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귀농 / 백석

샌. 2005. 2. 4. 15:28

백구둔의 눈 녹이는 밭 가운데 땅 풀리는 밭 가운데
촌부자 노왕하고 같이 서서
밭최뚝에 즘부러진 땅버들의 버들개지 피여나는 데서
볕은 장글장글 따사롭고 바람은 솔솔 보드라운데
나는 땅임자 노왕한테 석상디기 밭을 얻는다

 

노왕은 집에 말과 나귀며 오리에 닭도 우글거리고
고방에 그득히 감자에 콩곡석도 들여 쌓이고
노왕은 채매에 힘이 들고 하루종일 백령조 소리나 들으려고
밭은 오늘 나한테 주는 것이고
나는 이젠 귀치 않은 측량도 문서도 싫증이 나고
낮에는 마음놓고 낮잠도 한잠 자고 싶어서
아전 노릇을 그만두고 밭을 노왕한테 얻는 것이다

 

날은 챙챙 좋기도 좋은데
눈도 녹으며 술렁거리고 버들도 잎트며 수선거리고
저 한쪽 마을에는 마돗에 닭 개 즘생도 들떠들고
또 아이 어른 행길에 뜨락에 사람도 웅성웅성 흥성거려
나는 가슴이 이 무슨 흥에 벅차오며
이 봄에는 이 밭에 감자 강냉이 수박에 오이며 당콩에 마늘과 파도 심그리라 생각한다

 

수박이 열면 수박을 먹으며 팔며
감자가 앉으면 감자를 먹으며 팔며
까막까치나 두더쥐 돗벌기가 와서 먹으면 먹는 대로 두어두고
도적이 조금 걷어가도 걷어가는 대로 두어두고
아, 노왕, 나는 이렇게 생각하노라
나는 노왕을 보고 웃어 말한다

 

이리하여 노왕은 밭을 주어 마음이 한가하고
나는 밭을 얻어 마음이 편안하고
디퍽디퍽 눈을 밟으며 터벅터벅 흙도 덮으며
사물사물 햇볕은 목덜미에 간지로워서
노왕은 팔장을 끼고 이랑을 걸어
나는 뒷짐을 지고 고랑을 걸어
밭을 나와 밭뚝을 돌아 도랑을 건너 행길을 돌아
지붕에 바람벽에 울바주에 볕살 쇠리쇠리한 마을을 가리키며
노왕은 나귀를 타고 앞에 가고
나는 노새를 타고 뒤에 따르고
마을끝 충왕묘에 충왕을 찾아뵈려 가는 길이다
토신묘에 토신도 찾아뵈려 가는 길이다

 

- 귀농 / 백석

 

입춘(立春)이다.

봄이라는 말은 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아마도 한 도시인이 이 봄에는 밭을 얻고 농사를 지으려는 꿈을 꾼다.

그 옛날 측량을 하고 문서 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면 첨단의 직장이었을 텐데 그는 지친 듯 흙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잘 해낼 것 같지 않다. 경계에서 있는 그의 발걸음은 꿈에 부풀어 있지만 어째 불안해 보인다. 그래도 그 여유와 낭만이 아름답다.

시가 공감을 얻는 것은 읽는 사람의 마음에 시인과 비슷한 공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눈이 녹고 봄이 오면 나도 나무를 심고 채소도 가꾸리라. 비록 어설플지라도 아직 설레는 꿈이 남아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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