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식당 / 프란시스 잠

샌. 2024. 9. 10. 09:56

나의 식당에는 빛바랜 그릇장이 하나 있지요.

그는 나의 고모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나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고

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지요.

이 장은 이 추억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어요.

만일 사람들이 이 장이 묵묵부답이라고만 생각하면 잘못이지요.

나는 이 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니까요.

 

식당에는 또 나무로 된 뻐꾸기시계가 하나 있지요.

나는 이 시계가 왜 이제는 목소리가 없어졌는지 알 수 없어요.

그에게 물어볼 생각도 없구요.

아마 태엽 속에 담겼던 목소리가 깨어졌겠지요.

그저 죽은 사람이 목소리가 없어진 것같이.

 

거기에는 또 낡은 찬장이 하나 있지요.

그 속에는 밀랍, 잼,

고기, 빵, 그리고 무른 배 냄새가 납니다.

이 찬장은 충직한 청지기로 이 집에서

어떤 물건도 훔쳐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우리 집에 왔던 많은 남녀 손님들은

이 물건들에 작은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손님이 집 안에 들어서면서

"잠 씨, 어떠시오?" 하고 물을 때

그가 살아 있는 나뿐이라고 생각하니 나는 웃음이 나지요.

 

- 식당 / 프란시스 잠

 

 

다른 사람에게는 보잘것없어도 나한테는 소중한 것이 있다. 누적된 삶의 사연들과 추억이 담겨 있는 물건들이다. 잠 시인에게는 식당에 있는 그릇장, 뻐꾸기시계, 낡은 찬장이 그러했을 것이다. 시인은 그런 물건들에서 고모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의 숨결을 느끼며 함께 살아간다.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타인의 시선이 시인에게는 의아하게 느껴질 법하다.

 

내 주변을 둘러보면 옛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사할 때마다 낡은 것은 버리고 신제품으로 바꾸는 것이 의례화 되었다. 현대 문명의 캐치프레이즈는 "새것은 좋은 것이다"이다. 정말 그럴까? 신혼 때 쓰던 낡은 의자라도 하나 남아 있다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시를 접하고 보니 더욱 그렇다.

 

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매리 홉킨스의 '그 시절이 좋았어(Those Were The Days)'를 들으며 향수에 젖는다. 가끔은 이런 복고풍에 빠져도 괜찮으리. 가슴이 따스해지는 얼마 안 되는 시간 중 하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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