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48

자전거 / 이원수

달 밝은 저녁에 학교 마당에오빠가 자전거를 배웁니다. 비뚤비뚤 서투른 오빠 자전거뒤를 잡고 밀어주면 곧잘 가지요. 중학교 못 가는 우리 오빠는 어제부터 남의 집 점원이 되어 쏜살같이 심부름 다닌다고달밤에 자전거를 배운답니다. - 자전거 / 이원수  자주 나가는 야탑역 광장 한편에 '이동노동자 간이쉼터'가 있다. 컨테이너로 된 작은 건물인데 볼 때마다 마음이 따스해진다. 이름 그대로 배달 기사나 대리운전기사를 위한 짧은 쉼터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작지만 이런 배려를 할 수 있다는 게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이 동시는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에 발표되었다. 그때는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을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한 1960대 중반에도 우리 반에서 중학교에 진학한 ..

시읽는기쁨 2024.12.24

저들에겐 총이 우리에겐 빛이 / 박노해

이 한겨울에 우리 다시 만나니슬프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여눈물과 미소로 너를 바라본다 용기 내줘서 고마워살아있는 네가 눈부셔우린 꼭 이겨낼 거야 저들에겐 총이우리에겐 빛이 우리, 서로가 서로를 지키고우리, 서로가 나라를 지키고될 때까지 우리 함께 할 거야 역사의 악인은 얼굴을 바꾸며교과서 밖으로 걸어 나오지만우리는 지금 살아있는 빛으로승리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으니 세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아이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어선령들이 우리를 가호하고 있어 저들에겐 탐욕이 우리에겐 영혼이저들에겐 총칼이 우리에겐 사랑이저들에겐 파멸이 우리에겐 희망이 우리 인생의 '별의 시간'에다치지 말고 지치지 말고빛으로 모이자, 될 때까지 모이자 - 저들에겐 총이 우리에겐 빛이 / 박노해  윤석열이 지난 12월 3일에 '아닌 밤..

시읽는기쁨 2024.12.16

거인의 나라 / 신경림

모두들 큰 소리로만 말하고큰 소리만 듣는다큰 것만 보고 큰 것만이 보인다모두들 큰 것만 바라고큰 소리만 좇는다그리하여 큰 것들이 하늘을 가리고큰 소리가 땅을 뒤덮었다작은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아무도 듣지를 않는작은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아무도 보지를 않는그래서 작은 것 작은 소리는싹 쓸어 없어져버린 아아우리들의 나라 거인의 나라 - 거인의 나라 / 신경림  거인이 되고 싶은 욕망들이 모여 여기 한 거인을 만들었다. 그 거인은 나흘 전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거리낌 없이 너무나 당당하게, 미소까지 지으며. 거인이 하늘에서 별안간 툭 떨어질 리 없다. 그리고 우리는 박수를 쳤다.  "(거인이) 권력을 잡게 되면, 그는 어떤 죄를 지어도 괜찮은 자유를 얻기 위해 권력을 사용한다."

시읽는기쁨 2024.12.08

인생 / 이기철

인생이란 사람이 살았다는 말눈 맞는 돌멩이처럼 오래 견뎠다는 말견디며 숟가락으로 시간을 되질했다는 말되질한 시간이 가랑잎으로 쌓였다는 말글 읽고 시험 치고 직업을 가졌다는 말연애도 했다는 말여자를 안고 집을 이루고 자식을 얻었다는 말그러나 마지막엔 혼자라는 말그래서 산노루처럼 쓸쓸하다는 말 - 인생 / 이기철  그냥 첨벙 뛰어들었는데 인생이었다언제나 눈앞에선 보이지 않고뒤돌아보아야 보이는 그것우편행랑으론 배달되지 않고발끝에 머리 위에 모래처럼 쌓이는 그것아무리 화사해도 빌려 입을 수 없는 그것도서관에 가면 있지만 모두 남의 것인 그것때론 놓친 기차 같이 아쉽고 못 잡은 무지개 같이 설레는 그것왜 우는지도 모르고 명사산 모래처럼 우는 그것죄짓지 않고도 성서와 불경처럼 무릎 꿇게 하는 그것먹는 일 입는 일 ..

시읽는기쁨 2024.12.02

삼천포 / 백석

졸레졸레 도야지 새끼들이 간다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하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볏짚 같이 누우란 사람들이 둘러서서어느 눈 오신 날 눈을 츠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라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 삼천포-남행시초4 / 백석  백석은 20대 때 남해안을 여행했다. 통영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 쓴 시가 '남행시초(南行詩抄)'로 여러 편이 전한다. 이 시 '삼천포'도 당시의 따사로운 정경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구절인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에 유난히 마음이 가 닿는다. 요사이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정주행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는 '따스한 가난'에 가슴이 뭉클..

시읽는기쁨 2024.11.26

삶 / 박경리

대개소쩍새는 밤에 울고뻐꾸기는 낮에 우는 것 같다풀 뽑는 언덕에노오란 고들빼기꽃파고드는 벌 한 마리애닯게 우는 소쩍새야한가롭게 우는 뻐꾸기모두 한 목숨인 것을미친 듯 꿀 찾는 벌아간지럽다는 고들빼기꽃모두 한 목숨인 것을달 지고 해 뜨고비 오고 바람 불고우리 모두 함께 사는 곳허허롭지만 따뜻하구나슬픔도 기쁨도왜 이리 찬란한가 - 삶 / 박경리  통영 미륵산 자락에 있는 박경리기념관 뜰에 이 시가 적힌 시비가 있었다. 작가가 생의 마지막에 쓴 시들에서는 소설에서 읽지 못하는 작가의 진솔한 마음을 만난다. 작가에게 다가가는 데는 소설보다 시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한 인생이 농축되어 있는 작가의 시에는 고운 영혼의 향기가 풍긴다. 그 향기는 내 마음으로도 스며들어 따스하게 위무해 준다. 작가의 시는 쉽다. ..

시읽는기쁨 2024.11.18

나무처럼 / 오세영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우리도 그렇게살 일이다.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우리도 그렇게클 일이다.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우리도 그렇게살 일이다.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그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알듯 - 나무처럼 / 오세영  기온이 뚝 떨어졌다. 눈을 뜨니 냉랭한 기운이 얼굴에 닿아 이불을 끌어올렸다. 가을을 제대로 즐기기 전에 겨울이 불시에 쳐들어 온 것 같다. 따끈한 믹스커피 한 잔을 감싸 쥐고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온기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의 삶이란 게 너무 소란하고 번잡하다. 벌판..

시읽는기쁨 2024.11.06

주막 / 이기철

주막은 주막이 아니라 酒幕이라 써야 제격이다그래야 장돌뱅이 선무당 미투리장수가 다 모인다그래야 등짐장수 소금쟁이 도붓장수가 그냥은 못 지나가고방갓 패랭이 짚신감발로 노둣돌에 앉아 탁주 사발을 비우고 간다그래야 요술쟁이 곡마단 전기수들이 주모와 수작 한번 걸고 간다酒幕은 으슬으슬 해가 기울어야 제격이다번지수가 없어 읍에서 오던 하가키가대추나무 돌담에 소지처럼 끼어 있어야 제격이다잘 익은 옥수수가 수염을 바람에 휘날려야 제격이다돌무지 너머 참나무골에 여우가 캥캥 짖고누구 비손하고 남은 시루떡 조각이당산나무 아래 널부러져 있어야 제격이다시인 천상병이 해가 지는데도 집으로 안 가고나뭇덩걸에 걸터앉아 손바닥에 시를 쓰고그 발치쯤엔 키다리 시인 송상욱이 사흘 굶은 낯으로통기타를 쳐야 제격이다주막은 때로 주먹패 산도..

시읽는기쁨 2024.10.23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강

어느늦은 저녁 나는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강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 문학상을 발표하며 한강 작가의 소설을 '시적(詩的) 산문'이라고 표현했다. 한강 작가가 시로 문단에 데뷔했으니 소설에 운문의 리듬을 지니고 있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작가는 대학생 때 정현종 시인으로부터 '시 창작론'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30년 전이지만 정 시인은 그때 한강 학생이 준 강렬한 인상을 기억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래선지 한강의 이 시는 정 시인의 시풍과 닮지 않았나 싶다. '흰' 공기, '흰' 밥, '흰' 김이 주는 이미지는 우리 존재의 본질과..

시읽는기쁨 2024.10.15

팔순 / 이정록

기사 양반, 잘 지내셨남?무릎 수술한 사이에버스가 많이 컸네.북망산보다 높구먼. 한참 만이유.올해 연세가 어찌 되셨대유?여드름이 거뭇거뭇 잘 익은 걸 보니께서른은 넘었쥬? 운전대 놓고 점집 차려야겠네.민증은 집에 두고 왔는디골다공증이라도 보여줄까? 안 봐도 다 알유.눈감아드릴 테니께오늘은 그냥 경로석에 앉어유.성장판 수술했다면서유. 등 뒤에 바짝젊은 여자 앉히려는 수작이꾼 중에서도 웃질이구먼.오빠 후딱 달려. 인생 뭐 있슈?다 짝 찾는 일이쥬.달리다보면 금방 종점이유. 근디 내 나이 서른에그짝이 지난치게 연상 아녀?사타구니에 숨긴 민증 좀 까봐.거시기 골다공증인가 보게. - 팔순 / 이정록  할머니와 버스 기사 사이의 농담따먹기가 흥겹다. 걸쭉한 충청도 사투리 속에서 검버섯은 여드름이 되고 무릎 수술은 ..

시읽는기쁨 2024.10.09

두 번은 없다 /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여름에도 겨울에도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 버렸다.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더라?꽃인가, 아님 돌인가? 야속한 시간, 무엇 때문에 너는쓸데없는 두려움을 자아내는가?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

시읽는기쁨 2024.09.29

호박꽃 초롱 서시 / 백석

한울은울파주가에 우는 병아리를 사랑한다우물돌 아래 우는 돌우래를 사랑한다그리고 또버드나무 밑 당나귀 소리를 임내내는 시인을 사랑한다 한울은풀 그늘 밑에 삿갓 쓰고 사는 버슷을 사랑한다모래 속에 문 잠그고 사는 조개를 사랑한다그리고 또두틈한 초가지붕 밑에 호박꽃 초롱 혀고 사는 시인을 사랑한다 한울은공중에 떠도는 흰구름을 사랑한다골짜구니로 숨어 흐르는 개울물을 사랑한다그리고 또아늑하고 고요한 시골 거리에서 쟁글쟁글 햇볕만 바래는 시인을 사랑한다 한울은이러한 시인이 우리들 속에 있는 것을 더욱 사랑하는데이러한 시인이 누구인 것을 세상은 몰라도 좋으나그러나그 이름이 강소천(姜小泉)인 것을 송아지와 꿀벌은 알 것이다 - 호박꽃 초롱 서시 / 백석  강소천 시인이 동시집 을 펴냈을 때 써 준 백석 시인의 서시다...

시읽는기쁨 2024.09.24

깊은 밤 / 도종환

어려서 아버지께 편지를 자주 쓴 것첫 줄을 쓰기 위해 별을 올려다본 것슬픈 밤마다 별들과 가만히 눈을 맞춘 것실패한 아버지를 찾아 떠도는어머니가 보고 싶어 혼자 조용히 운 것수업 시간에 창 밖을 자주 내다본 것화폭에 칠한 색감에 몰입하는 시간이 좋았던 것수시로 도서실로 달려가던 오후'사랑이 무성한 수풀' 같은 소설 제목에 끌려무성한이란 말과 수풀에 대해 수많은 상상을 한 것나이 들어서 결국 숲속에서 살게 되었고영혼을 편하게 하는 일이 숲의 일이란 걸 알게 된 것내 인생에서 잘한 일을 들라면나는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진 것인내의 길이를 길게 늘여가는 게 시간이고시간이야말로 은혜롭다는 것시간이 사람을 깊게 한다는 말을 믿은 것어머니에게 여린 마음의 씨앗을 물려받은 것그 씨앗이 자라제비꽃 ..

시읽는기쁨 2024.09.15

식당 / 프란시스 잠

나의 식당에는 빛바랜 그릇장이 하나 있지요.그는 나의 고모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었고나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고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지요.이 장은 이 추억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어요.만일 사람들이 이 장이 묵묵부답이라고만 생각하면 잘못이지요.나는 이 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니까요. 식당에는 또 나무로 된 뻐꾸기시계가 하나 있지요.나는 이 시계가 왜 이제는 목소리가 없어졌는지 알 수 없어요.그에게 물어볼 생각도 없구요.아마 태엽 속에 담겼던 목소리가 깨어졌겠지요.그저 죽은 사람이 목소리가 없어진 것같이. 거기에는 또 낡은 찬장이 하나 있지요.그 속에는 밀랍, 잼,고기, 빵, 그리고 무른 배 냄새가 납니다.이 찬장은 충직한 청지기로 이 집에서어떤 물건도 훔쳐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우..

시읽는기쁨 2024.09.10

민들레가 민들레씨에게 / 임보

아들아바람이 오거든 날아라아직 여린 날개이기는 하지만주저하지 말고 활짝 펴서 힘차게 날아라이 어미가 뿌리내린 거치른 땅을미련 없이 버리고 멀리 멀리 날아가거라그러나 남풍에는 현혹되지 말라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부드럽고 따스하지만너를 차가운 북쪽 산비탈로 몰아갈 것이다북풍이 오거든 때를 잃지 말고몸을 던져 바람의 고삐를 붙잡으라비록 그 바람은 차고 거칠지라도너를 먼 남쪽의 따뜻한 들판에 날라다 줄 것이다아들아살을 에이는 그 북풍이 오거든 말이다어서 나를 떠나거라네 날개가 시들어 무디어지기 전에될수록 높이 솟구쳐 멀리 날아라가노라면 너의 발 아래 강도 흐르고 호수도 고여 있을 것이다그 강과 호수에 구름이 흐르고 숲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그 환상의 유혹에 고개를 돌리지 말고 멀리 ..

시읽는기쁨 2024.08.31

8월 / 김사인

긴 머리 가시내를 하나 뒤에 싣고 말이지야마하 150부다당 들이밟으며 쌍,탑동 바닷가나 한 바탕 내달렸으면 싶은 거지 용두암 포구쯤 잠깐 내려 저 퍼런 바다밑도 끝도 없이 철렁거리는 저 백치 같은 바다한테침이나 한번 카악 긁어 뱉어주고 말이지 다시 가시내를 싣고새로 난 해안도로 쪽으로부다당 부다다다당내리 꽂고 싶은 거지깡소주 나팔 불듯총알 같은 볕을 뚫고 말이지 쌍, - 8월 / 김사인  김사인 시인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다른 시여서 깜짝 놀랐다. 늘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하고 얌전해 보이는 시인의 내면에 이런 불 같은 열정과 일탈이 숨어 있다니, 의외였지만 솔직히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나도 가끔씩 뭔가가 불끈 치솟아 오를 때가 있다. 주체할 수 없는 궤도 이탈의 욕구 같은 것이다. '야마하 150'은 ..

시읽는기쁨 2024.08.25

지는 꽃을 보러 가자 / 최성현

다섯,혹은 열 번에 한 번쯤이라도꽃이 아니라꽃잎이 지는 것을 보러 가자 뽐내지 마라교만하지 말라죽은 날이 있다는 걸 알라고떨어지는 꽃잎이 그대에게 말하리라 내려갈 때가 있다고떨어질 때가 있다고잃을 때가 있다고꽃잎은 지며 그대에게 말하리라 있을 때 잘하라고,건강할 때 조심하라고,잃기 전에 베풀라고,땅에 떨어진 꽃잎이 그대에게 말하리라 사는 재미가 없을 때는피는 꽃이 아니라지는 꽃을 보러 가자 죽음이 언제 그대를 데려갈지 모르니즐겁게 살고감사하며 살라고지는 꽃잎이 그대에게 말하리라 - 지는 꽃을 보러 가자 / 최성현  자연농 농부인 선생은 30대 초반에 귀농해서 30년 이상 자연농법으로 자급자족 규모의 논밭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청년 시절에 자연농법을 만나 인류가 갇혀 있는 거대한 우물을 보는 경험을 ..

시읽는기쁨 2024.08.16

외로운 사람 / 나태주

전화 걸 때마다 꼬박꼬박 전화 받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불러주는 사람 별로 없고 세상과의 약속도 별로 많지 않은 사람이 분명할 테니까요 전화 걸 때마다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은 더욱 외로운 사람입니다 아예 전화기에서 멀리 떨어져 새소리나 바람소리, 물소리의 길을 따라가며 흰구름이나 바라보고 있는 그런 사람이 분명할 테니까요 - 외로운 사람 / 나태주 사람들의 모든 말이나 행동이 외로움을 호소하는 신호로 읽힌다. 전화를 바로 받아도 그렇고, 전화를 받지 않아도 그렇다. 단톡방에 출근하다시피 글과 영상을 퍼와서 올리는 사람도 그러하다. "나 여기 있어요!"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외치는 절규 같다. 내가 매일 블로그에 뭔가를 끄적거리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라는 걸 안다. 연락처에 전화번호가 ..

시읽는기쁨 2024.08.07

사랑의 찬가 / 에디뜨 피아프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로 무너진다 해도모든 대지가 허물어진다 해도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사랑이 매일 아침 내 마음에 넘쳐흐르고내 몸이 당신의 손 아래서 떨고 있는 한세상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당신의 사랑이 있는 한내게는 대단한 일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만약 당신이 나를 원하신다면세상 끝까지라도 가겠어요금발로 머리를 물들이기라고 하겠어요만약 당신이 그렇게 원하신다면하늘의 달을 따러, 보물을 훔치러 가겠어요만약 당신이 원하신다면조국도 버리고, 친구 버리겠어요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준다면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비웃는다 해도나는 무엇이건 해 내겠어요만약 어느 날 갑자기나와 당신의 인생이 갈라진다고 해도만약 당신이 죽어서 멀리 가 버린다 해도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겐 ..

시읽는기쁨 2024.07.30

봉우리 / 김민기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작은 봉우리 얘길 해줄까 봉우리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나한텐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오르고 있었던 거야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얼마 남지 않았는데 잊어버려일단 무조건 올라보는 거야봉우리에 올라서서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아무것도 아냐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늘어지게 한숨 잘 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그저 고갯마루였을 뿐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거기 부러진나무 등걸에 걸터앉아서나는 봤지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시읽는기쁨 2024.07.24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두 눈을 깊게 뜨고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첼로를 켜며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그리움이 불이 되는 날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부터 떠오르는 아침이면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달력 속에서 뚝, 뚝,꽃잎 떨어지는 날이면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 와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나는 너에게로 가까..

시읽는기쁨 2024.07.09

혼자 논다 / 구상

이웃집 소녀가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갔을 무렵하루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유명하다면서?그러길래- 유명이 무엇인데?하였더니- 몰라!란다. 그래 나는- 그거 안 좋은 거야!하고 말해 주었다. 올해 그 애는 여중 2학년이 되어서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자기가 그 작자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하고 물었더니-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 보면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라고 했단다. 나는 그 대답이 너무 흐뭇해서- 잘 했어! 고마워!라고 칭찬을 해 주고는그날 종일이 유쾌했다. - 혼자 논다 / 구상  '혼자 노는 소년' - 이웃에 사는 소녀의 눈에 이렇게 비쳤다면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을 것 같다. 내가 되고 싶은 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친구 중에 '혼자 노는 소년'에 가..

시읽는기쁨 2024.07.02

외로울 때 / 신경림

외로울 때는협궤열차를 생각한다해안선을 따라 삐걱이는 안개 속차창을 때리는 찬 눈발을눈발에 묻어오는 갯비린내를 답답할 때는늙은 역장을 생각한다발차신호의 기를 흔드는깊은 주름살얼굴에 고인 고단한 삶을 산다른 일이 때로 고되고떳떳하게 산다는 일이더욱 힘겨울 때 괴로울 때는여인네들을 생각한다아직도 살아서 뛰는광주리 속의 물고기 같은장바닥 여인네들의 새벽 싸움질을 밀려가는 썰물도 잡고 안 놓을그 억센 여인네들의 손아귀를외로울 때는 - 외로울 때 / 신경림  외로움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비슷한 조건인데도 외로움을 심하게 타는 사람이 있고, 덤덤한 사람도 있다. 인간관계가 끊어지고 고립되면 대체로 외로움을 느낀다. 사회 안에서 내가 하는 역할이 없어지거나 축소되어도 마찬가지다. 외로움은 관계의 결핍에서 온다고 봐도 ..

시읽는기쁨 2024.06.23

산수 시간 / 유금옥

"개 삽니다아 발바리 삽니다아"시골길에, 확성기를 단트럭이 돌아다닙니다. 순호가 교실 밖으로살금살금 달아납니다. 강아지풀이 꼬리를 흔드는파아란 밭둑길을 뛰어갑니다.복슬복슬한 흰 구름도 따라갑니다. "개 삽니다아 발바리 삽니다아"시골길에, 목쉰 트럭이기웃기웃 돌아다닙니다. 순호가 교실 안으로 살금살금강아지를 안고 들어옵니다. 친구들이 3, 1은 3. 3, 2, 63, 3, 9. 구구단을 외우고 있습니다.목소리를 점점 높여 줍니다. - 산수 시간 / 유금옥 어제 관악산에서 초등 동기들 모임이 있었다. 나는 나가지 않았지만 일흔을 훌쩍 넘긴 영감들 사진이 단톡방에 무더기로 올라왔다. 내 눈은 스르르 감기면서 타임머신을 탄 듯 60년 전으로 돌아간다. 아마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었을 것이다.  십 년이면 강..

시읽는기쁨 2024.06.16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 고은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오래오래 우리나라는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시읽는기쁨 2024.06.01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 신경림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수돗물을 받으러 새벽 비탈길을 종종걸음치는가난한 아내와 부엌도 따로 없는 사글셋방에서 산다문을 열면 봉당이자 바로 골목길이고간밤에 취객들이 토해놓은 오물들로 신발이 더럽다등교하는 학생들과 얼려 공중화장실 앞에 서서발을 동동 구르다가 잠에서 깬다지금도 꿈속에서는 벼랑에 달린 달개방에 산다연탄불에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는골목 끝 잔술집 여주인은 한쪽 눈이 멀었다삼분의 일은 검열로 찢겨나간 외국잡지에서체 게바라와 마오를 발견하고 들떠서떠들다 보면 그것도 꿈이다지금도 밤늦도록 술주정 소리가 끊이지 않는어수선한 달동네에 산다전기도 안 들어와 흐린 촛불 밑에서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가난한 아내의 기침 소리 속에 산다도시락을..

시읽는기쁨 2024.05.25

학살1 / 김남주

오월 어느 날이었다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밤 12시 나는 보았다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밤 12시 나는 보았다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밤 12시 나는 보았다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이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이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밤 12시 나는 보았다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밤 12시 나는 보았다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밤 12시 나는 보았다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시읽는기쁨 2024.05.19

용서 / 김창완

엄마나 학교 가다길고양이도 용서하고신호등도 용서하고큰 트럭도 용서했다자전거 타고 가는 누나도 용서하고날아가는 새도 용서했는데그때 구름도 용서했어요"너 용서가 뭔지 아니?"용서가 한번 봐주는 거 아니에요? - 용서 / 김창완  산울림의 멤버로만 알았던 김창완의 이미지가 지금은 동시 작가면서 음유시인으로 달라졌다. 초기부터 예쁜 노랫말을 직접 지었지만, 70대에 접어들어서도 동시를 발표한다는 것은 동심을 잃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천진난만한 그의 표정을 떠올리면 저절로 미소가 인다. 나도 시인의 마음을 닮으면서 늙어가고 싶다. 이 동시를 곱씹어 보면 의미심장하다. 본다는 것은 한자로 '시(視)' '견(見)' '관(觀)' 등이 있고, 영어에도 'see' 'look' 'watch' 등이 ..

시읽는기쁨 2024.05.06

내가 봐도 우습다 / 안정복

늙은이 나이가 팔십에 가까운데날마다 어린애들과 장난을 즐기네 나비 잡을 때 뒤질세라 따라갔다가매미 잡으러 함께 나가네 개울가에서 가재도 건지고숲에 가서 돌배도 주워오지 흰머리는 끝내 감추기 어려워남들이 비웃는 소리 때때로 들려오네 翁年垂八十 日與小兒嬉捕蜨爭相逐 점蟬亦共隨磵邊抽石해 林下拾山梨白髮終難掩 時爲人所嗤 - 내가 봐도 우습다(自戱效放翁) / 안정복(安鼎福)  순암 안정복 선생은 18세기를 살았던 유학자였다. 이웃 동네에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던 '이택재(麗澤齋)'라는 서재가 있다. 앞에는 영장산이 있고 뒤에는 국수봉이 감싸고 있는 아늑한 동네다. 선생은 성호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며 영향을 받았다. 실학자로 분류되지만 보수적이어서 평생 주자학을 신봉하며 새로운 학문을 추구..

시읽는기쁨 2024.04.27

종달새의 하루 / 윤석중

하늘에서 굽어보면 보리밭이 좋아 보여 종달새가 쏜살같이 내려옵니다. 밭에서 쳐다보면 저 하늘이 좋아 보여 다시 또 쏜살같이 솟구칩니다. 비비배배거리며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하다 하루 해가 집니다. - 종달새의 하루 / 윤석중 소년 시절에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자면 벌판을 지나야 했다. 가운데에 둑방이 있었는데 왼쪽으로는 하천 언저리의 터가 넓었고, 오른쪽으로는 논과 밭, 과수원이 있었다. 우리는 둑방 위로 날 길을 따라 학교를 오갔다. 봄날이면 벌판에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우짖으며 바삐 날아다녔다. 아지랑이와 종달새 노랫소리로 아련하게 떠오르는 내 어릴 적 봄 풍경이다. 하지만 종달새를 가까이 볼 수는 없었다. 멀리 작은 점으로 하늘에 떠 있거나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모습으로만 ..

시읽는기쁨 2024.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