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은
울파주가에 우는 병아리를 사랑한다
우물돌 아래 우는 돌우래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버드나무 밑 당나귀 소리를 임내내는 시인을 사랑한다
한울은
풀 그늘 밑에 삿갓 쓰고 사는 버슷을 사랑한다
모래 속에 문 잠그고 사는 조개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두틈한 초가지붕 밑에 호박꽃 초롱 혀고 사는 시인을 사랑한다
한울은
공중에 떠도는 흰구름을 사랑한다
골짜구니로 숨어 흐르는 개울물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아늑하고 고요한 시골 거리에서 쟁글쟁글 햇볕만 바래는 시인을 사랑한다
한울은
이러한 시인이 우리들 속에 있는 것을 더욱 사랑하는데
이러한 시인이 누구인 것을 세상은 몰라도 좋으나
그러나
그 이름이 강소천(姜小泉)인 것을 송아지와 꿀벌은 알 것이다
- 호박꽃 초롱 서시 / 백석
강소천 시인이 동시집 <호박꽃 초롱>을 펴냈을 때 써 준 백석 시인의 서시다. 강소천이 함흥의 영생고보에 다닐 때 백석이 영어교사였고 운 좋게도 직접 백석으로부터 시를 배울 수 있었다. 둘은 나이 차이가 세 살밖에 안 되지만 강소천이 늦깎이로 학교에 들어가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난 것이다. 이 시를 보면 백석이 얼마나 강소천을 아꼈는지 알 수 있다.
하늘은
울타리 옆에 우는 병아리를 사랑한다
우물돌 아래 우는 땅강아지를 사랑한다
그리고 또
버드나무 밑 당나귀 소리를 흉내내는 시인을 사랑한다
버드나무 밑에 매여진 당나귀 소리를 따라 흉내내는 강소천 시인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그려져 있다. 강소천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아련하게 나의 소년 시절이 떠오른다. 시인의 동시와 함께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소천 시인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백석 시인과 이런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니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강소천 시인의 '호박꽃 초롱'은 이렇다.
호박꽃을 따서는
무얼 만드나?
무얼 만드나?
우리 애기 조그만
초롱 만들지
초롱 만들지
반딧불이를 잡아선
무엇에 쓰나?
무엇에 쓰나?
우리 애기 초롱에
촛불 켜 주지
촛불 켜 주지
시집 <호박꽃 초롱>이 나온 1941년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 시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다. 일제가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제하며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하던 때에 한글로 된 시집을 낸 것이다. 제자의 그런 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백석은 '서시'를 써 주었다. 시로 나누는 사제지간의 정에 가슴이 따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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