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8

꿈 / 서홍관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지 논두렁 개울가에 진종일 쪼그리고 앉아 밥 먹으라는 고함 소리도 잊어먹고 개울 위로 떠가는 지푸라기만 바라보는 열 다섯 살 소년이 되어보는 중학교 때 교장 선생님은 월요일 아침 조회 시간이면 웅변조로 자주 강조하셨다. "Boys, Be ambitious!" 다른 얘기도 많이 하셨을 텐데, 시간은 모든 걸 걸러내고 오직 하나만 남겨 놓았다. "야망을 가져라!" 스피커를 통해 찌렁 찌렁 울리던 그 소리는 늘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당시의 나는 야망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던 시골뜨기였다. 그리고 이상하게 별로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또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나 희망도 대부분 낯 설었다. 내 능력 밖인 것 같았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무엇이 ..

시읽는기쁨 2003.12.23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 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그 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그래도 인생은 고단하고 쓸쓸하고 힘들다. 지금 이 자리가 꽃봉오리임을 알아채기엔 내 눈은 가려져 있고 귀는 멀었다. 그러나 어떤 아픔일지라도 지나고 보면, 내곁을 떠나 사라진 것들은 아득한 그리움만 남긴다. 나는 왜 늘상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일까? 지나고 나서야 후회하는 것일까? 더 사랑하..

시읽는기쁨 2003.12.18

유안진의 詩 두 편

슬퍼지는 날에는 어른들아 어른들아 아이로 돌아가자 별똥 떨어져 그리운 그곳으로 가자 간밤에 떨어진 별똥 주우러 가자 사랑도 욕스러워 외로운 날에는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물어보자 개울가의 미나리아재비 물봉숭아 여린 꽃이 산기슭의 패랭이 엉겅퀴 산난초가 어째서 별똥 떨어진 그 자리에만 피는가를 어른들아 어리석은 어른들아 사는 일이 참말로 엄청 힘들거든 작고도 단순하게 경영할 줄도 알아야지 작아서 아이같은 고향 마을로 가서 밤마다 떨어지는 별똥이나 생각다가 엄마 누나 무릎 베고 멍석자리 잠이 들면 수모도 치욕도 패배도 좌절도 횃불꼬리 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 찬란한 별똥별이 되어주지 않을꺼나 문득 너무 오래 사람이었구나 아장걸음 걸어오는 새벽 봄비에 미리..

시읽는기쁨 2003.12.12

작은 사내들 / 김광규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나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

시읽는기쁨 2003.12.02

순수를 꿈꾸며 / 블레이크

한 알의 모래알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의 손바닥 안에 무한이 있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 하며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쫓기는 토끼의 울음 소리는 우리의 머리를 찢는다. 종달새가 날개에 상처를 입으면 아기 천사는 노래를 멈추고....... -- W. Blake / Auguries of Innocence 중에서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A robin redbreast i..

시읽는기쁨 2003.11.24

낙엽 / 구르몽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떨어져 땅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리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 낙엽, 구르몽(R. Gurmon) 아침에 흐린 하늘이 낮이 되면서 개이더니 지금은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이런 날은 하던 일..

시읽는기쁨 2003.11.19

My heart leaps up / Wordsworth

하늘의 무지개 바라보면 내 가슴 뛰노라. 내 삶이 시작될 때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니 늙어서도 그러하리라. 아니라면 죽음만도 못하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컨대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자연에 대한 경애로 이어지기를.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 My heart le..

시읽는기쁨 2003.11.11

너와집 한 채 /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베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플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

시읽는기쁨 2003.11.06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이 남아있을까 / 이시영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이 남아 있을까 이 시영 중학 1학년 새벽밥 일찍 먹고 한 손엔 책가방 한 손엔 영어 단어장 들고 가름젱이 콩밭 사잇길로 시오리를 가로질러 읍내 중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에 함뿍 젖은 아랫도리가 모락모락 흰 김을 뿜으며 반짝이던 간혹 거기까지 잘못 따라온 콩밭 이슬 머금은 작은 청개구리가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팔짝 튀어 달아나던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을 다시 한번 걸을 수 있을까 과거는 아름답다? 하물며 어린 시절의 추억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나이 탓인가, 계절 탓인가 요즘은 옛날 생각이 자주 난다. 오늘 만난 이 시도 내 마음을 울린다. 나도 이십리 길을 걸어 읍내 중학교에 다녔다. 합승이라고 불렀던 작은 버스가 다녔지만 시골 아이들 대부분은..

시읽는기쁨 2003.11.01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 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 그녀는 시대의 고통에 같이 아파한 시인이었다. 그런데 아깝게도 40대 초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시읽는기쁨 2003.10.28

달빛이 내 몸을 / 까비르

`마음의 평화`를 노래하는 문맹의 농부 시인 까비르! 인도의 갠지스 강 근처 한 산중 마을에서 어느 수도승과 과부의 사생아로 태어난 까비르는 태어나자마자 길에 버려졌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평생을 물긷는 일과 베짜는 일로 생계를 이어간 그는 틈틈이 삶의 초월에 대하여, 그리고 마음의 평화에 대한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적었다. 글을 읽을 줄 몰랐던 문맹의 시인이며 농부였던 까비르의 시는타고르가 엮어세상에 알려졌다. 달빛이 내 몸을 누리고 있네 그러나 눈먼 내 눈은 그것을 보지 못하네 달이 해가 내 몸 속에 있네 영원의 목소리가 내 몸 속에서 울리고 있네 그러나 내 먼 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네 나 나의 것 그것들을 외치고 있는 동안의 그대의 노력은 무가치하네 나 나의 것에..

시읽는기쁨 2003.10.23

그만큼 행복한 날이 / 심호택

그만큼 행복한 날이 심 호택 그만큼 행복한 날이 다시는 없으리. 싸리빗자루 둘러 메고 살금 살금 잠자리 쫒다가 얼굴이 발갛게 익어 들어오던 날. 여기저기 찾아 보아도 먹을 것 없던 날. 아무 것도 먹을 것 없던 그 때가 어떻게 행복했을까? 지나간 것은 다 그리워지기 때문일까? 그 때는 모두들 가난했지만 가난했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마음의 배고픔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허기에 져 있다. 조사에 따르면 세계의 빈국들에서 행복지수가 높게 나오고 있다. 물질적 풍요와 정신의 행복은 비례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도가 지나친 풍족과 욕심은 공허와 권태라는 또 다른 선물을 가져다 준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또 문명의 발전이라는 것은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가는 과..

시읽는기쁨 2003.10.16

감자를 먹으며 / 이오덕

녹색연합에서 만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 그대로 작은 잡지가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 이오덕 선생님의 `감자를 먹으며`라는 시를 만났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우리 나라 초등 교육과 우리 말 가꾸기 운동에 일생을 보내신 올곧은 선비셨습니다. 언젠가 TV 프로그램으로도 소개가 되었었지요. 권정생 선생님과의 아름다운 교유를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좀 길기는 하지만 시 전문을 옮겼습니다. 저같은 중년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어릴적 추억에 젖게 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전 감자를 너무 많이 먹어서 질리기도 했지요. 이 시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감자가루를 삭혀서 만든 쫄깃쫄깃한 감자떡 기억도 납니다. 그리고 시냇가에서 감자 구워 먹는 묘사, 너무나 생생해서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어른이 되어서..

시읽는기쁨 2003.10.08

자유 / 김남주

자유 (김남주)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이 시를 읽으면 두렵다. `위선자`라는 벼락 소리가 내 정수리 위로 쏟아질 것 같다. 인간은 철저히 이기적이다. 물론 나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난한 이웃, 고통받은 생명..

시읽는기쁨 2003.09.29

飮酒16 / 陶淵明

少年罕人事 어려서부터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遊好在六經 육경을 읽으며 친구를 삼았더니 行行向不惑 세월 흘러 나이 사십 바라보니 淹留遂無成 내가 이룬 일이 없구나 竟抱固窮節 비굴하지 않은 굳은 절개만을 품은 채 飢寒飽所更 추위와 굶주림만 지겹도록 겪었구나 弊廬交悲風 초라한 오두막엔 차가운 바람만 드나들고 荒草沒前庭 잡초는 집 주변을 황폐하게 만들었구나 披褐守長夜 낡은 옷 걸치고 지새우는 긴긴 밤 晨鷄不肯鳴 닭마저 새벽을 알리지 않는다 孟公不在玆 선비를 알아주는 맹공도 없으니 終以예吾情 끝내 내 가슴이 답답하구나 도연명 스스로가 선택한 가난과 빈한이었지만 그의 전원 생활은 고달픈 나날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낭만적 가난이 가능할까? `安貧`도 역시 가능할까? 먹을 양식도 떨어지고, 입을 옷조차 헤어져 찬 바..

시읽는기쁨 2003.09.28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소 싶소....` 사람마다 바램이 다르겠지만 어느 날 읽은 이 시의 첫 구절이 종종 나의 독백 소리가 되었다. 이 시도 역시 현실 도피적, 자기 만족적경향이 강하지만 세상의 욕심 버리고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보고픈 내적 충동은 어찌할 수가 ..

시읽는기쁨 2003.09.21

길 / 정희성

길(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 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

시읽는기쁨 2003.09.1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白石)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오랫동안 `마가리`를 지명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오막살이를 뜻하는 북쪽 방언이..

시읽는기쁨 2003.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