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길에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난들 또한 다른 사람 마음에
그리 꼭 맞으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자
내 귀에 들리는 말들 어찌 다 좋은 말 뿐이랴
내 말도 더러는 남의 귀에 거슬리리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자
세상이 어찌 내 마음에 꼭 맞추어주랴
비록 속 상하고 마땅찮은 일 있어도 세상은
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노라면 가깝고 다정했던 사람들
어느 날 멀어져 갈 수도 있지 않으랴
온 것처럼 가는 것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자
무엇인가 안 되는 일 있어도 실망하지 말자
때로는 잘 되는 일도 있지 않았던가
그냥 그저 그럴 때도 있으려니 하고 살자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 좋지만
가끔은 떠나고 싶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예수님도 사랑을 피하신 적도 있으셨다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람이 주는 상처에 너무 아파하지 말자
아픔만 주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기쁨도 주지 않던가
그냥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누가 비난했다고
분노하거나 서운해하지 말자
격려하고 세워주는 사람도 있지 않았던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자
컴컴한 겨울 날씨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자
더러는 좋은 햇살 보여줄 때가 있지 않던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자
우리,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자
-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자 / 손영호
젊을 때 살아가는 문법과 늙어서 살아가는 문법은 다를 것이다. "마음은 청춘인데"라는 말을 노인들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이런 심신의 괴리도 두 문법이 다른 데서 오는 게 아닐까. 노인이 되면 노인으로서 살아가는 처세훈이 있어야 하리라.
언제부턴가 입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가 있다. '그러려니'와 '그럭저럭'이다. "그러려니 해야지 뭐" "그럭저럭 지내" 등이다. 색깔로 치면 마음은 회색을 닮아간다. 저녁노을이 가라앉아 무채색으로 변하는 하늘을 나는 사랑한다. 무엇에 대한 바람도 기대도 없는 고요하고 담박한 상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쓰던 말에 '에포케(Epoche)'가 있다. '판단 멈춤' 또는 '여러 관계 속에서 생기는 불필요한 감정의 멈춤'이라는 뜻이다. 내 입장 내 판단을 멈출 때 세상과의 마찰은 줄어들고 내 마음도 편안해진다. 몽테뉴는 '에포케'와 '크세쥬(내가 무엇을 아는가)'를 삶의 지표로 삼았다. 둘 모두 '그러려니'와 가깝다고 생각한다.
노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다. "이렇게 살아라"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고, 좇아야 할 목표도 없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면 자족(自足)의 기쁨이 찾아온다. 고독(孤獨)도 체념(諦念)도 달콤하다. 노년의 즐거움이 무엇인가,라고 묻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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