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9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 - 귀천 / 천상병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자리가 컸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사랑이 지극했음을 압니다.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인품이 온화하고 따스했음을 압니다. 자식들에 대한 그 사랑을 어찌 버려두고 가실 수 있었나요? 다시 못 올 먼 길을 어찌 그리 빨리 재촉해 떠나셨나요? 남은 우리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그래도 당신은 행복했었다고 얘기합니다. 병고에무너져 내리는 당신을 보며 유약하다고 탓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당신..

시읽는기쁨 2004.10.19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니 작별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걸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 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말을 배우며 사세 -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어느덧 거리에는 가로수의 낙엽이쌓이고 있다. 지금 바라보는 창 밖으로 또 하나 빠알간 담쟁이 잎 하나가 아래로 떨어진다. 때가 되어서 어머니 품을 떠..

시읽는기쁨 2004.10.12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시읽는기쁨 2004.10.06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면서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 도로는 넓어지고 자동차는 더 커지고 많아지고, 지금은 특급열차가 아니라 초고속열차가 산하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며 날아간다.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그만큼 잘 살게 되었을까? 추석에 찾아가 본 농촌은 황폐한 속살을 그대로 드..

시읽는기쁨 2004.09.30

당나귀가 나는 좋아 / 프란시스 잠

물푸레나무 긴 울타리를 끼고 걸어가는 순한 당나귀가 나는 좋다. 당나귀는 꿀벌에 마음이 끌려 두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태워 주기도 하고 호밀이 가득 든 부대를 나르기도 한다. 당나귀는 수챗가에 가까이 이르면 버거정거리며 주춤 걸음으로 걸어간다. 내 사랑은 당나귀를 바보로 안다. 어쨌든 당나귀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당나귀는 언제나 생각에 젖어 있고 그 두 눈은 보드라운 비로드 빛이다. 마음씨 보드라운 나의 소녀야, 너는 당나귀만큼 보드랍지 못하다. 당나귀는 하느님 앞에 있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 닮아서 당나귀는 보드랍다. 당나귀는 피곤하여 가벼운 모양으로 외양간에 남아서 쉬고 있다. 그 가련한 작은 발은 피곤에 지쳐 있다. 당나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가 할 일을 모두 다했다. 그런데,..

시읽는기쁨 2004.09.20

기도 / 야마오 산세이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바다여 우리의 병든 몸과 마음을 고쳐 주셔요 그 깊고 푸른 호흡으로 우리를 고쳐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산이여 우리의 병든 욕망을 치유해 주셔요 그 깊고 푸른 호흡으로 우리를 치유해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강이여 우리의 병든 잠을 고쳐 주셔요 그 푸른 시냇물 소리로 편안한 잠자리를 되찾게 해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 내면에 있는 여래여 우리의 병든 과학을 고쳐 주셔요 모든 생명에 봉사하는 과학의 길을 찾아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나무여 우리의 침울해 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축복해 주셔요 그 곧게 선 푸른 모습에서 우리들도 또한 조용하고 깊게 곧게 설 수 있는 길을 배울 수 있게 해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바람이여 우리들의 ..

시읽는기쁨 2004.09.14

거미 / 이면우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 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시읽는기쁨 2004.09.11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 안도현

저 도시를 활보하는 인간들을 뽑아내고 거기에다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한다면 자작나무의 눈을 닮고 자작나무의 귀를 닮은 아이를 낳으리 봄이 오면 이마 위로 새 순 새록새록 돋고 가을이면 겨드랑이 아래로 가랑잎 우수수 지리 그런데 만약에 저 숲을 이룬 자작나무를 베어내고 거기에다 인간을 한 그루씩 옮겨 심는다면 지구가, 푸른 지구가 온통 공동묘지 되고 말겠지 -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 안도현 저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중에서 자작나무를 닮은 사람이 많아진다면 도시는 푸른 숲의 향기로 가득할 거야. 칙칙한 매연 대신에 신선한 산소가 거리를 감싸고 사람들은 이제 심호흡을 크게 할 거야. 잿빛 도시에 꽃이 피어나고, 예쁜 새들이 찾아와 노래할 거야. 사람들의 마음도 꽃처럼 환하게 피어나고,새들 따라서 ..

시읽는기쁨 2004.09.06

山中問答 / 조지훈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 아능가' '마당 가 멍석자리 쌉살개도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낚는 맛을 자네 太古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나간 사람 잘 되어 오는 놈 하나 없네 소원이 뭐가 있능고 해마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 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라일이나 잘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능가' 老人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뤄 주신다. '예 이 ..

시읽는기쁨 2004.08.31

용서받는 까닭 / 유안진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있고 들리지 않아도 소리내는 것이 있다 땅바닥을 기는 쇠비름나물 매미를 꿈꾸는 땅 속 굼벵이 작은 웅뎅이도 우주로 알고 사는 물벼룩 장구벌레 소금쟁이 같은 그것들이 떠받치는 이 지구 이 세상을 하늘은 오늘도 용서하신다 사람 아닌 그들이 살고 있어서 - 용서받는 까닭 / 유안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인간이 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진 인간족 말고 이 말에 동의할 생물은 없을 것 같다. 땅도 하늘도 침묵하고 있지만 가만히 눈 감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잘 살아 보자는 명분 아래 환경을 파괴하고 다른 생명을 멸종시키며 그러고도 당당하게 큰 소리만 치고 있다. 스스로의 묘혈을 파면서도 그걸 지혜로 착각하고 있다. 천성산의 도룡뇽이..

시읽는기쁨 2004.08.24

그 날이 오면 / 심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이 시를 읽으면 가슴이 뛴다. 영국의 한 비평가는 이 시를 세계..

시읽는기쁨 2004.08.15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짙은 먹구름..

시읽는기쁨 2004.07.27

걸어 보지 못한 길 / 프로스트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 먼저 길은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

시읽는기쁨 2004.07.13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사람들 틈에서 살지만 사람이 그립다. ..

시읽는기쁨 2004.06.29

더 먼저 더 오래 / 고정희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는 절망 중에 사..

시읽는기쁨 2004.06.17

경청 / 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이 시는 지난 달에 발표된 12회 공초문학상 수상작이다. 시어가 투박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도리어 편안하게 읽힌다. 무거운 주제를 부담감 없이 펼쳐 보이고 있다. 현대는 온갖 ..

시읽는기쁨 2004.06.08

천년의 바람 /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나무를 좋아하는 한 친구가 식물의 특징으로 단순함을 들면서 그 단순함이 자신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세상이 복잡해질 수록 우리는 단순함에서 구원의 빛을 본다. 천년 전의 바람은 지금도 똑 같이 불지만 지리하지 않고 늘 새롭다. 무위(無爲)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 것도 이루려는 마음이 없지만 모든 것을 다 이룬다. 길을 가다가 바람을 만나면, 그저 말없이 생각없이 맞기만 할 일이다. 쓸데..

시읽는기쁨 2004.06.03

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소리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이 시는 작년에 어느 분이 코멘트에 올려준 것이다. 이 시를 가사로 한 안치환의 노래도 있다고 하는데 귀뚜라미의 애절하고 외로운 울음이 고독한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아 누구에게나 공감이 갈..

시읽는기쁨 2004.05.22

날아라 버스야 / 정현종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에 꽃다발을 든 사람이 무려 두 사람이나 있다! 하나는 장미 - 여자 하나는 국화 - 남자 버스야 아무데로나 가거라. 꽃다발을 든 사람이 둘이나 된다. 그러니 아무데로나 가거라. 옳지 이륙을 하는구나! 날아라 버스야, 이륙을 하여 고도를 높여 가는 차체의 이 가벼움을 보아라. 날아라 버스야! 오래 전 일이지만 시내 버스가 노선을 벗어나 엉뚱한 길로 달려서 신문의 가십거리가 된 적이 있다. 그 때 운전 기사의 말이 재미있었다. "매일 똑 같은 길로만 다니려니 답답해서 아무데로나 자유롭게 막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시인의 상상력은 버스를 하늘로 날리고 있다. 버스 안에 꽃다발은 든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것도 유쾌한데, 그 버스는 땅에서 떠올라 하늘을 난..

시읽는기쁨 2004.05.14

갈대 / 마종기

바람 센 도로변이나 먼 강변에 사는 생각 없는 갈대들은 왜 키가 같을까. 몇 개만 키가 크면 바람에 머리 잘려나가고 몇 개만 작으면 햇살이 없어 말라버리고 죽는 것 쉽게 전염되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서로 머리 맞대고 같이 자라는 갈대. 긴 갈대는 겸손하게 머리 자주 숙이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같은 박자로 춤을 춘다. 항간의 나쁜 소문이야 허리 속에 감추고 동서남북 친구들과 같은 키로 키들거리며 서로 잡아주면서 같이 자는 갈대밭, 아, 갈대밭, 같이 늙고 싶은 상쾌한 잔치판. 산등성이의 나무들도그러하다. 고르게 키를 맞추며 자라는 모습이 꼭 전지를 해 놓은 것 같아 신기하게 느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들은 함께 살아나가는 지혜를 절로 터득하고 있는 셈이다. 그네들 세계에도 경쟁..

시읽는기쁨 2004.05.06

후손들에게 / 브레히트

참으로 나는 암울한 세대에 살고 있구나! 악의 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 하나 없는 이마는 그가 무감각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웃는 사람은 단지 그가 끔찍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줄뿐이다. 나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많은 범죄 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이냐! 저기 한적하게 길을 건너는 사람을 곤경에 빠진 그의 친구들은 아마 만날 수도 없겠지? 내가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믿어 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 (나의 행운이다 하면, 나도 끝장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

시읽는기쁨 2004.05.01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 이해인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작년에 대학로에서 이해인 수녀님을 만난 적이 있다. 친구의 소개로 잠깐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지만아직 소녀같은 얼굴과 편안하게 느껴지던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마음 비우기......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채우기보다는 비우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런 원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고 아름다운..

시읽는기쁨 2004.04.21

그랬다지요 / 김용택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꽃이 피고 지고, 새들이 울고, 그러면서 봄날은 간다. 꽃이 피고 지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새들이 우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는게 아니다. 인간의 눈을 위해 봄꽃이 화려하게 대지를 덮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귀를 위해 새들이 우는 것도 아니다. 하늘의 구름 모양에서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내 마음의 상상일 뿐, 구름은 그냥 구름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은 의미를 물으며 산다. 아무 대답이 없을지라도 그래도 의미를 묻는 사람은 행복하다. 존재의 이유를, 행위의 의..

시읽는기쁨 2004.04.09

春望 / 杜甫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천淚 恨別鳥驚心 峰火連三月 家書抵萬金 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나라는 깨져도 산하는 남고 옛성에 봄이 오니 초목은 우거졌네 시세를 설워하여 꽃에도 눈물짓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도 놀라네 봉화 석 달이나 끊이지 않아 만금같이 어려운 가족의 글월 긁자니 또 다시 짧아진 머리 이제는 비녀조차 못 꽂을래라 세상은 어지러워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온다. 작금의 정치적 사태를 보면 역사와 인간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쓰레기통에나 버려야 할지 모르겠다. 이젠 어느 누구든지 또는 어느 집단이든지 비난할 의욕도 없다. 다만 내 스스로가 슬프고 자괴감만 들 뿐이다. 이 시는 756년, 그의 나이 46세 때 杜甫가 안녹산의 반란군에 점령당한 장안에 남아 있으면서 지은 노래이다. 國..

시읽는기쁨 2004.03.14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다락방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

시읽는기쁨 2004.03.07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 네루다

어디에서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사는 것일까 어디에서 소금은 그 투명한 모습을 얻는 것일까 어디에서 석탄은 잠들었다가 검은 얼굴로 깨어나는가 젖먹이 꿀벌은 언제 꿀의 향기를 맨 처음 맡을까 소나무는 언제 자신이 향을 퍼뜨리기로 결심했을까 오렌지는 언제 태양과 같은 믿음을 배웠을까 연기들은 언제 공중을 나는 법을 배웠을까 뿌리들은 언제 서로 이야기를 나눌까 별들은 어떻게 물을 구할까 전갈은 어떻게 독을 품게 되었고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늘이 사라지는 곳은 어디일까 빗방울이 부르는 노래는 무슨 곡일까 새들은 어디에서 마지막 눈을 감을까 왜 나뭇잎은초록색일까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 먼지만도 못하고 짐작하는 것만이 산더미 같다 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 우리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 < 우리..

시읽는기쁨 2004.02.26

내 노동으로 / 신동문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그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가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제 맛도 모르면서 밤 새워 마시는 이 술버릇은 다 무엇인가 그리고 친구여 모두가 모두 창백한 얼굴로 명동에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을 만나는 쓸쓸한 이 습성은 다 무엇인가 절반을 더 살고도 절반을 다 못 깨친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미련을 되씹는 이 어리석음은 다 무엇인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 최근에 `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먹고`라는 책을 읽었다. 전희..

시읽는기쁨 2004.02.16

그 느티나무 아래로 가자 / 최옥

그랬지... 그곳엔 세월 가도 바래지 않을 풀빛 추억이 지금도 뛰어다니고 있는 걸 가위바위보에 터지던 웃음 소리 공기놀이에 지지 않던 해가 아직도 비추고 있는 걸 그랬지... 그 나무 아래서 먼 훗날 우리의 날들이 나무 그늘 밖의 저 햇살이길 소원하거나 꿈꾸지는 않았지만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추억을 두고 왔는 걸 한 방울 눈물없이 아름다웠던 내 여덟 살이 거기 있는 걸 다래끼집 몰래 지어두고 지켜볼 때 내 작은 몸을 온전히 숨겨주던 내 전부를 기대고 섰던 나무 한 그루 거기 있는 걸 밤 하늘에 토끼풀같던 별들이 만발해지면 그 때 그 아이들 하얀 풀꽃 따다 만든 꽃다발 오늘 밤도 내 목에 걸어주는 걸 유난히 날 좋아했던 첫 사랑 그 아이의 커다란 눈이 아직도 날 바라보고 있는 걸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의..

시읽는기쁨 2004.02.11

파장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서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켤레 또는 조기 한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옛날의 시골장은 농촌 사람들의 축제 마당 역할을 했다. 고된 농사일을 잠시 멎고, 폐쇄된 마을 문화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 소식을 나누고 인정을 나누던 공간이었다. 어릴 적 기억에도 장날이 되면 어머니는 새 옷을 곱게 입고 머리에는 뭔가를 ..

시읽는기쁨 2004.02.02

自祭文 / 陶淵明

바로크 시대라고 하는 유럽의 17세기에 삶을 바라보는 두 가지 대립되는 관점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즐기라)이고, 다른 하나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였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이런 삶의 양면성 문제는 존재해 왔을 것이고, 어느 관점이 우세하느냐에 따라 그 시대의 특징이드러날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관점을 택함에 따라 현실 중심적으로 되든지아니면 이상주의로 기울거나 종교적성향이 강해지기도 한다. 카르페 디엠은 삶을 긍정하지만 경박해지기 쉽고, 메멘토 모리는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은 좋으나 무겁고 음울해지기 쉽다.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는 오히려 메멘토 모리의 정신을 되살려야 하지 ..

시읽는기쁨 2004.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