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48

줄탁 / 이정록

어미의 부리가 닿는 곳마다 별이 뜬다 한 번에 깨지는 알 껍질이 있겠는가 밤하늘엔 나를 꺼내려는 어미의 빗나간 부리질이 있다 반짝, 먼 나라의 별빛이 젖은 내 눈을 친다 - 줄탁 / 이정록 줄탁동기(줄啄同機)란 말이 있다. 줄(口+卒)이란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말하고, 탁(啄)이란 알 속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어미닭이 밖에서 껍질을 쪼아 깨뜨려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줄탁동기란 스승이 제자의 노력이나 역량을 알아채리고 바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관계를 이르는 아름다운 말이다. 이 시는 별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특이해서 절로 경탄이 난다. 우주는 하나의 알이 되고, 나를 꺼내려는 어미의 부리질이 반짝하며 별빛으로 빛나고 있다. 언젠가 저 틈 너머 빛의 세계로 ..

시읽는기쁨 2006.03.28

늪 / 오태환

다슬기 다슬다슬 물풀을 갉고 난 뒤 젖몽우리 생겨 젖앓이하듯 하얀 연蓮몽우리 두근두근 돋고 난 뒤 소금쟁이 한 쌍 가갸거겨 가갸거겨 순 초서草書로 물낯을 쓰고 난 뒤 아침날빛도 따라서 반짝반짝 물낯을 쓰고 난 뒤 검정물방개 뒷다리를 저어 화살촉같이 쏘고 난 뒤 그 옆에 짚오리 같은 게아재비가 아재비아재비 하며 부들 틈새에 서리고 난 뒤 물장군도 물자라도 지네들끼리 물비린내 자글자글 산란産卵하고 난 뒤 버들치도 올챙이도 요리조리 아가미 발딱이며 해찰하고 난 뒤 명주실잠자리 대롱대롱 교미交尾하고 난 뒤 해무리 환하게 걸고 해무리처럼 교미交尾하고 난 뒤 기슭어귀 물달개비 물빛 꽃잎들이 떼로 찌끌어지고 난 뒤 나전螺銓같은 풀이슬 한 방울 퐁당! 떨어져 맨하늘이 부르르르 소름끼치고 난 뒤 민숭달팽이 함초롬히 털며..

시읽는기쁨 2006.03.20

숲 / 정희성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 숲 / 정희성 도시의 나무들은 '더불어 숲'을 이루지 못한다. 아니, 숲을 이루지 못하는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다. 광화문 지하도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은 메마른 사막의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소리만 낸다.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시읽는기쁨 2006.03.16

마흔 살의 동화 / 이기철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부는 바람 따라 길 떠나겠네 가다가 찔레꽃 향기라도 스며오면 들판이든지 진흙 땅이든지 그 자리에 서까래 없는 띠집을 짓겠네 거기에서 어쩌다 아지랑이 같은 여자 만나면 그 여자와 푸성귀 같은 사랑 나누겠네 푸성귀 같은 사랑 익어서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같이 잠들면 나는 햇볕 아래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겠네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내 가진 부질없는 이름, 부질없는 조바심 흔들리는 의자, 아파트 문과 복도마다 사용되는 다섯 개의 열쇠를 버리겠네 발은 수채물에 담겨도 머리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겠네 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놀 아래 울음 남기고 죽은 노루는 아름답네 숫노루 만나면 등성이서라도 새끼 배고 젖은 아랫도리 말리지 않고도 푸른 잎 속에 스스로 뼈를..

시읽는기쁨 2006.03.07

기도 / 십자가의 성요한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보다 맛있는 것보다 보다 맛없는 것을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쉬운 일보다도 고된 일을 위로되는 일보다도 위로 없는 일을 보다 큰 것보다도 보다 작은 것을 보다 높고 값진 것보다 보다 낮고 값없는 것을 무엇을 바라기보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기를 세상의 보다 나은 것을 찾기보다 보다 못한 것을 찾아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 벗고, 비고, 없는 몸 되기를 바라라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

시읽는기쁨 2006.03.0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 백창우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 나비처럼, 딱새의 고운 깃털처럼 가벼워져 모든 길 위를 소리 없이 날아다녔으면 좋겠다 내 안에 뭐가 있기에 나는 이렇게 무거운가 버릴 것 다 버리고 나면 잊을 것 다 잊고 나면 나 가벼워질까 아무 때나 혼자 길을 나설 수 있을까 사는 게 고단하다 내가 무겁기 때문이다 내가 한 걸음 내 디디면 세상은 두 걸음 달아난다 부지런히 달려가도 따라잡지 못 한다 다 내가 무겁기 때문이다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 안개처럼, 바람의 낮은 노래처럼 가벼워져 길이 끝나는 데까지 가 봤으면 좋겠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 백창우 무겁다. 마음 속에 큰 바위덩이 하나 들어있는 듯 사는 게 무겁다. 무슨 욕심이나 바람, 원망이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가벼워지고 싶다. 나비처럼, 안개처럼,..

시읽는기쁨 2006.02.21

산머루 / 고형렬

강원도 부론면 어디쯤 멀리 가서 서울의 미운 사람들이 그리워졌으면 옛날 서울을 처음 올 때처럼 보고 싶었던 사람들, 그 이름들 어느새 이렇게 미워지고 늙었다 다시 진부 어디쯤 멀리 떨어져 살아 미워진 사람들 다시 보고 싶게 시기와 욕심조차 아름다워졌으면 가뭄 끝에 펑펑 쏟아지는 눈처럼 서울 어느 밤의 특설령처럼 못 견디게 그리운 사랑이 되었으면 그러나 우린 모두 사라질 것이다 - 산머루 / 고형렬 멀리 떨어져야 사람이 그리워질까? 사람이 그립기 보다는 싫고 밉고, 그래서 만나지 않았으면 싶을 때가 많다. 서울이라는 장소도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서울에 가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이젠 이놈의 장소도 싫다. 어느새 이렇게 미워지고 늙었다. 그러나 이런 애증이라는물건은 다 무엇인가? 못 견디게 그리운 것은 무엇이고..

시읽는기쁨 2006.02.16

일체감 / 신현정

눈이 내리면서 먼저 내리면서 뒤에 내리면서 먼저 내리는 눈이 뒤에 내리는 눈을 사뿐히 받아주기도 하면서 먼저 내리는 눈이 뒤에 내리는 눈을 무동을 태워 세상구경도 시켜주어가면서 먼저 내리면서 뒤에 내리면서 마음을 포개면서 궁극적으로 세상을 덮으면서 한 이불 속을 만드누나 - 일체감 / 신현정 따스하고 평화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시다. 먼저 내리는 눈이 뒤에 내리는 눈을 태워주고 이끌어주면서 세상을 한 이불로 덮는다.더 앞서 가려고 눈송이는 좌충우돌 가속도를 내지 않는다. 덩치 큰 녀석이나 작은 녀석이나 함께 고요히 떨어지고 있다. 이건 단순히 눈 내리는 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희망의 인간 세상을 말하고 있다. 한 이불 속에 든다는 것은 시의 제목처럼 일체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사..

시읽는기쁨 2006.02.05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어지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하고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깎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게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매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

시읽는기쁨 2006.01.31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 정희성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 사러 왔냐고 우리 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 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 정희성 가끔은 이런 명랑시를 읽으며 빙긋 웃고 싶다. 성(性)과 성(聖)은 원래 한 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태초에는 그 어떤 구별도없었으리라.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면서 성(性)은 부끄럽고 은밀한 것으로 변했다. 이제 다시 낙원으로 돌아가려는지 성(性)은 개방되고 상품화되어 여기저기서 흘러 넘친다. 너무 많은 정보와 과도한 드러냄의 문제점은 성(性)..

시읽는기쁨 2006.01.24

사람의 일 / 천양희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고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 사람의 일 / 천양희 그렇다. 모두가 다 사람의 일이다. 사람 때문에 아파하고, 그 사람으로 인하여 희망이 생긴다.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해진다. 오늘이 그렇고, 내일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시읽는기쁨 2006.01.18

무지개를 사랑한 걸 / 허영자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것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 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 무지개를 사랑한 걸 / 허영자 집을 떠나 무지개를 따라 나섰지. 어느 날 무지개는 사라지고, 나는 저녁 빈 들판에 홀로 남게 되었네. 사람들의 마을은 멀고, 빈 들의 바람은 차갑기만 하네. 그러나 먼 땅 위로 외로운 별 하나 떠오르고, 어두운 길에서는 낯 선친구를 만날지도 모르리. 무지개를 사랑한 걸 결코 후회하지는 않으리....

시읽는기쁨 2006.01.13

그리움 /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그리움 / 유치환 '그리움'은 허기진 땅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이다. 그 무엇을 그리워 하는 마음은 아름답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그리워 하고,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 하고, 가고 싶은 저 피안의 땅을 그리워 한다. 모든 그리움의 대상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의 표상이다. 그리움을 아름답다고 했지만 동시에 그리움은 한없이 아프기도 하다. 욕망이 충족되어도 그리움은 남는다. 올해는 나에게 그리움의 한 해가 될 것 같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누구든, 마음 속으로 아름답게 아프게 그리워 해야 할 것 같다.

시읽는기쁨 2006.01.05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다시 새해 첫날이 열렸다. 어제의 아쉬움이 오늘은 기대와 설레임으로 변했다. 날든, 뛰든, 아님 앉은 채 그대로든 모든 존재들에게 새해 첫날은 기적처럼 똑 같이 주어졌다. 여기엔 잘난 이, 못난 이의 차별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매일매일이 첫날처럼 설레임과 경이로 가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의 축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잔뜩 흐린 날씨처럼 오늘 우리 집엔 무겁게 저기압이 드리워져 있다. 새벽 꿈자리마저 뒤숭숭하더니 아침 밥상 자리 작은 데서 일이 터졌다. 하필 새해 첫날에..... (그런데 이 시에서 재미있는 점은 가만히 ..

시읽는기쁨 2006.01.01

너도 그렇다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은 자세히 볼 수록 예쁘다. 꽃에 얼굴을 갖다댈 수록 향기는 진해기고, 숨어있는 작은 아름다움도 발견하게 된다. 풀꽃은 멀리서 보아도 예쁘고, 가까이서 보면 더 예쁘다. 사람을 꽃에 비유하지만, 솔직히 사람은 적당히 떨어져 있을 때가 제일 아름답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거나 오랫동안 옆에 있으면 첫 아름다움마저 잃어버리는 경우가 흔하다. 어떨 때는 악취가 나기도 한다. 그것은 그 사람에 원인이 있기 보다는 그 사람에 대해 품었던 내 환상 탓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풀꽃은 인간의 환상에 대해서 조차 배반하지는 않는다. 다가갈 수록 향기가 나는 사람, 오래 옆에 있어도 물리지 않고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는 사람 - 야생의 풀꽃..

시읽는기쁨 2005.12.26

박달재 아이들 / 김시천

성배는 흔히 하는 말로 지진아다 성배의 평균 점수는 대개 20점 미만이다 그래도 성배는 제 답안지에 번호 이름을 꼬박꼬박 적어서 내고 0점을 받아도 남의 걸 훔쳐 쓰진 않는다 가끔, 보다 못한 감독선생님이 슬그머니 답을 알려 주어도 성배는 결코 그 답을 받아 쓰는 일이 없다 그냥 틀리고 만다 그런 성배 녀석이 좋다 공부 못한다고 아무도 성배를 나무라지 않는다 애시당초 시험 점수하고 성배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두들 성배의 착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착하고 정직하게 사는 일 말고 우리가 그렇게 기를 쓰며 배워야 할 게 또 무어란 말인가 성배의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착하고 정직한 성배의 눈을 볼 때마다 세상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착하고 정직하게 사는 일 말고 진정 우리에게 중요..

시읽는기쁨 2005.12.20

어릴 때 내 꿈은 / 도종환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 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님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 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 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시읽는기쁨 2005.12.16

성가족 / 임영조

어디서 쫓겨온 일가족일까 아파트 단지 높다란 굴뚝 꼭대기 피뢰침 바로 아래 짓다버린 까치집 언제부턴가 올망졸망 새끼들 딸린 가난한 까치부부가 세들어 산다 비바람치고 천둥소리 거친 날이면 보채는 새끼들을 품고 잠든 부부는 스스로 집이 된다 요람이 된다 남루도 때때로 행복이 되는 하늘 가장 가까운 성가족(聖家族)이 산다 - 성가족 / 임영조 '남루도 때때로 행복이 되는' - 이 구절을 읽으면 가슴이 찡해진다. 요즈음 같은 풍요의 시대에, 그리고 그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시대에, '남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게 된다. 대림 3주일이다. 가장 낮은, 가장 남루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의 진정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다시 서울 시청 앞에는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가 휘황찬란하게 번쩍이고,세종..

시읽는기쁨 2005.12.11

장선리 / 양문규

마당 한가운데 너럭바위 있다 댓돌 위 검정 고무신 있다 마루 한쪽 맷돌 확독 있다 뒤뜰 크고 작은 독 있다 외양간 코뚜레한 소 있다 사랑채 흙벽 종다래끼 뒤웅박 키 호돌이 삼태기 있다 뒷간 똥장군 똥바가지 있다 정짓간 쇠솥 있다 조왕신 절구통 절굿공이 있다 헛간 벽 쇠스랑 갱이 갈쿠리 걸려 있다 도리깨 홀태 족답식 탈곡기 있다 쟁기 지게에 얹혀 있다 닭장 닭둥우리 있다 개울 나무다리 놓여 있다 뒷산 서낭당 있다 상엿집 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흑백사진 속의 풍경처럼 천태산 남고개 너머 더 깊은 골짝 장선리 - 장선리 / 양문규 30년 전쯤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처음 읽었을 때 정보, 지식 혁명에 대한 개념들은 무척 낯설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제3의 물결이 단순한 물결이 아니라 쓰나미가 ..

시읽는기쁨 2005.12.07

우리도 쿠바의 새들처럼 / 서정홍

쿠바에는 새들도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더라 쿠바에는 개들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더라 해치지 않을 줄 알기 때문이다 길가에 서 있는 옥수수도 골목마다 핀 노란 해바라기도 잔디밭에 누워서 까닭 없이 하늘을 쳐다보는 학생들도 훤한 대낮, 길거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애인을 안고 있는 젊은 경찰도 모두 자유롭고 행복하게 보이더라 '저렇게 살갗이 검을 수가 있을까' 싶은 아가씨와 '저렇게 살갗이 하얄 수가 있을까' 싶은 사내가 팔짱을 끼고 걸어가더라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허름한 집을 보고 그들이 입고 다니는 낡은 옷을 보고 가난하다고 말한다. 못 산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아무런 조건도 갖추지 않았는데도 행복한 사람이 있..

시읽는기쁨 2005.12.01

다시 남자를 위하여 / 문정희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 싱싱하게 몸부림치는 가물치처럼 온 몸을 던져오는 거대한 파도를 몰래 숨어 해치우는 누우렇고 나약한 잡 것들 뿐 눈에 띌까 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 뿐 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 여권 운동가들이 저지른 일 중에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세상에서 멋진 잡놈들을 추방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핑계 대기 쉬운 말로 산업사회 탓인가 그들의 빛나는 이빨을 뽑아 내고 그들의 거친 머리칼을 솎아 내고 그들의 발에 제지의 쇠고리를 채워버린 것은 누구인가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여자들은 누구나 마음 속 깊이 야성의 사나이를 만나고 싶어하는 걸 갈증처럼 바람둥이에 휘말려 한 평생을 던져버리고 싶은 걸 안토니우스 시저 그리고 안록산에게 무너진 현종을 봐 그뿐인가 나폴레옹 너는 뭐며 심지어 돈..

시읽는기쁨 2005.11.25

神은 망했다 / 이갑수

神은 시골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회를 건설했다 神은 망했다 - 神은 망했다 / 이갑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런 말씀을 내린 神은 아마 지금쯤은 크게 후회하고 있으실지 모른다. 神의 명령에 충실한 아담의 후예들이 번성하고(60년대에 30억이던 인구가 지금은 60억을 넘었고 50년 뒤에는 100억이 될 거라고 한다), 정복하고(남북극 어떤 극한지에도 인간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다스리면서(다른 종에게 인간은 무자비한 폭군이며 인간에 의한 멸종이 자연 멸종률의 근 1천배에 달한다), 지구마을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되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넜는지 神도 침묵만 하신다. '神은 ..

시읽는기쁨 2005.11.17

난 발바닥으로 / 문익환

하느님 이 눈을 후벼 빼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이 고막을 뚫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이 입을 봉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이 목을 날려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할 겁니다 도끼로 이 손목을 찍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풍물을 울릴겁니다 창을 들어 이 심장을 찔러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사랑을 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발바닥에 불질러보시라구요 젠장 난 발바닥 자죽만으로 남아 길가의 풀포기들하고나 사랑을 속삭일 겁니다 - 난 발바닥으로 / 문익환 늦봄 문익환 목사님(1918-1994). 목사님은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셨다.목사님은 장준하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민주화 운..

시읽는기쁨 2005.11.11

自歎 / 田萬種

聞古仁無敵 看今義亦嗤 富榮貪益顯 貧賤是爲非 天意豈能度 人精未易知 山深水綠處 早晩不如歸 - 自歎 / 田萬種 예부터 인자무적(仁者無敵) 들어왔건만 요즘 보니 의로워도 비웃음 당해 부유하고 영화로우면 탐욕 더욱 드러나고 가난하고 천하면 옳은 것도 그르게 되네 하늘의 뜻 어찌 헤아리랴마는 사람의 마음 쉽게 알기 어려워라 산 깊고 물 푸른 곳으로 조만간 돌아가는 게 낫겠네 예로부터 사람 마음을 일촌심(一寸心)이라고 불렀다. 한 치 작은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한 치밖에 안되는 마음 알기가 천의(天意)를 터득하기만큼이나 어렵다. 마음 속 휘몰아치는 폭풍에 비틀대기도 하고, 음침한 기운에 질식 당하기도 한다. 어떤 날은 마음 속에서 돋아난 바늘이 나를 찌르고, 상대방을 향해 무수히 날아가기도 한다. 이럴 때는..

시읽는기쁨 2005.11.08

행복 / 박세현

오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뉴스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초창기 일화다 나는 그 시대에 감히 행복이란 말을 적어넣는다 - 행복 / 박세현 정말 이런 시절이 있었을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만큼이나 지금은 황당하게 들린다. 그러나 요사이 쉴새없이 쏟아지는 뉴스의 내용이란 걸 살펴보면 왜 시인이 그 시대를 행복이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시는 노장사상의 '무위(無爲)'를 떠올린다. 세상은 점점 유위(有爲)로넘쳐나고, 그 속에서 무위의 삶이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사람들은 예전에 비해 결코 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개인의 행복은 사회 체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뉴스가 없는 세상은 불가능할까? 뉴스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사..

시읽는기쁨 2005.11.04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난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

시읽는기쁨 2005.10.28

아버지 / 윤재철

뇌졸증으로 쓰러져 의식이 점차 혼미해지면서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기셨다 거기서 아버지는 몸부림치며 집으로 가자고 소리쳤다 링거 주삿바늘이 뽑히고 오줌주머니가 떨어졌다 남자 보조원이 아버지의 사지를 침대 네 귀퉁이에 묶어버렸다 나중에는 의식이 없어 아무 말도 못하면서 짐승처럼 몸부림만 쳤다 팔목이며 발목이 벗겨지도록 집으로 가자고 고향도 아니었다 집이나마나 창신동 골목길 셋방이었다 - 아버지 / 윤재철 작년 가을, 장인 어른이 돌아가셨다. 병원을 오가며 암 치료를 받으시다가 생의 마지막 날들은 집에서 보내셨다. 당신의 소원대로 당신의 방, 당신의 침대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셨다. 임종을 지켜본 모두들 평안한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만약 병원에 있었더라면 목에 구멍을 뚫고 호스를 꽂..

시읽는기쁨 2005.10.24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 채호기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넌다 베지 않은 키 큰 옥수수나무가 서 있고 누렁 빛 들판에는 풍성한 예감이 있다 먼데 산이 선명하다 형은 펌프 옆에서 양말을 빨고 하, 참 이 가을엔 햇빛의 뼛속까지 보이는구나 -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 채호기 사무실 앞 가을 햇살 따스한 곳에서 동료들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뭘 하고 있느냐며 짐짓 물으니 광합성을 하고 있는 중이란다. 그 대답이 일품이다. 가을은 이 햇살과 하늘만으로도 더없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계절이다. 햇살은 투명하고, 하늘은 맑고, 대기는 청명하다. 이런 날은 인공 조명의 사무실을 벗어나 맑은 햇살 아래서 식물성 광합성이라도 하고 싶다. 모든 동물성 욕망은 잠재우고 저 맑고 투명한 햇살로 내 몸과 마음을 씻어내고 싶다. 표현 하나 때문에 특별..

시읽는기쁨 2005.10.17

계란 한 판 / 고영민

대낮, 골방에 처박혀 시를 쓰다가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계란.....(짧은 침묵) 계란 한 판.....(긴 침묵)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침묵).....계란 한 판 이게 전부인데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계란, 한 번 치고 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 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 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 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 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 계란, 하고 친다 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귀를 잡아당긴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친다 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 계란 한 판의 리듬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 계란 한판 / 고영민 장일순 선생님의 일화에 이런 게 있다. 선생님의 글씨도 탈속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을 받고 있는데..

시읽는기쁨 2005.10.11

Job 뉴스 / 장정일

봄날 나무벤치 위에 우두커니 앉아 를 본다 왜 푸른하늘 흰구름을 보며 휘파람 부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호수의 비단잉어에게 도시락을 덜어 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소풍온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놀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비둘기떼의 종종걸음을 가만히 따라가 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뭇잎 사이로 저며드는 햇빛에 눈을 상하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무벤치에 길게 다리 뻗고 누워 수염을 기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이런 것들이 40억 인류의 Job이 될 수는 없을까? - Job 뉴스 / 장정일 개미나 꿀벌을 찬양하던 시대가 있었다. 사실 지금도 인간의 고군분투란 Job을 얻기 위한, 또는 더 나은 Job을 차지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시읽는기쁨 2005.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