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산창을 열면 / 조오현

샌. 2025. 3. 8. 11:08

화엄경 펼쳐놓고 산창을 열면

이름 모를 새들이 이미 다 읽었다고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를 포롱포롱 날고....

 

풀잎은 풀잎으로 풀벌레는 풀벌레로

크고 작은 푸나무들 크고 작은 산들 짐승들

하늘 땅 이 모든 것들 이 모든 생명들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하나로 어우러져

몸을 다 드러내고 나타내 다 보이며

저마다 머금을 빛을 서로 비춰주나니....

 

- 산창을 열면 / 조오현

 

 

<화엄경(華嚴經)>을 접하지는 못했으나 '화엄세상'이란 말은 자주 들었다. '세상 모든 존재가 함께 어우러져 장엄하게 빛나는 세상'이라는 의미로 알고 있다. '화엄'하면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구슬로 된 인드라망이 떠오른다. 우주의 모든 개체는 홀로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작용이라는 관계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개체는 개체가 아니고 하나는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달라지면 다른 모든 존재가 영향을 받는다. 결국 우리는 한 몸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시인이 말하는 산창(山窓)은 곧 심창(心窓)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은 손톱만 한 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떤 사람은 넓은 통유리로 세상을 바라본다. 아예 벽을 없앤 사람도 있다. 내 마음의 창이 어떠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화엄이란 세상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이기도 하리라. 화엄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거대한 꽃밭일지 모른다. 온갖 색깔의 꽃들이 어울려 각자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면서 아름다운 화원을 만든다. 잘 나고 못나고의 구별이나 차별 없이 모두가 대등한 존재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도 없다. 너는 너여서 아름답고, 나는 나여서 아름답다. 시인은 자연을 통해 이런 화엄세상을 열어보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읽고 있는 <토지> 16권에 해도사의 이런 말이 나온다. 관수의 유골을 모셔 와서 강쇠, 소지감, 해도사 셋이 모여 나누는 대화 중 일부인데 화엄사상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목숨의 여지없는 순환은 선악의 인(因)으로써 과(果)로 통하고 물(物)의 정연함과 더불어 영(靈) 또한 정연하니 오늘과 같은 말법(末法)의 시대도 새 법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아야 옳고 정연한 순환에 따라 말법은 썩어서 새것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흔적 없이 되는 것이, 병든 목숨이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 하여 우주는 나요 나는 우주라. 흥복도 내 자신의 것이요 재앙도 내 자신의 것이며 벌레인들 내 자신 아니라 못하리. 날짐승 들짐승도 내 자신이며 간 사람도 내 자신이며 오는 사람도 내 자신, 모든 것은 일체(一體)요 또한 낱낱이라. 일체가 같은 것이라면 낱낱은 다른 것, 이 무궁무진함을 어찌 인간이 헤아리고 가늠하리."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 옆 홍매화의 개화 소식이 들려올 때가 되었다. 올해 또 찾아가 뵙고 올 수 있을까.

 

홍사성 시인의 '못난이들이 지은 화엄세상'이라는 시가 있다.

 

못난이는 누구든지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에 가볼 일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새든 벌레든

꽃이든 나비든 흙이든 물이든 그 무엇이든

꼭 한번 가볼 일이다

가서 깨달을 일이다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는지를

그 부처가 얼마나 멋진 화엄세상을 만드는지를

뒤틀어진 몸으로 서 있는 기둥은 나무부처

돌계단에 드러누운 장대석은 돌부처

빛바랜 단청 속에는 나비부처

용마루에는 이끼 낀 기와부처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부처, 부처, 부처

하찮은 중생도 여기서는 부처가 되나니

거지같이 살아온 인생도 황제가 되나니

누구나 별 볼일 없이 걸어온 길 억울하거든

전라남도 구례땅 화엄사 각황전에 가볼 일이다

가서 못난이 부처나 돼볼 일이다

부처가 못 되면 부처 구경이라도 하고 올 일이다

 

- 못난이들이 지은 화엄세상 / 홍사성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우가 / 윤선도  (0) 2025.03.03
좋을 대로 해라 / 김규동  (0) 2025.02.15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자 / 손영호  (0) 2025.02.05
설날 마누라랑 장보기 / 서봉교  (1) 2025.01.28
두루미를 보다가 / 유안진  (0) 2025.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