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48

야생 / 백무산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야생의 들짐승 야생의 날짐승 그리고 야생의 여자 야생의 수생짐승 그들을 안아볼 때마다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어두운 밤길에서 만나는 산짐승의사나운 눈빛도 밤의 숲 속 짐승들의 거친 교미도 저들끼리 싸워 피 흘릴 때도 나무들이 뿜어대는 뜨거운 열기인 양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저들은 분리되지 않은 그리고 분화도지 않은 무수한 촉수와 날카로운 긴장의 그물을 가졌다 대상과도 자신의 몸과도 동물은 사람뿐이다 - 야생 / 백무산 그래 그래 하며 술술 읽히던 시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뒤통수를 친다 - '동물은 사람뿐이다'. 시인은 식물과 동물로 나누는 대신에 식물성이란 표현을 쓴다. 식물성이란 분리되지 않은, 분화되지 않은 자연과 하나된 상태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것은 자연..

시읽는기쁨 2005.03.01

연탄 한 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어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연탄 한 장 /안도현 날이 다시 추워졌다. 서울 기온이 영하 9도까지 떨어..

시읽는기쁨 2005.02.20

빗소리 / 주요한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날 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 빗소리 / 주요한 겨울비가 내린다. 멀리서 올라오고 있는 봄을 재촉하듯 조용 조용히 겨울비가 내린다. 비에 젖고 있는 도시의 밤 풍경에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친구는 비가 올 때면자주 이 시를 읊었다. 얼마나 들었는지 나중에는 나도 외우게 되었다. 뒤에 친구가 이 시를 좋아하게 된 사연을 듣고는 실소하게 되었지만.....

시읽는기쁨 2005.02.15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서시 / 윤동주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이 한 구절에는 사람의 영혼을 뒤흔드는 마력이 숨어있다. 그러나 젊었던 날과 달리 지금은 '괴로와했다' '죽어가는 것' '사랑' 같은 말들에 더욱 마음이 끌린다. 부끄럼 없는 삶이 거저 주어지지도 않거니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나이이다. 허나 이런 초월적인 삶을 꿈꾸는 것으로 나는 살고 있다. 내 영혼의 자양분은 거기서 나온다. 맑고 따스한 별빛이 비추인다.

시읽는기쁨 2005.02.14

귀농 / 백석

백구둔의 눈 녹이는 밭 가운데 땅 풀리는 밭 가운데 촌부자 노왕하고 같이 서서 밭최뚝에 즘부러진 땅버들의 버들개지 피여나는 데서 볕은 장글장글 따사롭고 바람은 솔솔 보드라운데 나는 땅임자 노왕한테 석상디기 밭을 얻는다 노왕은 집에 말과 나귀며 오리에 닭도 우글거리고 고방에 그득히 감자에 콩곡석도 들여 쌓이고 노왕은 채매에 힘이 들고 하루종일 백령조 소리나 들으려고 밭은 오늘 나한테 주는 것이고 나는 이젠 귀치 않은 측량도 문서도 싫증이 나고 낮에는 마음놓고 낮잠도 한잠 자고 싶어서 아전 노릇을 그만두고 밭을 노왕한테 얻는 것이다 날은 챙챙 좋기도 좋은데 눈도 녹으며 술렁거리고 버들도 잎트며 수선거리고 저 한쪽 마을에는 마돗에 닭 개 즘생도 들떠들고 또 아이 어른 행길에 뜨락에 사람도 웅성웅성 흥성거려 나..

시읽는기쁨 2005.02.04

긍정적인 밥 / 함민복

시 한 편에 삼 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 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에 따뜻하게 덮어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멀기만 하네 시집 한 권 팔리면 내게 삼 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긍정적인 밥 / 함민복 어른이 된다는 것은 거래에 익숙해 지면서경제적 가치로 물건을 판단하는데 길들여 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삭막한 자본주의 체제라도 정말로 소중한 것은 계량화될 수 없는 것들이다. 정, 신뢰, 사랑을 돈을 주고 살 수는 없다. 세상이 매겨놓은 금전적 가치보다는 숨어있는 사물..

시읽는기쁨 2005.01.29

여행자를 위한 서시 / 류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 가리라 한 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 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

시읽는기쁨 2005.01.17

마음 / 유안진

그릇아 세상을 담아낼 만치 커질 수도 있고 자살밖에 도리없어 작을 수도 있는 마음아 눈꼴시어 못 보겠던 남의 인생도 내 것처럼 우는 이와 같이 울고 웃는 이와 같이 웃자 대문에 이마에 앞가슴에 '헌 나는 없어졌음' 이런 문패 하나 내걸고 싶어 빈 그릇처럼 나머지가 없는 찌꺼기도 없는 - 마음 / 유안진 마음은 요술쟁이다. 전 우주를 품을 만큼 넉넉해지기도 하고, 바늘 하나 꽂을 수 없을 만큼 옹졸해지기도 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이런 변덕을 겪는다. 점수(漸修) 뒤에 돈오(頓悟)는 과연 찾아오는 것일까?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과연 얼마 만큼의 영적인 진보를 할 수 있을까? 같은 돌부리에 반복해서 똑 같이 넘어지며 나는 늘 제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다. 인생 학교에서 나는 우둔한 학생임을 고백하지..

시읽는기쁨 2005.01.10

새 아침의 기도 / 조창환

새 아침에 꽃씨 하나 받게 하소서 작고 단단한 꽃씨 어루만질 때 씨앗 한 점에 우주가 담긴 그 신비, 느끼게 하소서 꽃나무 모종 하나 가슴에 품고 새봄 맞게 하소서 꽃나무 모종 하나 뜨락에 심고 실비 내리는 새벽 바라보게 하소서 햇빛 이글거리는 날 뜨거운 바람 번득일 때 백일홍, 채송화, 과꽃, 접시꽃.... 사람의 마을에 붉은 꽃 가득 넘쳐 그 꽃밭에서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마침내 산그늘 홀로 무거워지고 사람의 마을에 가을이 오면 그늘 속에 맑은 열매 줍게 하소서 흐린 하늘과 차가운 바람 속에 저희가 너무 오래 떨었사오며 거친 말, 욕된 날, 무서운 밤을 저희가 너무 오래 겪었사오니 새 아침에 단단한 꽃씨 한 점 내려 주시어 거기서 실비 내리는 새벽과 이들거리는 사랑 보게 하시고 그늘 속에 맑은 열매 ..

시읽는기쁨 2005.01.01

12월 / 정호승

하모니카를 불며 지하철을 떠돌던 한 시각장애인이 종각역에 내려 흰색 지팡이를 탁탁 두드리며 길을 걷는다 조계사 앞길엔 젊은 스님들이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플래카드를 내걸고 분주히 행인들에게 팥죽을 나누어준다 교복을 입은 키 작은 한 여고생이 지팡이를 두드리며 그냥 지나가는 시각장애인의 손을 이끌고 팥죽을 얻어와 건넨다 나도 그 분 곁에 서서 팥죽 한 그릇 얻어 먹는다 곧 함박눈이 내릴 것 같다 - 12월 / 정호승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고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만나고 너와 내가 가슴으로 만나서, 따스한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진다면..... 그냥 지나가는 이웃의 손을 이끌고, 같이 팥죽을 나누는 세상이 된다면.....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 기다려진다.

시읽는기쁨 2004.12.28

바람만이 알고 있지 / 밥 딜런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한 사람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야 흰 갈매기는 사막에서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이 머리 위를 날아야 포탄은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어야 산은 바다가 될까? 얼마나 더 오래 살아야 사람들은 자유로워질까? 얼마나 더 고개를 돌리고 있어야 안 보이는 척할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더 고개를 쳐들어야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알..

시읽는기쁨 2004.12.23

雜詩(二) / 陶淵明

白日淪西阿 素月出東嶺 遙遙萬理輝 蕩蕩空中景 風來入房戶 夜中枕席冷 氣變悟時易 不眠知夕永 欲言無予和 揮杯勸孤影 日月擲人去 有志不獲騁 念此懷悲悽 終曉不能靜 - 雜詩(二) / 陶淵明 밝은 해 서쪽 장강으로 떨어지고 하얀 달 동편 산봉우리로 나오네 달빛은 아득히 만리를 비추며 넓디넓게 공중에서 빛나네 바람은 방문으로 들어오고 밤중에 잠자리 서늘도 하여라 기후 변해 시절의 바뀜 깨닫고 잠 못 이뤄 밤 길어졌음을 안다네 말 나누려 하나 나와 화답할 이 없어 잔 들어 외로운 그림자에게 권하네 세월은 사람을 버려두고 가니 뜻이 있어도 펼치지 못한다오 이를 생각하다 마음은 구슬퍼 새벽 되도록 진정하지 못한다오 잡시(雜詩) 12수(首)는 도연명이 50세 즈음에 지은 시다.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낙향한지 10년, 그를..

시읽는기쁨 2004.12.16

소리들 / 나희덕

승부역에 가면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구름 옮겨가는 소리 지붕이 지붕에게 중얼거리는 소리 그 소리에 뒤척이는 길 위로 모녀가 손 잡고 마을을 내려오는 소리 발 밑의 흙이 자글거리는 소리 계곡물이 얼음장 건드리며 가는 소리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송아지 다시 고개 돌리고 여물 되새기는 소리 마른 꽃대들 싸르락거리는 소리 소리들만 이야기하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겨울 승부역 소리들로 하염없이 붐비는 고요도 세 평 - 소리들 / 나희덕 소리가 끊어져야 소리가 들린다. 진공이 단순한 무(無)가 아니듯, 우리 귀의 고막을 울리지 않는다고 소리 없음이 아니다. 오히려 들리지 않는 소리로 가득하다.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 대음희성(大音希聲)...... 세상..

시읽는기쁨 2004.12.09

가면 / 홍윤숙

이 나이에도 나는 아직 마음 들키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문다 부질없는 호감을 사기 위해 미소를 짓는다 수치와 굴욕을 감추기 위해 큰소리로 떠든다 그러다 돌아와 자신을 향해 침을 뱉는다 눈물을 쏟는다 무거웠던 가면 전흔의 상처 남루한 또 하나의 얼굴이 쓸쓸히 누워있다 - 가면 / 홍윤숙 인생은 흥겹고도 쓸쓸한 가면 무도회..... 잔치가 끝나면 내 지친 얼굴은 외로이 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하나씩 새 가면을 만드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지금 열심히 들락거리고 있는 이 블로그도 요사이 만들어낸 새 가면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적당히 화내고, 적당히 미소 짓고, 적당히 떠들며 저 시끌벅적한 가면 무도회에 동참하기 위해 내 손에는 늘 무거운 가면이 들려있다. 언제쯤일까? 神 앞에 서게 되는 날, 그분의 빛으로 이..

시읽는기쁨 2004.12.02

가정 /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동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가정 / 박목월 아버지가 그립다. 이젠 찾아볼 길 없는 아버지의 위엄과 권위가 그립다. 지금 아..

시읽는기쁨 2004.11.26

내가 보고 싶은 것들 / 박노해

9시 뉴스를 진행하는 장애우 앵커를 보고 싶어요 노동하는 삶의 철학을 강의하는 노동자 교수님을 보고 싶어요 이혼한 젊은 여자가 실력 있는 대통령으로 뽑히는 걸 보고 싶어요 동남아시아계 서울 시장이 세계경영을 이끄는 걸 보고 싶어요 서울역에서 상경하는 농사꾼에게 정중히 경례하는 경찰들이 보고 싶어요 안기부 청사에 아이들과 김밥 싸들고 격려 방문하는 시민들을 보고 싶어요 북한 노동자의 손에 깨끗이 쓰러진 수령의 동상을, 항일 운동하던 시절의 김일성 장군 사진이 독립기념관에 걸려진 걸 보고 싶어요 거리에 자동차보다 많은 자전거의 물결을 보고 싶어요 안 갖는 긍지로 적게 벌고 나누어 쓰자며 '푸른 생산'을 내건 파업 노동자들을 만나고 싶어요 토실토실 살 오른 아프리카 아이들이 두 뺨 발그레한 남북한 아이들과 어..

시읽는기쁨 2004.11.21

나무들 / 칼머

나무보다 아름다운 시를 나는 결코 알지 못할 것 같다. 대지의 달콤한 가슴에 허기진 입술을 대고 있는 나무 하루 종일 신을 우러러보며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 여름에는 머리 위에 개똥지빠귀의 둥지를 이고 있는 나무 가슴에는 눈이 내려앉고 또 비와 함께 다정히 살아가는 나무 시는 나 같은 바보가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건 신만이 할 수 있는 일 - 나무들 / 칼머 사람보다는 나무가 더 좋다는 친구가 있다. 그래서인지 이 친구는 꼭 나무를 닮았다. 그의 곁에 가면 숲에 든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의 별명은 물푸레나무이다. 이 친구 따라 나무 설명을 들으며 나도 나무와 많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나무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눈이 떠진 느낌이다. 지금 밖에는 다가오..

시읽는기쁨 2004.11.11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

땅거미 내릴 무렵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 외딴 함석 지붕 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흩어진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오, 저것이야! 아직 내가 살아 보지 못한 느림! -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 빨리 빨리가 미덕이 되었고, 분주함은 일상이 되었다. 어떤 때는 나 자신이 현대 문명의 속도전에 이유도 모른채 내몰린 힘없는 병사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쁜 일상의 틈 사이로 언뜻 비치는 그런 느낌...... 저녁 어스름, 고향의 초가 지붕 위로 느릿느릿 피어오르던 연기를 떠올리면 나는 슬프다. 바삐 달려오기만 한 내 이 자리는 어디인가?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시읽는기쁨 2004.11.06

가을날 / 허영자

세상엔 가을이 우리한텐 이별이 왔다 안녕히 늘 안녕히 우리는 가난한 연인이나 가진 것 모두 서로 주었기 빈 알몸으로 후회는 없다 꽃이나 나무나 온갖 식물이 그러하듯 나도 빛나는 사랑의 열매 하나 달고 이 愁心 깊은 계절을 견디리라 정녕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던 열정의 시간 보랏빛 추억의 때를 저 높다란 구름 선반 위에 갈무리 하느니 더욱 넉넉히 허용될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 낙엽 쌓인 조롱길이 열린다 가앙 가앙 푸르른 가을 하늘 열린다 - 가을날 / 허영자 올해는 유난히 파란 가을 하늘이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다. 되돌아보니 봄에는 황사도 덜 했고, 여름 태풍도 비켜갔고, 비 피해도 적었고, 다른 해보다 자연 혜택을 많이 받은 해인 것 같아 고맙다. 상대적인지 이웃 일본은 태풍과 지진의 자연 재해로 ..

시읽는기쁨 2004.10.29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 - 귀천 / 천상병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자리가 컸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사랑이 지극했음을 압니다.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인품이 온화하고 따스했음을 압니다. 자식들에 대한 그 사랑을 어찌 버려두고 가실 수 있었나요? 다시 못 올 먼 길을 어찌 그리 빨리 재촉해 떠나셨나요? 남은 우리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그래도 당신은 행복했었다고 얘기합니다. 병고에무너져 내리는 당신을 보며 유약하다고 탓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당신..

시읽는기쁨 2004.10.19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니 작별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걸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 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말을 배우며 사세 -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어느덧 거리에는 가로수의 낙엽이쌓이고 있다. 지금 바라보는 창 밖으로 또 하나 빠알간 담쟁이 잎 하나가 아래로 떨어진다. 때가 되어서 어머니 품을 떠..

시읽는기쁨 2004.10.12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시읽는기쁨 2004.10.06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면서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 도로는 넓어지고 자동차는 더 커지고 많아지고, 지금은 특급열차가 아니라 초고속열차가 산하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며 날아간다.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그만큼 잘 살게 되었을까? 추석에 찾아가 본 농촌은 황폐한 속살을 그대로 드..

시읽는기쁨 2004.09.30

당나귀가 나는 좋아 / 프란시스 잠

물푸레나무 긴 울타리를 끼고 걸어가는 순한 당나귀가 나는 좋다. 당나귀는 꿀벌에 마음이 끌려 두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태워 주기도 하고 호밀이 가득 든 부대를 나르기도 한다. 당나귀는 수챗가에 가까이 이르면 버거정거리며 주춤 걸음으로 걸어간다. 내 사랑은 당나귀를 바보로 안다. 어쨌든 당나귀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당나귀는 언제나 생각에 젖어 있고 그 두 눈은 보드라운 비로드 빛이다. 마음씨 보드라운 나의 소녀야, 너는 당나귀만큼 보드랍지 못하다. 당나귀는 하느님 앞에 있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 닮아서 당나귀는 보드랍다. 당나귀는 피곤하여 가벼운 모양으로 외양간에 남아서 쉬고 있다. 그 가련한 작은 발은 피곤에 지쳐 있다. 당나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가 할 일을 모두 다했다. 그런데,..

시읽는기쁨 2004.09.20

기도 / 야마오 산세이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바다여 우리의 병든 몸과 마음을 고쳐 주셔요 그 깊고 푸른 호흡으로 우리를 고쳐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산이여 우리의 병든 욕망을 치유해 주셔요 그 깊고 푸른 호흡으로 우리를 치유해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강이여 우리의 병든 잠을 고쳐 주셔요 그 푸른 시냇물 소리로 편안한 잠자리를 되찾게 해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 내면에 있는 여래여 우리의 병든 과학을 고쳐 주셔요 모든 생명에 봉사하는 과학의 길을 찾아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나무여 우리의 침울해 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축복해 주셔요 그 곧게 선 푸른 모습에서 우리들도 또한 조용하고 깊게 곧게 설 수 있는 길을 배울 수 있게 해 주셔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바람이여 우리들의 ..

시읽는기쁨 2004.09.14

거미 / 이면우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 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시읽는기쁨 2004.09.11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 안도현

저 도시를 활보하는 인간들을 뽑아내고 거기에다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한다면 자작나무의 눈을 닮고 자작나무의 귀를 닮은 아이를 낳으리 봄이 오면 이마 위로 새 순 새록새록 돋고 가을이면 겨드랑이 아래로 가랑잎 우수수 지리 그런데 만약에 저 숲을 이룬 자작나무를 베어내고 거기에다 인간을 한 그루씩 옮겨 심는다면 지구가, 푸른 지구가 온통 공동묘지 되고 말겠지 -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 안도현 저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중에서 자작나무를 닮은 사람이 많아진다면 도시는 푸른 숲의 향기로 가득할 거야. 칙칙한 매연 대신에 신선한 산소가 거리를 감싸고 사람들은 이제 심호흡을 크게 할 거야. 잿빛 도시에 꽃이 피어나고, 예쁜 새들이 찾아와 노래할 거야. 사람들의 마음도 꽃처럼 환하게 피어나고,새들 따라서 ..

시읽는기쁨 2004.09.06

山中問答 / 조지훈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 아능가' '마당 가 멍석자리 쌉살개도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낚는 맛을 자네 太古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나간 사람 잘 되어 오는 놈 하나 없네 소원이 뭐가 있능고 해마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 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라일이나 잘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능가' 老人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뤄 주신다. '예 이 ..

시읽는기쁨 2004.08.31

용서받는 까닭 / 유안진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있고 들리지 않아도 소리내는 것이 있다 땅바닥을 기는 쇠비름나물 매미를 꿈꾸는 땅 속 굼벵이 작은 웅뎅이도 우주로 알고 사는 물벼룩 장구벌레 소금쟁이 같은 그것들이 떠받치는 이 지구 이 세상을 하늘은 오늘도 용서하신다 사람 아닌 그들이 살고 있어서 - 용서받는 까닭 / 유안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인간이 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진 인간족 말고 이 말에 동의할 생물은 없을 것 같다. 땅도 하늘도 침묵하고 있지만 가만히 눈 감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잘 살아 보자는 명분 아래 환경을 파괴하고 다른 생명을 멸종시키며 그러고도 당당하게 큰 소리만 치고 있다. 스스로의 묘혈을 파면서도 그걸 지혜로 착각하고 있다. 천성산의 도룡뇽이..

시읽는기쁨 2004.08.24

그 날이 오면 / 심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이 시를 읽으면 가슴이 뛴다. 영국의 한 비평가는 이 시를 세계..

시읽는기쁨 2004.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