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48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짙은 먹구름..

시읽는기쁨 2004.07.27

걸어 보지 못한 길 / 프로스트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 먼저 길은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

시읽는기쁨 2004.07.13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사람들 틈에서 살지만 사람이 그립다. ..

시읽는기쁨 2004.06.29

더 먼저 더 오래 / 고정희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는 절망 중에 사..

시읽는기쁨 2004.06.17

경청 / 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이 시는 지난 달에 발표된 12회 공초문학상 수상작이다. 시어가 투박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도리어 편안하게 읽힌다. 무거운 주제를 부담감 없이 펼쳐 보이고 있다. 현대는 온갖 ..

시읽는기쁨 2004.06.08

천년의 바람 /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나무를 좋아하는 한 친구가 식물의 특징으로 단순함을 들면서 그 단순함이 자신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세상이 복잡해질 수록 우리는 단순함에서 구원의 빛을 본다. 천년 전의 바람은 지금도 똑 같이 불지만 지리하지 않고 늘 새롭다. 무위(無爲)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 것도 이루려는 마음이 없지만 모든 것을 다 이룬다. 길을 가다가 바람을 만나면, 그저 말없이 생각없이 맞기만 할 일이다. 쓸데..

시읽는기쁨 2004.06.03

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소리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이 시는 작년에 어느 분이 코멘트에 올려준 것이다. 이 시를 가사로 한 안치환의 노래도 있다고 하는데 귀뚜라미의 애절하고 외로운 울음이 고독한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아 누구에게나 공감이 갈..

시읽는기쁨 2004.05.22

날아라 버스야 / 정현종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에 꽃다발을 든 사람이 무려 두 사람이나 있다! 하나는 장미 - 여자 하나는 국화 - 남자 버스야 아무데로나 가거라. 꽃다발을 든 사람이 둘이나 된다. 그러니 아무데로나 가거라. 옳지 이륙을 하는구나! 날아라 버스야, 이륙을 하여 고도를 높여 가는 차체의 이 가벼움을 보아라. 날아라 버스야! 오래 전 일이지만 시내 버스가 노선을 벗어나 엉뚱한 길로 달려서 신문의 가십거리가 된 적이 있다. 그 때 운전 기사의 말이 재미있었다. "매일 똑 같은 길로만 다니려니 답답해서 아무데로나 자유롭게 막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시인의 상상력은 버스를 하늘로 날리고 있다. 버스 안에 꽃다발은 든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것도 유쾌한데, 그 버스는 땅에서 떠올라 하늘을 난..

시읽는기쁨 2004.05.14

갈대 / 마종기

바람 센 도로변이나 먼 강변에 사는 생각 없는 갈대들은 왜 키가 같을까. 몇 개만 키가 크면 바람에 머리 잘려나가고 몇 개만 작으면 햇살이 없어 말라버리고 죽는 것 쉽게 전염되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서로 머리 맞대고 같이 자라는 갈대. 긴 갈대는 겸손하게 머리 자주 숙이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같은 박자로 춤을 춘다. 항간의 나쁜 소문이야 허리 속에 감추고 동서남북 친구들과 같은 키로 키들거리며 서로 잡아주면서 같이 자는 갈대밭, 아, 갈대밭, 같이 늙고 싶은 상쾌한 잔치판. 산등성이의 나무들도그러하다. 고르게 키를 맞추며 자라는 모습이 꼭 전지를 해 놓은 것 같아 신기하게 느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들은 함께 살아나가는 지혜를 절로 터득하고 있는 셈이다. 그네들 세계에도 경쟁..

시읽는기쁨 2004.05.06

후손들에게 / 브레히트

참으로 나는 암울한 세대에 살고 있구나! 악의 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 하나 없는 이마는 그가 무감각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웃는 사람은 단지 그가 끔찍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줄뿐이다. 나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많은 범죄 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이냐! 저기 한적하게 길을 건너는 사람을 곤경에 빠진 그의 친구들은 아마 만날 수도 없겠지? 내가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믿어 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 (나의 행운이다 하면, 나도 끝장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

시읽는기쁨 2004.05.01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 이해인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작년에 대학로에서 이해인 수녀님을 만난 적이 있다. 친구의 소개로 잠깐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지만아직 소녀같은 얼굴과 편안하게 느껴지던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마음 비우기......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채우기보다는 비우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런 원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고 아름다운..

시읽는기쁨 2004.04.21

그랬다지요 / 김용택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꽃이 피고 지고, 새들이 울고, 그러면서 봄날은 간다. 꽃이 피고 지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새들이 우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는게 아니다. 인간의 눈을 위해 봄꽃이 화려하게 대지를 덮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귀를 위해 새들이 우는 것도 아니다. 하늘의 구름 모양에서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내 마음의 상상일 뿐, 구름은 그냥 구름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은 의미를 물으며 산다. 아무 대답이 없을지라도 그래도 의미를 묻는 사람은 행복하다. 존재의 이유를, 행위의 의..

시읽는기쁨 2004.04.09

春望 / 杜甫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천淚 恨別鳥驚心 峰火連三月 家書抵萬金 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나라는 깨져도 산하는 남고 옛성에 봄이 오니 초목은 우거졌네 시세를 설워하여 꽃에도 눈물짓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도 놀라네 봉화 석 달이나 끊이지 않아 만금같이 어려운 가족의 글월 긁자니 또 다시 짧아진 머리 이제는 비녀조차 못 꽂을래라 세상은 어지러워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온다. 작금의 정치적 사태를 보면 역사와 인간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쓰레기통에나 버려야 할지 모르겠다. 이젠 어느 누구든지 또는 어느 집단이든지 비난할 의욕도 없다. 다만 내 스스로가 슬프고 자괴감만 들 뿐이다. 이 시는 756년, 그의 나이 46세 때 杜甫가 안녹산의 반란군에 점령당한 장안에 남아 있으면서 지은 노래이다. 國..

시읽는기쁨 2004.03.14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다락방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

시읽는기쁨 2004.03.07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 네루다

어디에서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사는 것일까 어디에서 소금은 그 투명한 모습을 얻는 것일까 어디에서 석탄은 잠들었다가 검은 얼굴로 깨어나는가 젖먹이 꿀벌은 언제 꿀의 향기를 맨 처음 맡을까 소나무는 언제 자신이 향을 퍼뜨리기로 결심했을까 오렌지는 언제 태양과 같은 믿음을 배웠을까 연기들은 언제 공중을 나는 법을 배웠을까 뿌리들은 언제 서로 이야기를 나눌까 별들은 어떻게 물을 구할까 전갈은 어떻게 독을 품게 되었고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늘이 사라지는 곳은 어디일까 빗방울이 부르는 노래는 무슨 곡일까 새들은 어디에서 마지막 눈을 감을까 왜 나뭇잎은초록색일까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 먼지만도 못하고 짐작하는 것만이 산더미 같다 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 우리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 < 우리..

시읽는기쁨 2004.02.26

내 노동으로 / 신동문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그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가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제 맛도 모르면서 밤 새워 마시는 이 술버릇은 다 무엇인가 그리고 친구여 모두가 모두 창백한 얼굴로 명동에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을 만나는 쓸쓸한 이 습성은 다 무엇인가 절반을 더 살고도 절반을 다 못 깨친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미련을 되씹는 이 어리석음은 다 무엇인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 최근에 `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먹고`라는 책을 읽었다. 전희..

시읽는기쁨 2004.02.16

그 느티나무 아래로 가자 / 최옥

그랬지... 그곳엔 세월 가도 바래지 않을 풀빛 추억이 지금도 뛰어다니고 있는 걸 가위바위보에 터지던 웃음 소리 공기놀이에 지지 않던 해가 아직도 비추고 있는 걸 그랬지... 그 나무 아래서 먼 훗날 우리의 날들이 나무 그늘 밖의 저 햇살이길 소원하거나 꿈꾸지는 않았지만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추억을 두고 왔는 걸 한 방울 눈물없이 아름다웠던 내 여덟 살이 거기 있는 걸 다래끼집 몰래 지어두고 지켜볼 때 내 작은 몸을 온전히 숨겨주던 내 전부를 기대고 섰던 나무 한 그루 거기 있는 걸 밤 하늘에 토끼풀같던 별들이 만발해지면 그 때 그 아이들 하얀 풀꽃 따다 만든 꽃다발 오늘 밤도 내 목에 걸어주는 걸 유난히 날 좋아했던 첫 사랑 그 아이의 커다란 눈이 아직도 날 바라보고 있는 걸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의..

시읽는기쁨 2004.02.11

파장 /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서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켤레 또는 조기 한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옛날의 시골장은 농촌 사람들의 축제 마당 역할을 했다. 고된 농사일을 잠시 멎고, 폐쇄된 마을 문화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 소식을 나누고 인정을 나누던 공간이었다. 어릴 적 기억에도 장날이 되면 어머니는 새 옷을 곱게 입고 머리에는 뭔가를 ..

시읽는기쁨 2004.02.02

自祭文 / 陶淵明

바로크 시대라고 하는 유럽의 17세기에 삶을 바라보는 두 가지 대립되는 관점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즐기라)이고, 다른 하나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였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이런 삶의 양면성 문제는 존재해 왔을 것이고, 어느 관점이 우세하느냐에 따라 그 시대의 특징이드러날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관점을 택함에 따라 현실 중심적으로 되든지아니면 이상주의로 기울거나 종교적성향이 강해지기도 한다. 카르페 디엠은 삶을 긍정하지만 경박해지기 쉽고, 메멘토 모리는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은 좋으나 무겁고 음울해지기 쉽다.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는 오히려 메멘토 모리의 정신을 되살려야 하지 ..

시읽는기쁨 2004.01.27

寒山詩

昔日極貧苦 夜夜數他寶 今日審思量 自家須營造 掘得一寶藏 純是水晶珠 大有碧眼胡 密擬買將去 余卽報渠言 此珠無價數 예전엔 가난하고 비참하였다 매일 밤 남의 보물 헤아렸었지 그러나 이제 깊이 생각한 끝에 모름지기 내 집을 짓기로 했네 땅을 파다가 감추어진 보물을 찾았지 뭔가 수정처럼 맑디 맑은 진주라네 푸른 눈의 서역 장사치들이 앞다퉈 이 진주를 사려 하길래 내 그들에게 웃으며 말했지 이 진주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라고 寒山은 8세기 부근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전설적인 隱者이다. 일설에는 형제들과 땅을 경작하며 살았으나, 모든 緣을 끊고 아내와 가족과도 헤어져 각처를 방랑하다가 寒山에 은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것을 발견하려는 신비적 충동에 이끌렸..

시읽는기쁨 2004.01.14

꿈 / 서홍관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지 논두렁 개울가에 진종일 쪼그리고 앉아 밥 먹으라는 고함 소리도 잊어먹고 개울 위로 떠가는 지푸라기만 바라보는 열 다섯 살 소년이 되어보는 중학교 때 교장 선생님은 월요일 아침 조회 시간이면 웅변조로 자주 강조하셨다. "Boys, Be ambitious!" 다른 얘기도 많이 하셨을 텐데, 시간은 모든 걸 걸러내고 오직 하나만 남겨 놓았다. "야망을 가져라!" 스피커를 통해 찌렁 찌렁 울리던 그 소리는 늘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당시의 나는 야망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던 시골뜨기였다. 그리고 이상하게 별로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또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나 희망도 대부분 낯 설었다. 내 능력 밖인 것 같았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무엇이 ..

시읽는기쁨 2003.12.23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 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그 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그래도 인생은 고단하고 쓸쓸하고 힘들다. 지금 이 자리가 꽃봉오리임을 알아채기엔 내 눈은 가려져 있고 귀는 멀었다. 그러나 어떤 아픔일지라도 지나고 보면, 내곁을 떠나 사라진 것들은 아득한 그리움만 남긴다. 나는 왜 늘상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일까? 지나고 나서야 후회하는 것일까? 더 사랑하..

시읽는기쁨 2003.12.18

유안진의 詩 두 편

슬퍼지는 날에는 어른들아 어른들아 아이로 돌아가자 별똥 떨어져 그리운 그곳으로 가자 간밤에 떨어진 별똥 주우러 가자 사랑도 욕스러워 외로운 날에는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물어보자 개울가의 미나리아재비 물봉숭아 여린 꽃이 산기슭의 패랭이 엉겅퀴 산난초가 어째서 별똥 떨어진 그 자리에만 피는가를 어른들아 어리석은 어른들아 사는 일이 참말로 엄청 힘들거든 작고도 단순하게 경영할 줄도 알아야지 작아서 아이같은 고향 마을로 가서 밤마다 떨어지는 별똥이나 생각다가 엄마 누나 무릎 베고 멍석자리 잠이 들면 수모도 치욕도 패배도 좌절도 횃불꼬리 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 찬란한 별똥별이 되어주지 않을꺼나 문득 너무 오래 사람이었구나 아장걸음 걸어오는 새벽 봄비에 미리..

시읽는기쁨 2003.12.12

작은 사내들 / 김광규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나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

시읽는기쁨 2003.12.02

순수를 꿈꾸며 / 블레이크

한 알의 모래알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의 손바닥 안에 무한이 있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 하며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쫓기는 토끼의 울음 소리는 우리의 머리를 찢는다. 종달새가 날개에 상처를 입으면 아기 천사는 노래를 멈추고....... -- W. Blake / Auguries of Innocence 중에서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A robin redbreast i..

시읽는기쁨 2003.11.24

낙엽 / 구르몽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떨어져 땅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리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 낙엽, 구르몽(R. Gurmon) 아침에 흐린 하늘이 낮이 되면서 개이더니 지금은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이런 날은 하던 일..

시읽는기쁨 2003.11.19

My heart leaps up / Wordsworth

하늘의 무지개 바라보면 내 가슴 뛰노라. 내 삶이 시작될 때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니 늙어서도 그러하리라. 아니라면 죽음만도 못하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컨대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자연에 대한 경애로 이어지기를.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 My heart le..

시읽는기쁨 2003.11.11

너와집 한 채 /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베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플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

시읽는기쁨 2003.11.06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이 남아있을까 / 이시영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이 남아 있을까 이 시영 중학 1학년 새벽밥 일찍 먹고 한 손엔 책가방 한 손엔 영어 단어장 들고 가름젱이 콩밭 사잇길로 시오리를 가로질러 읍내 중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에 함뿍 젖은 아랫도리가 모락모락 흰 김을 뿜으며 반짝이던 간혹 거기까지 잘못 따라온 콩밭 이슬 머금은 작은 청개구리가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팔짝 튀어 달아나던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을 다시 한번 걸을 수 있을까 과거는 아름답다? 하물며 어린 시절의 추억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나이 탓인가, 계절 탓인가 요즘은 옛날 생각이 자주 난다. 오늘 만난 이 시도 내 마음을 울린다. 나도 이십리 길을 걸어 읍내 중학교에 다녔다. 합승이라고 불렀던 작은 버스가 다녔지만 시골 아이들 대부분은..

시읽는기쁨 2003.11.01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 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 그녀는 시대의 고통에 같이 아파한 시인이었다. 그런데 아깝게도 40대 초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시읽는기쁨 2003.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