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오리 망아지 토끼 / 백석

샌. 2008. 6. 27. 10:24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는 논으로 내려간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트리며 날아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다 던져 버린다

 

장날 아침에 앞 행길로 엄지 따라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조르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크다란 소리로

- 매지야 오나라

- 매지야 오나라

 

새하려 가는 아배의 지게에 지워 나는 산으로 가며 토끼를 잡으리라고 생각한다

맞구멍난 토끼굴을 아배와 내가 막어서면 언제나 토끼 새끼는 내 다리 아래로 달아났다

나는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 오리 망아지 토끼 / 백석

 

이 시를 읽으면 가슴이 따스해진다. 내게도 이런 동화 같은 시절이 있었으리라. 할배 등에 올라타서 할배 수염을 잡고 "이랴 이랴" 까불면 할배는 말처럼 히힝거리며 방안을 기어 다녔다. 손자가 웃으면 할배도 따라 웃었다. 여름밤이면 아배 따라 솜에 석유를 적신 횃불을 들고 강가로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강기슭에서 잠자는 고기를 그저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되었는데, 아배는 그렇게 고기 잡는 걸 좋아했다. 장날이면 어매 치맛자락을 잡고 장터에 따라갔다. 우리 어매는 한 번도 마다하지 않고 날 장에 데리고 다녔다. 다른 아이들은 장에 데려가지 않는다고 으악질도 많이 했다. 온갖 눈요기를 하며 어매와 하루 내내 보낼 수 있는 장날이 나는 좋았다. 기찻길을 따라 가다가 강을 건너고 과수원을 지나 장으로 가던 10 리 길은 아름다웠다.그 정겨웠던 길과 함께 지금은 많은 것이 사라져 갔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 또한 어느새 여기까지 걸어왔다. 잠시 멈춰서 돌아보면 뒤의 풍경들은 안개속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과연 그곳에 내가 있었던가.

 

* 오리치 : 야생 오리를 잡으려고 만든 그물

* 동말랭이 : 논에 물이 흘러들어가는 도랑의 뚝

* 시악(恃惡) : 마음속에서 공연히 생기는 심술

* 매지 : 망아지

* 새하다 : 땔나무를 장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