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48

달빛이 내 몸을 / 까비르

`마음의 평화`를 노래하는 문맹의 농부 시인 까비르! 인도의 갠지스 강 근처 한 산중 마을에서 어느 수도승과 과부의 사생아로 태어난 까비르는 태어나자마자 길에 버려졌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평생을 물긷는 일과 베짜는 일로 생계를 이어간 그는 틈틈이 삶의 초월에 대하여, 그리고 마음의 평화에 대한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적었다. 글을 읽을 줄 몰랐던 문맹의 시인이며 농부였던 까비르의 시는타고르가 엮어세상에 알려졌다. 달빛이 내 몸을 누리고 있네 그러나 눈먼 내 눈은 그것을 보지 못하네 달이 해가 내 몸 속에 있네 영원의 목소리가 내 몸 속에서 울리고 있네 그러나 내 먼 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네 나 나의 것 그것들을 외치고 있는 동안의 그대의 노력은 무가치하네 나 나의 것에..

시읽는기쁨 2003.10.23

그만큼 행복한 날이 / 심호택

그만큼 행복한 날이 심 호택 그만큼 행복한 날이 다시는 없으리. 싸리빗자루 둘러 메고 살금 살금 잠자리 쫒다가 얼굴이 발갛게 익어 들어오던 날. 여기저기 찾아 보아도 먹을 것 없던 날. 아무 것도 먹을 것 없던 그 때가 어떻게 행복했을까? 지나간 것은 다 그리워지기 때문일까? 그 때는 모두들 가난했지만 가난했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마음의 배고픔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허기에 져 있다. 조사에 따르면 세계의 빈국들에서 행복지수가 높게 나오고 있다. 물질적 풍요와 정신의 행복은 비례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도가 지나친 풍족과 욕심은 공허와 권태라는 또 다른 선물을 가져다 준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또 문명의 발전이라는 것은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가는 과..

시읽는기쁨 2003.10.16

감자를 먹으며 / 이오덕

녹색연합에서 만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 그대로 작은 잡지가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 이오덕 선생님의 `감자를 먹으며`라는 시를 만났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우리 나라 초등 교육과 우리 말 가꾸기 운동에 일생을 보내신 올곧은 선비셨습니다. 언젠가 TV 프로그램으로도 소개가 되었었지요. 권정생 선생님과의 아름다운 교유를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좀 길기는 하지만 시 전문을 옮겼습니다. 저같은 중년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어릴적 추억에 젖게 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전 감자를 너무 많이 먹어서 질리기도 했지요. 이 시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감자가루를 삭혀서 만든 쫄깃쫄깃한 감자떡 기억도 납니다. 그리고 시냇가에서 감자 구워 먹는 묘사, 너무나 생생해서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어른이 되어서..

시읽는기쁨 2003.10.08

자유 / 김남주

자유 (김남주)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이 시를 읽으면 두렵다. `위선자`라는 벼락 소리가 내 정수리 위로 쏟아질 것 같다. 인간은 철저히 이기적이다. 물론 나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난한 이웃, 고통받은 생명..

시읽는기쁨 2003.09.29

飮酒16 / 陶淵明

少年罕人事 어려서부터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遊好在六經 육경을 읽으며 친구를 삼았더니 行行向不惑 세월 흘러 나이 사십 바라보니 淹留遂無成 내가 이룬 일이 없구나 竟抱固窮節 비굴하지 않은 굳은 절개만을 품은 채 飢寒飽所更 추위와 굶주림만 지겹도록 겪었구나 弊廬交悲風 초라한 오두막엔 차가운 바람만 드나들고 荒草沒前庭 잡초는 집 주변을 황폐하게 만들었구나 披褐守長夜 낡은 옷 걸치고 지새우는 긴긴 밤 晨鷄不肯鳴 닭마저 새벽을 알리지 않는다 孟公不在玆 선비를 알아주는 맹공도 없으니 終以예吾情 끝내 내 가슴이 답답하구나 도연명 스스로가 선택한 가난과 빈한이었지만 그의 전원 생활은 고달픈 나날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낭만적 가난이 가능할까? `安貧`도 역시 가능할까? 먹을 양식도 떨어지고, 입을 옷조차 헤어져 찬 바..

시읽는기쁨 2003.09.28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소 싶소....` 사람마다 바램이 다르겠지만 어느 날 읽은 이 시의 첫 구절이 종종 나의 독백 소리가 되었다. 이 시도 역시 현실 도피적, 자기 만족적경향이 강하지만 세상의 욕심 버리고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보고픈 내적 충동은 어찌할 수가 ..

시읽는기쁨 2003.09.21

길 / 정희성

길(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 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

시읽는기쁨 2003.09.1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白石)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오랫동안 `마가리`를 지명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오막살이를 뜻하는 북쪽 방언이..

시읽는기쁨 2003.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