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여행자를 위한 서시 / 류시화

샌. 2005. 1. 17. 17:52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 가리라

한 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 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은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 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꾸리라

 

- 여행자를 위한 서시 / 류시화

 

길을 떠나리.

설레이며 신발끈을 동여매던 그날 새벽의 다짐으로 다시 길을 떠나리.

길이 있어서 그냥 떠나는 길이므로몇 걸음 못가서 쉬어야 한들 이젠 길 탓을 하지 않으리.

지난 번 여행에서 생긴 상처에는 새 살이 돋고, 지친 몸도 넉넉히 쉬었으니 이제 여기 안온한 집을 떠나 다시 길 위에 서리.

맑은 새벽, 첫발을 내딛는 순례자의 발걸음은 행복하여라.

수많은 이정표에게 길을 물으며 물과 바람을 벗삼아 영원의 문을 향해 나아가는 여행자의 발걸음은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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