것들이 사소하지 않게 날 괴롭혀올 때면 나는 깊은 산중의 허름한 오두막집으로 떠나고 싶다. 내 영혼과 단둘이 밥상 마주할 수 있는 오두막집으로. - 누가 이런 오두막집 되어줄 사람..

시읽는기쁨 2023.09.08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작은 섬에 들어가 사시는 분을 화면에서 봤다. 이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덕목을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로 표현했다. 교수로 살면서 덧씌워진 명성과 과대포장된 삶을 벗고 본연의 나를 찾고픈 바람이 간절해 보였다. 하지만 속 마음이야 어떻든 섬에서 살아가는 삶은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보이지 않았다. 교수인 삶을 살았던 조건(정신적, 경제적)을 떨쳐버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명성을 버린다 하면서 명성을 이용한다. 소유의 맛을 즐기면서 겉으로는 무소유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다. 숨겨진 민낯이 드러나 비난을 받는 유명인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차라리 무소유를 명분으로 내세우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상적/대안적 삶이 가진 자에 의해서 소비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무소유라든가 '..

참살이의꿈 2023.08.10

심심함의 변명

나는 외출보다 집에서 보내는 날이 더 많다. 대략 두 배쯤 된다. 한 달이면 20일 정도는 집에 있고, 10일 정도밖에 나간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활동량이 적은 편이다. 집에 있을 때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지낸다. 당신은 심심하지도 않느냐고, 아내가 늘 신기해 한다. 사람들은 하루를 무언가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 없는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다. 퇴직한 이후도 마찬가지다. 삶의 관성이란 무섭다. 봉사 활동이든 취미 생활이든 뭔가를 해야 한다. 그전까지 일 속에서 살아온 습관이 몸에 밴 것이다. 은퇴 후에도 바쁘게 보낸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현대인은 혼자 있는 시간을 앗기고 있다. 휴대폰이 등장한 이후로는 더 심해졌다. 전철에서 보면 열에 아홉은 휴대폰으로 뭔가를 한다. 휴대폰이 없..

참살이의꿈 2023.06.23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

지은이인 정규웅 작가는 1970년대에 중앙일보 문학 담당 기자로 있으면서 많은 문인들을 취재하고 교유를 가졌다. 이 책은 그 시절 문인들에 얽힌 일화를 전해주고 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삶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1970년대는 정치적으로 혹독한 계절이었다. 그 시대는 1970년의 '정인숙 피살 사건'과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으로 시작되어 1979년 박정희 피살로 끝을 맺었다. 문학계도 민중문학, 민족문학을 지향하는 반체제문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시대 현실을 외면하고 정권에 아부하거나 순수문학을 고집하는 부류도 있었다. 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내 기억에도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차지하려고 김동리와 조연현 간에 벌어진 볼썽사나운 싸움도 그중 하나다. 당시에는..

읽고본느낌 2023.03.08

재미를 버릴 때 찾아오는 재미

교직에 있을 때 나를 괴롭힌 건 선생 노릇에 대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교사는 -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부모의 욕망에 충실히 복무할수록 유능한 교사로 인정받았다.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만큼 불행한 것도 없다. 30여 년의 교직 생활 동안 보람을 느끼거나 재미있게 지낸 적이 없었다. 그저 버텨냈을 뿐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삶이 재미없었던 제일 큰 이유는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미를 구하는 동물이다. 무슨 일을 하건 의미/명분이 있어야 열정이 생기고 재미도 느낀다. 아니면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무기력에 빠진다. 오락이나 쾌락이 위안을 주지만 일시적 도피일 뿐이다. 근원적인 해결 없..

참살이의꿈 2023.02.15

허깨비 상자 / 김창완

TV를 보는데 뉴스가 나왔다 전쟁이 나서 폭탄이 터지고 사람들이 도망가고 애들이 울고 연기가 하늘같이 올라가는데 탱크가 달려오고 난리 난리가 났다 금세 장면이 바뀌고 광고가 나왔다 맛있는 걸 먹으면서 깔깔거리고 웃고 춤추며 걸어갔다 저래도 되나 싶었다 - 허깨비 상자 / 김창완 TV만 아니라 이 세상도 허깨비 놀음이겠지. 쯧쯧 몇 번 혀를 차주고는 금방 고개를 돌리고 희희덕거린다. 세상만사에 대해서 그렇다. 하긴 타자의 고통을 나의 아픔으로 여긴다면 몸성히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말씀이 아닌가. 예수님도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자리에서 지인이 그랬다. 자신은 사람들과 투명한 벽을 쌓고 살아간다고. 상대의 온기나 사정을 알려고 하..

시읽는기쁨 2023.02.04

어른 김장하

MBC TV에서 방송된 2부작 다큐멘터리인 '어른 김장하'를 봤다. 진주에서 남성당한약방을 하며 남몰래 선행을 베풀고 여러 지역사회 운동을 지원한 김장하 선생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선생은 제목에 나오는대로 우리 시대의 '어른'이신 분이다. 선생이 세상에 드러나는 걸 고사하셔서 직접 인터뷰는 하지 못하고 선생과 관련된 분들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경남도민일보 기자였던 김주완 씨가 채현국 선생에 이어 다시 훌륭한 분을 소개해주어 고맙다. 언론이나 TV의 역할이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1944년생인 선생은 19세인 1963년에 한약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사천에서 남성당한약방을 열고 박리다매 전략으로 돈을 많이 번다. 10년 뒤 진주로 옮겨서도 마찬가지였다. 선생은 번 돈을 쌓아두지 않고 지역사..

참살이의꿈 2023.01.30

어느 독일인의 삶

이 책의 주인공은 브룬힐데 폼젤(Brunhilde Pomsel)은 나치 선전부 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의 비서로 일하다가 독일 제국의 멸망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책 표지에 실린 그녀의 프로필이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범죄자들 중 하나인 요제프 괴벨스를 위해 일했다. 나치 선전부의 속기사였던 그녀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폼젤은 자신이 나치 가담자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은 철저히 비정치적이었고 그 당시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직장, 의무감, 소속감에 대한 욕구였다는 것이 그녀의 항변이다. 나치 만해의 규모와 잔학성은 종전 뒤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2017년 10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폼젤은 그저 평범한..

읽고본느낌 2023.01.02

열심히 산다는 것 / 안도현

산서에서 오수까지 어른 군내버스비는 400원입니다 운전사가 모르겠지, 하고 백원짜리 동전 세 개하고 십원짜리 동전 일곱 개만 회수권함에다 차르륵 슬쩍, 넣은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걸 알고 귀때기 새파랗게 젊은 운전사가 있는 욕 없는 욕 다 모아 할머니를 향해 쏟아붓기 시작합니다 무슨 큰 일 난 것 같습니다 30원 때문에 미리 타고 있는 손님들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운전사의 훈계 준엄합니다 그러면, 전에는 370원이었다고 할머니의 응수도 만만찮습니다 그건 육이오 때 요금이야 할망구야, 하면 육이오 때 나기나 했냐, 소리치고 오수에 도착할 때까지 훈계하면, 응수하고 훈계하면, 응수하고 됐습니다 오수까지 다 왔으니 운전사도, 할머니도, 나도, 다 왔으니 모두 열심히 살았으니! - 열심히 산다는 것 / 안도현 인간..

시읽는기쁨 2022.12.31

되어가는대로 살기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된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되어 있고, 인연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애써도 가까워지지 못한다. 이만큼이나마 세상을 살아보니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더라. 세상일은 노력한다고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헛심만 쓴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러므로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순리에 따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되어가는대로 살기'다. 되어가는대로 살기는 되는대로 살기와는 다르다. 되는대로 사는 것은 제멋대로 사는 것이다. 되어가는대로 사는 것은 자기 통제와 규율이 있지만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삶에는 목표가 필요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실행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열매를 맺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일이다. 되어가는대로 사는 것은 진인사..

참살이의꿈 2022.12.22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임사 체험 후 깨닫게 된 인생에 대한 통찰을 담은 책이다. 지은이인 아니타 무르자니(Anita Moorjani)는 인도 여성으로 어린 시절부터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살면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접하며 성장했다. 결혼한 후에 임파선암이 발견되어 4년간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하던 중 마지막에 신체의 기능이 멈추었고 임사 체험 상태에 들어갔다. 30시간 동안의 임사 체험은 삶에 대한 시각을 바꾸었고 병도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 는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의학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감각에 눈을 떠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지각한다는 임사 체험은 많이 알려져 있으며 대체로 비슷한 패턴을 띄고 있다. 아니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죽은 자신을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평안과 행복에 잠..

읽고본느낌 2022.10.06

폰 쇤부르크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지은이인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는 언론인이자 칼럼니스트로 일하다가 독일 경제가 어려워지자 직장을 잃었다. 수입이 끊어진 가운데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우아하게 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 돈이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삶의 우아함을 결정한다는 확신을 갖고 쓴 책이 이다. 이제 풍요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하는 지은이의 말은 불안한 국제 정세나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를 보면 동감이 된다. 전과 같은 고성장의 호황기는 다시 올 것 같지 않고 절약이 불가피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과거와 같은 성장과 자원 낭비가 계속되면 지구가 여러 개여도 부족할 것이다. 환경 파괴도 심각하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 이 책은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

읽고본느낌 2022.08.21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요사이 책 읽기에 게을러졌다. 핑계를 대자면 장마철의 후덥지근한 날씨다. 아직 에어컨을 켤 정도는 아니지만 책에 집중하기에는 꿉꿉하다. 보통 일주일에 한두 권을 읽는데 이 책은 두 주일이 걸렸다. 그것도 듬성듬성 읽었다. 영국의 역사 평론가인 그레그 제너가 쓴 는 발상이 재미있다. 현대인의 하루 일상을 - 침대에서 빠져나와 화장실에 가고 아침을 먹고 몸을 씻고 입을 옷을 고르고 시간을 보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함께 식사하고 술을 마시고 이를 닦고 침대에 들어가 자명종을 맞추는 것 -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관습화된 행위의 역사적 연원을 밝히는 내용이다. 현대인의 생활 방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밝힌 책이다. 우리의 일상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의식적으로 되풀이하면서 굳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수백 년, ..

읽고본느낌 2022.07.21

꽃 또는 절벽 / 박시교

누군들 바라잖으리, 그 삶이 꽃이기를 더러는 눈부시게 활짝 핀 감탄사기를 아, 하고 가슴을 때리는 순간의 절벽이기를 - 꽃 또는 절벽 / 박시교 멀리 있는 신기루에 홀려 발 밑의 꽃밭은 보지 못한 채 허덕이며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내 삶이 꽃이고, 감탄사인 것은 아닐까. 나는 장님이어서 보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면 너무 많이 소유하고 지식이 넘쳐서 모든 것이 시시해진지도. '아, 하고 가슴을 때리는 순간의 절벽'에 서면 세상살이의 온갖 근심조차 꽃으로 알게 될까. 기쁨과 환희와 함께 근심과 시련의 꽃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진 아름다운 인생의 꽃밭을 보게 될까.

시읽는기쁨 2022.06.16

2022년 첫 뒷산

새해에 든 지 벌써 반 달이나 지났다고 푸념을 하는 동기에게 나는 속으로 한 마디 한다. 넌 참 재미나게 사는가 보다. 나에게는 새해의 시작이 한참 전의 과거로 멀게 느껴진다. "아직 반 달밖에 안 지났다고",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반 달이나'와 '반 달밖에'의 차이는 무엇일까. 인생사에는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새해가 되었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올 들어 처음 뒷산을 오르면서 탐, 진, 치(貪, 嗔, 痴)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나이를 더할수록 또렷해지는 어두운 그늘이면서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이다. 산길은 꼬불꼬불 이어진다. 고개를 넘으면 또 다른 고개가 나온다. 꼭대기라고 여긴 곳이 눈을 들면 작은 봉우리 중 하나일 뿐이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도 끝은 아니다. "나는 과..

사진속일상 2022.01.16

개의치 않으련다

늙어가면서 신체와 정신에 변화가 생긴다. 둘을 비교한다면 정신보다는 신체의 변화가 더 빠르고 큰 것 같다. '마음은 이팔청춘인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라고 하듯이, 노년이 되면 육체가 정신을 받쳐주지 못한다. 물론 정신이 먼저 문제가 생기는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둘이 크게 엇박자를 내지 않으면서 사이좋게 나란히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년에 진입한 나를 관찰해 보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어떤 변화가 느껴진다. 전에는 상대를 의식하면서 내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 신경을 썼다. 내 언행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지, 피해를 주지는 않는지 먼저 살폈다. 그래서 늘 조심했고, 동시에 실수를 하거나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 말을 아꼈다. 이것은 내 오래된 습(習)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

참살이의꿈 2021.11.18

무거운 밤

어설프게 술을 마신 뒤에는 잠을 설친다. 비몽사몽 상태에서 온갖 꿈이 난무한다. 꿈은 대체로 어둡고 무겁다. 가위눌릴 정도는 아니어도 영 기분이 씁쓸하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어제는 직장과 군대 꿈에 시달렸다. 둘 모두에서 나는 불성실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나온다. 직장은 학교 교무실과 교실이 주무대다. 늘 나는 수업에 들어가는 게 늦거나 교실을 찾지 못해 허둥댄다. 시간표를 착각해서 아예 수업을 빼먹기도 한다. 교실에 들어가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서툴다. 수업 준비를 안 해서 무엇을 가르칠지 몰라 진땀을 흘린다. 나는 교무실 동료나 교실의 아이들한테서나 왕따 신세다. 35년 동안 한 선생 노릇이다. 어떤 강박관념이 있길래 퇴직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이따위 꿈에 계속 시달리는지 모르겠다. 교직이 적..

참살이의꿈 2021.09.04

마음의 맷집

초등학생 때 A는 씩씩하고 담대해서 우리의 부러움을 샀다. 적어도 교실 안에서는 그랬다. 담임 선생님한테 야단이나 매를 맞을 때면 다들 무서워하고 벌벌 떨었지만 A는 달랐다. 뭘 그 정도를 가지고 그러냐면서 씩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A는 술고래인 아버지한테 욕먹고 얻어터지는 게 일상이었다. 지게 작대기에 단련된 A의 몸이 선생님의 회초리는 애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와는 별개로 A의 몸은 살아남기 위해 맷집이 생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맷집은 시련을 통해 생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리라.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가 야생의 풀과 경쟁할 수는 없다. 백신을 맞는 것도 같은 원리다. 병원균에 미리 노출시켜서 적응력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호르메시스(Horme..

참살이의꿈 2021.08.09

제법 안온한 날들

"사람은 일방적으로 불행하지 않다." 이 책에서 건진 한 문장이다.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한 글쓴이는 수많은 죽음과 불행을 지켜보며 인간은 조건이 아무리 척박하더라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러이러하니까 타인이 불행하다고 재단하는 것은 나의 오만일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을 안고 당당하게, 당연하게 살아간다. 정도의 차이일 뿐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 은 이대목동병원 임상조교수로 재직중인 남궁인 님이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했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의 삶과 죽음, 사랑을 감성적인 필체로 보여주는 책이다. 가슴 뭉클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사연들이 많다. 저자는 살벌한 응급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싶을 정도로 여리고 따스한 분인 것 같다. 인간의 고통을 곁에서 접하며 그는 삶과 죽음에..

읽고본느낌 2021.07.11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서울대병원에서 종양내과 전문의로 근무하고 있는 김범석 선생이 쓴 책이다. 암 환자를 담당하는 의사로서 만난 여러 죽음과 사연을 소개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성찰하게 한다. 부제가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Hodie Mihi, Cras Tibi" - 로마 시대 때 공동묘지 입구에 적혀 있었다는 글귀인데,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뜻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갈래의 인생길을 걸어가지만 끝은 똑같다. 오늘 누군가의 죽음이 내일 나의 죽음이 된다. 타인의 죽음은 바로 나의 죽음을 대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례들이 남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며, 그래서 너무나 절절이 가슴을 울린다. 여러 사례 중에서 중환자실에서 마지막을 맞은 어느 할머니의..

읽고본느낌 2021.06.24

경계에 흐르다

최진석 선생의 철학 산문집이다. 철학이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것일진대, 제목처럼 이 책의 중심 주제는 '경계적 삶'이다. 여러 매체에 발표한 글을 모은 탓에 산만하긴 하지만 선생이 말하려는 바는 명료하게 읽힌다. '경계, 비밀스러운 탄성'이라는 서문에서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경계에 있을 때만 오롯이 '나'다. 경계에 서지 않는 한, 한쪽의 수호자일 뿐이다. 정해진 틀을 지키는 문지기 개다. 경계에 서야 비로소 변화와 함께 할 수 있다. 변화는 경계의 연속적 중첩이기 때문이다. '진짜 나(眞我)'는 상相에 짓눌리지 않는 존재다. 이러면 부처가 되는 필요조건은 일단 채워진다. 동네 부처라도 될 요량이면 경계의 흐름 속으로 비집고 스며들어야 한다. 경계에 서 있으면 과거에 붙잡히지..

읽고본느낌 2021.06.06

덕 볼 일이 없으면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제일 강력한 요인은 무엇일까? 나는 단연코 '이욕(利慾)'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비롯해 모든 동물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개체의 생존과 종족 번식의 욕구는 이기성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돈 많고 권력이 있으면 주변에 사람이 모여든다. 뭔가 덕 볼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덕 볼 일이 없다고 생각되면 냉정하게 발걸음을 끊는다. 오죽하면 염량세태(炎凉世態)라는 말이 있겠는가. 심지어는 부모 자식간도 다르지 않다. 우리 나잇대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손주를 자주 보는 방법은 올 때마다 용돈을 듬뿍 쥐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주말마다 부모님을 찾아뵙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효자인 줄 알았더니 속셈은 따로 있었다. 제가 부모한테 덕 볼 일이 없어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척할지는..

참살이의꿈 2021.05.26

사는 법 / 홍관희

살다가 사는 일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길을 멈춰 선 채 달리 사는 법이 있을까 하여 다른 길 위에 마음을 디뎌 보노라면 그 길을 가던 사람들도 더러는 길을 멈춰 선 채 주름 깊은 세월을 어루만지며 내가 지나온 길 위에 마음을 디뎌 보기도 하더라 마음은 그리 하더라 - 사는 법 / 홍관희 누군가 그랬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각자의 해답이 있을 뿐." 우리는 수많은 겹쳐진 길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하나를 선택할 때 한 길은 활성화되지만 다른 길은 사라진다. 선택이 우리의 온전한 의지의 발현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때는 우연으로 보이고, 다른 때는 운명으로 보인다. 내 앞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었고, 나는 지금 그중 하나의 길에 서 있다. 길 위에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며..

시읽는기쁨 2021.04.18

풍운아 채현국

사나이의 배짱과 스케일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싶은 분이 채현국 선생이다. 오척단구 거한, 당대의 기인, 인사동 낭인들의 활빈당주, 가두의 철학자, 발은 시려도 가슴은 뜨거웠던 맨발의 철학도,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한 채씩 사준 파격의 인간, 민주화 운동의 든든한 후원자, 이 시대의 어른 등 채현국 선생을 지칭하는 수식어는 많다. 한 마디로 부귀를 초개 같이 여기고 거침없이 인생을 산 자유인이 채현국 선생이 아닌가 싶다. 이 책 은 2014년에 김주완 기자가 선생과 나눈 대화록이다. 선생의 말씀은 시원시원하면서 정곡을 찌른다. 김형석 교수를 멘토로 여기는 친구들이 많은데 나는 이런 삐딱한 분에 끌린다. 선생의 언행은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시킨다. 선생은 젊었을 때 여러 병으로 시달렸던 것 같다..

읽고본느낌 2021.04.16

몸무게는 설탕 두 숟갈 / 임복순

설탕 두 숟갈처럼 몸무게가 25그램밖에 나가지 않는 작은 북방사막딱새는 남아프리카에서 북극까지 삼만 킬로미터, 지구 한 바퀴를 난다고 한다. 살다가 가끔 내 몸무게보다 마음의 무게가 몇 백 배 더 무겁고 힘들고 괴로울 때 나는, 설탕 두 숟갈의 몸무게로 지구 한 바퀴를 날고 있을 아주 작은 새 한 마리 떠올리겠다. - 몸무게는 설탕 두 숟갈 / 임복순 언젠가 길을 가다가 건물 옆에 쓰러져 있는 작은 새 한 마리를 보았다. 어딘가 부딪쳐서 잠시 기절한 것 같았다. 다치지 않도록 옆 화단으로 옮길 때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진 새의 무게에 깜짝 놀랐다. 깃털 하나 놓인 듯 전혀 무게감이 없었다. 이렇게 가벼운 생명체도 있구나, 경탄스러웠다. 북방사막딱새는 25그램, 설탕 두 숟갈의 가벼운 몸무게로 거센 바람과 ..

시읽는기쁨 2021.04.12

건들건들 / 이재무

꽃한테 농이나 걸며 살면 어떤가 움켜쥔 것 놓아야 새것 잡을 수 있지 빈손이라야 건들건들 놀 수 있지 암팡지고 꾀바르게 사느라 웃음 배웅한 뒤 그늘 깊어진 얼굴들아, 경전 따위 율법 따위 침이나 뱉어주고 가볍고 시원하게 간들간들 근들근들 영혼 곳간에 쟁인 시간의 낱알 한 톨 두 톨 빼먹으며 살면 어떤가 해종일 가지나 희롱하는 바람같이 - 건들건들 / 이재무 CBS 라디오에서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로 소개받은 시다. "아, 그래!" 하며 잔잔한 물결로 가슴에 스며들었다. 세상살이 뭐 별것 있는가. 견주고, 탐내고, 다 헛된 짓거리가 아닌가. 하지만 누습에 절어 알면서도 어리석은 길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이번 주의 화두는 시의 제목인 '건들건들'로 삼기로 한다. 꽃한테 농이나 걸며, 가지나 희롱하는 바..

시읽는기쁨 2020.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