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민들레가 민들레씨에게 / 임보

샌. 2024. 8. 31. 11:36

아들아

바람이 오거든 날아라

아직 여린 날개이기는 하지만

주저하지 말고 활짝 펴서 힘차게 날아라

이 어미가 뿌리내린 거치른 땅을

미련 없이 버리고 멀리 멀리 날아가거라

그러나 남풍에는 현혹되지 말라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부드럽고 따스하지만

너를 차가운 북쪽 산비탈로 몰아갈 것이다

북풍이 오거든 때를 잃지 말고

몸을 던져 바람의 고삐를 붙잡으라

비록 그 바람은 차고 거칠지라도

너를 먼 남쪽의 따뜻한 들판에 날라다 줄 것이다

아들아

살을 에이는 그 북풍이 오거든 말이다

어서 나를 떠나거라

네 날개가 시들어 무디어지기 전에

될수록 높이 솟구쳐 멀리 날아라

가노라면 너의 발 아래 강도 흐르고 호수도 고여 있을 것이다

그 강과 호수에 구름이 흐르고 숲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

그 환상의 유혹에 고개를 돌리지 말고 멀리 멀리 날아라

너의 날개가 다 빠지고 너의 몸이 다 젖어 더 날을 수 없을 때

네 눈 앞에 햇볕 따스한 들판이 보이거든 그곳에 내려라

그러나 아들아 거칠은 숲들의 마을은 피하거라

지금은 외롭고 삭막할지라도 인적 없는 조용한 들판

우리들의 키보다 낮은 들풀들이 모여 사는 조용한 마을을 찾으라

네가 처음 발붙이기에는 그래도 아직 그들의 인심이 괜찮을 것이다

아들아

네가 처음 발디딘 땅이 물기 어린 비옥한 흙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지금껏 비어 있는 좋은 땅이 너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기대하지 말라

이미 자리잡고 있는 이웃들의 틈에 네가 비집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아들아 인내와 겸손으로 새로운 이웃들의 이해를 얻도록 해라

어떤 이웃은 너의 발등을 밟고 너의 등을 밀어내고 너의 팔을 비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만 다 거칠은 것은 아니어서

어떤 이웃은 폭풍이 올 때 그들의 품에 너를 감싸주기도 하고

사나운 벌레들이 접근해 올 때 독을 뿜어 그들을 내쫓기도 할 것이다

아들아 네 이웃이 네게 어떻게 대하든

너는 그들을 사랑하며 참고 견디어 튼튼한 뿌리를 내리도록 해라

어느 날 밤 봄비를 맞아 네 키가 나만큼 자라면

다음 날 아침 네 이웃들의 낮은 어깨 위에 우뚝 솟아오른 너의 모습을 볼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바로 네 이웃에

네 또래의 민들레 아가씨가 방글거리며 웃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민들레 아가씨가 주위에 보이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

기다리노라면 내일 아침쯤 아니 언제쯤엔가는

너처럼 그렇게 날아서 네 곁에 내려앉을 것이다

그러거든 아들아 서로 사랑하여라

하늘의 별들이 으스러지도록 사랑하여라

그리하여 너도 어른이 되어 예쁜 민들레씨들을 가지게 되면

나처럼 그렇게 너도 일러주거라

북풍이 오면 어서 멀리 멀리 날아가라고

따뜻한 새 세상 찾아 멀리 멀리 날아가라고

이것이 생명의 길이란다

 

- 민들레가 민들레씨에게 / 임보

 

 

'딸 바보' '아들 바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지극한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헬리콥터 부모'라는 말도 있다. 자식에 대한 애착이 지나친 나머지 자식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는 부모를 일컫는 말이다. 하물며 성인이 된 자식한테까지 시시콜콜 간섭을 한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것이다. 며칠 전에 뉴스를 보고 실소를 했다. 치과에서 23세 남성의 충치 치료를 했는데 나중에 어머니가 찾아와서 "스물세 살 우리 아이가 뭘 안다고" 치료를 마음대로 했느냐며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다. 스물세 살이나 된 아들이 어머니 눈에는 여전히 '아이'로 보였는가 보다. 너무 '내 아들'을 밝히면 눈이 멀어진다.

 

민들레는 때가 되면 민들레씨를 훌훌 떠나보낸다. 왜 애틋하지 않겠냐마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다. 이소(離巢)를 시킬 때 어미새를 보면 너무나 냉정하다. 새끼가 둥지를 떠나면 완전한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않으니 묘하다. 죽을 때까지 자식 걱정에서 못 벗어난다. 스스로 굴레를 씌우고 허덕허덕 살아간다. 

 

민들레가 민들레씨를 떠나보내는 마음은 지극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바람을 타고 떠난 민들레씨는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 향유할 권리가 있다. 이것이 자연의 길이며 생명의 길이다. '딸 바보' '아들 바보'가 정작 딸과 아들을 바보로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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