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네 집이 멀어서
북적대는 시게전을 지나야 한다
골목을 벗어나면 언덕이 있고
싸리울 하얀 꽃 속에 그녀는 산다
방은 늘 비어 있어 어른대는
살구꽃에 취해 잠이 들었다 눈을 뜨면
꽃 그림자가 방문을 덮는다
그녀네 집이 멀어서
물 머금은 보름달을 등에 지고
내려오는 길은 더욱 멀다
골목을 벗어나고 시게전을 지나서
외진 모퉁이 들여다보면
꼬치집에도 그녀는 없다
기다리며 구석에 앉아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나는 잊는다 그녀의 얼굴을
체취를 잊고 이름을 잊는다
그녀네 집이 멀어서
시게전을 잊고 유행가가 자욱한 골목을 잊고
싸리울 하얀 빈 방을 잊고 비릿한 이불자락을 잊고
달빛을 가리는 살구꽃과 과묵한 꼬치집 주인을 잊고....
당초부터 이 세상에 없는지도 모를
그녀네 집이 멀어서 너무 멀어서
- 그녀네 집이 멀어서 / 신경림
시인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였을까? 짝사랑 했던 소녀였을까? 마음 속으로 그리는 이상적인 여성상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추상적인 어떤 그리움이었을까?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정신적 가치이든 그녀네 집은 너무나 멀리 있다. 그리고 집을 찾아가도 그녀는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는 오지 않고, 그녀를 찾아나서도 그녀는 없다. 우리가 지상에서 맺는 모든 관계는 그저 이와 같이 아득한 그리움이기만 할 뿐이다. 그것은 충족되지 않는, 채워질 수 없는 그리움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잊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관계 속에 있으면서 관계를 떠나는 것인지 모른다. 그녀네 집을 찾아가고, 기다리고, 내려오고, 그리고 잊게 되는 과정은 나에게는 깨달음을 향한 시인의 정신적 여정으로 보여진다. 시인은 그녀를 잊고, 체취를 잊고, 이름을 잊고, 더 나아가 시게전을 잊고, 골목을 잊으면서 결국은 그녀네 집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집에 도달한 순간 당초부터 아무 것도 없었음을 보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녀네 집이 너무 멀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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