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비에 막혀 그대로 어둠이 되는 미도파 앞을 비는 내리는데
서울 시민들의 머리 위를 비는 내리는데
비에 젖은 그리운 얼굴들이
서울의 추녀 아래로 비를 멈추는데
진종일을 후줄근히 내 마음은 젖어내리는데
넓은 유리창으로 층층이 비는 흘러내리는데
아스팔트로 네거리로 빗물이 흘러내리는데
그대로 발들을 멈춘 채 밤은 내리는데
내 마음 속으로 내 마음 흘러내리는 마음
내 마음 밖으로 내 마음 흘러내리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을 막고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가난한 방에 가난한 침대 위에
가난한 시인의 애인아.... 어두운 창을 닫고
쓸쓸한 인생을 그대로 비는 내리는데
아무런 기쁨도 없이 하는 일 없이 하루를 보내는데
하루가 오고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비에 막혀 미도파 앞에 발을 멈춘 채 내 마음에 밤은 내리는데
- 비는 내리는데 / 조병화
비가 내린다. 반가운 비가 내린다. 비는 땅을 적시며 흘러내린다. 비는 내 마음까지 적시며 흘러내린다. 문득 젊었을 때 좋아했던 이 시가 생각난다. 아닌 것 같은데 그때도 빗소리에 흔들리기도 했었나 보다. 비 내리는 날은 쓸쓸한 회상이 어울리는 법인지, 감추고 싶은 어둡고 쓸쓸한 기억들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결코 푸르지만은 않았던 젊음의 그늘, 내 청춘은 왜소했고, 그런데도 짐은 무거웠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따가운 햇빛이 그리워질 정도로 지겹도록 빗속에 잠겨보고 싶다. 소녀적인 감상을 드러내도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우기가 나는 좋다. 쓸쓸한 인생을 그대로 비는 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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