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1717

고향에 다녀오다(12/16~19)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를 뵙고 왔다. 겨울로 들어선 계절이 고향집의 안팎 풍경을 스산하게 했다. 집에 있었던 3박4일 동안 두문불출하고 방 안에서 어머니하고만 지냈다. 고향에 내려가면 게으른 몸이 더 게을러져 나무늘보가 된다.   감사하게도 어머니는 무탈하게 잘 지내시는 편이다. 지남력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외로움을 많이 타신다. 90대 중반이니 친구들이 대부분 떠나고 이제는 말상대가 거의 없다. 장수한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몫인 것 같다.   어머니의 조각그림 맞추기 속도는 나보다 낫다. 시력, 청력도 젊을 때와 같다. 허리가 아픈 걸 빼면 신체에 다른 이상도 없다. 그럼에도 고령의 연세로 혼자 지내시기 때문에 자식 입장에서는 늘 걱정이며 불안 요소다. 언젠가 지인에게 이런 심정을 하소연..

사진속일상 2024.12.20

성지(38) - 배티성지

성지 53. 배티성지(충북 진천군 백곡면) 경기도 안성에서 충북 진천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배나무 고개'라는 뜻의 배티다. 산에 돌배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고 한자로는 '이치(梨峙)'라고 쓴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기 시작하고 교우촌이 만들어졌다. 1850년에는 작은 초가집에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졌고, 최양업 신부님이 이 초가집에 살면서 신학생들을 지도했다. 배티성지는 박해시대 비밀 교우촌이었고, 조선대목구 최초의 신학교가 있던 곳이며, 최양업 신부님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사목 중심지였고, 무명 순교자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배티성지에는 최양업 신부를 기념하는 성당과 박물관, 옛 신학교, 피저의 집, 순교자의 무덤 등이 있다.  오랜만에 배티성지를 찾으니 새로운 곳에 온..

사진속일상 2024.12.05

청주에 다녀오다

나에게 청주(淸州)라면 교육의 도시면서 깨끗한 도시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이런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이 예전부터 있었다. 아내와 함께 청주에 다녀왔다. 새로운 거처로 적당한지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콕 집은 동네도 있었다. 가는 길에 안성의 금광호수와 진천의 배티성지에 먼저 들렀다. 5년 전에 금광호수의 박두진문학길을 걸은 적이 있지만 최근에 세워진 하늘전망대가 어떤지 보고 싶어서였다. 쌀쌀했으나 겨울 하늘의 구름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청주의 목적지는 사천동이었다. 청주의 외곽지대로 한적했으며 가까이에 성당과 병원이 있어서 우리 조건에 맞았다. 하지만 청주공항이 가까워 비행기 소음이 심한 게 단점이었다. 청주공항은 전투기도 이용하기 때문에 그 날카로운 굉음이 낯설었다. 사천동성당을 둘러보는..

사진속일상 2024.12.04

11월의 폭설

첫눈이면서 대단한 폭설이었다. 우리 지역에서는 27일 새벽 3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28시간 동안 누적적설량 45cm가 쌓였다.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11월에 내린 눈의 최고 기록이었다. 28일 아침의 집 앞 도로는 옴짝달싹 못 하는 자동차가 긴 줄을 만들었다. 학교는 휴교했다. 나도 바깥 약속이 있었지만 나가지 못했다.  기상청에서는 이번 폭설의 원인을 "예년보다 높은 해수면 온도로 인해 서해상의 해기차(대기와 바닷물간 온도차)가 크게 났고 그로 인해 찬 공기가 따뜻한 바다 위를 통과하면서 지속해서 수증기로 인한 눈구름대가 만들어졌다"라고 설명했다. 이 역시 지구온난화의 한 결과라는 얘기다. 아름다운 설경을 바라보는 마음이 착잡했다.  이런 식으로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고 지구온난화가 진행한..

사진속일상 2024.11.29

첫눈 내리는 새벽

3시에 눈이 떠졌다. 밤에 첫눈이 내릴 것이라는 예보를 뇌가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설레는 손길로 커튼을 젖히니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점점 기온이 내려갈 테니까. 오디오북으로 소설 한 편을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커튼을 여니 반가운 손님처럼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돋보이게 드러난 눈송이가 춤추듯 흩어져 내렸다. "어떤 소리도 없이, 아무런 기쁨도 슬픔도 없이".  열린 창문 틈으로 "꼬끼요", 멀리서 새벽을 깨우는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두런두런거리는 말소리와 함께 눈치우개로 바닥을 미는 소리가 났다. 작업을 하는 경비원은 보이지 않았다. 이 새벽에 일터로 나가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자동차 바퀴자국을 눈은 선명하게 드러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사진속일상 2024.11.27

떠나가는 가을

서점에 주문한 책을 찾으러 갔는데 일요일이 문 닫는 날인 걸 깜빡 했다. 빈 배낭을 메고 경안천에 나가서 떠나가는 가을과 함께 했다. 영은미술관 뜰에는 가을이 남긴 흔적이 가득하다.  가을이 떠나가면 고니가 찾아올 거야.   경안천에는 백로가 무리를 지어 모여 있다. 길 떠날 채비를 하는가 보다. 먼 길 떠나자면 길동무가 필요하겠지.  곧 겨울이 다가온다고 수근거리는 소리들.  아파트 뜰의 수양단풍나무는 마지막 치장이 화려하다.   다음주에는 기온이 더 떨어진다고 하고 첫눈 예보도 나와 있다. 가을 옷을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다시 겨울옷을 꺼내 장농에 건다. 그렇게 한 계절이 가고 새 계절이 온다.

사진속일상 2024.11.24

여수천의 늦가을

여수천을 걸어서 야탑에 나가다. 여수천 주변은 늦가을을 장식하는 단풍으로 곱다. 노을이 그러하고, 단풍이 그러하고, 사라지는 것들은 이리 아름답다.   11월 하순인데 물들지 않은 단풍나무 잎도 보인다. 일부만 붉게 채색되었고, 나머지는 여전히 초록색이다. 이러다가는 12월에도 단풍이 남아 있겠다. 일본 기상청 자료를 보면 일본에 단풍이 찾아오는 시기가 70년 전보다 19일 정도 늦어졌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다. 앞으로는 12월 단풍도 드문 말이 아닐 것이다.  나뭇잎은 생의 끝에서 자기의 고유한 색깔로 빛난다. 생명의 활력으로 충만하던 여름에는 서로간에 구별이 되지 않았다. 사람도 그러할 것이다. 마지막 때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세상은 아름답다. 세상 속에서 부..

사진속일상 2024.11.22

광명동굴과 도덕산, 당구 직관

광명동굴과 도덕산 출렁다리를 찾아본 뒤 광명시민체육관에서 열리고 있는 PBA 팀리그 경기를 직관하다. 잔뜩 흐리다가 오후부터는 가을비가 내리는 날씨였다. 광명동굴은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에 있는 폐광 동굴로 2011년에 내부를 단장하여 일반에 개방하였다. 수도권에서는 드문 광산 동굴이라 지금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광산의 아픈 역사와 함께 아이들이 좋아할 여러 볼거리를 갖추어 놓았다.   여기서는 1912년에서 1972년까지 광물을 채광했다. 채광 물질은 금, 은, 동, 아연 등이었다. 갱도 길이는 7.8km였고, 총 9개 층으로 되어 있었다.    광명의 도덕산(道德山)이 유명한 건 2022년에 만들어진 이 Y자형 출렁다리 때문이다. 소문난 곳이니 한 번 와 보기는 해야겠지.  도덕산..

사진속일상 2024.11.20

성지(37) - 윤봉문 요셉 묘

성지 52.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 묘(경남 거제시 일운면) 순교복자인 윤봉문 요셉(尹鳳文, 1852~1888)은 1866년 병인박해로 재산을 몰수 당한 뒤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양산에서 거제도로 이주하였다. 거제도에서 전교하며 로베르 신부의 성사 집전을 돕는 등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고 진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1888년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2013년에 유해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성지로 조성하였다.  이곳은 거제도에서 유일한 천주교 성지다. 그래선지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순교자 현양탑 안에 복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현양탑은 순교자들이 옥중에서 쓰던 칼 모양을 형상화 했다.  경당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미사가 집전된다.  성지에는 편백나무와..

사진속일상 2024.11.17

거제도, 통영 여행(2)

이틀에 걸쳐 수박 겉핥기로 거제도와 통영 지역을 둘러보았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이 비례하지는 않겠으나 그래도 너무 짧은 일정이었다. 아쉬운 대로 거제도와 통영 여행을 마치고, 셋째 날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합천 해인사와 영동 월류봉을 찾아보기로 했다. 나로서는 둘 모두 첫 발걸음을 하는 곳이다. 새벽부터 하역 작업을 준비하느라 숙소 앞 통영항은 시끄러웠다. 조금 지나니 냉동 참치가 배에서 끝없이 내려졌다. 참치가 금속 상자에 담길 때 쇳덩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덕분에 일찍 잠을 깨었고 해 뜨는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해인사로 들어가는 길에서 올 가을 제일 화려한 단풍을 만났다.   대적광전(大寂光殿) 앞 마당에는 부처님 오신 날 연등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절을 단체로 찾아온 외국인들의 몸가짐이 경..

사진속일상 2024.11.16

거제도, 통영 여행(1)

아내와 2박3일 일정으로 거제도와 통영을 다녀왔다. 옛 기록을 찾아보니 이 지역 여행을 다녀온 게 2005년이었으니 어느새 19년이 되었다. 그때 일은 단편적으로 두세 장면이 떠오를 뿐이어서 마치 처음 가 보는 곳처럼 새로웠다. 옛 추억을 되새김하기에는 너무나 긴 세월이 되었다. 처음 찾은 곳은 거제 파노라마 케이블카였다. 학동고개에서 노자산 정상까지 1.5km 길이로, 정상에 오르면 다도해 전경을 파노라마로 볼 수 있다. 시설이 깔끔한 걸 보니 개통한지 얼마 안 되어 보였다.  다음은 학동흑진주몽돌해변을 찾았다. 몽돌 위에 앉으니 자갈 위를 들고나는 파도소리가 귀를 채웠다. 저절로 눈이 감기고 명상에 잠겼다.  도장포선착장 옆에 있는 바람의 언덕은 유일하게 옛 기억으로 남아 있는 장소다. 왜 명소로 이..

사진속일상 2024.11.15

장모님 모시고 진안 나들이

전주에 내려간 길에 장모님에게 바깥바람을 쐬 드리기 위해 진안으로 함께 가을 나들이를 나갔다. 걸음이 불편하시니 주로 차 안에서 가을 풍광을 즐기실 수밖에 없었다. 산야는 가을로 무르익고 있었다. 먼저 찾은 곳은 부귀면 세동리에 있는 메타세콰이어길이었다. 옛 도로를 따라 모래재를 넘으면 500m 정도 메타세콰이어가 길게 늘어선 이 길을 만난다. 1980년대에 심었다니 수령이 40년이 되는 메타세콰이어들이다. 노랗게 물들어서 더욱 예쁜 길이었다.   다음에는 사양저수지에 들렀는데 마이산 두 봉우리를 배경으로 하는 경치가 좋았다.  천황사에서는 곱고 선명한 단풍을 만났다.  14년 만에 다시 만난 천황사 전나무다.  용담호 주천생태공원에서 가을 분위기에 빠졌다. 장모님은 조심스레 걸으셨다.  돌아오는 길에는..

사진속일상 2024.11.14

동네 추경(秋景)

아직 완숙은 아니지만 우리 동네에도 가을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인간의 마을에도 숲에도 가을 향기가 가득하다. 화려하기로 치면 이맘때의 가을과 필적할 계절은 없다. 가을이 주는 선물을 감사히 받으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한낮의 추광(秋光)이 따스했다. 고운 단풍 따라 내 마음도 곱게 물드는 것 같았다.  뒷산 숲에는 가을이 먼저 와 있었다. 오솔길에는 떨어진 낙엽이 수북했다. 촌촌가인인생(村村家人人生)이던가, 우리의 삶도 나뭇잎에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 움이 돋아 여름, 가을을 지나 흙으로 돌아간다. 대자연 순환의 흐름 속 시절인연이 나를 이 순간 이 자리에 있게 한다.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다.

사진속일상 2024.11.04

정선, 영월 단풍 여행

아내와 함께 정선과 영월로 1박2일의 단풍 여행을 다녀왔다. 단풍만으로는 결과가 시원찮았다. 높은 기온과 잦은 비로 시기가 늦어져서 두 지역 단풍은 아직 절정이 되지 못했다. 된다 한들 색감이 예년처럼 곱지 않을 것 같다. 제일 먼저 정선의 병방치 스카이워크 전망대에 올랐다. 눈에 그렸던 울긋불긋 산하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래전 아내의 추억이 어린 정선성당에 들렀다.  점심은 정선읍내에 있는 군언송어횟집에서 송어회와 매운탕으로 했다. 반찬으로 나온 번데기에 제일 먼저 젓가락이 갔다.  오후에는 동강을 따라가는 드라이브였다. 할미꽃마을에 정차하여 마을 뒤편의 조용한 산길을 걸었다.   가수분교와 미리내폭포(와인잔폭포)를 지나고,  문치재 정상에서 사행의 도로를 보고, 후진하다가 가드레일 모서리와 격한 키..

사진속일상 2024.11.01

가을걷이를 돕다

고향에 내려가서 4박5일을 보내며 어머니의 가을걷이를 도왔다. 내내 밭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작은 힘이나마 올 농사의 마무리에 보탠 셈이었다.  마구령터널이 개통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려가는 길에 영월로 우회해서 마구령터널을 지나갔다. 아직 부분 개통인지 한 개 차로만 통행을 허용하고 있었다. 영주와 단양을 잇는 새 길이 뚫린 것이다.  겸하여 백두대간수목원에도 들렀다. 트램을 타고 꼭대기까지 이동하여 걸어서 내려왔다. 시간이 넉넉지 않아 대충 훑어만 봤다. 넓이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수목원이라고 한다.   이번 가을걷이의 제일 큰 일은 들깨를 터는 일이었다. 지난 주말에 동생들이 내려와서 반 이상을 끝낸 터라 하루만에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총량이 50되가량 나왔을 성싶다.  고춧대를 뽑고 밭을 정..

사진속일상 2024.10.29

감사하며 오른 백마산

아내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요 몇 년간 산행이라면 엄두를 못 냈는데 꾸준한 치료와 트레이닝으로 다시 도전하게까지 되었다. 몸 상태를 체크할 겸 같이 백마산 등산에 나섰다. 무리가 되면 되돌아오려 했으나 예상외로 가뿐했다. 도리어 내가 뒤따라가기 바빴다. 아내는 하루도 빼지 않고 뒷산에서 맨발 걷기를 하고 있다. 하루 운동량이 내 열 배는 될 것이다. 이러다가는 체력이 역전될지 모르겠다. 몸은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나타난다는 걸 아내가 증명해 보이고 있다.  백마산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백마산은 500m가 채 안 되는 낮은 산이지만 그럴지라도 부부가 같이 산행을 할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중년 부부는 가끔 만나지만 우리처럼 7학년 부부는 드물다.   내려오는 길에는 종교 문제로..

사진속일상 2024.10.21

목현천 걷기

가을비가 흠뻑 내린 다음날 목현천 길을 걸었다. 하늘은 잔뜩 흐렸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내일부터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한다. 찾아온 지 얼마 안 된 가을도 더욱 짙어질 것이다. 목현천은 시골의 개울 느낌이 나서 좋다. 고마리가 피어 있는 천변은 고향의 개울을 보는 것 같다. 여름을 지나면서 모래톱이 많이 자랐다. 수질도 이만하면 합격점이다. 그러나 경안천과 합류한 뒤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인간이 버린 오물과 몸을 섞으면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흰뺨검둥오리 가족이 한가로이 놀고 있다.   고마리는 고향을 연상시키는 꽃이다. 고향 마을 앞 냇가에는 가을이 되면 고마리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집의 수챗구멍 주변에도 고마리가 가득했다. 고마리가 물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고마..

사진속일상 2024.10.20

유유히 뒷산

뒷산에 가을물이 들기 시작했다. 계절이 성큼 다가오는 것 같지만 산에 들면 느리고 유유하게 찾아온다는 걸 알 수 있다. 가을 오시는 산길을 자연의 리듬 따라 나도 유유하게 걸었다. 그러고 보니 '유유하다'는 말이 참 좋다. 유유자적(悠悠自適)한 노년은 상상만 해도 흐뭇하다. 유유하게 살기 위해서는 세상사에 어느 정도 초연해야 할 것이다. 우주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기니 변화에 거역하지 않는다. 순리로 받아들이면 시달릴 일이 줄어든다. 괴로움은 외부가 아닌 내 마음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삶의 종착점은 장자의 목계(木鷄)가 아닐까. 불교의 무아(無我)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없으면서 '내'가 온전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삑 삑 삑삑~" 산길에서는 청딱따구리의 노래가 연신 들려..

사진속일상 2024.10.17

동구릉 산책

용두회 10월 트레킹은 동구릉이었다. 트레킹이라는 이름은 붙었지만 이젠 걷기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산책 수준이다. 오늘도 왕릉을 연결하는 평탄한 길을 1시간 30분 정도 산책하듯 걸었다.  경기도 구리에 있는 동구릉(東九陵)은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이다. 오늘의 왕릉 역사 답사 순서는 이랬다. ▽ 수릉(綬陵)추존 문조(文祖, 1809~1830)와 신정황후의 능이다. 문조는 순조와 순원황후의 아들로 왕세자가 되었으나 2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효명세자라 하였다. 뒤에 문조로 추존되었다.   ▽ 현릉(顯陵)문종(文宗, 1414~1452)과 현덕왕후의 능이다. 조선 5대 왕인 문종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아들이다.   ▽ 건원릉(健元陵)조선을 건..

사진속일상 2024.10.11

뒷산에 오르다

여름 동안 뒷산에 들지 못했다. 집요하게 달려드는 산모기의 성화를 견디지 못해서였다. 여름 산의 모기는 2차세계대전 때 미국 군함을 향해 돌진하던 일본의 제로센 전투기들 같다. 전에는 손수건을 휘저으며 기어코 오르기도 했으나 요사이는 귀찮아서 아예 산가까이 가지를 않았다. 그러니 뒷산 들기가 거의 다섯 달만이었다. 가을이 되니 성가시게 하던 것들이 사라지고 산길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눈에 띄지 않는 풀벌레들의 노랫소리만 숲에 가득했다. 오랜만에 와서인지 숲은 한층 깊어진 느낌이었다. 경건한 예배당에 든 듯해서 살금살금 걸은 숲길이었다.  법정 스님은 어느 글에서, 여름이 지나간 가을철 산은 '머스마'인 스님들을 설레게 한다고 썼다. 일과가 끝나는 가을날 오후가 되면 선원이고 강원이고 절 안이 텅텅 빈다는..

사진속일상 2024.10.10

전주 4박5일

장인 기일을 맞아 전주에 다녀왔다. 겸하여 군산과 영광에도 들렀다. 추모하러 내려갔지만 가을 여행이 된 셈이었다. 둘째 날은 장모님을 모시고 아내, 처제와 함께 군산을 둘러보았다. 군산에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건물이 다수 남아 있다. 1899년에 개항한 군산항은 일제 강점기 때 호남권의 양곡을 일본으로 실어나른 주요 항구였다. 관련한 시설이 많았고 일부는 잘 보존되어 있다. 우리 역시 옛 건물과 유적지를 중심으로 찾아다녔다. 순서는 이랬다. 근대역사박물관 - 군산세관 - 인문학창고 '정담' - 초원사진관 - 신흥동 일본식 가옥 - 여미랑 - 점심(영화원에서 물짜장과 짬뽕밥) - 카페 '8월의 크리스마스' - 진포해양공원 - 해망굴 - 월명공원.   셋째 날은 불갑사로 꽃무릇을 보러 갔다. 올해는 늦..

사진속일상 2024.10.06

둘째네 집

둘째네는 아파트 맨 꼭대기 층에 산다. 구조가 특이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다락방이 있고, 옥상에는 마당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이 있다. 공중에 만든 단독주택에 사는 것 같다. 옥상에 서면 하늘이 360도로 펼쳐져서 가슴이 탁 트인다. 아래는 온통 아파트 숲뿐이지만.  꼭대기 층에다 옥상 마당의 존재가 이 집의 가치를 높여준다. 특히 층간소음에서 자유롭게 사는 점이 제일 부럽다. 위층 올빼미 때문에 10년 넘게  밤잠을 설치는 날이 잦은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유난히 심한 이를 알고 있다. 전투기 소리만 들어도 두려움에 떤다. 얼마 전에는 헬리콥터 여러 대가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걸 보고 전쟁이 날까 봐 방독면을 구입하고 대피처를 검색했다고 한다. 어릴 때 어떤 트라우마가..

사진속일상 2024.09.30

남한강변 드라이브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기운이 몸을 움츠리게 한다. 가을 하늘이 이뻐서 남한강변으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드라이브 중에 문득 양평에 내려 와 있는 후배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더니 마침 집에 있었다. 강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카페에서 만나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었다. 나름대로 의미를 찾으며 살려고 하는 후배의 모습이 대견했다.   후배와 만나면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다. 서로 관심 분야는 달라도 책을 옆에 두고 산다는 공통점이 우리를 묶어준다.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인연의 끈은 불가해하다. 남한강과 연결되는 다산길을 짧게 걸었다. 자연 속 모든 존재가 순리에 따라 잘 익어가고 있었다. 나는 어디메쯤 와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자문하며, 부끄러웠다.

사진속일상 2024.09.26

뜨거운 추석을 고향에서 보내다

추석을 전후한 연휴 기간 동안 30도가 넘는 기온이 이어졌다. 고향에서의 추석날은 34도까지 올라가서 여간 더운 게 아니었다. 이러다가는 '추석'이라는 명칭을 '하석(夏夕)'으로 바꿔야겠다. 올해는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와 함께 추석을 보냈다. 차례는 지내지 않으므로 다른 형제들은 모이지 않은 단출한 명절이었다. 추석 전날은 어머니를 모시고 예천에 있는 외할머니 산소를 찾아보고 바람을 쐬러 무섬마을에 들렀다. 오랜만의 바깥 나들이에 어머니가 좋아하셨다.   어머니의 밭농사가 끝난 줄 알았다. 자식들이 극구 말리니 안 하겠다는 다짐도 있었다. 그런데 웬 걸, 산소 가는 길에 들러보니 500평 밭이 무성하게 자란 들깨로 빽빽했다. 올해도 자식들 몰래 가꾼 것이다. 아흔이 지난 지 한참이나 된 노인인데 집 부..

사진속일상 2024.09.19

추석 연휴 첫날의 동네 산책

추석 연휴 첫날에 우리 동네와 뒷산길을 산책하다. 고향에는 내일 내려갈 예정이라 오늘은 태풍 전야처럼 고요하다. 내일은 교통 상황을 살펴 정체 없는 시간을 택해 출발해야겠다. 명절이 다가오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아내도 나도 마찬가지다. 도로 정체는 차치하고 우선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이 피곤하다. 억지로 의무방어전을 치러야 하는 기분이다. 젊을 때도 그랬고 늙어서도 다르지 않다. 지금은 고향 상황이 서먹하게 변했고 찾아가는 설렘이나 활기가 사라졌다. 사람의 도리이니 안 할 수가 없는 그런 의무 비슷한 것이다. 숲길에 있는 벤치에 누워 나무 사이로 떠가는 구름을 바라본다. 나날살이가 부운(浮雲)과 같지 않으랴. 바람 부는 대로 정처 없이 흘러갈 뿐이다. 구름을 이루는 입자들은 제 잘 난 줄 알고 이리저리..

사진속일상 2024.09.14

민영환 묘

용인에 간 길에 마침 민영환 선생 묘가 부근에 있어 들렀다. 충정공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선생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이다. 선생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있다. 선생은 동부승지, 이조참판, 한성부윤 등의 요직을 지냈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도 참석하는 등 일찍이 서구 문명을 접하며 나라의 개혁에 앞장섰지만 친일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리며 항의했으나 실패하자 동포와 각국 공사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묘소 비문에는 선생의 유언이 새겨져 있다.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가운데에서..

사진속일상 2024.09.08

풍경(56)

모래톱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리들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스르르 몸을 일으켜 물로 피한다. 멀리서는 백로 두 마리가 한가로이 먹이를 기다리고 있다. 슬로우 모션을 보는 듯한 늦여름 오후의 경안천 풍경이다. 손님을 기다리다 지친 무수리 나루터의 줄배는 오수에서 깨어날 줄 모른다. 번잡한 세상에서 조금만 발길을 옮겨도 이런 천고수청(天高水靑) 속 적막강산이 있다.

사진속일상 2024.09.04

가을 오는 하늘

가을이 몇 발자국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한낮 햇살은 따가워도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은 선선해졌다. 매미 소리는 잦아들고 풀벌레들 노랫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간다. 하늘도 가을이 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뜨거운 열기에서 벗어났는지 더 푸르러 보이고, 구름 모양도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 붓을 부드럽게 터치해서 그린 듯한 권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에 하늘을 자주 쳐다봤다.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는 구름의 움직임이 재미있었다. 꽤 오래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는 구름이 있는가 하면, 어떤 구름은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금방 변신을 했다. 하늘이 연출하는 변검술이었다. 하늘 하나만으로도 오가는 길이 즐거웠다. 이 또한 파적(破寂)의 하나가 아니겠느냐고 흐뭇해하면서.  도종환 시인의 시집을..

사진속일상 2024.09.01

여수천의 아침

야탑 모임에 나갈 때는 약속 시간보다 1시간 일찍 나간다. 그리고 예닐곱 버스 정거장 전에 내려 여수천을 따라 걸어서 약속 장소로 간다. 한적한 오전에 한가한 마음으로 걷는 행복한 시간이다. 여수천(麗水川)은 탄천의 지류다. 성남시 갈현동에서 시작하여 도촌동과 여수동을 지나 탄천과 합류한다. 길이가 4km 정도 되는 작은 하천이다. 관리를 잘해서 주변 환경이 깔끔하고 수질도 깨끗하다. 민물고기가 보이고 수량이 불어나면 탄천에서 커다란 잉어도 올라온다. 너구리를 주의하라는 안내문도 붙어 있다. 그만큼 야생동물의 서식 환경이 좋아졌다는 뜻이리라. 도시를 관통하는 살아 있는 하천의 존재가 무척 고맙다. 요즘 같은 여름에는 산책로가 한산하다. 사람이 들어간 사진을 찍자면 한참 기다려야 한다. 느릿느릿 걸어도 몸..

사진속일상 2024.08.24

20층 계단 오르기

올여름은 유난히 덥다. 수도권에서는 한 달째 열대야(熱帶夜)가 이어지고 있다. 기상 관측 이래 신기록이라고 한다. 8월 하순에 접어들었건만 폭염의 기세는 수그러들 줄 모른다. 2024년은 가장 뜨거운 여름으로 기록될 듯하다. 내가 더위를 이기는 방법은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바깥 걸음은 가능한 한 피한다. 가만히 있으면 소란한 마음이 잦아들고 더위도 멀어진다. 한낮에는 선풍기나 에어컨의 도움을 받으며 소파에 누워 책을 읽는 것이 나의 피서법이다. 굳이 바다나 계곡으로 찾아갈 이유가 없다. 책 속에 바다가 있고 산이 있고 멋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웃고 울다 보면 더위도 어느 정도는 잊힌다. 그래서 수치상의 더위와 내가 느끼는 더위는 다르다. 이리 편안하게 지내도 괜찮은지 가끔씩 미안하고 두려..

사진속일상 2024.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