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샌. 2008. 8. 8. 17:16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늙어서 저런 사람의 얼굴을 닮고 싶을 때가 있다. 지난 5 월에 타계하신 박경리 님의 모습에서도 그런 느낌을 갖는다. 님의 얼굴은 세상의 고뇌가 담겨있으면서도 참푸근하다. 그분이 쓴 '토지'처럼 넓고도 넉넉하다. 그저 온실의 화초처럼 곱게 늙기만 한얼굴이 아니다. 세상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용광로 속에서 처럼 녹여내어 뜨겁게 내면화시킨 거인의 모습이다. 삶이 불행하지 않았다면 작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님은 말했다.

 

최근에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는 유고시집이 나왔다. 시들은 본인의 일생을 회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님의 인간적인 고뇌와 슬픔, 진솔한 고백이 깊은 감동을 준다. 소설가이지만 말년에 쓴 시에서도 인생의 대가로서의 품위가 느껴진다. 이 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쓰신 것이라고 한다. 특히 마지막 구절,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는 초탈의 경지가 느껴지면서도 왠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시집에는 '천성'이라는 이런 시도 들어 있다.

 

남이 싫어하는 짓을 나는 안했다

결벽증,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내가 싫은 일도 나는 하지 않았다

못된 오만과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나를 반기지 않는 친척이나 친구 집에는

발걸음을 끊었다

자식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싫은 일에 대한 병적인 거부는

의지보다 감정이 강하여 어쩔 수 없었다

이 경우 자식들은 예외였다

 

그와 같은 연고로

사람 관계가 어려웠고 살기가 힘들었다

 

만약에 내가

천성을 바꾸어

남이 싫어하는 짓도 하고

내가 싫은 일도 하고

그랬으면 살기가 좀 편안했을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은 훨씬 더 고달팠을 것이며

니레 지쳐서 명줄이 줄었을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은 거의 다 가고

감정의 탄력도 느슨해져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무덤덤하여

가진 것이 많다 하기는 어려우나

빚진 것도 빚 받은 것도 없어 홀가분하고

외로움에도 이력이 나서 견딜 만하다

 

그러나 내 삶이

내 탓만은 아닌 것을 나는 안다

어쩌다가 글 쓰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고도와도 같은 암실과도 같은 공간

그곳이 길이 되어 주었고

스승이 되어 주었고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 주었다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공개적으로 내지른 싫은 소리 쓴 소리

그거야 글쎄

내 개인적인 일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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