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 147

팔순 / 이정록

기사 양반, 잘 지내셨남?무릎 수술한 사이에버스가 많이 컸네.북망산보다 높구먼. 한참 만이유.올해 연세가 어찌 되셨대유?여드름이 거뭇거뭇 잘 익은 걸 보니께서른은 넘었쥬? 운전대 놓고 점집 차려야겠네.민증은 집에 두고 왔는디골다공증이라도 보여줄까? 안 봐도 다 알유.눈감아드릴 테니께오늘은 그냥 경로석에 앉어유.성장판 수술했다면서유. 등 뒤에 바짝젊은 여자 앉히려는 수작이꾼 중에서도 웃질이구먼.오빠 후딱 달려. 인생 뭐 있슈?다 짝 찾는 일이쥬.달리다보면 금방 종점이유. 근디 내 나이 서른에그짝이 지난치게 연상 아녀?사타구니에 숨긴 민증 좀 까봐.거시기 골다공증인가 보게. - 팔순 / 이정록  할머니와 버스 기사 사이의 농담따먹기가 흥겹다. 걸쭉한 충청도 사투리 속에서 검버섯은 여드름이 되고 무릎 수술은 ..

시읽는기쁨 2024.10.09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있다.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나갈 한국 대표를 뽑는 본선이 어제 있었는데 81세의 최순화 씨가 베스트 드레스상을 받았다. 올 가을에 열리는 세계 대회에 나갈 대표가 되지는 못했지만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미스 유니버스에 도전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1943년생인 최순화 씨는 간병인으로 일하다가 어느 환자의 권유로 모델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 74세 때였다. 미스 유니버스에 출전하는 나이 제한이 없어지면서 최 씨의 목표는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이번에 32명이 겨루는 본선까지 오르면서 주목을 받았으나 아쉽게도 한국 대표가 되지는 못했다. 만약 세계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면 지구촌의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특별한 ..

참살이의꿈 2024.10.01

'3노'를 경계한다

공자는 나이 일흔을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 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무엇을 삼가거나 조심할 필요가 없을 게다. 보통 사람에게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경지다. 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매사를 살피면서 경계해야 한다. 그래야 겨우 인간 노릇을 하며 살 수 있다. 늙으면 '3노'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3노'의 첫 번째는 노여움이다. 늙으면 괜히 서러워지면서 화가 생기기 쉽다. 세상의 중심이었다가 변방으로 밀려난 소외감이 원인일 것이다. 전처럼 대우를 받지 못하니 서운하고 섭섭한 감정이 든다. 그러므로 자신이 처한 위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이제는 주인공이 아니다. 기대심을 내던지지 못하면 노여움..

참살이의꿈 2024.09.21

안경 다섯 개

내가 사용하는 안경 종류는 다섯 개나 된다. 그동안은 보통 안경에 선글라스, 돋보기 둘(독서용과 컴퓨터용)로 네 종류였는데 지지난달부터 고글이 추가됐다. 한참 전부터 눈물이 흐르고 충혈되는 눈 질환이 자주 찾아왔다. 안과에서는 눈물관이 막힌 탓이라고 했다. 바람을 맞으면 증세가 심해지는데 의사는 고글 쓰기를 권했다. 그래서 다섯 번째 안경이 생겼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섯 개 중 하나를 사용한다. 요사이는 외출할 때 주로 고글을 쓴다. 답답하기는 하나 바람을 차단하는 효과는 있다. 그래선지 최근에는 눈물이 과다하게 흐르는 현상이 생기지 않는다. 앞으로 더 지켜봐야겠지만 효과가 확실하다면 약간의 불편은 감내할 만하다. 20대 중반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50대까지는 안경 하나로 넉넉했다. 그러다가 ..

길위의단상 2024.08.05

혼자 논다 / 구상

이웃집 소녀가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갔을 무렵하루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유명하다면서?그러길래- 유명이 무엇인데?하였더니- 몰라!란다. 그래 나는- 그거 안 좋은 거야!하고 말해 주었다. 올해 그 애는 여중 2학년이 되어서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자기가 그 작자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하고 물었더니-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 보면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라고 했단다. 나는 그 대답이 너무 흐뭇해서- 잘 했어! 고마워!라고 칭찬을 해 주고는그날 종일이 유쾌했다. - 혼자 논다 / 구상  '혼자 노는 소년' - 이웃에 사는 소녀의 눈에 이렇게 비쳤다면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을 것 같다. 내가 되고 싶은 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친구 중에 '혼자 노는 소년'에 가..

시읽는기쁨 2024.07.02

삼한사온

전에 직장 동료였던 H한테서 전화가 왔다. 반년 가량 연락이 끊어진 채였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걱정되기도 했다. 누구든지 통화를 하게 되면 맨 처음 묻는 말이 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H는 대뜸 말했다."삼한사온으로 살고 있지요."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H의 부연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이 시원찮았다가 괜찮았다를 반복하면 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어지럼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온갖 검사를 해도 특별한 이상은 없는데 주기적으로 어지럼증이 찾아와서 삶의 질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10여년 전부터 겪었던 증상과 비슷했다. 불현듯 어지럼증이 찾아오면 이삼 주 정도 지속되면서 괴롭혔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니 일상 생활하기가 불편했다. 그러다가 슬며..

길위의단상 2024.06.08

소풍

노년의 상실과 아픔을 리얼하게 그린 영화다. 생로병사는 인간 존재의 숙명이지만 말년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나 회피하려 한다. 나에게도 닥칠 미래임을 인지하나 애써 외면한다. 직시한다고 뭐 뾰족한 수도 없다.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감내하며 살 뿐이다. 영화 '소풍(逍風)'은 이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은심(나문희)과 금순(김영옥)은 고향 친구면서 사돈지간이기도 하다. 둘 다 지병에다 자식들이 골치를 썩힌다는 고민을 갖고 있다. 훌훌 털고 금순이 사는 고향인 남해에 내려온 은심은 역시 어릴 적 친구였던 태호(박근형)를 만나 잠시나마 추억에 젖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고향은 옛 고향이 아니었다. 다녔던 학교는 폐교되었고, 동네는 리조트가 들어선다고 시끄럽다.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읽고본느낌 2024.06.02

내가 봐도 우습다 / 안정복

늙은이 나이가 팔십에 가까운데날마다 어린애들과 장난을 즐기네 나비 잡을 때 뒤질세라 따라갔다가매미 잡으러 함께 나가네 개울가에서 가재도 건지고숲에 가서 돌배도 주워오지 흰머리는 끝내 감추기 어려워남들이 비웃는 소리 때때로 들려오네 翁年垂八十 日與小兒嬉捕蜨爭相逐 점蟬亦共隨磵邊抽石해 林下拾山梨白髮終難掩 時爲人所嗤 - 내가 봐도 우습다(自戱效放翁) / 안정복(安鼎福)  순암 안정복 선생은 18세기를 살았던 유학자였다. 이웃 동네에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던 '이택재(麗澤齋)'라는 서재가 있다. 앞에는 영장산이 있고 뒤에는 국수봉이 감싸고 있는 아늑한 동네다. 선생은 성호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며 영향을 받았다. 실학자로 분류되지만 보수적이어서 평생 주자학을 신봉하며 새로운 학문을 추구..

시읽는기쁨 2024.04.27

사랑인 줄 알았는데

일본은 재미있는 나라다. 매년 노인들을 대상으로 실버타운협회에서 주관하는 센류 공모전이 있다.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센류(川柳)'란 5-7-5 음률의 정형시로 풍자나 익살이 특징이다. 하이쿠와 비슷한데 자연을 소재로 하는 하이쿠와 달리 센류는 인간 삶의 애환에 중점을 둔다. 이 공모전이 노인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매해 1만 수가 넘는 작품이 출품된다고 한다. 고령자의 생활상과 심정을 읊은 '실버 센류' 작품을 보면 웃음이 나오면서도 슬프고 애잔하다. '웃프다'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수상작은 책으로도 출판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있다. 그중 몇 수를 골라보았다. 확인한다 옛날에는 애정 지금은 숨소리 할멈 개한테 주는 사랑 나한테도 좀 주구려 손주 목소리 부부 둘이서 수화기에 뺨을 맞댄다 ..

길위의단상 2024.04.08

인생은 독고다이

"여러분, 인생은 혼자입니다. 마음 가는대로 사십시오. 여러분을 누구보다 아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건 여러분 자신이고, 누구의 말보다 귀담아 들어야 하는 건 여러분 자신의 마음의 소리입니다. 웬만하면 아무도 믿지 마세요. 누군가 멋진 말로 나를 이끌어주길, 나에게 깨달음을 주길, 내 삶이 더 수월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세요. 그런 사람들 무리의 먹잇감이 되지 마세요. '인생 독고다이다' 생각하고 쭉 가세요." 지난달에 이효리 씨가 국민대 졸업식에 참석해 후배들에게 전한 인생 조언이다. '독고다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의 성격대로 직설적이면서 소탈한 화법이 인상적이었다. 내용에 대해서는 나도 공감한다. 사회로 진출하는 젊은 후배들을 위한 연설이었지만 7학년인 나는 내 식..

참살이의꿈 2024.03.20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젊었을 때는 의지를 세워 열심히 노력하면 웬만한 일은 전부 이뤄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살아 보니 알겠다. 인생은 필연보다 우연에 의해 좌우되었고, 세상은 생각보다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러운 곳이었다.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원래부터 많지 않았고, 흐르는 시간을 당해 내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 인생의 슬픔은 일상의 작은 기쁨으로 인해 회복된다는 사실이다. 하루를 열심히 보내는 가운데 발견하는 사소한 기쁨과 예기치 않은 즐거움이 세월로 인한 무상감과 비애감을 달래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비로소 삶이 가벼워졌다. 미래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어떤 일에도 쉽게 좌절하지 않으며, 이유 없이 불안해하지 않게 되었고, 함부로 서운해하지도 않게 되었다...

읽고본느낌 2024.02.02

비닐하우스

보면서도 보고 나서도 가슴이 먹먹해지며 오래 한숨을 쉬었던 영화다. 내용이 스릴러 영화로 분류될 정도로 긴장을 시키지만, 나는 영화에서 비중 있게 나오는 치매에 걸린 노년의 삶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데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닐하우스에서 살아가는 문정은 아들과 함께 살 집을 구하기 위해 간병인 일을 한다. 소년원에 있는 아들은 곧 출소할 예정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문정이 자신의 뺨을 때리는 자학 증세가 나오는데 이는 문정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정은 성심성의껏 치매에 걸린 노부부를 간병하는데, 어느 날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고 문정은 헤어날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든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파멸의 길로 들어가고 만다. 가족이라는 족쇄가 문정..

읽고본느낌 2023.12.01

그럭저럭과 그러려니

'그럭저럭'과 '그러려니'는 늙어가면서 사용 빈도가 늘어나는 말이다. 가끔 지인과 통화를 하게 될 때는 어떻게 지내느냐고 서로 묻는다. 이때 내 대답은 일정하다. "그럭저럭 지내지 뭐." 늙어서의 일상이란 게 그렇다. 잘 지낸다고 자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못 지내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 '그럭저럭'만큼 적절한 것도 없다. 반면에 '그러려니'는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늙으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을 안팎으로 자주 만난다. 세상 돌아가는 일도 성에 차지 않고, 몸도 이곳저곳이 고장 난다. 그럴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려니 하는 게 제일 속 편하다. 여러 달째 손가락과 이빨이 말썽이다. 어느 때부터 양 손의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기 시작했다. 아..

참살이의꿈 2023.11.24

탄로가 / 신계영

아이 적 늙은이 보고 백발을 비웃더니 그동안에 아이들이 나 웃을 줄 어이 알리 아이야 웃지 마라 나도 웃던 아이로다 사람이 늙은 후에 거울이 원수로다 마음이 젊었더니 옛 얼굴만 여겼더니 센 머리 씽건 양자 보니 다 죽어만 하아랴 늙고 병이 드니 백발을 어이 하리 소년 행락이 어제론 듯 하다마는 어디가 이 얼굴 가지고 옛 내로다 하리오 - 탄로가(嘆老歌) / 신계영 조선 중기의 문인이었던 신계영(辛啓榮, 1577~1669) 선생이 쓴 늙음을 한탄하는 노래다. 자신의 소년 시절과 비교하며 세월의 무상을 절감하는 노인의 심경을 진솔하게 고백한다. 선생은 92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굉장히 장수한 셈이다. 노년의 아픔과 쓸쓸함을 몸소 체험한 바가 컸을 것이다. 나도 이제 선생의 마음에 공감하는 나이가 되었다...

시읽는기쁨 2023.11.22

복이 없어 이렇게 오래 살았어요

얼마 전에 A 선배와 노년의 삶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몇 살까지 사는 것이 적당할까, 라는 물음이 나왔고 선배는 망설임 없이 85세라고 답했다. 병이 없더라도 그 이상은 살기 싫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노인을 대상으로 한 통계를 보면 100세까지 살고 싶다는 사람이 50%에 달한다. 이에 비하면 선배는 소박한 바람을 갖고 있는 셈이다. 반면에 일본은 100세까지 살고 싶다는 비율이 20%에 불과하다. 우리보다 앞서 초고령화사회에 들어간 일본은 장수와 고령이 가져다주는 비극을 다수가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TV를 보면 100세를 넘기고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슈퍼 노인이 자주 나온다. 이걸 보고 자신도 그렇게 되리라고 착각하기 쉽다. A 선배와의 대화에서도 김형석 선생이 화제..

참살이의꿈 2023.11.12

그냥

들판에서 자라나는 풀꽃을 생각한다. 만약 풀꽃이 말을 한다면 왜 사느냐는 물음에 "그냥"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풀꽃은 사는 게 무슨 이유가 있느냐고 고개를 갸웃하며 살포시 웃을 것이다. "그냥"이라는 말이 참 좋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좋을 뿐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댄다면 정말로 좋아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무슨 목적이나 의미가 있어 사는 게 아니다. "그냥" 산다. "그냥" 산다고 자신에게 가만히 속삭여 보라. 나를 짓누르던 삶의 무게가 홀연히 가벼워지는 걸 느낄 것이다. 기쁜 일이 찾아오면 웃고, 슬픈 일이 찾아오면 울면 된다. "그냥" 그렇게 살뿐이다. 지금 좋게 보인다고 좋은 일은 아니다. 지금 나쁘게 보인다고 나쁜 일은 ..

참살이의꿈 2023.10.06

벚나무 잎이 천천히 떨어지며 남기고 간 사소한 것들 / 김산

앞마당의 벚나무 잎이 작은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진다 큰 빗자루를 들고 떨어진 잎들을 쓸기 시작하면 바스락거리며 오그라든 당신의 지문이 조각조각 바서진다 바람과 빛과 물이 일제히 분열하며 공중으로 흩어진다 검지까지 쭉 뻗은 감정선과 손목으로 가다 끊긴 생명선 그래, 생각이 많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은 틀림없다 빗자루가 쓸리면서 빗자루가 아플 것이라는 생각에 빗자루질을 멈추고 떨어지는 잎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겨우겨우 붙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벚나무 잎을 보면서 어디서 불어왔는지 찬바람이 오른뺨을 할퀴고 간다 뺨으로 누구를 때렸다거나 해코지를 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 기껏해야 뺨은 누군가의 뺨을 비비거나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잠시 온기를 나누는 게 다일 뿐, 다시 빗자루를 잡고 떨어진 벚나무 잎들을 쓸..

시읽는기쁨 2023.09.20

노화의 종말

"노화는 질병이다"라고 이 책의 지은이는 단언한다. 질병이므로 치료할 수 있다. 노화를 막을 수 있다면 죽음도 무기한 연기할 수 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더 이상 인간의 숙명이 될 수 없다. 이 책 은 하버드 의대 유전학 교수이자 노화와 장수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인 데이비드 싱클레어(D. A. Sinclair) 박사가 썼다. 지은이는 현재 과학자들이 찾아낸 노화 현상의 연구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지은이가 정의하는 노화란 세포의 상해와 손상에 대응하는 후성유전 신호 전달자들이 과로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생명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태초의 생명체가 극한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장착한 '생존 회로'가 노화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생존 회로는 DNA가 끊겼음을 알아차렸을 때 세포 분열과 번식을..

읽고본느낌 2023.07.17

100세 철학자의 행복론

김형석 선생은 1920년생이니 103세가 되신다. 여전히 저술과 강연 등의 활동을 하는 노익장이 대단하시다. 선생은 우리들 대화 자리에서 노년의 본보기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분이시다. 물론 이런 하늘이 내린 혜택을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은 선생이 행복을 소재로 발표한 글을 모은 책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사소한 일상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선생의 글은 평이하고 담백하다. 선생의 성격과 세계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삶의 기본이 되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이 초등학생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에 담겨 있다. '약간 우울한 이야기'라는 글에서 선생은 늙는다는 것은 생활공간이 점점 좁아지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한다. 나이가 들 수록 사회 공간은 없어지고, 활동 영역이 가정 공간으로..

읽고본느낌 2023.06.16

노인의 예절

노인을 대하는 예절이 아니라 노인'의' 예절이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옛날에는 60을 넘기면 잔치를 열었고 70을 넘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젊은이는 많고 노인은 적었으니 노인은 집안이나 공동체에서 존경과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는 시대가 역전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도 2025년이면 65세 이상 비중이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들어간다고 한다. 65세 이상 노인이 1천만 명을 넘어서는 것이다. 노인이 넘쳐나면 존경과 대우는커녕 자칫하면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더구나 노인은 생산성이 없어서 경제적 측면에서 사회에 기여하는 바도 적다. 과거에는 지혜와 경륜으로 한몫했지만 이제는 첨단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여서 노인이 자리 잡을 영역은 좁아지고 있다. 시대에 뒤지지 않으려면 젊은이에게 ..

참살이의꿈 2023.06.10

아이고

"아이고!" 망팔(望八)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이젠 아내나 나나 집에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되었다. 아침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때부터 저절로 튀어나온다. 앉을 때도 일어설 때도 무심코 내뱉는 말이다. "아이고!" 불과 몇 년 전이었다. 트레킹 도중에 쉴 자리를 찾아 앉으며 선배의 입에서 "아이고"라고 신음 섞인 비명이 나왔을 때 우리 모두는 웃었다. 벌써 그럴 연세가 되었느냐고 놀리기까지 했다. 이젠 나도 그때의 선배 나이를 지났고, 그리고 똑 같이 되었다. 나이는 속일 수 없는가 보다. 개화기 때 조선에서 활동했던 선교사의 글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조선인이 여러 명 있었는데, 이들이 수시로 '간다'라고 말해서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다는 것이다. 조선인들이 습..

길위의단상 2023.06.05

몰라서 못 먹는다

집에는 냉장고가 세 대 있다. 두 노인이 사는 집 치고 과하지만 전에 자식들과 같이 살 때 쓰던 냉장고가 고장 없이 작동하고 있으니 계속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아내에게 한 대를 없애자고 제안했지만 다 쓸모가 있다고 한다. 부엌 살림살이는 아내 소관이니 어찌할 수가 없다. 세 대의 냉장고는 어디를 열어봐도 빈틈없이 뭔가가 가득 들어 있다. 둘이 사는 살림에 무슨 먹을거리가 이토록 필요한지 모르겠다. 아내조차도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을 파악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뭘 찾자면 이 냉장고 저 냉장고로 왔다갔다 한다. 냉장고만 아니라 옷장도 마찬가지다. 십 분의 일로 줄여도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것 같다. 냉장고 문을 열면서 아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부쩍 늘어난 말이다. "이런 게 있..

참살이의꿈 2023.05.25

당구 배우는 재미

쓰리 쿠션 당구를 배우는 재미에 빠져 있다. 유튜브를 통해 시스템을 공부하고 당구장에서 배치를 놓고 연습하면서 익히고 있다. 감각으로만 칠 때와 달리 공이 진행하는 원리를 알게 되니 당구가 훨씬 흥미롭다. 30대 때 당구를 시작했는데 그때 다니던 직장 분위기는 술을 마시고 나면 2차 또는 3차는 당구장에서 노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큐대를 잡게 되었지만 취중에 흉내낸 당구라 기본이 안 된 채 엉망이었다. 맨정신으로 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십 년을 쳐도 4구 100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4, 50대 때는 당구와 멀어졌다가 다시 재개한 것은 퇴직 후였다. 대학 동기 당구 모임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한 달에 두 번씩 모이다가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난다. 대여섯 명이 고정 멤버이고 나는 출석률..

길위의단상 2023.05.12

18세와 81세

고등학교 동창 카페방에 누군가 재미있는 글 하나를 올렸다. 제목이 '18세와 81세'인데 읽다 보니 웃음이 나면서 씁쓰레하다. 나도 81세가 눈앞에 와 있다. 사랑에 빠지는 18세 욕탕에 빠지는 81세 도로를 폭주하는 18세 도로를 역주행하는 81세 마음이 연약한 18세 다리뼈가 연약한 81세 두근거림이 안 멈추는 18세 심장질환이 안 멈추는 81세 사랑에 숨 막히는 18세 떡 먹다 숨 막히는 81세 학교 점수 걱정하는 18세 혈당 당뇨 걱정하는 81세 아무것도 철 모르는 18세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81세 자기를 찾겠다는 18세 모두 찾아 나서는 81세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남자가 81세다. 그렇다면 한국 남성은 81세가 되면 반 정도만 생존한다는 얘기다. 지금은 같이 희희낙락하는 친구들이지만 곧 반..

길위의단상 2023.04.29

노인 / 이화은

평생 조연으로 살더니 드디어 주인공이 되었다 집안에서도 모임에서도 아무 데를 가도 최고령이다 최고라는 말이다 주인공이 죽는 걸로 결말이 나는 연극을 보듯 관객들이 모두 주시한다 건강은 어떠세요 기색을 살핀다 언제쯤 죽어 연극이 끝이 나려나 뻔한 결말이지만 그래도 반짝 이 호황을 누려야 한다 이것도 잠깐이다 - 노인 / 이화은 "이제 길어야 10년 남았다." 동년배들 모임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다. 그것도 과대평가해 줘서 그렇다. 통계를 보면 한국인의 건강수명은 대략 75세라고 한다. 그렇다면 5년도 채 안 남았다는 게 된다. 인생 다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 쓸쓸해진다. 황혼이 지면서 언덕 너머로 종착역이 보인다. 미련이 남거나 안타깝지는 않다. 시간차만 있을 뿐 누구나 노년이 닥치고 병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

시읽는기쁨 2023.04.17

노년의 갈림길

노년이 시작되는 공식적인 나이는 65세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65세에 노인이 되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경로 우대증을 받기는 했지만 노인이라는 소리를 듣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이팔청춘'이라는 말속에는 노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 배어 있는 게 아닐까. 실제 노년이 시작되는 나이는 몇 세 쯤일까?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로서는 일흔을 넘어서니 노년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어봐도 대체로 비슷한 것 같다. 인간은 세월 따라 서서히 늙어가겠지만 노인이 되었다고 정서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한순간에 찾아온다. 인생의 과정은 단계가 있고 점프하듯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불연속적인 ..

참살이의꿈 2023.03.10

7000

블로그의 글 수가 7,000개를 기록했다. 블로그를 처음 개설한 날이 2003년 9월 12일이니 어느새 20년 가까이 되었다. 날수로는 정확히 7,090일째다. 남에게는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천 단위의 소중한 기념일이다. 20년 전에 나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밤골 생활이 여의치 못해서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세상은 등을 돌린 채 나를 외면했고, 진심을 터놓고 고민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그때 절박한 심정으로 시작한 게 블로그였다. 온라인 공간에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나를 위로해 나갔다. 누구에게 드러내거나 보여주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글을 쓰면서 나를 더 알아가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블로그는 상상한 이상으로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 ..

길위의단상 2023.02.08

산 대로 죽는다

"엄마의 죽음의 과정은 삶의 과정과 직결되어 있었다. 즉 엄마가 평생 살아온 과정과 방식이 죽어가는 과정과 방식을 결정했다.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평생 늘 해오신 말들을 했고 늘 해오신 걱정들을 했으며 늘상 눈을 주곤 했던 대상들에 눈을 주셨다. 엄마 평생의 사랑의 방식은 죽어가는 과정에도 관철되었다. 나는 이 점을 감동적으로 지켜봤다." 박희병 선생이 어머니의 마지막 1년을 옆에서 간병하며 지켜본 끝에 내린 결론이다. 의 에필로그에 적혀 있다. 선생의 어머니는 말기암과 알츠하이머성 인지장애를 앓다가 돌아가셨다. 한 인간이 살아온 삶의 방식과 태도가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생로병사는 생명체의 숙명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자신이 죽을 존재임을 살아 있을 때부터 인식한다. 다른 동물은 현재만 살뿐 ..

참살이의꿈 2023.01.12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이 책을 쓴 와카타케 치사코는 1954년생으로 55세부터 소설 강좌를 들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8년 후 이 작품을 집필했고, 2018년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는 74세인 모모코의 일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며 노년의 내면을 잘 그려낸 작품이다. 모모코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살면서 두 자식과도 관계가 소원하다. 이웃과 교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외로움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모모코는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안다.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고독을 즐긴다. 친구와 모임이 없어도 충분히 자족하며 즐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모코의 행복은 과거의 따스했던 추억에서 나오지만, 현실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모모코는 진지하게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며 이 점이 그..

읽고본느낌 2023.01.11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존경하는 벗인 Y형은 글을 잘 쓴다. 잘 쓴다는 것은 기교가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라 글이 진솔하면서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형은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도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담백한 그런 점이 옆에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우리는 서로 공통점도 많다. 가까워진 것도 꽃이 매개가 되어서였다. 얘기를 하다 보면 서로가 "어, 나도 그런데"라는 반응이 나온다. 얼마 전에 통화를 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함을 잃지 말자고 서로 다짐했다. 외부 환경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황폐해져 버린다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고 형은 "이만큼 살아보니 인생사가 새옹지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니 너무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형이 최근에 쓴 글 한 편을 보내줬다. 감사하고 고마워..

참살이의꿈 2022.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