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벌레 / 고미경

샌. 2008. 7. 22. 07:42

나는 뼈가 없는 동물입니다 먼 조상이 뼈와 엿을 바꿔먹었다고도 하고 잘못된 사랑으로 벌을 받아 유전된 것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뼈대 없는 가문에다 역사도 없고 사상도 없다며 나를 천하다고 말합니다 손가락질까지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뼈가 없으니 생각이 없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생각이 없으니 번뇌도 없습니다 번뇌가 없으니 싸울 일도 없습니다

뼈는 무기입니다 뼈는 칼날입니다 뼈는 주먹입니다 뼈는 증오입니다 나는 뼈가 없어 비무장지대입니다 아니 꽃잎입니다 입술입니다 젖무덤입니다

온몸으로 기어가는 바닥이 나의 하늘입니다 함부로 침 뱉지 마십시오

- 벌레 / 고미경

이제까지는 뼈와 주먹과 칼의 문화가 세상을 지배했다. 약하고 힘 없고 부드러운 것들은 뒷전으로 밀려나서 벌레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약하고 부드러운 것들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힘과 만용의 인간 역사, 그 병폐를 치유할 지혜는 우리가 쓸모없다고 무시했던 것에서 나오리라고 믿는다. 꽃잎, 입술, 젖무덤.... 그리고, '영원한 여성이 우리를 저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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