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깊은 밤 / 도종환

샌. 2024. 9. 15. 09:37

어려서 아버지께 편지를 자주 쓴 것

첫 줄을 쓰기 위해 별을 올려다본 것

슬픈 밤마다 별들과 가만히 눈을 맞춘 것

실패한 아버지를 찾아 떠도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혼자 조용히 운 것

수업 시간에 창 밖을 자주 내다본 것

화폭에 칠한 색감에 몰입하는 시간이 좋았던 것

수시로 도서실로 달려가던 오후

'사랑이 무성한 수풀' 같은 소설 제목에 끌려

무성한이란 말과 수풀에 대해 수많은 상상을 한 것

나이 들어서 결국 숲속에서 살게 되었고

영혼을 편하게 하는 일이 숲의 일이란 걸 알게 된 것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을 들라면

나는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진 것

인내의 길이를 길게 늘여가는 게 시간이고

시간이야말로 은혜롭다는 것

시간이 사람을 깊게 한다는 말을 믿은 것

어머니에게 여린 마음의 씨앗을 물려받은 것

그 씨앗이 자라

제비꽃 애기똥풀 같은 꽃만 보아도 마음이 순해지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 마음이 선해지던 것

스무살에 니체를 알게 된 것

반야심경을 꼼꼼히 읽은 것

좌절과 자학이 질펀하던 시절에

사르트르와 키르케고르를 만난 것

빈곤한 날들의 끝에 톨스토이를 좋아하게 된 것

변방에서 쑥부쟁이처럼 비천하게 살았지만

의롭게 살다 간 사람들의 인생을 흠모하게 된 것

시골 학교 선생으로 오래 일한 것

그것도 잘한 일의 목록에 들어가야 할 듯싶다

 

세상에는 문자를 만들어 나무껍질에 새겨

공유하기 시작한 이도 있고

범람하는 세상의 강을 다스리는 일에 생을 던진 이도 있고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려낸 이도 있고

증기의 압력으로 동력을 얻어 새 시대를 연 이도 있으나

나는 세상을 바꾸는 어마어마한 일을 하거나

역사의 물줄기를 튼 사람들 근처에도 못 간다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더 많고

세상에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안다

내 안에는 빛보다 그늘이 많지만

그늘도 사랑하고 햇빛도 사랑한다

햇빛에 반짝이는 부분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그늘진 곳이 나를 겸손한 자리에 머물게 한다

 

내 인생이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

아직도 다 알지 못하지만

여기까지 함께 와준

고마운 내 인생을 향해 편지 한장 쓰는 밤

별을 올려다보는 밤이 깊다

 

- 깊은 밤 / 도종환

 

 

올해 나온 시인의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을 읽고 있다. 하루에 조금씩 음미하며 읽는다. 모든 시가 시인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올리는 기도 같다. 이 시는 시집의 맨 처음에 실려 있다.

 

시인은 선현의 말을 인용해  '속유(俗儒)'를 경계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세상에 등 돌린 채 시문을 지으며 자적한 날을 보내고, 새와 물고기와 꽃의 말을 알아들으려 하며 바람의 언어에 주석을 다는 이들을 속된 선비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진정한 선비라면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진흙 구덩이에 빠진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시인의 행적도 이런 방향에서 이해될 듯싶다. 시집에서는 정치인으로서의 한계를 고백하는 부분도 곳곳에 눈에 띈다.

 

청주가 지역구인 시인은 4선에 도전했으나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어떤 내부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22대 국회에서는 시인 국회의원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어쩌면 더러운 정치판에서 발을 빼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속유의 극복이 꼭 정치를 통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일이 더 높고 순결한 길로 나아가는 전기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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