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누가 이런 오두막집 되어줄 사람 없소? / 김영남

샌. 2023. 9. 8. 10:41

오두막집 하나를 장만하고 싶다.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름다운 오두막집.

그런 오두막을 장만하면 나는

호롱불의 불편함도 편안함으로 여기며 살리라.

낮이면 하얀 산꽃들로 나의 내부를 살피고,

밤이면 벽에 돋은 긴 그림자의 높이로

나의 밖을 위로하며.

 

겨울이 되면 위로할 게 더 많아지겠지?

눈이 오면 토끼, 노루들이 밖을 서성이겠지?

이들과는 가을 달빛에 익은 고구마를 같이 나누고,

눈길의 얼음장 깨고 옹달샘도 함께 하리라.

그러면 이들은 나와 한 마음을 정답게 이루는

훈훈한 저녁 연기요, 반가운 아침 인사가 되겠지?

 

사소한 것들이 사소하지 않게 날 괴롭혀올 때면 

나는 깊은 산중의 허름한 오두막집으로 떠나고 싶다.

내 영혼과 단둘이 밥상 마주할 수 있는 오두막집으로.

 

- 누가 이런 오두막집 되어줄 사람 없소? / 김영남

 

 

은둔 본능을 여자보다는 남자가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여자는 타인과 함께 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남자는 홀로 있으려는 욕구가  강하다. 여기에는 성차에 따른 진화적인 요인이 있을 것이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에 보면 산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이들은 대부분이 남자다. 아마 이런 시를 여자가 쓴다면 십중팔구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오두막을 꿈꿀 것이다. 반면에 남자는 자기만의 공간으로 혼자서 도피하는 꿈을 꾼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만의 오두막으로 숨고 싶은 건 나이가 들어도 쇠퇴하지 않는 본능 중 하나인 것 같다.

 

'사소한 것들이 사소하지 않게 날 괴롭혀올 때면' - 이 시구가 쓰리게 가슴을 울린다. 인생의 괴로움은 '사소한 것들'을 괴로워한다는 데서 유래하는 게 아닐까. 김수영 시인도 '나는 왜 조그만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며 자탄했다. 거대 담론에 매달릴 때 인간은 현실의 사소한 문제는 외면할 수 있다. 생로병사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려 나선 부처는 행복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삶이란 이런 소소한 근심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두막으로 도피할 수는 있어도 삶에서 도피할 수는 없다. 결국은 다시 세상으로, 사람들 속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시의 제목처럼 시인은 오두막집 되어줄 '사람'을 찾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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