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 157

그랬으면 좋겠네 / 이시하

애인이 빨리 늙어 소처럼 느리고 순해지면 좋겠네 빨리 늙은 애인이 느지막이 일어나 찬 없는 밥을 우물우물 먹고 나서 산수유 꽃 피었드만, 그거나 보러 가지, 그랬으면 좋겠네 사람구경도 참 쏠쏠하구먼, 천천히 걷지 뭐, 그랬으면 좋겠네 강 언덕에 시름도 없이 앉아서는 노을빛이 퍽 곱구먼, 그랬으면 좋겠네 주름진 내 손을 슬쩍 당기며 거 참, 달빛 한번 은근하네, 그랬으면 좋겠네 애인이 빨리 늙어 꾀병 같은 몸사랑은 그만두고 마음사랑이나 한껏 했으면 좋겠네 산수유 그늘 아래 누워 서로의 흰 머리칼이나 뽑아주면 좋겠네 성근 머리칼에 풀꽃송이 두엇 꽂아놓고 킥킥거렸으면 좋겠네 빨리 늙은 애인이 허허 웃으며 주름진 이마나 긁적거리면 좋겠네 아직두 철부지 소녀 같다고 거짓농이나 던져주면 좋겠네 한세상 흐릿흐릿 늙어..

시읽는기쁨 2010.03.30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

시읽는기쁨 2008.08.08

삶을 이길 수는 없죠

'44 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한 부부 그랜트(고든 빈센트)와 피오나(줄리 크리스티)에게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온다. 아내 피오나가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것. 피오나는 자진해서 요양원에 입원하고, 그랜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결정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억을 잃은 피오나가 요양원에서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랜트는 피오나에게서 잊혀진다. 그는 둘을 바라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절망한다. 아무리 애써도 아내의 기억을 되살릴 수 없음을 알게된 그랜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아내를 보내주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데....' 미로스페이스에서 영화 'Away from Her'를 보았다. 70대의 노부부 사랑 이야기지만 영화를 보고난 느낌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산다는 것..

읽고본느낌 2008.04.02

거꾸로 가는 생 / 김선우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나이 서른에 나는 이미 너무 늙었고 혹은 그렇게 느끼고 나이 마흔에 누이는 가을 낙엽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어도 갈래머리 여고생처럼 후르륵 가슴을 쓸어 내리고 예순 넘은 엄마는 병들어 누웠어도 춘삼월만 오면 꽃 질라 아까워라 꽃구경 가자 꽃구경 가자 일곱 살배기 아이처럼 졸라대고 여든에 죽은 할머니는 기저귀 차고 아들 등에 업혀 침 흘리며 잠 들곤 했네 말 배우는 아기처럼 배냇니도 없이 옹알이를 하였네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머리를 거꾸로 처박으며 아기들은 자꾸 태어나고 골목길 걷다 우연히 넘본 키작은 담장 안에선 머리가 하얀 부부가 소꿉을 놀 듯 이렇게 고운 동백을 마당에 심었으니 저 영감 평생 여색이 분분하지 구기자 덩굴 만지작거리며 영감님 흠흠, 웃기만 하고 애증이랄지 ..

시읽는기쁨 2008.03.11

7 Up

테니스 대회를 마치고 뒷풀이 자리에서 C가 노년의 지혜라면서 '7 Up'에 대해 말해 주었다. C의 구수한 입담 때문이기도 했지만 들어보니 그럴 듯 했다. 내용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더니 다음 날 메일로 보내 주었다. 1. clean up 나이 들수록 집과 환경을 깨끗이 해야 한다. 분기별로 주변을 정리 정돈하고, 자신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과감히 덜어 내야 한다. 귀중품이나 패물은 유산으로 남기기보다는 살아생전에 선물로 주는 것이 효과적이고 받는 이의 고마움도 배가 된다. 2. dress up 항상 용모를 단정히 해 구질구질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젊은 시절에는 아무 옷이나 입어도 괜찮지만 나이가 들면 비싼 옷을 입어도 좀처럼 태가 나지 않는 법이다. 3. shut up 말하기 보다는 듣기를..

참살이의꿈 2007.10.31

아름답게 나이 들기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두 노인네 사이에 갑자기 육탄전이 벌어졌다. 내가 탔을 때는 경노석에 앉아 있던 두 사람 사이에 나이가 몇 살이나 처먹었느냐는 험한 말이 오가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일흔 몇이라고 했고, 더 젊게 보이는 다른 사람은 그보다 몇 살을 더 보태 형님 행세를 했다. 서로 반말과 쌍욕이 오가더니 결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다짐이 벌어지고 안경이 깨어지는 소동까지 일어났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더 큰 화가 생길 뻔 했다. 들어보니 소동의 발단은 사소한 것이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발이 옆 사람을 건드린 것이다. 복잡한 지하철에서 예의 없는 사람 때문에 짜증이 나는 경우는 흔히 있다. 이번 경우도 그랬을 것이다. 그것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서로간에 날이 선 말들이 오갔을 것이고, ..

참살이의꿈 2007.10.06

아름다운 노년

'우리의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 중에서 신과 가장 가까운 단계에 있는 사람은 노인들이다. 나이가 든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늙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어두운 계곡으로 내려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세계로 차츰 접근해 가는 것, 즉 지복(至福)의 산(山) 정상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느 보험 회사의 광고였던가, 노부부가 건강한 모습으로 환하게 웃는 광고 사진을 보면서 저렇게 늙어갈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또한 그것이 젊은 시절에 상상했던 내 노년의 모습이기도 했다. 생활은 안정되고, 여유 있는 시간을 즐기며 자유롭고 넓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었는데 혼돈의 젊은 시절 뒤에는 그런 평화스런 노년이 찾아오리..

길위의단상 2004.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